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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33화


야이간은 팔부령으로 숨어들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날이 풀려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 다행이다. 자신이 원하는 생활과는 거리가 멀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병신들… 그렇게 쉽게 물러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팔부령 싸움은 구파일방이 이길 싸움이었지 물러설 싸움은 아니었다.

도대체 소림 오선사가 뭐란 말인가! 고작해야 소림에서 좀 오래 무공을 연마한 고수에 지나지 않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죽었기로서니 그렇게 물러설 수가 있단 말인가.

야이간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하후가는 살수를 살려두지 않는다.

가주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믿을 곳은 중원 명문정파로 자리를 굳건히 한 진주 언가뿐이다. 팔부령 싸움에서 별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 더욱 진주 언가에 매달려야 한다.

그것도 고작 계집 하나 건드리는 것으로 끝나 버렸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백화탄금까지 어떻게 했을 텐데, 물러서는 발걸음은 어찌 그렇게 빠르던지…

백화탄금의 마음만 사로잡았다면 하후가주나 진주 언가주의 사나운 눈초리를 접했을망정 산 속으로 숨어드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텐데.

야이간은 현정 도인이 퇴보를 명하기 전에 기미를 눈치채고 팔부령으로 들어왔다.

행동은 순간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미련이 남았다고 망설이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만다. 등하불명인 게다.

설마 팔부령으로 숨어들어 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게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 하후가 무인들은 얌전히 물러갔다.

야이간은 한동안 속이 후련했다. 목줄을 움켜잡고 있던 하후가 무인들을 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속이 다 시원했다. 하후가주의 섬뜩한 눈길을 대하지 않으니 날고기를 먹어도 소화가 잘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바위 단식 사건으로 얼굴이 알려져 버렸다. 당시에는 최선의 행동이었으나 지금은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사람이 두엇만 모여 있는 곳을 가더라도 단번에 드러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단지 살수였다는 이유만으로 철천지원수나 되는 양 이를 가는 자들이 달려올 것이다.

야이간은 백팔나한과 육십칠단승이 있는 팔부령에 둥지를 틀었다.

이곳만은 쉽게 들어올 무인이 없으리라는 판단이었고, 예측은 맞아떨어져 그림자 한 명 볼 수 없었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지. 이대로 산귀신이 되어 죽을 수는 없어.’

야이간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무인들이 모두 물러간 팔부령은 한산하기까지 했다.

살문이 대래봉에 웅크리고 있어 입산하는 사람이 없는 탓도 크다.

팔부령에서 상미현까지는 이십여 리 길이지만 야이간에게는 그리 먼 길이 아니다.

야이간은 무복 대신 평복을 입고, 병기도 휴대하지 않은 채 상미현으로 부지런히 발길을 옮겼다.

밤이 이슥해진 후에야 산을 내려왔기 때문에 부딪치는 사람도 없고, 설혹 부딪친다 해도 잠시 몸을 피할 곳은 얼마든지 있다. 무인이 아닌 다음에야 곤륜파의 신법을 잡아낼 이목은 없다.

낮이 긴 여름이고, 완전히 어둠이 깔린 다음에 하산했기 때문에 상미현에 들어섰을 때는 시간이 삼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가 목표로 할 집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상미현에는 부자가 많지만 고래등같은 장원을 소유한 사람은 단 네 명뿐이다. 그중에 부모를 잘 만나 평생 놀고먹는 사람이 두 사람이고, 한 사람은 농토를 백여 필지나 가지고 있는 지주다.

마지막 남은 사람, 그는 한 푼의 이익만 있더라도 중원 어디나 찾아간다는 장사꾼이다. 한 번 장삿길에 나설 때는 인마가 장사진을 이뤄 장관을 연출한다는 거상이다.

야이간은 주변을 둘러본 후, 높은 담을 훌쩍 타 넘었다.

장원은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들만큼 컸다. 자신도 소소한 돈으로 장원이라는 것을 꾸민 적이 있고, 재미를 많이 보았지만 이곳처럼 크지는 않았다.

집 안에 숲이 있고 연못이 있다.

전각이 즐비하여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들어왔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야이간은 이번 행동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쉬익!

한 마리 야조가 허공을 가르고 전각 위에 올라섰다.

야이간은 큰 전각, 작은 전각, 아름다운 전각, 위용스러운 전각을 모두 지나쳤다.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가 목표로 한 전각은 가장 은밀한 곳에 있다.

안으로 치달려 장원 안의 장원을 찾아 들어갔다.

내원은 생각대로 불이 꺼져 있다.

모두 곤히 잠들어 있을 시각에 찾아왔으니 불이 켜져 있다면 오히려 조금 귀찮았을 게다.

내원에도 전각은 여러 채 있지만 고를 필요가 없다.

특정한 목표를 선정하고 들어선 것이 아니다. 아무 곳이나, 누구나 상관없다.

쉬익!

내원으로 내려선 야이간은 가장 가까운 전각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장원을 거니는 듯 태연한 걸음으로.

“누구…?”

잠을 자다 이상한 기척에 깨어난 여인이 놀란 눈을 했다.

갑자기 입을 틀어막는 무지막지한 손길에 저항할 기력은 썰물처럼 사라져 버렸다.

“대래봉에서 왔다.”

여인이 꿈틀거렸다.

대래봉이라는 말에 상당히 놀란 듯했다. 어둠 속이라 보이지는 않지만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을 게다.

대래봉이라는 말은 곧 살수와 직결된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질시의 대상이 되니 청부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야이간은 양물이 꿈틀거렸다.

전각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여인의 풋풋한 살내음을 맡자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이 치밀었다.

‘아무래도 땀 좀 빼고 가야겠어.’

야이간은 한 손으로 여인의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움켜쥔 채 여인을 침상에 눕혔다.

여인은 반항할 의사를 잃은 듯 바들바들 떨면서 누웠다.

“너를 위해 말하는데… 조용히 해라. 피차 좋은 거야.”

입을 막은 손바닥이 느낀 여인의 입술은 도톰하면서도 탄력이 있다. 부릅뜬 눈은 크고 살포시 풍기는 내음은 싱그럽다.

부인은 아니다. 아마도 첩실인 듯싶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이 스르르 미끄러져 잠옷을 파고들며 가슴을 더듬었다. 도톰하면서도 탄력이 있다. 살갗의 매끄러운 감촉이 녹을 듯이 만져진다.

“아!”

여인은 사내의 목적을 안 듯 바르르 떨었지만 비명을 지르지는 못했다. 잠옷이 벗겨질 때도, 사내의 타액이 전신 곳곳을 누빌 때도, 묵중한 체구가 실려올 때도….

대래봉은 죽음의 사신이었다.

“몇째야?”

“네?”

여인은 서방에게 안긴 듯 가슴에 푹 파묻혀 있다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몇 째 첩이야?”

“둘째요. 첩은 저 밖에 없어요.”

“서방은?”

“장사 나갔어요.”

“그래서 그런가?”

“…?”

“강간당하면서 절정을 느끼는 계집은 흔치 않지.”

여인은 야이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거상이 집에 머무르는 날은 일 년 중 두어 달도 되지 않는다.

거상이 집을 비울 때는 총관과 정실부인이 장원을 꾸려 나간다. 첩들은 수나 놓고 화원이나 거니는 것이 고작이다.

여인은 양물이 삽입되는 순간부터 교성을 토해냈다.

어떻게 해야 사내가 흥분하는지를 아는 여인이다. 그러다… 정말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몸을 비틀며 죽을 듯이 흥분했다. 야이간이 사정을 한 다음에도 여인은 야이간을 놓아주지 않았다.

여인이라면 신물이 날 만큼 겪어 본 야이간도 이 여인에게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살결이 찰싹 달라붙는다. 양물은 깊은 수렁에 빠진 듯 한없이 빨려 들어간다.

여인은 수천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다는 음녀다.

음녀는 교접한 사내를 놓아주지 않는다. 음녀는 놓아주더라도 사내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음녀의 치마폭에 휘감기면 평생 벗어나지 못한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여인은 요물이다.

눈 높은 거상이 첩으로 들어앉힐 만한 여인이다.

첩이 한 명뿐이라면 거상은 여자를 밝히지 않는 사내다.

열 여자 마다할 사내가 있으랴마는 중심을 굳게 잡은 사내다. 하긴 그러니까 거상도 되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여인이 있기에 다른 여인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객지에 나가 있으니 외로움도 달래야 할 것이고 여인을 품에 안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만한 쾌감은 얻을 수 없었을 테니…

여인의 혀가 가슴을 누비는 순간 야이간은 또다시 음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양물은 벌써 반응하고 있었다.

‘이거 잘못하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하겠군.’

야이간은 정신을 수습했다.

“살문에 대한 말은 들었지?”

“그럼요. 하악!”

여인의 몸이 또 뜨거워졌다.

여인의 손과 혀가 전신을 누볐다.

“무… 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해야겠어. 여기는… 그만! 말 좀 하자.”

“말해요. 듣고 있으니까.”

여인은 멈추지 않았다.

‘미치겠군. 이건… 내가 그물을 친 거야, 그물에 걸린 거야?’

여인이 뱀처럼 찰싹 달라붙어 위로 올라왔다.

“이렇게 날… 만족시켜 준 사내는 처음이야.”

여인의 음성이 귓전에서 살랑거렸다.

결국 야이간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충동에 몸을 맡겼다.

그때부터 여인과 야이간의 밀월 관계는 시작되었다.

거상은 인편으로, 혹은 서신으로 꾸준히 연락을 취해왔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장원에 전해지는 소식은 상당히 정확했다.

거상은 많은 상인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들이 급변하는 중원 정세를 꾸준히 보고해 왔고, 그런 정보는 장사할 품목을 결정하는 데 중대한 자료가 되었다.

거상에게는 이윤을 남기는 정보다.

야이간에게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여인은 마음먹지 않아서 그렇지 마음만 먹는다면 장원으로 굴러드는 정보는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야이간이 상인의 장원을 택했고, 내원으로 잠입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대래봉 살문을 팔면 어느 여인인들 입을 열지 않을까. 여인이 아니라 총관, 혹은 거상과 직접 대면하더라도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 죽기 싫은 사람은 없을 테니.

야이간은 사오 일에 한 번씩 장원에 들렀고, 여인은 중원 정세를 알려주었다. 또한 날이 샐 때까지 꼬박 밤을 밝히며 욕정을 불태웠다.

세상에는 궁합이라는 것이 있다.

궁합을 보지는 않았지만 만약 본다면 야이간과 여인 취국은 찰떡궁합으로 나오리라.

‘살수들을 죽이고 있어!’

야이간의 몸은 얼어붙었다.

여인의 혀가 살을 녹일 듯 전신을 누비고 있지만 오늘만은 양기가 뻗치지 않았다.

‘살수분파 모두 무너지고 있어. 사실이 맞는다면 살수들을 죽이는 곳은 두 곳이야. 한 곳이 아냐. 하후가주도 아냐. 하후가주도 강하지만 그렇게 무너뜨리지는 못해.’

“오늘 왜 그래? 영 시들하네?”

“가만… 조금 있다가.”

“죽었다는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돌대가리.’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일을 생각해보지도 않고 묻는다.

여인은 생각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 것 같다.

‘조만간 이곳에도 피바람이 몰아칠 거야. 그만한 파괴력을 지닌 자들이라면 살문을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아니, 다른 곳은 다 내버려 두더라도 살문만은 쳐 없앨 거야. 여기 있으면 위험해.’

야이간은 하후가주가 있을 때처럼 또다시 위험을 감지했다.

‘벗어나야 하는데, 어떻게 어디로…’

문득 야이간은 여인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 여자! 그래, 지금은 네가 살길이다.’

“우리 같이 여길 떠날래?”

“왜?”

“여길 떠나서 우리끼리 사는 거야. 자식도 낳고…”

“싫어.”

“뭐?”

“이대로가 어때서 그래? 지금 좋잖아. 괜히 좋은 관계 깨지 마.”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야이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넌 남의 첩실이 좋아?”

“첩실이면 어때? 나만큼 호강하는 여자도 드물어. 어린애같이 굴지 말고, 우리 이렇게 즐기기나 해. 도망가자느니 어쩌자느니 말할 거면 오지도 마. 나도 세상 돌아가는 것 안 알아내 줄 거야.”

‘이건 나보다 한 수 더 뜨는 계집아냐?’

야이간은 기가 막혔지만 그것보다 가슴 밑바닥에서 스멀거리는 모멸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야이간은 여인을 밀치고 일어섰다.

‘떠나야 해. 팔부령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

야이간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보물이 그려졌다.

거상과 천 노인이다.

상미현 같은 조그만 도읍에 천 노인과 버금가는 재력가가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상미현은 몽고로 가는 길목이다. 서역으로 갈 수도 있다.

무심히 들른 상미현이 뜻밖의 요지다.

상미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태원부 양곡성이 지척에 있지만 한적함을 좋아하는 거상의 성격이 상미현에 터전을 마련하게 했다.

상미현과 양곡성은 마차로 반 시진 거리이니 크게 불편한 점도 없었으리라.

머릿속에서 계획이 정리되어 갔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거야. 완전히 다른 사람.’

야이간은 하산 준비를 했다.

지겨운 팔부령도 마지막이다.

챙길 것도 없다. 부러뜨린 보검 대신 동전 열닷 냥을 주고 산 청정장검이 소지하고 갈 유일한 물건이다.

야이간은 대래봉을 쳐다봤다.

뾰족한 산봉이 어둠 속에 묻혀 씁쓸함을 자아냈다.

‘넌 똑똑한 놈이지만 살수를 고집하는 게 탈이야. 준걸은 시세를 안다고 했는데 넌 준걸은커녕 미련하기 짝이 없는 놈이야. 잘 죽어라.’

야이간은 경공을 전개했다.

쉬익! 쐐액…!

“크윽!”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평화로운 밤을 즐기던 장원에 느닷없이 피바람이 불었다.

살수는 정확했다.

비명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튀어나오더라도 옆에 잠든 사람조차 모를 정도가 되게끔 목젖만 골라 쳤다.

잠든 하인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임을 당했다.

간혹 깨어나는 자도 있었지만 죽음을 조금 더 앞당겼을 뿐이다.

야이간은 차분차분 도륙해 나갔다.

하인만 이백여 명에 이른다는 송가장은 죽음의 괴기스러움에 파묻혔다.

야이간은 총관의 전각으로 들어섰다.

침상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총관의 모습이 보였다.

야이간은 발걸음을 죽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소리가 나는 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총관이 부스스 눈을 뜨더니 머리맡에 놓은 장검을 낚아챘다.

총관은 무인이다. 거상이 사정사정해서 총관을 맡았다는 풍문이 돌 만큼 무예가 높다.

취국 말로는 좌우로 움직이면 공격하는 모습이 번개 같다고 했으니 환검문의 환음검법을 익힌 것 같은데.

“웬 놈이냐!”

검을 뽑아 든 총관은 당당했다.

야이간은 걷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야심한 밤에 월장한 놈이니 의도가 불순할 터!”

“거참, 되게 말 많은 놈이네. 목이 필요하니 목이나 줘.”

쉬이익…!

야이간은 시간을 오래 끄는 것이 싫었다.

총관과는 주고받을 말도 없다.

“고, 곤륜!”

총관은 야이간의 신법을 알아봤다.

곤륜파의 신법은 중원의 신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중원의 신법보다 간결하면서도 화려하다. 허식을 배제한 대신 몸의 굴절을 최대한 이용했기 때문이다.

쐐액…!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뻗었다.

총관은 좌측으로 움직였다.

‘역시 환음검법!’

야이간은 좌측으로 따라가는 듯 검을 휘둘렀다.

총관이 허리를 낮게 구부리며 우측으로 방향을 꺾었다. 일견 검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 같지만 검을 피해 우측으로 빠져나가는 신법이다. 그는 빠져나감과 동시에 검을 찔렀을 게다.

환음검법은 좋은 무공이다. 산서성에서 환검문은 꽤 널리 알려져 있고, 총관의 움직임 정도면 이름도 날렸을 게다.

거상이 소문처럼 애원해서 데려올 정도는 아니지만 총관에 앉힐 만한 자다.

아쉽게도 환음검법에는 단점이 있다.

초식이 너무 많이 알려져 있다. 고수와의 싸움에서 알려진 초식을 사용하는 것처럼 우둔한 것은 없다. 경이로운 속도나 태산도 무너뜨릴 만한 파력이 깃들었다면 몰라도.

쉬이익!

어김없이 찔러왔다.

야이간은 오른발로 검을 든 손목을 쳐들었다. 동시에 좌측으로 흘러가던 검의 방향이 꺾이더니 총관의 등을 후려쳤다.

“크윽!”

총관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척추를 베였는지라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손가락 하나 꼼지락거리지 못한다. 다리는 부들부들 경련만 일으킬 뿐 일어설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이제 총관은 가만 내버려 두어도 목 위만 움직일 수 있는 불구자가 되었다.

“네 처지는 너도 알 거야. 머리만 움직일 수 있지. 한데 말이야, 난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필요해.”

쉬익!

청강장검이 허공을 갈랐다.

총관의 머리가 뚝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야이간은 총관의 머리는 쳐다보지도 않고 죽은 육신이 붙잡고 있는 검을 바라봤다.

“무공도 약한 놈이 검은 좋은 걸 가지고 있군.”

야이간은 검을 빼서 들어 보았다.

무게도 적당하고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든다. 날이 곤두서 있으며 푸른빛을 뿜어낸다.

거상이 힘겹게 구해줬고, 총관이 정성을 들여 손질했으리라.

“바보 같은 놈… 이런 검을 들고 그 정도밖에 무공을 펼치지 못하다니. 검아, 네가 불쌍하구나. 이제 새 주인을 만났으니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라. 하하하!”

검집까지 주워 허리에 찔러 넣었다. 그런 다음에야 방바닥을 구르고 있는 머리를 집어 들었다.

대래봉에서 온 살문 살수.

살이 후덕하게 찐 중년 부인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은자며, 금이며, 패물까지 가진 것을 모두 꺼내 놓았다.

잘린 총관의 머리도 무섭지만 직접 보고 있는 앞에서 시녀들을 도륙하는 모습은 인간 같지 않았다. 살아서 걸어 다니는 염라대왕 같았다.

벌벌 떨기는 취국도 마찬가지다.

어젯밤만 해도 같이 육욕을 불태웠지만 손아귀에 쥐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살수라는 것을 새삼 인식해야만 했다.

“모자라. 겨우 이것 때문에 이백여 명이나 죽인 줄 알아? 너! 뭘 알고 있는 것 있어?!”

“모, 모르는데요.”

시녀가 사시나무 떨 듯이 떨었다.

“모르면 할 수 없지.”

야이간이 걸어갔다.

“드, 드릴게요. 더 있어요, 더!”

중년 부인이 다급히 외쳤지만 야이간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아악!”

시녀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가슴을 일직선으로 그어 내린 검은 심장을 살짝 비켜갔다.

시녀는 죽는다. 하지만 쉽게 죽지 못한다. 육신에서 피가 흘러나와 방바닥을 흠씬 적신 후에야 죽는다. 그것이 여인들 앞에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다.

중년 부인은 부들부들 떨며 침상을 밀었다.

아직 죽지 않은 시녀가 둘이나 있지만 야이간의 눈치만 살필 뿐 도울 생각도 못하고 있다.

중년 부인이 힘들게 침상을 밀치고, 바닥을 드러내자 하얀 은광이 눈부시게 새어 나왔다.

‘족히 오만 냥은 되겠군. 좋아. 이 정도면…’

야이간의 검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시녀 두 명이 맥없이 쓰러지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던 중년 부인도 눈을 부릅뜬 채 널브러졌다.

“넌 어떻게 죽여줄까?”

“사, 살려…”

“살려달라?”

“네, 네, 네!”

“같이 갈래?”

“네, 네!”

야이간은 속으로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싫다고 할 여자가 아니지만 싫다고 했다면 곤란할 뻔했다. 이 여자가 없으면 무사히 빠져나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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