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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01화


종리추는 마지막 무공 수련에 돌입했다.

권각을 놀리거나 신형을 움직이는 초식은 별 의미가 없다. 상단전, 중단전이 활짝 열려 마음의 평정이 유지된다. 세상에서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부동심(不動心)의 소유자를 단 한 명만 꼽으라면 종리추를 꼽아도 될 것이다.

도가 무공인 금종수, 어떤 무공인지 몰랐지만 불가의 무공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변검 양부의 심공(心功) 덕분이다. 하단전은 금, 목, 수, 화, 토의 진기가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금기, 목기…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다. 처음에는 구분이 되었으나 전신을 흐르는 진기는 단 하나뿐이다. 서로가 합일되어 한데 뭉쳐 돌아다닌다.

오행이 섞여 태극(太極)이 되었다. 유난히도 추웠던 올겨울, 극한의 환경에서 수련한 무공은 실망을 주지 않았다.

종리추는 이제야 의기유형(意氣有形)의 실체를 잡았다. 전에도 막연히 무리(武理)를 떠올린 적이 있지만 눈에 보이듯이 실체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의기유형이란 진기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악한 마음을 품고 진기를 끌어올리면 사악한 진기가 뻗어 나가고 포근한 마음으로 뻗어내면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무형기를 내뿜었던 두 사람 분운추월과 소고도 진정한 의미의 의기유형은 아니었다. 분운추월은 너무 강력해 스스로 검을 접게 만드는 기운을 뻗어냈다. 소고는 인간의 정신을 옭아매 검을 뻗어내서는 안 될 사람이란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분운추월은 될 수 있는 한 싸우지 않으려는 무인이며 소고는 강하게 짓누른다. 짓누르는 기운이 가지각색으로 변해 희로애락을 자극하고 환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인간의 마음이란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만큼 의기유형도 다양하게 변해야 한다.

분운추월과 소고는 한 가지 기운밖에 배출하지 못했다. 의기유형은 내공이 강한 사람이면 누구나 뿜어낼 수 있는 자연 발생적인 기운이었다.

과거 종리추가 분운추월의 기를 무형기라고 느꼈던 것은 분운추월의 기운이 너무 강하게 느껴진 탓에 싸운다면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크게 작용한 때문이었다.

반면에 소고의 무형기는 일종의 염력(念力)이라고 봐야 했다. 적각녀, 적사가 검을 쳐내지 못하고 멈칫거린 것은 환청(幻聽)을 들었기 때문이다.

무공을 펼치면서 염력을 사용했다. 모두 진정한 의기유형은 아니다.

종리추는 물에 적신 한지를 사이에 두고 촛불을 마주 봤다.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육안으로 움직임이 식별되지 않을 만큼 아주 조용히 움직였다. 이윽고 손가락과 촛불이 일직선상에 이르렀다 싶은 순간 종리추는 전신 진기를 손가락에 모았다.

‘빠져나간다. 쏘아낸다.’

고함도 없는 조용한 울림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파앗!

소리 없는 움직임이 감지됐다. 그리고……

퍽!

실제로는 거의 들리지 않는 아주 작은 소리가, 종리추에게는 천둥소리처럼 우렁찬 굉음 소리가 들려왔다. 반은 성공, 반은 실패다.

진기를 몸 밖으로 발출하는 것은 성공했으나 물에 적신 한지를 손상시키지 않고 촛불을 끄지는 못했다. 한지가 찢어졌다.

내공을 처음 배운 사람이 진기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본인 스스로 진기의 흐름을 느낀 다음에야 진기의 존재를 알게 되듯이……

종리추도 의기유형을 처음으로 봤다.

‘의기유형은 존재했어!’

종리추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었다. 배운 적도 없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는 신세계였다.

무인이 새로운 무공을 접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주화입마(走火入魔)다. 권각을 놀리는 무공 같으면 크게 두려워할 것이 없으나 진기를 사용해야 하는 내공 같은 경우에는 돌다리도 두들겨 본 후에야 건너는 심정으로 익힌다.

종리추도 마찬가지였다.

‘진기에 손상이 가는지… 혈류는 제대로 이어지는지… 모든 걸 세세하게 살펴봐야 해.’

의기유형이 어느 정도인지 파괴력을 시험하지 않고 촛불 끄는 것으로 시험해 본 것은 조금씩 조금씩 양을 늘려 나가려는 심산에서였다. 진기에 무리가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금씩.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상단전을 활용해 보자.’

찢어진 한지를 벗겨내고 새로운 한지에 물을 먹였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섬을 돌아다녔다. 천전흥이 장담한 대로 섬은 아름다웠다. 거창하게 천부라고까지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무 한 그루, 바위 한 조각조차 예사롭지 않았다.

‘아……!’

종리추는 시원하게 바람을 맞았다. 살을 멜 듯이 매서운 바람이지만 뱃속을 뚫고 지나가는 듯 시원했다.

바람 소리, 새소리… 자연의 소리는 종리추에게 영감을 주었다. 새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공기를 울린다. 바람이다. 새가 말하는 순간 바람이 인다. 나무도 말을 한다. 바위도 말을 한다. 바람을 타고 말이 전달되어 온다.

종리추는 자연의 소리에서 의기유형을 깨우쳤다. 목을 통해 나오는 소리는 더 알아듣기 쉽다.

동물들이 울부짖는 소리, 어미를 찾는 소리, 짝을 찾는 소리…… 다른 사람의 귀에는 똑같이 들리는 소리지만 종리추는 온갖 동물들의 소리를 분석해서 들었다.

하루 중 반나절을 내던져 소리를 듣는 것은 동물들과의 의사 소통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다.

십망을 선포받고 쫓길 적에 쥐를 이용해서 탈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천살문주의 거처로 침입할 때도 쥐를 이용했다.

동물도 쓰기에 따라서는 천군만마가 될 수 있다.

중원에 들어가려면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데 주변에 사람이 너무 없다. 그것보다 있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해야 해.’

살문 살수들에게 가장 뛰어난 병장기를 가져오라고 지시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무공이 한정되어 있으면 다른 수단이라도 강구해야 된다는 생각.

“짹! 째짹! 짹짹짹……!”

맑은 새소리를 토해냈다. 겨울 철새 한 마리가 날아와 주위를 두어 번 휘돈 다음 돌아갔다.

‘새도 써먹을 수 있겠군.’

종리추는 이용할 수 있는 동물을 찾아 섬을 돌아다녔다.

종리추는 어린에게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다.

“넌 내가 보호해 줄 거야. 영원히. 그럼 됐잖아? 무공이란 칼과 같은 거야. 칼을 안 들고 있으면 살 수도 있는 일을 들고 있으면 죽게 되는 경우도 많아.”

어린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나 너무 얕보지 마. 내 몸은 내가 간수하고 싶어. 전처럼 느닷없이 나타나 가슴을 만지면 어떡해? 상공이니까 다행이었지 깜짝 놀랐단 말이야. 얼마나 놀랐다고.”

종리추도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칼이란 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일단 손에 쥐면 반드시 휘두르게 되어 있는 것이 칼이다.

종리추가 흔들리지 않자 어린은 모진아에게 돌아갔다.

적지인살, 배금향… 모두 어린을 피했지만 어린의 집요한 추적은 감당하지 못했다.

어린은 구연진해를 능숙하게 펼쳐 냈다. 종리추나 모진아에게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일신은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종리추가 졌다.

‘어설피 배운 무공은 독약이야. 이미 무공을 배웠으니… 하나라도 확실히 가르쳐야겠어.’

“이것 껴.”

종리추는 열 살 이후로 손에서 벗어본 적이 없는 수투를 건네줬다.

“이게 뭐야? 매미 날개처럼 얇아. 너무 예쁘다.”

“껴봐.”

“어? 이거 딱 맞네. 내 손에 맞는 걸 끼고 다닌 거야?”

수투를 벗어준 것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다. 정작 강한 상대를 만나면 틀림없이 당하고 말 테고 불의의 기습이라도 해서 빠져나가라는 의도였다.

무공도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구연진해는 절세의 절학이다. 너무 난해하고 역동적인 무공이라 여인이 익히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이미 익히고 있으니 한 우물을 꾸준히 파는 것이 나으리라.

열심히 가르쳤다. 금종수도 가르쳤다.

가장 빨리 배울 수 있는 무공은 한성천류비결이다. 제사공 십비십향을 익히려면 상당한 수련이 필요하지만 제삼공 일비일표까지는 속성을 기대할 수 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 익히고 있는 구연진해를 더욱 파고드는 편이 빠르다.

봄이 될 때까지는 두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어린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을까?

구연진해로 제 몫을 해내려면 적어도 십 년 세월은 수련해야 한다. 구파일방이 강제로 내몰았던 오독마군의 절학인데 쉽게 배울 수는 없다.

현재 어린의 상태는 매우 위험하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어설픈 각법으로 천방지축 날뛸 수도 있다. 어린의 성격상 살수로 나서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종리추가 금종수를 가르친 것은 금종수는 깨달음의 무학이기 때문이다.

금종수를 익힌 사람은 전무하다. 적지인살마저 금종수의 존재를 부인할 정도로 귀신의 무학이다.

그런 것을 가르쳤다. 천운이 닿는다면 상단전이 활짝 열리는 기연을 만날 수 있다. 수투와 금종수의 파괴력이라면 누구도 쉽게 승부를 장담하지 못한다.

‘그동안은 구연진해로……’

종리추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투까지 낀 어린은 더욱 무공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비무.

종리추와 모진아의 비무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였다. 그들은 한 번 비무를 가진 적이 있지만 종리추가 워낙 어린아이였을 때였고 모진아가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에 진정한 승부라고는 할 수 없었다.

종리추와 모진아의 싸움은 한 번 더 있었다. 남만에서 살수 대 살수로 싸운 싸움에서 종리추는 모진아의 허를 찔렀다.

중원에 나와 종리추가 살문에 정신을 쏟고 있는 동안 모진아는 오로지 구연진해의 수련에만 전념했다.

남만인이지만 오독마군의 전인(傳人)으로 생각될 만큼 무골이 뛰어난 터라 올바른 무리까지 얻은 이후에는 극도로 수련에 매진했다. 모진아 스스로 장담하듯이 오독마군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이제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구연진해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둘의 비무는 예상치 않은 장소에서 예상치 않게 벌어졌다. 어린은 모진아와 함께 무공 수련 중이었다.

그날따라 어린은 권각이 몹시 흔들렸다. 어린의 익힌 무학은 각법 중에서는 최고의 절학으로 알려진 구연진해다.

구연진해를 익힐 적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모진아라는 훌륭한 사부는 부족한 부분을 세심하게 교정시켰고 그녀는 순조롭게 아홉 각법을 익혀 나갔다.

문제는 수투에서 일어났다. 손에 낀 것 같지도 않은 수투를 끼고 권장(拳掌)을 휘두르자 엄청난 파괴력이 일어나 그녀 자신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공이라고는 구연진해밖에 모르던 어린에게 수공(手功)의 파괴력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웠다.

종리추가 일러준 금종수의 심결을 일으키자 파괴력은 더욱 증폭되었다. 바위가 부서지고 나무가 넘어갔다.

‘이건… 이건… 엄청나!’

어린은 구연진해도 깜짝 놀랄 만한 파괴력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그녀의 미약한 내공으로는 현란한 초식은 펼칠 수 있어도 거웅(巨熊)을 일격에 쓰러뜨릴 만한 파괴력은 상상도 못 하던 터였다.

하지만… 금종수에는 초식이 없다. 육장(肉掌) 자체는 쇠망치를 능가하는 병기이지만 병기를 사용할 만한 초식이 없다.

금종수에 온 정신을 빼앗긴 어린은 구연진해를 펼치는 동안 자꾸 손이 앞으로 나갔다.

허공으로 솟구쳐 상대의 정수리를 내려찍는 단철각을 펼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양손이 튀어나갔다.

신형이 올바를 리 없다. 어린은 균형이 무너졌다. 각법을 펼치기는커녕 신형을 유지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이것은 금종수를 전수한 종리추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그만!”

모진아가 버럭 노성을 질렀다. 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어린은 상당히 위험했다. 어린 자신은 모를지 모르지만 진기가 헝클어진다는 것은 자칫 주화입마를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진기를 운기할 때 최대의 적은 잡념, 최대한 집중하여 진기가 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게 가장 기본이거늘……

모진아의 고함 소리에 좌식(坐息)을 하던 적지인살이 운기를 풀고 눈을 떴다.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던 벽리군과 배금향이 고개를 돌렸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던 정원지도 깜짝 놀라 토끼 눈을 했다. 구맥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의아함이 가득했다.

모진아는 어린을 종리추 모시듯이 공경한다. 그런 사람이 노성을 질렀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다.

모진아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어린에게 다가섰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겁니까!”

어조가 평소와 크게 달랐다. 암연족 족장이 부족민들을 나무랄 때나 쓰는 어조였다. 큰소리 한 번 지르지 않던 모진아가 정색을 하고 다그쳤다.

“나, 나는……”

어린은 말을 더듬거렸다. 종리추의 노예인지라 자신의 노예처럼 부렸지만 한때는 너무나도 두려웠던 사람이다. 지금도 마음 한쪽에는 두려움이 있지만……

“무공을 수련하면서 잡생각을 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겁니까! 도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

“무공 수련은 때려치우세요! 그 따위 정신 상태로 무공 수련을 한다면 백년을 수련해도 필요 없어요!”

어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눈물만 글썽거렸다. 그녀도 자신이 왜 그런 초식을 펼쳤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구연진해를 수련할 때는 오직 각법에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데……

“그만.”

어린을 곤경에서 빼내준 사람은 종리추였다.

운이 닿으려고 그랬는지 때가 마침 점심 무렵으로 들어섰다. 종리추가 오전 수련을 마치고 들어올 때.

종리추는 한눈에 사태를 알아챘다.

‘각법과 수공…… 초식이 없어.’

어린의 문제는 초식에 있다. 금종수에 허접한 초식이라도 있었다면 어린의 구연진해를 펼치면서까지 금종수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자신은 금종수를 진기로만 생각했다. 상단전을 열어주는 진기……

그에게는 금종수 외에도 익혀야 할 절기들이 너무 많았고 상단전의 합일에 온 신경이 곤두섰었다. 만약 그에게도 지금 어린과 마찬가지로 구연진해와 금종수밖에 없었다면 어린과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막강한 위력을 지닌 수공이 있는데, 수투가 있는데… 멀고 험한 길을 돌아가야 하는 구연진해의 수련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겠는가.

당장 몸에 익히기 쉬운 금종수를 구연진해에 접합시켜 절세 고수로 발돋움하고 싶다는 생각은 당연하다. 절세 고수가 된 다음 구연진해를 수련해 나가고……

종리추는 어린 곁으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기에… 무공을 익힐 적에는 금종수를 생각하지 말랬더니. 구연진해를 익히고 짬이 나면 금종수를 생각했어야지. 하나도 제대로 못 하면서 두 개를 동시에 어떻게 하려고……”

“흑!”

어린은 기어이 눈물을 쏟아냈다.

어린은 이제 무엇이 잘못됐는지 명백히 알았다. 그것 때문에 운 것은 아니다. 전에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염려가 가득 깃든 음성으로 말해 준 적이 없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지만 이렇게 말속에 정감을 담아주기는…… 그것이 고마워 눈물이 솟구쳤다.

“모진아, 나와 비무 좀 해야겠어.”

뜻하지 않은 모진아와 종리추의 비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몇 성(成)으로……?”

모진아가 물었다.

“십성(十成).”

“…주공, 주공의 무공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빈노(貧奴)의 무공은 오독마군이 환생한다 해도……”

종리추는 옅은 웃음을 지어냈다.

“알지. 그래서 든든해. 모진아의 무공이라면 구파일방 장문인과 비등할 거야. 더 나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 정도의 무공으로는 중원에 나가지 못해.”

모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추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종리추는 중원 최고수라는 구파일방 장문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아니, 안중에 두지 않아야 중원에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종리추가 말했던 ‘준비’는 단순히 무공을 더 강하게 수련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모진아는 기괴하게만 보였던 종리추의 수련이 궁금해졌다.

‘과연 어떤 수련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겠군.’

“주공, 그럼 무례를.”

“타앗!”

모진아의 신형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지면에서 박차 오른 탄력으로 허공에서 한 바퀴 몸을 뒤집은 모진아는 다시 옆으로 몸을 뉘며 발을 뻗어왔다. 구연진해 중에 원음각(元陰脚)이다.

종리추는 피하지 않았다. 몸을 우측으로 약간 비켜 틀며 왼발을 쭉 뻗어 올렸다. 동시에 빙글 원을 그리며 돌았다. 난화각(亂花脚) 제일 초다.

타탁! 타타탁……!

각과 각이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흘려냈다.

모진아는 각법에 십성의 진기를 실었다. 혼신의 진기가 실린 각법은 쇠몽둥이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지녔다. 발끝, 발등, 정강이… 앞을 가로막는 것은 모조리 부숴 버리는 강철이다.

변화도 무궁했다. 모진아는 이미 구연진해의 모든 변화를 하나로 귀일시켰다. 각법이나 초식에 연연하지 않고 바람 부는 대로 흘려내는 각법이다. 쭉 뻗어내는가 싶으면 휘둘러 치고, 그런가 싶으면 발굽으로 내려찍었다.

단철각, 흑살각, 천둔각, 금강각… 각법의 명칭이 무색해졌다.

빠르기는 섬전(閃電)을 능가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조차도 신형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쾌속했다.

적지인살은 생각했다.

‘천지양단, 풍운변화, 비응회선… 어떤 초식으로도 막을 수 없어. 세상에! 혈염삼절을 완전히 짓눌러. 내가 무공을 전개한다면… 전개하는 순간 죽는 거야. 내가 일 초를 뻗어낼 때 모진아는 오륙 초는 뻗어낼 테니까.’

그 차이는 엄청났다. 굼벵이와 토끼의 싸움과 다름없었다. 변화는 고사하고 속도에서 완전히 짓눌렸다.

그런 공격을 종리추는 여유 있게 막아냈다.

종리추의 방어 수법은 역시 구연진해를 펼치는 것 같은데 모진아와 상당히 달랐다.

모진아가 파괴적이고, 빠르고, 날카롭다면 종리추는 부드러웠다. 진기를 끌어올린 것 같지도 않았다. 병자처럼 손과 발이 흐느적거리면서 힘이 없었다.

속도에서도 뒤졌다. 모진아가 각법을 서너 번 전개할 때 종리추는 한두 번으로 그쳤다. 어떤 때는 각법으로 응수하지도 못하고 간신히 몸을 틀어 피하기도 했다.

적지인살은 다시 생각했다.

‘밀린다. 밀… 리기는 밀리는데?’

정녕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모진아의 공격이 번번이 무위로 끝나 버린다. 매섭게 살공을 퍼붓고 있는데 위협이 될 만한 공격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모진아가 사정을 봐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진실로 온 힘을 다해 공격을 퍼붓고 있다.

종리추의 신형은 바람처럼 흘렀다.

결코 손에 잡을 수 없는 사람처럼 매서운 강풍이 몰아치면 살짝 몸을 틀어 피하고 정면으로 부딪쳐야 될 상황이면 공격을 맞받지 않고 흘려 버린다.

‘무당파의 태극권(太極拳)? 아냐… 달라. 수법이 전혀 달라. 태극권은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것. 추아는… 역이용하는 게 아니라 맥을 끊어놓고 있어.’

적지인살은 비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했다.

종리추는 맥을 끊어놓을 때만 공격했다. 모진아가 아무리 살공을 매섭게 퍼부어도, 아무리 빨라도 허점을 공격당한다면 살공을 거둘 수밖에 없다.

‘끝났어. 모진아는 상대가 안 돼. 세상에! 추아가 이렇게 크다니…… 이건… 이런 무공은… 처음이야.’

같은 초식을 수련했어도 한 달 수련한 사람과 일 년 수련한 사람의 차이는 크다. 위력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초식을 읽고 보는 눈의 차이가 그렇다는 거다.

모진아는 아직도 구연진해를 수련하는 중이나 종리추는 수련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엄청난 공간이 둘 사이에 존재했다.

종리추가 생각을 바꿨는지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모진아는 물러서기에 급급했다. 손과 발이 헝클어지고 신법도 둔해졌다.

모진아가 차라리 다른 무공을 익혔다면 어땠을까? 그랬어도 지금처럼 밀렸을까?

종리추는 구연진해를 너무 잘 알았고 모진아가 신법을 채 펼치기도 전에 갈 곳을 차단했다. 각법을 전개하기도 전에 발이 뻗어 올 곳을 막아버렸다.

무공의 종류도 달라졌다. 방어적일 때는 구연진해만 펼치는 것 같았는데 공격을 시작하자 손과 발을 함께 사용했다.

조금 거리가 벌어지면 각법, 거리가 조금 붙으면 수공(手功).

팔꿈치, 무릎, 어깨… 전신이 모두 병기였다.

‘이 정도면 승부가 끝났는데……?’

적지인살은 모진아가 끝까지 분투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다.

모진아는 무모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승패를 알고 있다. 그토록 자신했던 공격이 막히는 순간 알아챘을 게다. 손과 발이 헝클어지는 순간에는 뚜렷하게 알았을 테고.

그런데 왜 그만두지 않는 것일까? 고수와 고수의 싸움에서 균형이 흐트러졌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데 왜……?

비무는 반 시진을 더 끌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무공을 모르는 정원지까지도 승패를 짐작했다.

모진아는 굵은 땀방울을 연신 흘렸고 손발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 보였다. 진기가 이어지지 않고 중간중간 가닥이 끊긴다는 증거다.

모진아 같은 고수는 하루 종일 싸워도 진기가 끊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내공 수련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종리추가 내공마저 흩뜨려 놓고 있다.

아무리 내공이 강해도, 끊임없이 진기를 흘려낼 수 있다 해도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가 손끝, 발끝으로 바로 오는 것은 아니다. 경락을 따라 흘러서 온다.

싸우는 도중에 외기(外氣)를 받아들여 내기(內氣)를 키워야 한다. 진기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러한 과정을 굳이 의식하고 행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스스로 흡수와 순환을 반복해 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외기를 받아들여야 할 때 급박한 공격을 받는다면?

외기를 흡수하기는커녕 오히려 내기를 뿜어내야 한다. 순환이 아니라 소진(消盡)되는 것이다.

초식뿐만이 아니라 내공에서도 종리추와 모진아의 차이는 컸다.

“헉!”

모진아가 급박하게 헛바람을 내지르며 털썩 주저앉았다.

“헉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몹시 힘들어 보였다.

모진아 같은 고수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적지인살도 믿기 힘들었을 게다.

종리추는 모진아의 어깨를 툭 친 후 어린에게 다가섰다.

“얼마나 봤어?”

“아주 조금…… 하지만 알 것 같아.”

“그래?”

“응. 내공, 초식, 절학이라는 것들… 조금은 알 것 같아.”

“네 무공으로는……”

“알겠어. 지금 내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형편없는지. 그래도 따라갈 거야. 그것만은 막지 마. 무공 수련… 더 열심히 할게.”

종리추는 어린의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곤 돌아섰다.

승부가 끝났는데도 비무를 계속한 것은 어린에게 각법과 수공의 운용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모진아도 그런 점을 이해하고 끝난 승부인데도 포기하지 않았고.

“헉헉, 빌어먹을! 각법 하나로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더니… 헉헉! 오독마군, 그 늙은이에게 속았군.”

종리추의 등 뒤에서 모진아의 탄식 소리가 들렸다.

“허허! 종리추가 펼친 무공도 구연진해 같은데?”

“헉헉! 그런가요? 아이고, 힘들어 죽겠다.”

“그 나이에 벌써 힘들다는 말이 나오면 어떡하나? 내가 자네 나이 때에는……”

적지인살과 모진아는 농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종리추의 놀라운 무공을 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부모 심정이란 다 그렇다. 친자식이 무능한 아비를 닮지 않고 놀라운 성취를 일궈냈을 때의 부모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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