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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09화


무인들은 객잔을 빠져나오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걸개에게 의구심을 털어놓았다.

“저 객잔에 의원 세 명이 있는데… 하남 곡성에서 온 염가 삼형제라고 하더군. 한 번 알아보게. 말하는 투로 봐서는 의원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어쩐지 구린내가 난단 말이야.”

말을 들은 개방 걸개는 재빨리 움직였다.

그는 허리 매듭도 없는 백의개였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지시를 받지 않아도 잘 알았다.

개방 걸개들 중에는 구걸을 하지 않고 무공 수련에만 몰두하는 걸개도 있다. 그러나 그런 특혜를 받기 위해서는 뛰어난 자질을 지녔어야 한다. 천에 한 명, 만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다는.

“부모 잘 만나서……”

그렇다. 부모를 잘 만나서 선천적으로 강골로 태어난 아이들은 장문인이나 장로들의 눈에 들어 구걸을 하지 않고 무공 수련에만 몰두한다.

보통은… 개방이란 곳을 모른 채 동냥을 시작했고, 동냥을 하다 보니 개방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개방 문도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냥을 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눈치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요. 놓치면 안 돼요. 수상한 기미가 있어도 따라붙기만 하지 어찌해 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염려 말게, 소형제.”

종리추 일행에게 말을 걸었던 무인 네 명은 객잔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심상치 않은데……?”

모진아가 창밖을 슬쩍 흘겨보며 말했다.

종리추도 바깥 동정을 유심히 살폈다.

점심으로 시켰던 소면은 다 먹고 입가심으로 차를 들던 중이었다.

“모진아.”

“네.”

“저 네 명… 유인해서 죽여.”

“죽입니까?”

“…….”

“알겠습니다.”

모진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개방 백의개는 발에서 불이 날 정도로 뛰었다.

분타주를 만나야 한다. 아니, 그것은 꿈이다. 한낱 백의개로서는 분타주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아는 사람… 일결이나 이결 사형들이라도 만나야 한다.

다른 때 같으면 산신각(山神閣)에 가면 우글우글 모여 있을 테지만 지금은 한 명도 없다. 모두들 혈영신마의 종적을 찾아 각처로 흩어졌으니.

백의개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혈영신마로 의심되는 자를 찾았는데 신호탄은 일결 이상만 지니고 있고, 사형들을 만날 수 없으니… 아니, 신호탄을 지니고 있다 해도 쏘아 올리지는 못한다. 혈영신마인지 아닌지 확신도 서지 않는데.

‘사형을 만나 조사해 봐야 돼. 염가 삼형제……’

그는 드디어 허리에 한 가닥 매듭이 있는 걸개를 만났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누구지? 어지간히 못난 사람이군.’

첫인상이 그랬다. 머리는 희끗희끗한 사람이 아직도 일결 매듭을 두르고 있다면 무능력한 자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정말 지지리도 무공에 자질이 없어 위로 올라가지 못하거나 늦은 나이에 걸개가 되어 개방에 입문한 문도이리라.

어느 쪽이나 무능력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역시 늦은 나이에 개방에 입문했지만 조만간 일결 매듭을 받기로 내정되어 있는 처지다.

그는 일결 사형을 경시하는 마음이 들었다.

“저, 사형들을 만나야 하는데 지금 어딨습니까?”

“넌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냐?”

“절… 아십니까?”

“시끄럽! 지금 혈영신마가 나타났다고 모두들 난린데. 빨리 따라와!”

일결 사형은 오리가 걷는 것처럼 뒤뚱거리는 신법으로 달려나갔다.

백의개가 보기에도 한심한 신법이었다.

‘혈영신마가 나타나? 그럼 객잔에 있던 염가 삼형제는……? 쳇! 잘못 짚었군. 그자들도 수상하기는 한 자들인데… 사형을 만나면 말해 봐야겠어.’

일결 사형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초가를 지나 마을 뒷산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곧 산 중턱에 이르렀다.

“헉헉! 아이고, 힘들다. 좀 쉬었다 가자.”

일결 사형은 산을 타기도 힘이 드는 듯 조그만 바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사형, 혈영신마가 어디 나타났는지 알려주시면… 컥!”

백의개는 가장 고통 없이 편하게 죽었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잡고 확 돌리는 힘을 감당하지 못해 목뼈가 부러졌다. 머리가 한 바퀴 원을 그리는가 싶더니 반동의 힘으로 되돌아왔다.

머리가 한 바퀴 돌았다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

백의개가 고통을 느낀 시간이다. 아주 잠깐,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니 가장 고통 없이 죽었지 않겠는가.

그를 죽인 사람은 염가 삼형제 중 셋째 염선, 종리추였다.

종리추는 백의개의 시신을 들고 몇 걸음 더 움직였다.

그곳에는 마을 사람들의 아궁이를 지펴줄 땔감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대체로 마을은 산을 등지고 형성되었으며 겨울 산에는 땔감이 쌓여 있기 마련이다.

베어 놓고 말리느라 아직 거둬들이지 않은 땔감들이다.

백의개의 시신을 땔감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지폈다.

지지직……! 화악……!

차디찬 눈 속에 묻혀 있던 나무들이지만 불기에 닿자 새 생명을 얻은 듯 활활 타올랐다.

불길이 백의개의 몸에 이르는 것을 본 종리추는 신형을 날렸다.

혈영신마는 마을을 벗어나 타박타박 걸었다.

지금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종리추도, 모진아도 없이 홀로 무림을 떠돌 때처럼 혼자 몸이다.

앞을 가로막은 사람도 없다.

종리추와 모진아가 뒤처리를 하고 있을 테니…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면 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혈영신마는 전과 같은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이나 혼자 무림을 떠돌 때나 혼자 몸인 것은 같은데 전처럼 개운하지 못했다.

그는 곧 이유를 알았다.

‘어디로……’

갈 곳이 사라졌다.

무림은 더 이상 그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가 무공을 드러내는 즉시 아귀처럼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 먹을 게다. 전처럼 기다리는 짓도 하지 않으리라. 그를 보는 무인들은 삶과 죽음을 도외시하고 달려들 것이 뻔하다.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인, 그가 갈 곳이 어디 있으랴.

‘훗훗! 갈 곳이 있지. 죽음의 골짜기…… 나는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종리추가 떠올랐다.

그도 무림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인 것은 분명하다.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갈 곳이 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어딘가로 가고 있다. 그리고 그곳은 적어도 개죽음을 당하는 곳은 아닌 듯싶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시간은 점점 죽어가고 있다.

그는 예감하고 있다. 종리추가 다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 정말 그의 말대로 일 년간은 그의 곁에 머물러야 될 것 같다는 예감.

그의 곁을 벗어나려면 지금 이 순간밖에는 없다.

혈영신마는 고민을 거듭하며 터벅터벅 걸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가 가진 시간이 모두 소모되고 말았다.

종리추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논두렁에 앉아 산불이 일어난 곳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

‘휴우!’

한숨이 새어 나왔다.

종리추를 보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는 종리추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름이 뭐… 요?”

나이가 어려 보이니 하대를 해야 마땅한데 하대를 할 수도 없다. 그가 누구에게 말하면서 지금처럼 곤혹스러운 적은 없었다.

“종리추.”

“……”

“모진아.”

“……?”

“궁금할 것 같아서. 내 노예를 자처하는 사람… 그 사람 이름은 모진아야.”

“아!”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혈영신공에 당하면 왜 혈흔이 생기지? 빨갛게.”

일반적으로 타격을 당한 부위는 먼저 죽는다. 그렇기에 시반(屍班)이 까맣게 된다. 다른 부위보다 더 시커멓게 변한다. 혈영신공에 당하면 빨갛게 변한다고 한다.

“흡인(吸引) 때문이오.”

“흡인?”

“중원 무학은 대부분 타격 시점에 경력을 발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소. 혈영신공은 반대로 타격 시점에 진기를 거둬들이지. 상대는 타격을 받는 부위에서 진기가 빨려 나가는 느낌을 받게 되오.”

종리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혈영신공의 원리를 알 것 같았다.

혈영신공은 반탄력을 이용한 무학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타격을 받으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반탄력이 형성된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은 너무 미미해서 알지 못할 뿐.

반탄력은 가해지는 충격에 비례해서 일어난다.

무인의 경우에는 그런 징후가 뚜렷하다. 진기를 조절할 수 있기에 약한 타격에, 강한 타격에 본능적으로 그에 합당한 반탄력이 형성된다.

그 순간, 혈영신공은 진기를 거둬들인다.

반탄력은 형성되었으나 마주칠 힘이 없으니……

일정 부위로 급격하게 밀려든 진기는 정체되어 굳어진다.

혈영신공에 스치기만 해도 사지가 마비되는 것 같다는 통설은 그래서 나왔으리라.

결국 혈영신공은 타격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주화입마를 유도해 내 죽이는 것과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기의 발출과 거둠이 신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하다.

시전자가 의식할 틈은 전혀 없다. 본능보다도 더 빠른 감각이 진기를 발출하고 거둬들여야 한다.

하단전을 이용한 무학이 아니다. 중단전이나 상단전을 이용한 무학이다.

금종수가 그렇다.

마음으로 운용되는 무공이기에 진기의 진퇴가 자유롭다.

종리추가 싸우면서 병자처럼 흐느적거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필요 없는 곳에서는 진기를 발출하지 않고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거기에 맞는 진기를 발출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 가지 더 알았다.

사람을 죽이는 데 꼭 발출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금종수로 혈영신공의 원리를 응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런데 왜 혈영신공이란 이름이 붙었지?”

혈영신마의 눈에 놀람이 떠올랐다.

그는 단 한 마디, 흡인이라는 말을 했을 뿐인데 종리추는 이미 원리를 깨달은 듯하지 않은가.

혈영신마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이 손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소?”

혈영신마의 손은 아기의 손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아니, 아기 손보다 더 부드러웠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손을 꼽으라면 여인의 손이 아니라, 아기의 손이 아니라 혈영신마의 손을 꼽아야 할 것이다.

“혈영신공을 펼치기 위해서는 일 단계는 손의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것이오. 손의 감각이 눈을 대신하는 거지. 귀를 대신하고 감각까지 대신해야 하오. 그러기 위해서 혈영신공이 택한 방법은 껍질을 벗겨내는 것이오.”

“……!”

“독초의 즙을 짜서 팔팔 끓인 독액(毒液)에 손을 담그면 피부가 시커멓게 타들어가지. 손이 아물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죽은 피부가 벗겨지면서 홍색의 새하얀 속살이 모습을 드러내고… 모기를 손바닥에 올려놓았을 때 날갯짓을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껍질을 벗겨내는 게 혈영신공 첫 단계요.”

“배울 만한 무공은 아니군.”

혈영신마는 피식 웃었다.

“미련하게도 난 그런 무공을 익혔소.”

“……”

“……”

두 사람은 말을 잃었다.

종리추는 금종수를 익힐 때를 생각했다.

밤마다 홍리족의 무덤을 찾아 귀신을 불러내던 일…… 정말 귀신이 튀어나오던 환상……

금종수나 혈영신공이나 정상적인 무학은 아니다.

정말 아닌가? 아니다. 둘 다 마음을 닦는 무공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무공이다. 우매한 인간이 마음을 닦기 어려워 편법을 생각해 냈을 뿐이다. 그것이 무공을 닦는 기초라 생각하면서.

혈영신공을 완성한 혈영신마는 지금도 손의 피부를 벗겨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할까? 아닐 것이다. 종리추가 귀신을 불러내는 과정이 불필요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혈영신마도 그런 과정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게다.

모두 이룬 자의 생각이다.

이루지 못한 자는 이뤘을 때의 경지를 모르기에 처음의 과정이 극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방법이 아니고는 지금의 경지에 이르지도 못했을 게다.

혈영신공이나 금종수는 사마의 무공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싸우는 무공이다.

중원 무인들은 잘못 알고 있다.

금종수나 혈영신공이 나타나면 무조건 사마의 무공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렇다. 금종수가 다행히 별다른 상흔을 나타내지 않기에 망정이지 혈영신공처럼 뚜렷한 상흔을 나타낸다면 혈영신마에 앞서 종리추가 십망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가지.”

종리추가 먼저 일어섰다.

모진아가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도망 다니는 자는 대부분 낮에는 잠자고 밤에 움직인다.

종리추는 그러지 않았다. 낮에는 움직이고 밤에는 객잔에 투숙해 편히 잠을 청했다.

먼저 객잔에서 있었던 일이 교훈이 되어 약재도 구입했다.

모든 일이 개방도의 귀에 흘러 들어간다고 생각해야 된다.

종리추는 한꺼번에 많은 양의 약재를 구입하지 않고 진귀하다는 약재만 조금씩 구입했다. 가난한 의원답게 터무니없이 비싼 약재는 군침을 삼키되 구입하지는 않았다.

안산에 이르기까지 많은 무인들과 접촉했고 질문을 받았지만 태연히 지나쳤다.

그때까지 무림은 백의개가 어떻게 되었는지, 객잔에서 말을 건넸던 무인 네 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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