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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03화


종리추는 활짝 웃는 어린과 또 활짝 웃는 벽리군의 배웅을 받으며 천부를 떠났다.

천부에 들어선 지 일 년하고도 이 개월만이다.

“주공, 도대체 무슨 일인데 주공께서 직접 나서십니까?”

배가 강심에 도착했을 무렵 모진아가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물어왔다.

모진아의 궁금증은 그만의 궁금증이 아니었다. 섬에 남아 있는 사람들, 뱃전에서 삿대를 젓고 있는 천전홍까지도 궁금증이 치미는 중대 사안이었다.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중원무림에 들어서지 않겠다던 종리추가 낯빛을 굳히고 나서니…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림에 나간 수하들 중 누군가가 위태롭다는 정도인데 지금 정황으로 봐서는 아무도 위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모진아도 알고 있었지?”

“뭘요?”

“어젯밤 일.”

모진아는 피식 웃었다.

암연족 용사들은 아내가 많다. 홍리족 여인들이 많은 사내를 거느린 것처럼.

모두 생존 때문에 생겨난 관습이다.

홍리족은 사내에 비해 여인들의 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니 그런 풍습이 생겨났다. 그러나 암연족은 홍리족과 조금 다른 입장이다. 싸움을 좋아하는 부족이라도 끊임없이 싸움을 하다 보면 수가 줄어들고 당연히 부족의 세도 약해진다.

암연족은 끊임없이 부족민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전장에서 잡아온 여인들을 아무 죄책감 없이 겁탈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암연족은 용맹한 사람일수록 많은 여자를 거느린다.

여자를 얼마나 거느렸느냐는 바로 사내가 얼마나 뛰어나느냐 하는 잣대가 된다.

모진아도 많은 여인을 거느렸다. 유구도 유회도 부족민 가운데서는 가장 많은 여인들을 거느렸다.

그들에게 나이는 상관없다. 여자의 과거 같은 것도 상관하지 않는다. 열 명의 자식을 낳아 여자로서의 매력이 사라진 몸이라도 관계치 않는다.

아내가 되느냐, 허드렛일을 하는 노예로 삼느냐 하는 판가름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기준으로 정해진다.

모진아나 유구, 유회에게 벽리군 같은 여인을 진작 취하지 않은 종리추가 오히려 이상하게 보였다.

목숨을 검 한 자루에 맡겼다면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서……

그렇다면 더욱 많은 여인을 취해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복수를 하더라도 할 것이고.

“전 주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도 그래. 중원에 와서 이만큼 살았으면 알 만도 할 텐데……”

“주공, 말 돌리지 마시고, 무슨 일 때문에 나가시는 겁니까?”

종리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심히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았다. 낯을 굳히고 있지만 긴장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이 직접 나갈 만큼 중요한 일이 분명한데도 옆집이나 놀러 가는 것처럼 태연했다.

그는 무심히… 흘러가는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종리추는 하루에 두 번씩 연락을 받았다.

중원에 산재한 외장 문도들이 정보를 취합하여 벽리군에게 보내면 벽리군은 그중에서 산동성에 관한 정보만 추려 종리추가 지나는 길목에 있는 외장 문도에게 보낸다.

소식이 늦을 수밖에 없다.

종리추가 받아 보는 정보는 늘 사나흘 정도 흘러간 정보였다. 그래도 당금 중원에서 이만한 속도로 정보를 받아 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더군다나 소식이 가장 빠르다는 개방조차도 이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 종리추는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벽리군의 생각대로 종리추는 산동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광부가 벽력사부를 얻었군, 은자 스무 냥에. 벽력사부의 진가를 알면 그 가격에 넘기지 않았을 텐데.”

“그러게 보물은 임자가 따로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중원에 무림인이 그렇게 많아도 벽력사부의 존재를 몰랐던 것도 그렇고… 광부가 임자는 임자인 모양입니다.”

“……”

종리추는 모처럼 전해진 흔쾌한 소식에도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남의 일을 전해 들은 사람처럼 덤덤했다.

“갈 길이 바쁘니 서둘러야겠어. 앞으로 십 일 안에는 산동성에 들어서야 해.”

종리추의 말을 들었는지 어좌에 앉아 있던 천전홍이 채찍질을 가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사두마차가 힘차게 달려나갔다.

“이, 이건! 이거였어!”

벽리군은 전서 한 장을 손에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어린이 바짝 옆으로 다가앉으며 물었다.

어린은 아직 글을 모른다. 중원 말도 간신히 배웠는데 글까지 배울 틈이 어디 있으랴. 그것도 적지인살이 다잡아 놓고 가르치지 않았으면 지금도 말을 더듬거리고 있을 게다.

“혀, 혈영신마. 혈영신마에요.”

벽리군은 얼마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얘기해 봐.”

그날 이후 어린은 벽리군을 자신의 거처로 불러들였다.

벽리군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처사다. 정보를 취합하고 분류하려면 온 신경을 한 군데에 쏟아부어야 하는데 누가 옆에 있으면 신경이 분산되지 않겠는가. 그 사람이 언니가 되어버린 어린이라면 더욱 그럴 테고.

하지만 벽리군은 순순히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지난 과거를 모두 잊기로 했다. 종리추와 어린을 모시고 그의 두 번째 부인으로서의 삶을 살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새로이 태어났다.

새 삶을 시작했다.

어린의 말을 좇아 거처를 옮기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일일지라도 어린과 함께해야 한다.

벽리군은 어린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일들을 꼼꼼히 알려주었다. 무림에서의 경험담, 사내들의 속성, 차를 끓이는 법… 모든 것을.

지금 알려줄 시간이 없다. 어린 알아듣도록 설명해 주는 데 일다경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지만 그 시간마저 아까웠다.

“빨리, 빨리 상공께 알려야 돼요.”

벽리군은 서둘렀다.

황급히 지도를 펼치고 손가락으로 종리추가 머물렀던 하남성 신집(新集)을 짚었다.

‘오늘 아침 진시(辰時)에 출발했을 거야. 지금이 미시(未時) 무렵이니 세 시진. 전서구가 날아가는 데 하루.., 하루 하고 세 시진이면 산동을 들어서고도 성무(成武)까지는 가 있을 테지.’

전서구를 날릴 곳은 성무다.

성무는 큰 도읍이고 다행히도 살문 외장 문도가 은신해 있다.

벽리군은 자신이 읽은 전서를 다시 접어 전통(傳筒)에 넣은 다음 비둘기를 힘차게 날렸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전서구란 놈들은 간혹 매나 독수리에게 잡아 먹히곤 한다. 재수 없으면 엽사가 날린 화살에 떨어지거나 전서구임을 알아챈 무림인들의 손에 떨어지기도 한다.

벽리군은 전서에 적힌 내용을 부지런히 써 나갔다.

전서를 전통에 넣어 전서구를 날리고… 다시 전서를 적고……

그렇게 다섯 마리나 연달아 띄운 후에야 손을 멈추고 한숨을 돌렸다.

‘응? 나는 먹을 갈지 않았는데?’

벽리군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자신이 먹을 갈지도 않았는데 먹물이 그득했던 것을.

그녀는 어린을 쳐다봤고, 방실 웃고 있는 어린의 모습을 보았다.

“언니, 고마워요.”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상공을 위한 일이잖아. 자, 이제 말해 봐. 무슨 일이야?”

“밖에 있는 말이 참 건장합니다. 그런데 한 놈은 무릎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새우눈에 입술이 얇아 잔꾀로 똘똘 뭉친 것 같은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잘못 보셨소. 그놈은 무릎이 아픈 게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거요.”

“다른 놈들이 불평깨나 터뜨리겠군. 자기들은 잘 달리는데 한 놈만 빌빌거리고 있으니. 그놈 나한테 파시오. 달리지 못하는 놈은 농사나 짓는 게 낫지. 닷 냥에 파시오.”

“여덟 냥이라면 생각해 보겠소만……”

문답이 끝났다.

서로 간의 밀마(密碼)는 벽리군이 정해준다.

벽리군은 전서를 보낼 내용이 기재된 전서 외에도 두 개를 더 보낸다.

하나는 외장 문도에게 보내는 전서로 거기에는 접선 시 사용해야 할 밀마가 적혀 있다. 다른 하나는 봉인된 채 전해져야 한다. 봉인된 전서는 종리추만이 열어볼 수 있으며 다음 접선에서 사용될 밀마가 적혀 있다.

밀마는 항상 변한다.

일면 번거롭게 생각되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최상책이다.

말을 걸어온 사내와 천전홍은 눈짓을 주고받았다.

“쳇, 여덟 냥이면 너무 비싼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남의 말을 후려치려거든 썩 물러나쇼.”

“그렇다고 말을 그렇게 할 건 또 뭐유. 됐소. 안 사면 그만이지.”

새우눈 사내는 뒤도 안 보고 주루를 빠져나갔다.

사내는 말이 탐나는지 이곳저곳을 만져보더니 입맛을 다시며 대로를 걸어갔다.

잠시 후 사내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외장 문도가 어좌석 밑에 숨겨놓은 전서는 곧바로 종리추에게 전해졌다.

종리추는 마차 안에서 전서를 펼쳤다.

벽리군도 그렇지만 그 역시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다. 특히 지금은 아무리 조심을 해도 부족할 판이었다.

혈영신마, 십망.

현 소재지 동창부(東昌府) 동하(東河).

무당파 현학(玄鶴) 도인(道人) 지휘 하에 천여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추적 중.

혈영신마의 행적으로 보아 피하지 않을 것으로 사료. 혈겁(血劫)이 예상됨.

전서는 짤막했지만 내용은 컸다.

중원 곳곳의 정보를 빠짐없이 입수한다고 자부했던 벽리군의 정보망이 이제야 혈영신마의 십망을 알아냈다.

벽리군의 정보망이 느슨해서가 아니라 구파일방의 움직임이 그만큼 은밀했던 까닭이다.

그들은 혈영신마의 종적을 완전히 잡아내고 포위망 또한 완벽하게 구축한 다음에야 십망을 선포했다.

십망을 선포한 다음 추적하던 지난날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혈영신마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보나마나 혈영신마가 도주할 만한 곳에는 빠짐없이 개방 문도가 길목을 막고 있을 게다. 무공이 무척 높다는 점을 감안하여 장로급에 이르는 무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을 게고.

구파일방, 그리고 산동 무림인들이 연합하여 추적을 하고 있다는 점도 전과 다르다.

적지인살은 개방 문도에게 쫓겼다.

만약 소림이나 공동, 무당 같은 문파들이 가세했다면 그처럼 수월하게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게다.

어디 있는지 알고 포위망을 구축한 다음 거리를 좁혀 나간다면… 혈영신마에게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다 해도 몸 성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현학 도인… 현학 도인이라면 현단궁(玄丹宮)을 책임지고 있는 도인…… 쉽지 않겠군.’

종리추는 미간을 좁혔다.

무당파에서 현(玄) 자(字) 돌림을 가졌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고수라고 봐야 한다.

현 무당파의 장문인이 현 자 돌림이고 팔궁(八宮), 육원(六院), 일전(一殿)을 맡고 있는 도인들이 현 자 돌림이다.

소림사와 더불어 양대 산맥을 이루는 무당파.

현 자 돌림 도인들은 무당파에서 제일 강한 도인들이며 중원무림에서도 알아주는 거목들이다.

그들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은 무(無) 자(字) 돌림을 쓴다.

중원무림에는 무 자 돌림 노도사(老道士)는 단 세 명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진위 여부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들은 무림에 모습을 비추지 않기에.

“천전홍, 등천조에게 연락해. 혈영신마의 종적을 파악하는 즉시 내게 보고하라고. 천부를 거칠 여유가 없어. 지금부터는 촌각을 다퉈야 돼.”

“알겠습니다.”

어좌석에 앉아 있던 천전홍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종리추가 중원에 나왔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목적이 혈영신마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나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거기에 혈영신마라… 아미타불!”

낮은 불호가 죽림(竹林)을 울렸다.

뽀드득! 뽀드득……!

노승의 발밑에서 눈송이가 부서지며 작은 울음을 토해냈다.

소림사는 노승에게 혜공이란 불명을 지어주었고, 장문인이라는 직책을 떠맡겼다.

“어떻게 할까요?”

“……”

노승은 말없이 죽림을 걸었다.

눈처럼 흰 백의 장삼을 걸친 청년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노승은 고뇌에 깃든 얼굴로 깊은 상념에 젖어들었다.

일다경가량 걷자 죽림의 끝이 보였다. 그 너머에는 우람하다고 해야 할지 위용스럽다고 해야 할지… 하나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는 대사찰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미타불! 할 수 없지. 현 무림은 조용하다네. 십망도 제대로 돌아가고… 소고라는 여인도… 잘만 쓰면 살천문보다 낫겠어. 인심유변(人心有變)이나 불심무변(佛心無變)이라. 아미타불! 자네는 그만 내려가게.”

노승은 백의청년을 남겨두고 대사찰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인심유변이나 불심무변이라……”

혼자 남은 백의청년은 혜공 선사가 남기고 간 말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런 그의 얼굴에 고통의 그림자가 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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