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98화
세상이 온통 하얀색 일색이다. 눈발이 과녁을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대지에 내리꽂힌다. 나뭇가지는 눈바람에 휘청거리고 꼬시시 앉아 있던 멧새는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른다.
날은 점점 깊은 추위 속으로 들어갔다. 거세게 다그치던 첫 추위가 제풀에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송곳처럼 날카로운 강바람이 연일 할퀴어댔다.
종리추의 침묵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침묵을 강요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종리추는 먹지도 씻지도 않은 채 며칠 밤을 꼬박 지새웠다. 처음 섬에 들어와 청면살수를 보았을 때처럼 물결이 넘실거리는 강에서 석상처럼 굳어져 움직일 줄 몰랐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무슨 결정이든 내릴 걸세. 추아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앞으로의 인생에 후회는 하지 않을 결정이 될 걸세. 나는 약간의 도움만 줬을 뿐이야.”
청면살수는 편안한 음성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을 다독거렸다.
“무림을 떠나든 다시 돌아가든 후회 없는 결정을 할 걸세. 내가 그랬거든. 후회… 후회… 한때의 인연을 버리지 못해 의제들의 인생을 망친 후회……”
종리추가 무림을 떠나려 한다는 정도는 짐작하고 있다. 적지인살이 들은 부분은 거기까지다. 소고가 익힌 최고의 무공 혈암검귀의 무공을 똥 닦개라고 비하시킬 정도로 무림은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 알기에,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말해 준 것뿐일세.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말이기에. 결정을 하려면 지금 해야 하니까. 조금만 늦어도 안 되지. 모든 게 늦어지고 후회하게 되지. 자네는 모를 걸세. 하하, 한 파의 문주가 되지 못한 자는 짐작조차 못 하는 고민이란 게 있다네.”
적지인살은 중간에 나와 버린 자신을 원망했다. 서둘러 나와 버린 자신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배금향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텐데 그녀 역시 앉아 있을 자리는 아니었다.
종리추는 살혼부주를 철저히 무시했다. 살문이 멸문됨과 동시에 과거의 인연은 모두 땅속에 묻어두고 싶은 심정이었으리라.
그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그렇다고 대형이 모멸당하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난 무림에 돌아가라고도, 은거하라고도 하지 않았네. 단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부분, 하지만 꼭 지금 생각해야 되는 부분이 있기에 알려주려고 온 것일세. 어떤 결정을 내리든 마음은 편할 걸세. 지금은 가만히 놔두게. 혼자서 결정할 수 있도록. 하하, 추아와 나의 인연도 여기까지군.”
청면살수와 공지장은 의미 모를 말만을 남긴 채 떠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종리추의 침묵은 길어졌다. 몇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생각이 하루를 넘기고 이틀을 넘기고… 나흘 밤이 스며들었다.
“놔둬요. 놔두라고 했잖아요. 혼자 결정할 수 있게.”
“놔둬야지. 저놈 고집을 누가 모르나.”
말은 그렇게 나눴지만 적지인살과 배금향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런 면에서는 어린이가 한결 나았다.
“여긴 무림이 아니잖아요, 됐어요. 생각하다 죽은 사람은 없으니까 너무 심려 마세요.”
어린은 오히려 적지인살과 배금향을 염려했다.
종리추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남은 사람들은 병기를 손질하거나 무공을 수련했다. 혈살편복, 음양철극, 좌리살검, 구류검수, 혼세천왕.
그들은 종리추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는 은밀한 장소를 찾아가 미치다시피 무공을 수련했다. 죽은 여덟 명… 역석, 쌍구광살, 산화단창, 천왕검세, 살문 사살 등은 같이 생활했던 시간이 일 년도 채 안 되지만 마음속에 스민 정은 십 년을 사귄 것처럼 깊었다.
그들이 죽었다. 살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이고 그러리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죽었다는 생각을 하자 무공 수련에라도 정신을 쏟아야만 하루를 버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들끓는 복수심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역석과 친형제처럼 가까웠던 유구, 유회는 의외로 담담했다. 정이 얕은 것이 아니다. 부족은 다르지만 종리추라는 주공을 함께 모신 후부터는 부족이 다르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들도 복수심을 느낀다. 단지 역석의 죽음은 용사의 죽음이었고, 아부타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기에 안타깝지 않을 뿐이다.
“내가 남았어야 해. 네놈들에게 주공을 맡기는 것이 아니었어. 내가 남았더라면……”
모진아도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질책하는 부분은 쫓기듯이 하남을 떠나온 데 있다.
그 역시 죽은 자들을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인이 싸우다 죽었는데 무엇이 안타까울까.
쫓겼다는 것… 그것은 주공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이고 질책할 만한 부분이다.
“다시 수련한다. 네놈들 실력으로는 주공을 모시지 못해!”
모진아는 나이가 마흔이 넘은 유구와 유회를 어린애 다루듯이 몰아붙였다.
종리추는 고민을 거듭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무(武)’라는 글자가 불가의 화두처럼 새겨져 떠나지 않았다.
‘무림인이 무림을 떠날 때는 오직 죽었을 때뿐이다.’
‘검이란 요물이라 심사숙고한 끝에 잡아야 한다. 일단 잡으면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다.’
‘무림의 은원은 끝없이 반복한다. 선도 없고 악도 없다.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仇)를 죽이는 순간은 선(善)이 되나 죽은 자의 자식에게는 악(惡)이 된다. 불구대천지수를 죽이면서 불구대천지수가 되는 것이다.’
무림에 떠도는 온갖 격언들이 상념을 마구 헝클었다. 그런 말들을 들었을 때는 무의미하게 지나쳤건만 이제 와 생각하니 하나같이 맞는 말들이다.
자신은 은거를 한다 해도 혈살편복 등은 무림에 다시 나가야 한다. 그들은 무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문제는 살문에 머물렀던 전력(前歷)이다. 그들은 다시 낭인으로, 표사로 돌아가지 못한다. 살수로서 보낸 지난 일 년을 잊어버리고 싶지만 무림은 결코 과거를 잊지 않는다.
무림삼정 중에 한 사람인 삼절기인은 그의 성명병기인 검도창을 다시 찼다고 한다. 살문이 제자들을 암습한 줄 알고 있으며 복수심에 불타 중원을 뒤진다는 소문이다.
혈살편복 등이 무림에 나간다면… 죽음뿐이다. 그들은 강하나 삼절기인을 상대할 수는 없다.
삼절기인뿐만이 아니라 묵월광에 죽은 무인들의 지인들 역시 살문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그것이 소고의 목적이었고 종리추의 의도였지만 남은 자들에게는 억울한 누명이다. 항변할 기회도 없는.
‘결국… 다시 돌아가야 하는가. 무림이란 정말 죽는 순간에나 벗어날 수 있는 곳인가.’
무림은 과거를 잊지 않는다.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 부분 때문에 무림으로 돌아가더라도 정정당당히 문파를 개파할 수 없다. 지금까지처럼 살수 문파로 존재해야 하고 살얼음판을 걷는 인생이 되리라.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결정은 간단하다. 수하들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은거하면 그만이고 그럴 수 없다면 무림으로 돌아가야 한다. 살수 문파로.
양자 간의 선택은 더욱 간단하다. 그는 수하들이었던 사람들의 목숨을 나 몰라라 할 만큼 철심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결국 돌아가야 한다.
청면살수가 아니었다면 한참 뒤에나 생각했을 일을… 수하들 중 누군가 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아니면 자식을 낳고 잘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를 무렵에야 생각이 났을지도 모를 일을 지금 생각하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정말 무림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죽일 이유가 확실한 사람만 골라서 죽였다고는 하지만 아무 은원도 없는 사람을 죽이기는 싫었다.
죽이고 죽어야 한다는 자체가 싫었다. 소고의 의중을 알았을 때 죽음으로 내몬다는 섭섭함보다는 이것으로 인연을 끝낼 수 있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설혹 몸을 빼지 못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림에 다시 발을 딛는다……’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깊어질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처음 무림에 출도할 때보다도 한결 깊은 생각과 조심스러운 행동이 필요했다.
구파일방은 살문이 재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게다. 문파 명칭이야 다른 것으로 바꾼다 해도 종리추가 있고 십사전각 각주들이 살수로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폭풍이 몰아친다고 봐야 한다.
특히 공동파와는 묵은 은원도 생긴 마당이다. 발을 디딜 곳은 살수 무림밖에 없는데 그곳마저 용이하지 않다.
종리추나 십사전각 각주들이 무림에 발을 딛는 순간 죽음의 올가미가 씌워진다고 봐야 한다.
무림에서밖에 살 수 없는 사람들, 하지만 발을 디딜 공간이 한 뼘도 없는 사람들. 머리가 새하얗게 셀 만큼 고민을 해도 풀리지 않는 난제다.
‘아직은 시간이 있어. 급히 서두를 문제가 아냐.’
종리추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린은 종리추가 입을 옷을 짓느라 손가락이 성한 곳이 없었다. 중원 의복은 남만 의복과 달리 바느질이 꼼꼼해야 한다. 손도 훨씬 많이 가고 조금만 마음이 헝클어지면 모양새가 나빠진다.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 제대로 된 옷이 나온다.
“중원에서도 바느질을 잘하는 여인이 따로 있단다. 서둘지 마라.”
배금향은 어린이가 바느질을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 빙긋 웃었다.
‘꼭 하고 말 거야. 상공이 입을 옷인데……’
어린은 바느질에 몰두하느라 눈이 피로했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남만 여인들은 알지 못하는 재미… 그것을 알아가는 중이다.
문득 어린은 낯선 기척을 감지해 냈다. 남만에 있을 적부터, 종리추를 마음에 두면서부터 홍리족의 싸움 기술을 익혀왔다. 중원에 들어온 이후부터 모진아를 사부로 모시며 무공을 갈고닦았다.
그녀는 무공을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벽리군이나 배금향은 상대할 수 없는 고수다.
‘어, 엄청난 고수! 내가 상대할 수 없는 고수야!’
어린은 상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도를 감지한 후 어깨를 움찔했다. 상대가 내뿜는 기도는 엄청나다. 적어도 내공만은 모진아보다 훨씬 강할 것 같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상대가 나타난 것을 눈치챈 기미라도 보이는 날에는 무지막지한 살수가 날아올 것만 같았다.
‘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떤 무공으로……’
어린은 실전 경험이 전무하다. 급박한 상황이 되자 홍리족의 싸움 기술도, 모진아에게 배운 구연진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은 났지만 상대에게 타격을 줄 만한 자신이 없었다.
턱!
어린은 상대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대처할 방도를 떠올리지 못했고 급기야는 목 뒤 아문혈을 내주고 말았다.
‘헉!’
헛바람이 목 안으로 잠겨들었다. 아문혈을 살짝 눌러 전신을 마비시킨 상대의 손이 어깨를 어루만졌다. 귀중한 보옥을 다루듯이 살살……
‘무, 무엇을 하려고?’
어린은 당황했다. 어깨를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상대의 의도를 조금은 눈치챌 수 있었다.
‘누, 누구야!’
힘껏 고함을 질렀지만 음성은 목 안에 잠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상대의 손이 어깨에서 목으로 흘러들었다.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머릿결을 어루만지더니 다시 맨살과 맨살이 만났다. 그러다 불쑥 옷섶을 헤집고 앞가슴으로 들어섰다.
‘헉!’
어린은 펄쩍 뛸 만큼 놀랐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밖에 없었다. 상대가 손을 치워주기만을 바라며, 그러나 상대는 손을 치우기는커녕 몽실몽실한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치, 치워!’
소리가 들릴 리 없다. 소리가 나오지도 않았으니……
어린의 가슴은 낯선 자의 손에 무방비 상태로 유린되었다.
홍리족 여인들은 많은 사내를 거느리고 산다. 전쟁이라도 나서 노예로 끌려가면 몸을 허락하는 것 정도는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어린은 많이 변했다. 중원에 들어와 산 것이 겨우 일 년을 갓 넘은 상태고, 그것도 사람들과 어울려 산 적은 거의 없지만 중원 풍습을 어느 정도는 깨우쳐 가고 있다.
굳이 중원 풍습을 말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종리추를 사랑했고, 종리추를 제외한 다른 사내에게 몸을 허락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남만에서 역석과 함께 따라온 비부. 그는 어린을 원한다. 어린을 위해 홍리족까지 떠나온 사내다. 어린을 향한 마음도 변함이 없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만큼 헌신적이다. 중원에 들어와서도 오직 그녀를 위해 노예처럼 궂은일을 하고 있다.
남만에서라면 비부에게도 몸을 허락했을 게다. 많은 남편 중 한 명으로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일까?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사내의 손이 젖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어린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갑자기 수치심과 모멸감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상대의 손길이 뱀의 살갗처럼 차갑게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상대는 서둘지 않았다. 천천히… 웃옷을 벗겨 나갔다.
‘안 돼! 안 돼! 제발……!’
어린의 말없는 저항은 낯선 자의 손길을 막지 못했다.
웃옷을 완전히 벗겨내고, 젖가리개를 떼어내고… 상반신이 완전히 드러났다.
‘아!’
어린은 종리추를 떠올렸다.
누구란 말인가? 누구이기에 고수들이 득실거리는 섬에 들어와 대담하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비부? 비부라는 생각이 얼핏 들기는 했지만 비부는 이런 정도의 무공을 익히고 있지 않다. 그는 홍리족 가운데 역석의 뒤를 이을 용사로 추앙받았지만 지금은 어린조차도 이기지 못한다.
“아름답군.”
상대가 말했다.
“아!”
어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소리… 이 음성……
어린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그리고 또… 자신의 입에서 음성이 새어 나온 것도 깨달았다.
어린은 벌떡 일어섰다. 몸이 움직였다. 아문혈이 풀렸다.
뒤돌아선 그녀의 눈에 산발한 귀신처럼 머리가 헝클어진 종리추의 모습이 보였다. 먹지도, 자지도 않아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으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내의 모습이 눈앞에 서 있었다.
“사, 상공!”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짓궂은 장난을 한 것도 새카맣게 잊어버렸다. 그가 자신 앞에 서 있다는 것만이 가장 중요했다.
“어린… 아름다워.”
어린은 창피하지 않았다. 수치심도, 모멸감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어린은 종리추의 품 안에 안겨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보금자리가 거기 있었다.
“무림으로 돌아간다.”
종리추의 한마디는 의논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언제 돌아갑니까?”
광부가 광기에 찬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그와 후사도는 아직도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지만 눈빛은 활활 불타올랐다.
그들이라고 이번 무림행이 초래할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종리추보다도 더 자세하게 무림의 생리를 꿰뚫고 있다.
무림은 그들을 잊지 않는다. 살문이 공격받았던 원인, 하남 무림에서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사문(師門)이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아무리 변명해도 통하지 않으리라.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무림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살수가 되는 순간부터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으니 목숨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나… 혹시…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여망을 이룰지도 모르지 않는가.
무림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족시킬 수만 있다면 천만다행이다. 그러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적어도 해보지도 않고 숨어 살면서 한(恨)을 품는 것보다는 낫겠지.
치사하게 숨어 길게 사느냐,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들망정 마음의 한을 풀어보려고 노력하느냐. 목숨이 걸린 선택이지만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광부에게도 편안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근에서는 제일 아름다운 여인과 혼인을 했고, 사내자식도 두 명이나 낳아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광부 일가족에게 어둠이 들이닥친 것은 그가 노름에 손을 대면서부터였다.
“여보, 이 돈 어디서 났어요?”
“땄지.”
“노름했어요?”
“그거 별것 아니던데 뭘. 운만 좋으면 단숨에 부자 되겠어.”
“여보, 그러다가……”
“걱정하지 마. 날 몰라? 일진이 사나워서 잃는다 싶으면 바로 일어서면 되지 뭐. 따면 하는 거고. 이렇게 남의 논 소작이나 짓다가는 이놈들도 평생 소작농을 못 면해. 내가 알아서 잘 조절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이 노름으로 신세 망쳤다는 사람들이다. 노름을 하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는 말도 있다.
‘분수를 모르니까 그렇지. 잃으면 바로 일어서고 따면 하고, 어느 정도 땄다 싶으면 그만두는 거야. 그럼 잃을 게 없지.’
광부의 생각은 순진했다. 평생 농사만 짓던 광부가 노름을 알 리 있겠는가.
노름은 독성이 아주 지독한 독약이었다.
‘오늘은 일진이 사나운데… 아냐, 한 판만 먹으면 잃은 돈을 모두 만회할 수 있어. 한 판만 제대로 먹으면……’
“할 거요, 안 할 거요?”
“하지 왜 안 해. 내 것도 돌려.”
다음 날은 상황이 더 안 좋았다.
“형씨, 돈이 떨어졌나 본데 그만 하고 물러서지?”
“이 사람이 어디서 반말지거리야!”
“허, 얌전할 줄 알았더니 성깔 있네. 여보쇼, 노름판에서는 성깔보다는 돈이 있어야 돼. 돈 없으면 판 깨지 말고 물러나슈. 정 하고 싶으면 돈을 구해오던가.”
돈은 쉽게 구했다. 노름판에서 돈을 빌려주고 염왕채를 뜯어먹는 자가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초가삼간을 담보로 은자를 무려 닷 냥이나 빌려줬다.
“형씨를 가만히 지켜보니까 노름은 잘하는데 일진이 안 좋은 것 같아. 나도 투자를 하는 거니까 따거든 넉넉히 셈해 주쇼.”
“고맙소.”
광부는 진실로 고마웠다. 그날은 정말로 일진이 사나웠다.
은자 닷 냥이면 일 년을 넉넉히 살 수 있는 돈이건만 한 시진도 되지 않아서 털려 버렸다.
광부는 염왕채 사내를 힐끔 쳐다봤지만 돈을 빌려달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투자한 돈까지 잃어서인지 사내의 표정이 너무 험상궂었다.
사내가 손짓으로 불렀다.
“한 번 더 하면 딸 수 있겠소?”
“아이구! 빌려만 주시면……”
“이번에 잃으면 죽을 각오를 하쇼.”
광부는 섬뜩했지만 딸 자신이 있었다. 검패(劍牌)란 돌고 도는 것, 지금까지는 운이 따라주지 않았지만 곧 행운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사내가 광부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럼 처자식을 담보로 할 수 있소?”
“뭐요?”
“아니군. 죽는다는 말은 말뿐이었어. 죽을 각오가 섰다는 사람이 처자식을 담보로 하자는 말에 신경질을 내? 그만 가보쇼. 집은 내일 비워주고. 제길! 그거 팔아서는 한 냥도 건지지 못하겠네.”
집을 내놓는다… 어디로 가나… 한 판만, 한 판만 제대로 먹으면…… 정말 운이 안 좋아 이번에도 잃으면 혀를 콱 깨물고 죽어 버리지.
“좋소! 담보로 하겠소.”
가난했지만 행복하던 살림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염왕채 사내는 염라대왕으로 변해서 들이닥쳤다.
광부는 건장한 사내에게 팔다리가 잡힌 채 처자식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광부는 돌아가야 한다. 아내와 자식을 찾아야 한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노름꾼들을 찾아 도륙해야 한다. 표사로 무림을 떠돈 것도 많은 곳을 전전하기 위해서였고 살수가 된 것도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그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아름다운 섬에서 편히 살다가 죽겠느냐, 아니면 처자식을 찾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 무림으로 나가겠냐고 묻는다면 우문(愚問)이다.
혈살편복, 후사도…… 모두들 중원으로 나가야 할 사연이 있다.
‘언제 나가냐?’는 광부의 물음은 모두의 물음과 같았다.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종리추가 말했다.
“준비가 끝났을 때.”
무슨 준비냐고는 묻지 않았다. 종리추를 알아온 세월이 결코 적지 않다. 종리추가 말한 준비가 끝나게 되면 무림에 나가자마자 죽을 염려는 반으로 줄어든다. 믿는다.
어린, 벽리군, 배금향, 구맥, 정원지… 여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여인들은 아름다운 섬에서 편히 살고 싶었다. 피가 튀고 죽음이 난무하는 무림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린이 말했다.
“나도 준비할래.”
“……?”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하잖아. 나도 필요할 때가 있을 거야.”
“어린, 너는……”
“이제는 떨어지지 않아. 부족한 줄은 알지만 상공이 준비시켜 주면 되잖아.”
어린은 단호했고, 벽리군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벽리군은 생각했다.
‘그래, 무림이…… 여기서는 내가 할 일이 없어. 무림에 나가야 옆에 있을 수 있지. 휴우, 내 욕심이 너무 큰가?’
그녀는 종리추와 같이 있고 싶었지만 위험이 염려되기도 했다. 간신히 빠져나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