사신 – 93화
소림사.
무림의 태두인 숭산 소림사에 갖가지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도인도 있고, 걸인도 있으며, 속인도 있었다. 복장은 각기 다르나 눈빛은 한결같이 예광이 안으로 갈무리되어 범접하지 못할 위엄이 보였다.
걸인이 먼저 말했다.
살문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소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살문은 아니지만 대담하게 이와 같은 일을 벌일 자는 살문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니… 종리추라는 자는 아주 위험한 자요.
거지가 친근하게 보일 수 있을까? 우선 거지는 더럽다. 전신에 땟국물이 자르르 흘러 곁에 다가서는 것도 싫다. 하나 방금 말한 거지는 달랐다. 얼마나 더러운지 골치가 아플 정도로 썩는 냄새가 진동했지만 인상은 무척 온화했다. 네모나게 각진 얼굴인데도 보기 좋게 살이 붙어 곱게 늙은 모습이었으며 맑은 윤기까지 흘렀다.
그는 용머리가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다. 용두방주. 당금 무림에서 천하제일의 정보망을 지닌 개방의 방주가 바로 그다.
아미타불! 그자는 나도 만나봤소. 대담한 자였지. 아주 배짱 있고. 방주 말씀대로 아주 위험한 자이기도 하오. 빈승은 그자의 행동을 어느 정도 제약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듯싶소.
키가 작고 깡마른 노승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림 방장이다. 이 자리에는 구파일방 장문인들이 모여 앉았다.
…
모두 태연한 신색이었다. 긴장을 한다거나 골치 아픈 사건 때문에 신경 쓰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거목이었다.
태상삼존, 태상삼존…
백엽이 가슴까지 늘어진 도인이 눈을 감은 채 도호를 외웠다. 도인이라고는 하지만 칠척에 이르는 키에 어깨가 딱 벌어져 장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무당 장문인으로서보다는 명성 진인으로 더 많이 알고 있다. 무림인이면서도 무인들보다는 범인들에게 더 잘 알려진 도력 높은 도인이다.
아미타불! 장문인께서도 고견을 말씀하시지요.
소림 방장의 재촉을 받은 후에야 도인이 눈을 떴다.
옛부터 반골은 있었습니다. 반골 치고 큰 그릇 아닌 자가 없고… 방장 빈도의 생각으로는 방장의 뜻을 접어야 할 것 같소이다.
아미타불!
소림 방장은 한숨처럼 불호를 외웠다. 순간적으로 종리추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마가 넓고 윤기가 흐르며 안광이 밝다. 사기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자는 살수가 되지 못한다. 살수의 길을 걷고 있지만 회개가 가능한 자다. 그래서 강력한 경고는 하지 않았건만.
세상에는 언제나 반대적인 것이 존재한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다. 사도인, 마도인이 나쁘다고 해서 씨를 말리면 더욱 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반대적인 것은 공생 관계이지 상잔 관계가 아니다. 나쁜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모순된 말이지만 세상 이치가 그렇다. 마도 역시 사람들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 할지라도.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면 적정한 선에서 견제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완전히 말살시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독버섯이 자라도록 하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라는지 관찰하고 너무 크게 자란다 싶으면 적절하게 가지치기를 해주고…
살천문주는 너무 컸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했다고 하는 편이 옳다. 그는 살천문이 하남 무림 살수계를 장악하자 신이라도 된 듯 거만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렸다. 누굴 죽이든 살수 집단에서 선택할 사항이지만 항상 구파일방을 염두에 두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소림 방장은 대안으로 종리추를 생각했고, 장문인들 중에서도 세가 너무 커진 살천문 대신 새로 일어서는 신흥 문파 살문에 힘을 보태주는 게 낫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런데… 종리추라는 자는 의외로 만만치 않다. 살문이 자리를 잡았을 경우 살천문처럼 호락호락 당하지도 않을 게다. 그때가 되면 아마도 거센 피바람이 몰아친 후에야 정리를 할 수 있을 게다.
긴 침묵이 흘렀다.
방주, 살수계에 또 한 집단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쪽은 어떻소?
그쪽은 사라졌소이다.
개방주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림에서 개방의 정보력은 단연 압권이다. 하지만 다른 문파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정보를 얻는다는 것뿐이지 모든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아니다.
개방에서도 놓치는 정보도 많다.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무림 공적이라도 인적이 끊긴 첩첩산중으로 기어들어가 인간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 버린다면 징계할 방법이 없다.
갑자기 사라질 자들은 아닌 듯한데…
눈처럼 흰 백삼에 화려한 영웅건을 맨 노인이 말했다. 종남파 역사상 최고의 융성기를 이뤘다는 종남 장문인 천하일검이다.
숨기는 했지만 조만간 나타날 것이오. 그런 무리들은 오래 참지 못하잖소.
그렇지요. 오래 참지 못하지요.
이 건은 빈승이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구려. 공동에서 맡아 주었으면 하오.
소림 방장은 한 발 물러섰다. 공동파 장문인이 대답했다.
허허! 방장께서는 골칫거리는 모두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이 늙은이에게 떠넘기는구려. 그렇게 하리다. 마침 시험해 볼 아이들도 있고 하나…
그럼 하남 무림은 됐고…
구파일방 장문인들은 천하대세를 논했다. 그들에게 하남 무림에서 벌어지는 살겁은 조그마한 편린에 불과했다. 오직 한 사람,
모두 가볍게 보고 있어. 종리추의 무공은 오독마군이나 혈암검귀에 못지않아. 십망을 선포해도 빠져나갈 공산이 큰데… 공동이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지만 일단은 지켜봐야겠지.
중론은 살문의 제거 쪽으로 흐르고 있다. 드러난 정황이 미비하니 약간의 손질이 필요한 작업이다.
건드리려면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해.
종리추의 무공을 직접 견식해 본 사람, 소림 방장의 눈가에는 우울함이 깃들었다. 또 한 사람이 있다.
살문에 대한 정보는 모두 부정확하다. 살문에 십사각이 있는 것은 알아냈지만 십사각주의 능력은 미지수다. 쌍구광살, 혈사편복, 후사도… 그들 따위를 믿고 이런 일을 벌일 수는 없는데…
개방 방주의 고민은 그것이었다.
분운추월 장로! 이 일은 이 장로에게 맡겨야겠군.
좌중의 이야기는 하남 무림을 떠나 절강 무림으로 넘어가 있었다.
요 근래 혈영신마라는 자가 나타나 살겁을 자행하고 다닌다고 하던데, 혈영신공이 나타난 거요?
개방 방주는 생각을 접었다.
혈영신공이 맞소이다. 시신에 찍힌 붉은 장인에 시반이 생기지 않소. 또 다른 장기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오직 심장만 파괴하고 있소. 그런 무공은 혈영신공이오.
마두의 출현이었다. 이런 경우는 오직 한 가지 해답밖에 없다.
척살!
종리추는 십사각 각주와 벽리군을 불러들였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외장문도를 실질적으로 관할하는 등천조와 진무동도 불러들였다. 살문 살림살이를 도맡고 있는 남오도 들어왔다.
대청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다. 종리추의 안색은 깊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어두웠다.
오늘 들어온 소식은?
행와 제일 인의대협인 장 가주가 죽었어요. 전신이 난자당해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고 하더군요. 동성에서는 광무자가 죽었어요. 독침에 당했어요.
아예 무림인의 씨를 말리려고 작정했군. 도대체 이따위로 죽이는 법이 어디 있어?
유회가 역정을 터뜨렸다.
그게 언제 일인가?
종리추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장 가주는 어제 아침 진시쯤에 당했고 광무자는 오시쯤으로 추정돼요. 사인은 한결같다. 도에 난자당해 죽거나 독침에 죽는다. 또 다른 부류는 잡다한 병기에 죽고 있다. 어떤 때는 권각에 맞아 죽는 시신도 있지만 도와 독침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해 묻혀 버렸다.
무림인들의 동향은?
…
벽리군이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차마 말하지 못했다.
우리… 살문을 원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회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면 살문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동안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직접 원흉을 처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남 무림의 공분을 견딜 수 없게 된다. 종리추는 아무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아! 그래! 그 여자…?
벽리군은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떠올렸다. 젊음은 싱그럽다. 젊음만이 지닌 탄력을 유감없이 드러낸 여인.
종리추는 아직도 그 여인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종리추는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 나다.
…!
문주님!
뜻밖의 말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 귀가 잘못됐는지 엉뚱한 소리가 들리네요.
혼세마왕이 머리를 긁적이며 되물었다.
잘못 듣지 않았다. 내가 사건을 일으켰다.
…
조금 전보다 훨씬 깊은 침묵이 흘렀다. 문주가 이런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각주들이 잘 안다. 자신들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문주가 집무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는데 누가 살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첫 살인은 문주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다.
꼭 이래야만 하는 겁니까?
유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종리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구, 유회, 역석은 소고를 알고 있다. 그들이 살수라는 것도 알고 있다. 자신들이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이제 때가 된 것일까?
유구, 유회, 역석은 말을 잊었다. 너무 탄탄대로를 걸어서 잠시나마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종리추가 한 말이 생각난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남자, 여자, 살수.”
그들은 살수다. 늘 죽음을 옆에 끼고 살아야 하는.
벽리군도 모든 사태를 명확히 깨달았다. 처음 실마리를 잡아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풀기 시작하면 끝까지 파헤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단해. 이 정도로 대단한 세력이었다니…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벽리군은 사건이 터졌을 때 제일 먼저 그녀를 떠올리지 못했던 이유를 알아냈다.
소고는 연약해 보였다. 소고와 같이 있는 적사, 야이간, 소여은도 약해 보였다.
아니, 그들이 약한 것이 아니라 종리추가 훨씬 강해 보였다. 사실은 그들이 어떨지 모르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종리추는 적사, 야이간들 죽음 직전에서 풀어주었다. 소고가 어쩌지 못했던 사건을 말 한마디로 간단히 해결했다.
그러니 살문도 버거울 정도의 살행을 소고가 저질렀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소고는 그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는데… 무서운 세력이 되어 나타났다.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수백 리는 넘는 거리를 종횡으로 오가며 살인을 하기 위해서는 백여 명이 훨씬 넘는 일급 살수가 필요하다. 소고가 그만한 세력이 되었다니!
종리추가 말했다.
모두에게 미안하다. 처음부터 말했듯이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왔고 얼마 달리지 못해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쌍구광살이 낭인 출신답게 독기를 뿜어냈다.
사정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아직 죽은 게 아닙니다. 어떤 놈이든 죽이려고 덤벼들기만 하면…!
우리의 얼굴은 이미 알려졌다.
쌍구광살의 입이 닫혔다.
이렇게까지 되었는데도 내막을 알려 주지 못하여 미안하다.
종리추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한데 오늘은 두 번씩이나 했다.
난 무림의 이목을 집중시킬 세력을 원했고, 도와준 덕분에 성공했다. 한마디로 이용한 거지.
…
죽음을 피할 생각을 하지 마라. 전 무림의 이목을 피해 중원을 벗어날 자신이 있다면 또 모를까.
비로소 사태가 진하게 느껴졌다. 죽음의 향기가 코앞에서 피어나는 듯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살문 앞에는 개방 문도가 진을 치고 있다. 그들에게 가라.
…
할 말은 끝났다. 십사각 각주는 돌아가서 하인들에게도 내가 한 말을 전하고 목숨을 보존하라고 해라. 총관, 등천조, 진무동은 외장문도를 해산시켜.
살문이 낱낱이 흩어지고 있다.
남오, 살문에 한 사람도 남겨 놓지 말고 떠나보내. 밖에 나가서 거지가 될지언정 살문에는 남겨 놓지 마. 총관은 은자를 풀어줘. 밭뙈기나 살 수 있게.
남오가 한마디 툭 던졌다.
올 때도 자유고 갈 때도 자유죠.
종리추는 인망을 얻었다.
유구, 유회, 역석, 벽리군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대형, 어떻게 된 일인지 속 시원하게 말 좀 해보소.
…
총관, 총관까지 이러깁니까? 무슨 일인지 알아야 떡이 되든 밥이 되든 뭘 할 게 아닙니까!
…
문주 집무실을 물러난 십사각 각주는 네 사람을 다그쳤지만 네 사람은 입을 꼭 다물었다. 말해 줄 것 같았으면 종리추가 말했으리라.
네 사람은 종리추가 염려하는 것을 안다. 종리추는 묵월광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잡혀서 고문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불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비밀이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잘 지켜진다. 그런 면에서 네 사람이 아는 것만도 많이 알고 있는 게다.
우리는 꼭 죽어야 돼. 사로잡혀서는 안 돼.
네 사람은 대답 대신 죽음을 생각했다.
문주님도 그렇고 형님들도 그렇고 … 사정이 있겠죠. 그만합시다. 말할 것 같았으면 문주님이 말씀하셨겠죠.
구류검수는 각주들을 아울렀다. 그가 계속 말했다.
한 가지 물어봅시다. 대답할 수 있는 것으로. 대형, 죽을 겁니까?
유구는 구류검수를 바라보았다. 중원에 와서 사귄 친구라면 이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일생 동안 사귀었던 사람들보다, 모진아라는 사부를 모시고 무공을 전수받았던 사형제보다 이들이 더 가깝다.
유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역석, 유회가 고개를 끄덕였다.
총관, 총관도 죽을 결심이오?
벽리군이 베시시 웃었다.
모두 미쳤군. 말은 안 해도 눈치는 환한 사람들이오. 당금 무림에서 벌어지는 암살 누명을 뒤집어쓰려는 모양인데, 이유가 있겠지. 난 알아야겠어!
유구의 눈빛에 살광이 번득였다. 아무리 정을 가깝게 준 사이라고 해도 주공인 종리추를 핍박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문주님은 … 솔직히 말해서 문주님은 동생뻘도 한참 동생뻘이오.
구류검수, 말조심해라.
조심해서 말하는 거요.
구류검수도 만만치 않았다. 유구를 똑바로 노려보며 계속 말했다.
난… 사매를 강간했소.
뭐얏!
허…!
십사각 각주들도 돌연한 구류검수의 말에 혀를 찼다. 그들은 각기 아픔을 가지고 있다. 아픔이 아니면 야망을, 그것도 아니면 강한 무공을 쫓는 욕심이 있다.
그런 마지막 부분만은 서로 모르고 있었다.
난 화산파의 매화검수.
모두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구류검수가 뛰어난 검수인 것만은 알았지만 명문 정파인 화산파의 매화검수일 줄은 몰랐다. 어쩐지, 하는 행동이 절도가 있더라니.
난 화산파로부터 추적을 받는 몸이지. 하지만 피했어. 죽어라고 도망다녔지. 왜? 날 죽일 사람은 오직 사매뿐이오. 난 사매 손에 죽고 싶어.
구류검수의 눈가에 이슬이 아롱거렸다. 그는 사매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방법은 치졸했지만 사매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심이다. 그것도 명예, 부귀, 목숨… 모든 것을 버릴 만큼 강한 사랑이다.
문주는 사매 손에 죽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런데 치사하게 뭐? 이제 그만 가라고?
십사각주는 구류검수의 말 속에서 종리추에 대한 애정을 읽었다. 그의 말이 다소 과격하고 문주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말이기는 했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 역시 알고 있다. 살수 문파로 개파를 하였지만 막무가내로 살행을 한 것은 아니다. 죽을 만한 자들만 죽였다. 그들이 생각해도 ‘이런 죽일 놈!’ 하고 울분이 솟구치는 자들만 죽여왔다.
명문 정파로부터 벌은커녕 상을 받을 만하다. 그들은 많은 살행을 했지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는 않다.
그것보다, 종리추는 살수 문파의 문주로서 살행을 하기보다 자신들에게 백병전을 수련시키는 데 전념했다. 실제로 살행을 나갔을 때 죽음을 피하라는 최고의 배려였다.
종리추는 문주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다. 무공도 그렇고, 지혜도 그렇고, 집단을 구축하는 힘도 거파 장문인들에 비해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나이는 어리지만 사내로서 존경한다.
살아남아야지. 난 사매 손에 죽어야 하니까. 그리고 오늘 일이 무엇 때문인지 꼭 들어야 하니까. 대형, 살아남으면 꼭 말해 주소.
유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 두 명… 계획적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은 멀리 가지 않았다.
저… 분타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응? 왜?
살문에서 벗어나고 싶거든요. 요즘 돌아가는 것을 보니 사람을 죽여도 너무 많이 죽이는지라 겁이 나거든요.
거지의 안색에 놀라움이 새겨졌다.
그 말은…
목숨만 살려주시면…
거지는 하인으로 보이는 자를 분타주에게 데려갔다. 살문은 개방으로 말하면 허주 분타주의 영역 안에 있다.
개방 허주 분타주인 구곡신개는 투항한다는 하인을 붙잡고 여러 가지를 물었다.
문주의 나이는?
모릅니다. 소인 같은 놈들이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추측은 할 수 있죠. 이제 갓 스물을 넘었을까 하는 애송이입니다.
무공은 당연히 모르겠고?
예.
내원에 십사각이라고 있다던데?
있습니다. 거기야말로 살귀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하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한 점 거짓 없이, 보탬도 없이 솔직히 고변했다. 구곡신개는 하인을 보내주었다.
다음 날은 네 명이 슬그머니 거지들에게 다가와 살문을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들이 뭘 눈치챘나?
구곡신개는 자신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분운추월은 여저부 서평 견도장에 머물렀다. 방주로부터 허주 분타를 통솔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사건이 생기면 연락하라는 말만 전했을 뿐 가지는 않았다.
살문에서 저지른 일이 아냐. 또 누명이군. 살천문주를 구해준 것, 하오문주를 복위시킨 것이 비위를 건드린 게지. 불쌍한 놈… 작작 좀 나서지.
분운추월은 종리추의 종말을 예감했다. 그에게 개방 일결제자가 다가와 읍했다.
무슨 일인고?
분타주 구곡신개님의 전갈입니다.
…
분운추월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유심히 관찰하던 개 발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짐승이나 마찬가지로 개 발바닥에는 탄력적인 살점이 있다. 굳은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르고, 보통 살보다는 훨씬 단단한.
동물들은 그런 것이 있기에 땅을 박찰 수 있다. 분운추월은 진기를 운용하면 인간의 발바닥에도 동물과 같은 탄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목하 연구 중이었다.
살문에서 하인들이 투항하고 있습니다.
뭐야?
분운추월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싸움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시작할 기미를 보인 것도 아닌데 투항이라니?
하인들이 속속 넘어오고 있습니다. 살문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면서.
허허허…!
분운추월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전부 종리추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다. 무림은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지만 무림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현 무림에 가장 중대한 사건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으니 향후 자신에게 닥칠 위험도 짐작하고 있는 게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구파일방이 이렇게 광정명대하지 못한 행동으로 무림의 질서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애꿎은 목숨이라도 살리려는 거겠지. 혼자서 억겁을 짊어질 심산이냐? 불쌍한 놈.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 포기했군. 그래, 살수 문파를 창건한 것도 죄지. 바보 같은 놈… 뭐가 잘났다고 살수 문파를 입에 처바르고 다녀.
풀어주라고 해라.
옛!
일결제자는 깊이 읍을 취해 보인 후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분운추월은 문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거니 지켜봤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황급히 문도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문도를 초월했다.
모두 몇 명이냐?
정보를 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 놈들까지 모두 백스물아홉 명입니다.
백스물아홉… 우리가 파악한 숫자는?
스물세 명이 남았군.
실세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분운추월은 갈증이 치민 듯 호로병에 담긴 독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인망이 있는 놈이군.
…?
구곡신개는 이 장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 인망을 얻었으니 저승길도 편안할 게다. 모두 나왔으면 네놈에게 실망했을 게야.
분운추월은 그것이 알고 싶었다. 살수들이 투항을 하는지 안 하는지. 그런 생각이 치밀자 견도장에서 보고를 기다릴 만큼 느긋하지 못했다.
종리추에게는 극한의 상황이다. 이럴 때 살수들이 문주에게 등을 돌린다면 살천문이나 하오문과 다를 바가 없다. 아니, 다른 지방에 있는 살수 문파들 거의 대부분이 그럴 게다. 자신들에게 위험이 닥친 것을 알게 되면, 그것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면 아무리 굳게 충성을 맹세했던 자들이라도 등을 돌릴 게 뻔하다. 한두 명 정도는 문주와 함께 목숨을 버리겠지만.
분운추월은 종리추가 조금은 다른 살수 문파를 세웠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옳았다.
살수들 모두다 문주와 함께 목숨을 버리기로 작정한 것은 명문 정파도 흉내 내기 힘든 일이다.
아까운 놈이야. 미련한 놈… 뭐하러 살수 문파는 창건해서는… 했으면 죽치고나 있지 개파는 얼어 죽을 개파…
분운추월은 종리추와 함께 벌였던 비무 시합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상쾌했었다. 그때는.
종리추는 십사각 각주들이 남겠다는 의사를 들은 후 더욱 분주해졌다. 오늘도…
저녁 식사를 한 지 반 각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종리추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밤이 되면 비밀 통로를 통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그의 옷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빨아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흙탕물이 배어있는 적도 많았다.
벽리군은 종리추가 좋아하는 차를 끓여왔다. 마셔 줄 사람은 없다. 오늘은 혹시나 하고 들러봤지만 역시 종리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반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침상으로 갔다. 역시 깨끗하다. 밤을 꼬박 새웠으면 낮이라도 잠을 자야 할 텐데 침상은 누웠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 갈아 놓은 침대보지만 침대보를 깨끗한 것으로 갈아 놓고 싶었다. 언제 누워서 편히 잘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잠자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는가.
벽리군은 종리추의 수발을 들어주는 것이 즐거웠다. 그런 면에서 시녀들이 모두 나간 것이 고맙게 느껴졌다.
침대보를 갈고 막 깨끗한 이불을 가지런히 펼쳐 놓았을 때,
스르릉…!
지하 통로로 통하는 서가가 움직이며 종리추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도둑처럼 등에 보따리를 메고 있었다.
벽리군은 까딱 고개를 숙여 보일 뿐 어디 갔다 왔냐, 뒤에 짊어진 게 뭐냐는 물음은 던지지 않았다.
있었군.
예.
응.
…?
응이라고 해봐요.
…!
빨리.
으, 응.
누님, 수고 많았습니다.
벽리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앉아요. 오랜만에 차나 한잔 같이 마십시다.
탁자를 향해 걷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종리추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별이 다가왔다는 소리이지 않은가.
햇차는 맛이 고소했다.
금이 있었으면 해요. 누님은 금을 참 잘 탔는데.
그런 소리 하지 마요.
무슨 소리요?
누님이라는 소리요. 그냥 하대해 줘요.
하하! 높여줘도 불만인 사람은 누님밖에 없는 겁니다.
…
종리추는 보따리 속을 뒤지더니 붉은 헝겊으로 둘둘 말아 놓은 것을 꺼냈다.
이게… 누님의 목숨을 살려줄지도 모르겠군요.
필요 없어. 다 필요 없어. 난 문주님과 같이 죽을 거야. 아직도 내 마음을 그렇게 몰라?
벽리군의 간절한 소망이 눈가에 나타났다. 종리추는 애써 모른 척했다.
한 가지 약속해 주세요.
말해 보세요.
구류검수가 말한 적이 있다. 동생도 한참 동생뻘이 된다고. 그렇다. 종리추는 너무 어린 동생이다. 그런데 그가 사내로 보인다. 아무리 동생으로 생각하려 해도 사내로만 보인다.
기녀였으면 좋겠다. 종리추가 팔난봉에 호색한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다. 하기는 그런 여건이 아니라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사람이지만.
이 보자기에 싼 것은 지하 통로에 들어선 다음 펼쳐 보세요.
예.
그리고 그대로 따라요.
예.
누님.
…
걱정 마요. 난 안 죽습니다.
약…속할 수 있나요?
곧 만날 겁니다.
약속할 수 있나요?
누님은 참 바보군요.
말 돌리는 건 싫어요. 약속할 수 있나요?
약속하죠.
됐어요.
벽리군은 비로소 활짝 웃었다.
종리추는 벽리군을 처음 봤을 때 현모양처의 현숙함과 요부의 요사함을 동시에 지닌 여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 생각이 옳은 것 같다.
벽리군은 요부의 요사함까지 지니고 있다. 강한 마력으로 사내를 끌어당겨 빠져나가지 못할 거미줄로 친친 감아대는… 그런 여인이다. 벽리군에게서 도발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벽리군은 사내를 너무 잘 안다. 사내가 하는 말, 표정, 눈빛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안다.
종리추가 눈에 떠오른 흔들림은… 욕정이다.
‘날 원하고 있어.’
벽리군은 일어섰다. 사내를 유혹할 수 있는 걸음걸이로, 몸에 배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종리추의 몸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녀는 또 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심오한 눈길을…
‘참아냈어. 욕정을…’
욕정이란 정말 요물이다. 누구도 완벽하게 참을 수 없다. 참았다고 하는 것은 진실로 참은 것이 아니라 잠시 숨긴 것뿐이다. 그놈은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하면 곧 되살아날 기회를 엿본다.
‘이 사람을 가질 절호의 기회야.’
눈과 눈이 부딪쳤다. 벽리군은 한참 동안 종리추를 쳐다보다 볼에 입을 댔다. 처음으로 접하는 사내의 살결도 아닌데 처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참 보드라운 피부야. 꼭 여자 살결 같아.”
누님이라고 불러줘.
종리추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누님.
아무리 냉정한 사내지만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이번엔 내가 이겼지? 다음에는… 다음에는 놓치지 않을 거야. 이런 기회가 생기면…
고…맙습니다.
종리추는 싱긋 웃었다. 그 모습이 무척 해맑아 보였다.
다시 한번 볼에 입을 맞춘 다음 돌아서는 벽리군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도 욕정을 참아내야 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가지고 싶은 사내를, 가지고 싶은 기회가 생겼는데도 갖지 않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