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06화
종리추는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느리게, 느리게…… 너무 느려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종리추가 매달려 있는 나무를 유심히 살펴볼지라도 나무의 일부분이 아닐까 착각할 만큼 움직임이 느렸다.
휘이잉……!
겨울 바람이 불어왔다.
겨울 강풍, 살갗을 에일 듯 차갑게 몰아치는 기세는 천부나 이름없는 야산이나 마찬가지였다.
휘이잉……!
또다시 바람이 불었다.
종리추는 바람을 타고 훌쩍 날아올랐다.
그가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며 흘린 소리는 바람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옷자락도 펄럭이지 않았고 나무를 박차는 소리도, 잡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바람에 묻혀 휘날리는 낙엽과도 같았다.
그렇게 몇 번을 이동하여 십여 장을 미끄러진 뒤 이번에는 나무를 타고 스르륵 내려왔다.
그의 몸은 뱀이 되었다.
구렁이가 나무를 타고 미끄러지듯 기척도, 기미도 없이 나무 밑으로 내려와 납작 엎드렸다.
다시 이십여 장을 기어갔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땅에 바짝 닿아 있어 움직이기가 용이하지 않은 자세였지만 종리추가 움직이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세상 만물에는 길이 있다. 나무에도, 땅에도, 바람에도 길이 있다. 만물은 길을 따라 움직이는 거야.’
조그만 돌멩이는 몸으로 꾹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큰 돌멩이는 피하고……
종리추는 눈과 땅과 돌멩이와 나무로 가득한 산속에서 길을 찾았다. 사람이나 짐승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닌 자연이 지닌 본연의 길을 찾았다.
휘이잉……!
엎드려 있는 그의 몸 위로 세찬 강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강풍에 묻어 휘날리는 눈보라가 그의 몸을 덮었다.
종리추는 차가운 바람 속에서 따뜻한 온기를 감지했다. 날카로운 검기(劍氣)가 전신을 난자하는 느낌도 받았다.
‘일 장……’
종리추는 긴장을 풀었다. 완전히 이완시킨 것도 아니다. 적절히 긴장하고 적절히 이완시켰다.
이것이 자연이 인간에게 준 가장 이상적인 균형이다. 그런 상태에서 잡념 없이 하나의 일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즐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종리추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를 들었다. 바람에 묻어나는 나무들의 노랫소리도 듣고 볕들이 말하는 소리도 들었다.
스르륵……!
그의 몸이 앞으로 나갔다.
누가 그를 밧줄로 친친 묶어 끌어당기는 것처럼, 움직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데 움직여야 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들고 날카롭게 검기를 쏘아내는 사람을 직시했다.
그는 나무에 어깨를 기댄 채 십여 장 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고 있다.
종리추는 손을 뻗어 올렸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것처럼 살려달라고 손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검지가 무릎 뒤 오금 한가운데를 찔렀다. 아니, 찌른다 싶은 순간 엄지가 갈고리처럼 휘어지며 무릎을 잡았다. 검지에 실린 진기는 강한 힘으로 오금을 파고들었다.
사내가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비명 소리는 새 나오지 않았다. 휘청거리며 무너지는 신형이 종리추의 가슴에 안겼다.
종리추는 위중혈(委中穴)에 이어 천돌혈(天突穴)까지 짚었다.
위중혈을 압진(壓診)하는 데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했지만 천돌혈을 누르는 데는 아무런 주의도 필요하지 않았다.
상대는 무방비 상태다.
그가 세게 누르면 즉사하고 얕게 누르면 혼절하는 것으로 그친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검기를 폭출시키던 검인(劍人)이 목숨을 타인의 손에 내맡기고 있다.
종리추는 얕게 짚었다.
‘필요 없는 살생은 하지 말아야 돼. 살수일지라도.’
세 시진이 지나 시간이 신시초(申時初:03시)로 접어들 무렵 모진아는 눈을 부릅떴다.
혈영신마를 향해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하후량이다.
아니, 하후량의 인피를 뒤집어쓴 종리추다. 하후량이 두 명이 아니라면, 쌍둥이가 아니라면.
‘감시하는 눈들이 있는데 어쩌자고… 그럼……’
모진아는 귀를 기울여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을 전개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움직이는 소리는커녕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하긴 혈영신마를 상대하겠다고 일금 안으로 들어선 무인치고 종적을 흘릴 만큼 미숙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진아는 바싹 긴장하며 사방을 예리하게 살폈다.
여차하면 즉각 대응할 수 있게 진기를 가득 끌어올린 채.
종리추는 혈영신마에게 다가섰다.
혈영신마는 반응하지 않았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조는 듯 얕게 뜬 눈으로 불기만 쏘아보고 있다.
그는 맞은편으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는데도 흔들리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훌쩍 뛰어오르면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거리다.
무인이라면 진기를 끌어올리고 경계를 취해야 한다. 상대를 유심히 살피고 언제 있을지 모를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고수 대 고수의 싸움에서 이 정도의 거리에서 선공을 가해온다면 당장 기선을 제압당한다. 그리고 제압당한 기선은 좀처럼 되돌릴 수 없고 목숨을 잃는 결과까지 초래한다.
혈영신마는 진기를 끌어올리는 것 같지도 않았고 경계도 하지 않았다.
‘무서운 무공이군. 혈영신공… 불의 무공이야. 따뜻한 불이지만 기름을 얹으면 확 불타오르는…… 이자는 이미 진기를 끌어올렸어. 겉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 공격을 가하는 즉시 불붙은 진기가 전신을 태워 올 거야.’
“혈영신마, 죽고 싶나?”
“…….”
“죽고 싶다면 죽여줄 수 있다.”
혈영신마의 눈꼬리가 가늘게 경련했다.
처음으로 보인 반응이다.
“어떤가? 죽여줄까?”
혈영신마가 반개한 눈으로 종리추를 쳐다봤다.
종리추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마른 나뭇가지를 넣어 꺼져 가는 모닥불을 되살렸다.
“연기가 너무 나는군. 잘 마른 장작을 구하지 그랬어.”
“누구냐?”
혈영신마의 음성은 탁음(濁音)이었다. 음성이 목이 쉰 사람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왔다.
“내가 누구인지… 그게 궁금한가? 그런 건 살 사람들이나 묻는 거야. 죽을 사람에게는 궁금증이란 게 필요 없어. 죽으면 모든 기억이 망실되니까.”
“솜씨가 좋더군.”
혈영신마는 종리추의 소리 없는 싸움을 이야기했다.
종리추는 처음으로 혈영신마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네모난 얼굴형이다. 눈썹은 가늘고 길었으며 작은 눈에서는 한광(寒光)이 새어 나왔다. 코는 뭉툭하면서도 두터웠다. 한일 자로 굳게 다문 얇은 입술, 약간 솟구친 아래턱은 의지가 강함을 말해 준다.
고집이 있어 보인다.
나이는 얼마나 됐을까? 서른 중반? 초반은 넘긴 것 같고 사십에 가까워 보이지는 않고……
“죽이러 온 놈은 아니군.”
“무인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잘못 봤어. 난 내 싸움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방해받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혼절시켰을 뿐이야.”
“누구냐!”
“죽을 자는 알 필요 없다고 했는데 귀찮게 묻는군. 살고 싶은 모양이지? 그럼 말해 주지. 남들이 우리 형제 보고 벽도삼걸이라고 부르더군.”
혈영신마의 눈가에 놀람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곧 조소로 바뀌었다.
“벽도삼걸 이야기는 들어봤지. 협명이 높은 작자들이더군. 하지만 내 단언하건대… 네가 벽도삼걸이라면 내 눈깔을 후벼 파지.”
“그렇게 자신하면 곤란할 텐데?”
“누구냐!”
“눈깔을 후벼 파.”
혈영신마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종리추의 허리에는 분명히 하후가의 독문 표식이 새겨진 대도가 걸려 있다. 그리고 대도가 뽑히는 순간 천지를 양단해 버릴 듯한 도기(刀氣)가 폭풍처럼 몰아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앞에 앉아 있는 중년인은 그가 처음으로 만난 강적이었다.
그는 늘 무림에 무인이 없다고 말해 왔다. 쓰레기들이 병장기를 들고 설친다고 경시했다. 그런 무림에서 만난 첫 번째 고수다.
벽도삼걸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 고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하후가의 무공 따위로 이런 고수를 어떻게 길러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살을 저밀 듯 다가오는 도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세 가지만 묻지. 대답해 주면 좋겠어.”
“하지 않는다면?”
“죽여야지.”
“후후후! 꽤나 자신하는군.”
“믿어도 좋을 거야. 그만한 실력이 있으니까.”
혈영신마는 살을 저밀 듯한 안광을 쏘아냈다.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지만 그의 눈빛은 더 뜨겁게 이글이글 타올랐다.
반면에 종리추는 담담했다.
그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다. 바람 앞에 거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막히면 막히는 대로, 허공은 허공대로 유유히 흘러갈 뿐이다. 기운에 따라서는 한설을 동반한 강풍도 있지만 전혀 흐르지 않는 바람도 있다.
종리추는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을 바람결에 흐려 버리며 입을 열었다.
“무인을 몇 명이나 죽였나?”
“후후후! 모르겠는데, 너무 많아서.”
“두 번째 질문이야. 왜?”
“죽이고 싶었으니까.”
“마지막 질문을 하지. 죽고 싶나?”
“내 대답에 상관이 있나?”
“상관있지. 죽고 싶다면 죽여주고 살고 싶다면 살려주지.”
“후후후! 네 눈에는 여기 모인 사람들이 허수아비로 보이는 모양이군. 겨우 암습 나부랭이로 십여 명 쓰러뜨렸다고……”
“말이 많은 놈이었나? 가타부타 대답이나 해.”
혈영신마에게 이런 자는 처음이었다.
그는 군웅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다. 자신조차도 예전 같으면 몰라도 천여 명이나 운집한 지금은 뚫고 나갈 자신이 사라져 버렸는데.
하루, 이틀… 죽을 날만 꼽고 있는데.
“죽고 싶은데 죽여줄래?”
혈영신마는 정말 오랜만에 호기가 치솟았다. 무공에 대한 자신도 있었다. 아직까지 적수를 만나보지 못한 혈영신공이다. 육장에 걸리는 것은 모두 파괴해 버리는 강철이 몸속에 깃들어 있다. 그 순간.
쐐에에엑……!
언제 뽑아 들었는지 차디찬 한광을 발사하는 대도가 거칠게 달려들었다.
‘엇!’
혈영신마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경악했다.
쾌검, 쾌도… 빠르다는 많은 무공을 접해보았지만 이토록 빠른 도법은 처음이다. 도집에 새겨져 있는 번개 문양처럼 섬전을 능가하는 빠르기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는 마음도 들었다. 종리추의 도법은 경력을 중시하는 중원 무학의 상리를 벗어나 일체의 초식을 배제한 일직선의 공격이었다.
종리추의 대도는 모닥불을 갈라 버리고 앉아 있는 혈영신마의 목을 베어왔다.
패애앵……!
혈영신마의 양 손바닥이 모닥불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대도를 막아왔다. 한철로 만들었고, 날카롭게 날을 갈았으며, 무게만으로도 머리 하나쯤은 묵살 내 버릴 것 같은 대도를 피하지 않고 육장으로 마주쳐 왔다.
종리추가 전개한 도광이 순식간에 급변했다.
비스듬히 목을 쳐오던 것이 방향을 급선회하여 일직선으로 내려쳐 왔다.
‘쾌도에 환도(幻刀)까지! 중원에 이런 고수가!’
생각은 느낌일 뿐이다. 혈영신마는 급격하게 거리를 단축시켜 오는 대도를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가 누구와 맞서 부딪치지 않고 피한 것은 처음이었다.
무인들은 혈영신공을 안다. 그러면서도 병장기에 육장을 부딪쳐 가며 진기를 가중시킨다. 일격에 손을 잘라 버리고 몸통까지 베어버릴 심산이리라.
그곳에 함정이 있다.
혈영신마의 육장은 진기로 보호되어 있어 웬만한 도검에는 작은 상처조차 입지 않는다.
혈영신공이 깃든 육장은 상대의 의도를 보기 좋게 꺾어 오히려 병장기를 박살 내고 상대의 몸통까지 가격한다.
승부는 거의 일 초식에 끝났다.
종리추는 다르다. 그는 부딪치지 않고 피했다. 그리고 다른 방향에서 공격해 왔다. 혈영신마가 피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차앗!”
혈영신마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는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두 번을 회전한 뒤에야 간신히 도광을 피해냈다.
혈영신마는 몸을 추스렸다.
그는 더 이상 방심하지 않았다. 방심할 수 없었다. 손속을 부딪치기 전에도 강자라는 사실을 직감했지만 부딪치고 난 후에는… 너무 강한 상대라 모골이 송연해졌다.
‘쾌도에 환도, 중도(重刀)까지 갖췄다면… 나는 지금 도신(刀神)과 겨루고 있는 거야.’
고오오오……!
혈영신마의 몸에서 은은한 울림이 새어 나왔다.
인간의 몸에서 소리가 들릴 리 없지만 종리추는 바람에 묻어나는 소리를 들었다.
‘혈영신공의 진수……’
종리추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상대를 만나도 방심한 적이 없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인(凡人)과 만날 때도 방심하지 않았다. 지금은 습관으로 굳어져 버렸다.
혈영신마의 양손이 불에 달궈진 인두처럼 붉게 타올랐다.
‘어떤 신공인가? 진기의 운행이 어떻기에 인간의 육장이 저렇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화염은 인간의 살을 태운다. 상흔이 검게 그을리게 되어 있어. 혈영신공에 당하면 붉게 물든다고 했으니… 피를 응집시키는 무공인가?’
종리추는 직접 겨루고 있으면서도 혈영신공의 무리를 알아낼 수 없었다.
“타앗!”
혈영신마가 신형을 날려왔다.
그가 양손을 휘저을 때마다 불길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양손에서 터져 나온 불길이 어둠을 뚫고 사방으로 번져 나가는 것 같은.
종리추는 손에 들고 있던 대도를 ‘탁’ 소리가 나게 땅에 꽂았다.
휘루루륭……!
혈영신마의 양손이 지척에 이르렀다.
종리추는 대도를 버리고 양손으로 마주 쳐갔다.
혈영신공에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장법(掌法)으로 마주 쳐간 것이다.
혈영신마의 눈가에 놀람이 스쳐 갔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종리추는 분명히 보았다. 흔들리는 눈빛을. 아마도 육장으로 마주쳐 오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한 듯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천하의 혈영신공 앞에 누가 감히 육장으로 부딪친단 말인가.
팡! 꽈앙……!
장과 장이 부딪쳤는데 폭음이 울려 나왔다.
종리추는 팔꿈치가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가 펼친 무공은 금종수다. 초식은 혈염옹의 혈염도법 이절 풍운변환을 장법으로 바꿔 펼쳤다.
사실 종리추나 혈영신마나 초식이 필요 없었다.
육장과 육장이 부딪칠 것을 깨달은 순간 두 사람은 초식을 버리고 양손에 전신 진기를 주입했다. 오직 신공의 강약이 우열을 가린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결과는 무승부였다.
종리추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지만 혈영신마도 그만큼의 거리를 물러섰다.
육장이 부딪치는 순간 엄청난 반탄력이 전신을 떠밀었고, 무너진 몸의 균형은 양발의 힘만으로는 버텨내기가 힘들었다.
“이, 이런! 이런 일이! 이럴 수가!”
혈영신마는 자신의 양손을 쳐다보며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종리추는 아직도 양손이 얼얼했다. 팔꿈치에서는 부서진 것처럼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부단(不斷)한 진기가 전신을 휘돌고 있다는 것, 충후한 진기가 경맥을 따라 흐르고 있다는 것.
진기는 충격으로 마비되다시피 한 양팔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뚜벅! 뚜벅!
종리추는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처럼 태연히 걸어갔다.
대도 있는 곳까지 이르러 땅에 꽂혀 있는 대도를 힘차게 뽑아 들었다. 그리고 혈영신마에게 겨눴다.
“혈영신공은 잘 봤어. 별것 아닌 것 같군. 그게 혈영신공의 모든 것이라면 널 죽일 사람은 많아. 안타깝군. 여기에는 무당파의 현학 도인도 와 있지. 무당파의 면장(綿掌)이라면 혈영신공은 간단히 깨뜨릴 수 있는데… 다행으로 알아. 혈영신공이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에 네 목숨이 아직까지 붙어 있는 거야.”
혈영신마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종리추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내 차례야. 내가 펼칠 초식 명은 단 한 자야. 무(無). 무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
“무, 무슨… 무슨 무공이냐!”
“……”
“방금 전에 펼친 무공… 무슨 무공이냐!”
“금종수.”
“그, 금… 금종수…… 아냐. 그럴 리 없어. 금종수는 차력에 불과해. 그런 무공으로는 혈영신공을 깨뜨릴 수가……”
“금종수를 잘 아는 듯한데 펼쳐 봐. 금종수를 펼칠 수 있으면 물러서지.”
종리추는 혈영신마를 철저히 무너뜨렸다.
그의 무공은 물론 정신까지 황폐하게 구겨 버렸다.
그는 구겨져야 한다. 짓이겨져야 한다. 그래야 다시 부활한다.
“펼칠 수 없으면 믿어. 자, 그럼 받아봐. 무!”
쉬리리링……!
종리추의 도법은 바람을 닮았다.
날카로운 기세도 풍기지 않고 거센 파공음도 들리지 않았다. 모진아와 비무를 할 때처럼 힘을 잃어 흐느적거리는 듯했다.
혈영신마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뿐이다. 아니, 몇 번 허우적거리기는 했지만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도가 혈영신마의 머리와 한 치 간격을 두고 멈췄다.
종리추가 말했다.
“말했잖아. 죽여달라고 하면 죽여주겠다고. 이젠 믿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