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42화
“용두방주가 소고에게 암살당했다!”
구파일방의 거두인 개방 용두방주가 묵월광 살수에게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날개를 달고 퍼져 나갔다.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쉴 새 없이 번져 갔다. 용두방주가 묵월광 살수에게 암살되었다는 소문은 큰 충격으로 무림을 휘저었다. 무림인 아니더라도 용두방주의 죽음은 충격인데 하물며 무림인들이야.
타협의 여지는 사라졌다. 구대문파는 살수들을 원수처럼 미워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살육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수 문파에 청부를 하고 싶은 사람들도 숨을 죽였다. 아니, 청부를 하려고 해도 청부를 받는 살수 문파가 없었다. 죽음은 더욱 늘어갔다. 새로운 죽음도 과거에 죽은 살수들처럼 독특한 사흔을 남겼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어 납색을 띤 시신들은 개방도에게 맞아 죽은 자들이다. 허리가 잘린 자들은 시비의 고수들에게 도륙당한 거다. 중원은 죽음으로 넘쳤다.
살천문주는 인간 장막으로 겹겹이 둘러싸였다. 한 걸음만 떼어놓아도 감시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현재 섬서성에는 광부와 좌리살검이 들어와 있지만 그들과 연락을 취한다는 건 자살 행위였다. 청부는 당연히 중단되었다. 하기는 중원 전역에서 청부가 중단되었으니 특이할 노릇도 아니다. 외장 문도도 급물살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다. 정보가 살문에 흘러 들어가는 줄 아는 사람들은 그대로 붙어 있었지만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면서 돈을 받고 아는 것을 중얼거렸던 사람들은 상당수가 떨어졌다.
“주둥아리 잘못 놀리면 죽어.”
개방 걸개들이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한마디 한 효과는 무척 컸다. 특히 개방 용두방주가 묵월광의 소고라는 여인에게 살해당한 여파로 흉흉해진 인심도 외장 문도들이 떨어져 나가는 데 큰 몫을 했다. 살수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탕! 탕탕! 탕…!
살천문주는 예전처럼 장인이 되어 쇠를 두들겼다. 신분을 은폐하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직업을 갖는 게 제일이다. 그렇다고 숨어 지내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벌건 대낮에 떳떳이 돌아다녔다. 죽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살수를 펼칠 수 있는 자들이기에 숨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살문 살수들 중에는 그가 가장 많이 드러나 있다. 살천문주 다음으로는 역시 등천조가 위험하지만 그는 언제나 하오문과 개방을 염두에 두고 있으니 충분히 조심할 게다
탕탕탕! 탕! 따그르르르르…!
살천문주는 웃통까지 벗어젖히고 굵은 땀방울을 흘려내며 망치질에 여념이 없었다.
“망치질에 살기가 스며 있군.”
살천문주는 멈칫했으나 들고 있던 망치를 그대로 내려쳤다.
“하기는 겉으로 드러내느니 망치질 속에라도 숨긴 게 낫지. 지금 그거 뭐 만드는 거요?”
“호미.”
“호미라… 내가 보기에는 낫 같은데… 솜씨가 영 형편없는 분이구려. 그 솜씨로 용케 밥을 빌어먹었소. 하하! 쇠를 다룬 지는 몇 년이나 되셨소?”
낯선 사내는 계속 치근거렸다.
“그렇게 잘 아시면 한번 해보시우?”
살천문주는 낯선 자에게 망치를 내밀었다. 낯선 자는 서슴없이 망치를 잡았다.
탕! 탕탕!
내려치는 소리가 경쾌하다. 묵중하게 다듬을 때는 다듬고 톡톡 튀길 때는 튀긴다.
‘대단한 솜씨야! 이자는 누구인가…?
살천문주는 느닷없이 나타난 자를 예의주시했다. 능숙한 솜씨도 보통 능숙한 게 아니다. 어려서부터 풀무질부터 시작한 듯 온갖 쇠를 다뤄본 솜씨가 몸에 배어 있다.
‘허!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인가?’
낯선 자의 방문은 죽음을 의미한다.
‘마지막 싸움은…’
살천문주는 검을 꺼내 휴대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적은 자신의 목숨만을 베어낼 뿐이다. 하지만 검을 찬다면 광부나 좌리살검도 위험해진다. 고문에 대해서는 이가 갈릴 만큼 잘 안다. 고문에 대해서 장담하는 자는… 미련한 자다.
‘우두머리가 되었던 자는 다시 검을 들기가 어렵지. 옛날의 성세를 이룩할 만한 투지가 사라져 버리니까. 특히 남의 밑에 기어들어가 수하 노릇을 하기는 무척 어렵지. 종리추… 내가 네 밑에 있었던 것은 사무령을 보기 위해서다. 너를 위해서 죽어줄 테니, 부디 사무령이 되어라.’
낯선 자가 발갛게 달군 쇠를 기름 속에 넣었다.
치익!
쇠가 금방 식어버리면서 하얀 연기를 뿜어냈다. 낯선 자가 말했다.
“사람이 필요하지 않소?”
“…?”
“혼자서는 별로 돈벌이도 못할 것 같은데, 어떻소? 내가 일해주면 수입이 훨씬 나아질 텐데.”
‘누군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살문 외장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하지만 살문은 여전히 움직였다 예전처럼 활발하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암중으로 숨어서 조금 기어 다니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정보는 놓치지 않고 주워왔다. 그중에 하나가 살천문주에게 전달되었다.
“쇠 가져왔소. 짜게 굴지 말고 좀 넉넉하게 셈해주쇼.”
쇠붙이 조각을 모아온 사내가 망태기를 우르르 쏟아냈다. 크고 작은 쇠붙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망치도 있고, 검 조각도 있으며 못도 있다. 수명을 다한 쇠들은 모두 모였다. 살천문주는 무게를 달았다.
“여섯 냥일세.”
“제길! 요즘은 닭 한 마리도 두 냥이오. 좀 더 주쇼.”
“없어. 우리도 일거리가 없어서 죽을 지경이야.”
사내가 사라진 후 살천문주는 쇠붙이를 종류별로 분류했다. 쇠도 성질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물건이 다르다. 살천문주는 쇳조각 몇 개를 이었고, 그가 원하던 글자를 찾아냈다. 개방, 사결, 호법, 수지.
‘사결… 수지호법이라… 꽤 괜찮은 놈이군.’
살천문주는 한쪽에서 열심히 쇠를 녹이고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그의 등이 무척 넓어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런 일은 그저 툭 터놓고 이야기하는 게 편할 때도 있다.
“수지호법으로 알고 있소. 개방이 왜 여기…”
“쉿!”
수지호법은 뜻밖의 행동을 했다. 살천문주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수지호법이 수화를 시작했다. 살천문주는 수화를 모르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해 봤다.
‘용두방주가 당했다? 정보라고 할 것도 없는 사실…’
수지호법이 무슨 말을 하던 살천문주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천외천과 살문의 싸움을 최대한 지연시켜 주겠다? 그러면 이쪽이야 당연히 좋지. 그런데 무슨 수로… 후계가 나서겠다? 그렇군, 구파일방에 사건이 벌어졌군.’
좀 더 자세히 알아볼 사안이다. 어쨌든 개방이 살문의 손을 잡아온 것은 큰 행운이다. 살천문주는 단숨에 전서구를 띄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수지호법이 안전한 장소에 들어와서도 수화까지 할 정도라면 사방에 눈이 있다는 것과 다름없다.
살천문주는 수지호법의 손을 마주 잡았다. 수지호법은 냉랭한 빛이다. 어쩔 수 없이 살수들과 연수는 한다마는 언젠가는 칼부림할 사이란 걸 잊지 말라는 투로 비쳤다.
수지호법은 살문의 방패막이다. 그는 대장간에 머물며 살천문주의 행동을 개방에 보고한다. 형식적으로는 틀림없이 개방에서 살문에 잠입시킨 간자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하는 일이라는 것은 살문이 팔부령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이다. 소림승들이 팔부령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어 개미 한 마리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천외천이 살문을 공격할 구실을 빼앗는 선제공격이다. 무림군웅은 소림사가 봉문에 들어가며 남긴 말을 기억하고 있다. 소림사는 살문에 일정한 영역을 주었고, 그곳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다. 벗어나면 소림승에게 죽는다고. 즉, 다시 말해 일정한 영역 안에만 있으면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두 사람은 이내 서로의 연락 수법을 알아챘다. 쇠 줍는 사내가 우르르 망태기를 쏟아내고 간 다음에는 수지호법의 눈과 귀가 쫑긋 세워졌다. 수지호법은 살천문주처럼 은밀하지 않았다. 그는 살천문주만 속이면 된다. 겉으로 두 사람은 각기 자신의 정보를 비밀리에 유지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면 서로의 정보를 공유했다.
수지호법은 살문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살문의 조직이며 외장이 유지되는 형태 등등. 반면에 살천문주도 개방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용두방주의 죽음을 놓고 개방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소문을 믿고 묵월광의 소고를 징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해 있는 반면 용두방주의 죽음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용두방주가 죽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방주를 추대해야 하지만 후계가 한사코 사양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후계가 사양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방주만이 익히는 타구봉법을 전수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개방은 임시로 제일장로인 흑봉광괴가 유지해 나갔다. 후계는 폐관 수련에 들어갔고, 몇몇 장로가 호법을 섰다.
수지호법은 이런 개방의 속사정까지도 살천문주에게 전해주었다. 비밀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한 듯. 그 외에도 많은 정보를 주었다. 천외천은 무림군웅들 중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천외천 외에 구대문파가 만든 비객도 있다. 등등.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지만 단 하나… 천외천 천객에게 용두방주가 살해되었다는 놀라운 사실만은 몰랐다. 수지호법이 말해 주기 전까지는.
살천문주는 종리추의 입이다. 수지호법은 후계의 입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리추와 후계의 뜻을 주고받았다. 수지호법과 살천문주의 결론은 하나로 집약되었다. 천외천이 살문을 노리고 있다. 중원의 모든 살수들이 숨죽인 마당에 아직도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는 곳은 살문뿐이다. 이제 중원 천지에 사마의 무리는 살문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중원무림은 쑥대밭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군웅들은 환호했다.
살천문주가 수화를 전개했다.
‘후계가 이런 정보를 살문에 주는 저의가 무엇이오?’
수지호법이 수화로 대답했다.
‘청부’
‘뭐요?’
‘청부자는 모두 여섯 명. 그중 제일 첫 번째.. 개방 일장로 흑봉광괴.’
‘뭐, 뭐라고!’
‘…’
‘다시 한번 말해 주시오.’
수지호법은 천천히 수화를 펼쳤다.
‘개방 일장로 흑봉광괴.’
‘후계의 뜻이오?’
수지호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문주님께 여쭤봐야겠구려. 청부금은 얼마를 생각하시오?’
청부가 이루어지고 있다.
‘살문의 목숨.’
‘살문의 목숨? 여섯 명 전부 청부를 완수했을 때 말이오, 아니면 흑봉광괴를 죽였을 때…?’
‘여섯 명 모두.’
‘알겠소. 일단 문주님께 여쭤봐야겠소.’
나흘 후, 종리추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번 쇠는 검 조각이 많으니까 틀림없이 상질이오. 깎을 생각 말고 열 냥 주시고.”
“여섯 냥.”
“쳇! 아홉 냥.”
“여섯 냥.”
“정말 능구렁이야. 좋소. 일곱 냥.”
살천문주는 일곱 냥을 건네주었다. 쇳조각은 정말 그의 말대로 검편이라 쓸 만했다. 이것저것 뒤적이던 살천문주의 눈에 검편 한 조각에 음각된 글씨가 보였다.
불
“엇!”
살천문주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놀라도 너무 깜짝 놀랐다. 조건이 다소 건방지기는 해도 살문이 존속하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다. 자신 같았으면… 후계가 끼어들었다는 증거를 확보해 놓으리라. 문서도 좋고, 산물도 좋고. 상대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확보해 놓으면 살행에 나선다. 흑봉광괴가 고수이지만 암살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특히 살문같이 고수가 즐비한 곳이라면 백이면 백 암살할 수 있다. 그때부터 후계와 살문은 같은 길을 가게 된다. 후계는 살문을 배반할 수 없고, 살문은 후계가 있는 한 든든한 방조자를 얻게 된다.
더없이 좋은 기회…
종리추는 거절해 왔다. 수지호법이 이마에 흐른 땀을 쓱 문지르며 다가왔다. 살천문주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었다.
“거절, 거절, 거절… 거절하는 사람도 있군.”
옆에 사람이 있어도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할 소리다. 수지호법의 눈에도 놀람이 스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