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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43화


야이간과 취국은 세월 가는 줄 몰랐다. 상미현에서 하남성까지 오는 동안 꿀보다도 달콤하고 진한 나날을 보냈다. 애욕은 세상 무엇보다도 달콤했다.

‘이년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제명에 못 죽지’

야이간은 다리마저 후들거렸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취국을 보게 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다시 팽팽한 활력이 솟구치곤 한다. 그만큼 했으면 정력이란 것도 남아날 리 없으니, 원정까지 박박 쥐어짠 것이 틀림없다.

취국도 그렇다. 상미현에서 이백여 명의 하인들이 죽었다. 총관도 죽었고, 남편으로 모시던 거상의 정실부인도 죽었다. 장원에 있던 모든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었다. 취국은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황홀한 밤에 있었다.

“갈수록 시들해지는 것 알아?”

“긴장해서 그래.”

“어멋! 웬일일까? 대래봉 살수가 긴장을 다 하고?”

“그 입 다물지 못해!”

“틀린 말도 아니잖아.”

“함부로 나불대지 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치잇!”

취국이 침상 대용으로 사용해 온 우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거상이 애용하는 화려한 사두마차는 야이간을 무림인의 시선으로부터 막아주었다. 혹, 궁금증이 치밀어 마차로 다가서던 사람들도 마차 가까이 이르러서는 황급히 발길을 돌려 버렸다. 마차 안에서 들리는 끈끈한 열락의 소리는 차마 듣기 민망했다. 무림인은 거상들의 이런 불유쾌한 쾌락에 동참하지 않는다. 이런 거상들은 주위에 호위 무인들을 데리고 다니는 관계로 파락호들도 찝쩍거리지 않는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팔자가 늘어진 부류일 게다. 야이간은 그 점을 이용했고, 하남까지 들어오는 동안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취국이 상상 밖으로 진 빼먹는 것을 제외하면.

하남성에 들어와서는 마차를 바꿨다. 거상의 마차를 계속 타고 다니다 살인자를 뒤쫓는 거상 일당과 만날 수도 있다. 그것은 두렵지 않다. 걸림돌을 족족 모두 죽여 버리면 되니까. 하남성의 마차는 다른 곳과 조금 다르다. 문짝이 반달형으로 둥그스름하게 휘어졌고, 소자죽으로 만든 의자도 하남성에서는 양가죽을 쓴다. 여러 부분에서 조금씩 다르지만 야이간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마차를 사 와. 사두마차. 아주 호화스러운 것으로.”

“왜? 이것도 좋은데?”

“시키는 대로 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우린 평생 떵떵거리고 살 수 있어. 알겠어, 예쁜아?”

취국이 마차를 사 왔다. 돈은 걱정하지 않는다. 평생 쓸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당장 쓸 돈은 넘쳐난다. 야이간은 마차를 꼼꼼히 점검했다. 먼저 마차를 부숴 버렸고 말들도 죽여 버렸다.

“마차 한 대 더 사 와”

“왜애!”

“사 오라면 사 와.”

“나보고 마차 사 오라고 해놓고 살짝 도망치려고 그러지!”

야이간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돌머리도 이런 돌머리가 있는가. 떼어놓을 요량이었으면 한적한 곳에서 콱 죽여 버리면 그만인데.

“휴우! 아냐, 난 도망 못 가. 가라고 등 떠밀어도 가고 싶지 않아. 아직도 모르겠어?”

취국이 배시시 웃었다. 야이간은 의자 좌석에 앉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나가던 길손이 물었다.

“마차는 두 대인데 왜 혼자 끙끙거리고 있소?”

“그것 참… 용령까지 급히 가야 되는데 마부가 그만 급사하고 말았지 뭡니까? 실례지만 어디까지 가십니까?”

“에이, 여보쇼. 난 마차 몰 줄 모르오.”

“그냥 고삐만 잡고 가면 됩니다. 석 냥 드리죠.”

길손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용령에 가면 마방이 있을 겁니다. 급히 가셔야 합니다.”

야이간은 석 냥을 꺼내 길손에게 주었다.

“당신은 같이 안 가오?”

“전 급히 사랑으로 가야 돼서요. 용령으로 갈 것 같았으면 제가 두 대를 다 몰고 가죠.”

길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손이 마차를 끌고 떠난 후, 야이간은 복문으로 방향을 잡았다.

“사랑으로 간다며?”

“하는 말이지”

“용령에는 왜 괜히 보내는 거야?”

야이간은 취국을 보았다. 피곤한 여자다. 몸은 매력적이지만 생각할 줄은 모른다. 이런 여자는 내원 깊숙한 곳에 들여앉혀 놓고 생각날 때만 찾아가면 딱 좋을 것 같다.

“네 서방이 지금쯤 하남에 들었을 거야.”

“뭐! 누가 그래?”

“용령과 대래봉 살수… 아니지, 마차를 천길에서 빌렸으니 천길과 대래봉 살수지. 연결되지 않는 고리… 아마 추적은 거기서 끝날 거야. 추적이란 연결되는 고리가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거든.”

“너무 멋져. 천재인 것 같아.”

취국의 손이 하반신을 만져 왔다.

‘복문으로 해서 양성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러면 이 계집은 필요 없어지지. 헉! 미치겠네.’

야이간의 의지는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하남성 양성에는 야이간이 평생 잊지 못할 이름이 있다. 종리추, 그가 양성에서 첫 살인을 했다. 그가 이곳에서 혈배를 들었다. 또 한 사람… 천 노인이 있다. 소고의 자금줄, 살혼부의 모든 것은 천 노인이 양성에 터를 내리고 있다. 천 노인의 재산은 상미현 거상 정도는 콧방귀만으로도 날려 버릴 수 있다. 상미현 거상에게서 당장 급히 쓸 용채를 얻었다면 천 노인에게서는 평생 안락함을 제공해 줄 근원을 얻어야 한다.

야이간은 양성에 머물며 천 노인의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천 노인은 여전히 염왕채(고리대금)로 돈을 벌고 있다. 세월이 수상해서인지 전처럼 무지막지하게는 하지 않아도 사납다는 평은 들을 만큼 돈을 뜯어낸다. 용성 사람 중에 천 노인만큼 원한을 많이 받은 사람도 드물 게다. 그런 사람이 아직 청부 대상자가 아니란 게 우습기도 하지만. 천 노인은 사방 한 평이 안 되는 조그만 곳에서 돈을 굴린다. 하지만 천 노인과 연관을 맺고 있는 상인의 수는 하늘에 떠 있는 별보다도 많다.

천 노인은 거물이다. 그래서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 천 노인이 소림사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으며, 하오문 아니면 살수 문파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장군과 같은 나랏사람과 인연을 맺고 있을 수도 있다. 거목이 펼쳐 놓은 인맥은 무시하지 못한다. 죽이고자 달려들면 한 줌 거리도 안 되지만, 보이지 않는 넓고 무거운 그물막이 그에게 접근하는 것을 불허한다. 야이간은 알고 있다. 그가 살혼부의 자금을 관리하고 있고, 소고에게 막대한 은자를 줬으며, 자신이 장원을 짓고 뭇 여자들을 납치해 즐기게끔 해주었다. 그때는 정말 좋았다. 권력의 속성에 흠뻑 빠져들었다.

야이간은 천 노인에게 다가섰다. 천 노인이 고개를 들어 야이간을 쳐다봤다.

“네… 놈이군.”

야이간은 씩 웃었다. 천 노인도 음충맞게 웃었다. 야이간은 바람처럼 날며 보검을 휘둘렀다. 상미현 총관이 지니고 있던 검은 정혈검이라는 보검이다. 시퍼렇게 날이 선 푸른 보검이지만 피를 머금게 되면 검신에 물방울 문양이 생긴다. 붉은 선혈로 물들여진 물방울 무늬. 야이간의 검에는 물방울 무늬가 생겼다.

천 노인을 지키는 호위 무인들은 말이 좋아 무인이지 한낱 파락호에 지나지 않는다. 서민들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는 일은 무공이 높고 점잖은 사람보다는 무공이 낮더라도 험악한 사람이 훨씬 낫다. 야이간에게 덤벼든 자들은 바로 그런 자들이다. 두 명이 피를 쏟으며 쓰러지자 다른 자들은 감히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쓸개도 없는 놈이 살심만 키웠군.”

천 노인은 야이간을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음충맞은 미소는 야이간을 인간으로 보지도 않았다.

“천 노인, 노인이 세파에서 견뎌내는 힘은 명성이야. 그것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하지만 난 알잖아? 그 명성이란 것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좋아좋아! 다 요구하지는 않겠어. 소고 몫의 절반만 줘. 나도 그 정도는 받을 권리가 있으니까.”

“소천나찰이 불쌍하군.”

“뭐?”

“네놈을 아들같이 생각한 소천나찰이…. 큭!”

천 노인은 비명을 내질렀다. 야이간이 다가와 팔을 꺾어버렸다.

“나온다고 다 말이 아냐. 가려서 할 줄 알아야지. 자, 자… 그건 그렇고… 받을 것부터 받아야겠는데, 주겠냐?”

천 노인을 막아주는 것은 몇몇 파락호들의 무공이 아니다. 천 노인쯤 되는 거물에게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배경이 천 노인을 당당하게 만든다. 야이간은 살심을 키웠다. 천 노인을 데리고 다니면서 천 노인과 관계있는 사람은 모두 죽일 심산이었다. 누가 천 노인의 수족인지 모르니, 누가 천 노인과 같이 일하는 사람인지 모르니. 양성이 피바다로 변할 게다. 상인들 중 절반쯤 죽은 후에나 입을 열지도 모른다. 괜찮다. 묵월광은 잠적했고, 세상은 살수들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다. 세상으로부터 미움받는 천 노인을 어떻게 했다고 해서 그를 원망할 사람은 없다.

천 노인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이놈아, 넌 어른도 없냐? 이 팔부터 놔라. 늙은이 뼈다귀는 힘이 없어서 살짝만 비틀어도 부러진단 말야, 이놈아!”

“후후후! 속일 생각은 하지 마. 불행히도 난 이런 쪽으로는 훤하단 말야.”

천 노인을 소고에게서 빼돌리려면 상재에 밝아야 한다. 천 노인이 상인 한 명을 말하면 그의 뒤에 있을 수십 명의 중간 상인들까지 생각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파락호가 힘이 있다고 몰아붙여도 결국 빈손밖에 남지 않는 것이 그런 점을 몰랐기 때문이다. 세상에 돈을 탐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천 노인을 건드리지 못했던 것이 바로 알알이 이어진 인맥을 찾아내지 못해서다. 소고도 하지 못한다. 소고는 묵월광을 살수 집단으로만 키웠지 천 노인이 어떤 식으로 돈을 운용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야이간은 천 노인의 인맥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 묵월광에 들어와서 유일하게 한 일이라고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천 노인을 서슴없이 건드릴 수 있다. 천 노인의 재산은 그에게는 나무에 걸린 눈먼 열매다. 따는 사람이 임자인 게다. 자신만만? 얼마든지 자신만만하다.

천 노인은 순순히 장부를 넘겨줬다. 살혼부의 자금을 관리하는 상인들이 누군지, 자금이 어느 경로를 통해 어떻게 유통되는지… 천 노인은 이상하리만치 숨기지 않았다.

‘이거 뭐 하는 수작이야? 함정인가?’

야이간은 오히려 불안해졌다. 차라리 반항이라도 하면 의심하지 않았을 텐데.

백상이 모였다. 살혼부의 자금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며 천 노인의 명령을 듣는 상인들이다.

‘이 늙은이가 정말 무슨 꿍꿍이지?’

자신의 재물을 빼앗겠다고 덤비는 도둑에게 겉에 드러난 재산은 물론 숨겨둔 재산까지 속속들이 들어 바치는 사람도 있던가? 야이간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재산이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목숨은 한 번 잃으면 끝이다. 천 노인의 일거수일투족은 야이간의 눈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모두 잘 모였네. 이렇게 모인 게 얼마 만이지?”

“십 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렇지 살혼부가 십망을 받기 직전이었으니까… 십 년이 훌쩍 넘었군요.”

백 명의 상인들은 흉금을 털어놓고 편히 이야기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이 논의하지 못할 일은 없다. 입에 담지 말아야 할 것도 없다. 술주정도 괜찮고, 천 노인을 욕하는 소리도 괜찮다. 모두 허용된 자리다.

“주목하게. 참으로 오래되었네만… 불행히도 이제 살혼부는 사라졌네.”

“…”

시끌시끌하던 좌중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술잔을 들어 올렸는데 그 소리가 사발 깨지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살혼부가 사라졌으니… 나도 존재할 생각이 사라졌네.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니… 밀려나야지. 그래서 여기 이 소협과 함께 왔네.”

야이간은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자신이 천 노인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천 노인이 자신을 찾은 것 같다. 천 노인을 협박해서 그가 관리하는 모든 상권을 넘겨달라고 했는데. 실은 천 노인이 미리 주려고 준비해 놓은 것 같다. 일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이거 도깨비에게 홀린 것도 아니고,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지?’

야이간은 천 노인의 안내에 따라 일어섰다. 백 명의 상인들에게 인사할 차례다. 그는 순간적으로 많은 이름을 떠올렸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여기서 나는 새사람이 되는 거야. 이 막강한 상권을 바탕으로…’

야이간의 꿈은 순식간에 깨졌다. 천 노인이 입을 열어 야이간을 소개했다.

“이 소협의 이름은 현무길이오. 곤륜파에서 수학했고, 이번 팔부령 싸움에서도 명성이 단연 돋보인 기협이오.”

‘이런!’

야이간은 현무길이라는 이름이 싫었다. 그 이름은 살수 문파와 연관 지어진다. 살수들이라면 어린이조차 베어넘기는 천외천 무인들이 뇌리에 새겨놓은 이름이기도 하다.

‘하기는… 이들은 살혼부의 손과 발. 내가 누군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거야. 현무길이라는 이름을 떠들고 다닐 사람들도 아니고, 휴우! 십년감수했군. 망할 늙은이 같으니라고!’

야이간은 가벼운 포권지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천 노인이 말했다.

“앞으로 이 소협이 내 대신 여러분을 이끌 것이오. 어떤 조건도 없소. 소고가 재기한다 해도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명분도 없소. 살혼부가 사라졌으니.. 이제 모두 끝난 것… 난 이 길로 은거할 생각이오 허허! 하남성에서는 원한이 많으니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해남으로 가시지요. 날씨가 따뜻하니 건강에 좋을 겁니다.”

이야기가 엉뚱한 데로 흘러갔다. 백 명의 상인들과 천 노인은 엉뚱한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야이간을 소개시킨 것…. 그것으로 상인 백 명과의 만남은 끝났다.

‘무언가 있는데… 이 늙은이가 이렇게 쉽게?’

상인 백 명과의 회합은 연 사흘 동안 지속된다. 천 노인은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않았다. 첫날은 약간 신경을 건드렸지만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는 작별을 고했다.

“늙은이가 있어 봤자 쓸데없는 소리만 주워들을 터… 이 늙은이는 이만 작별을 고하겠소이다. 여러분…! 평생 이 늙은이를 따라줘서 고맙소.”

‘아차! 이 늙은이에게 당했군.’

야이간은 얼굴을 붉혔다. 천 노인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막을 방도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파락호라도 한 패 사서 관도에 숨겨두는 건데.

“모두들 현 소협을 많이 도와주시구려.”

“걱정 마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천 노인은 상인 백 명과 일일이 손을 맞잡은 후 회합이 열린 기루를 빠져나갔다.

‘됐어. 이들이 있으니…’

야이간은 천 노인의 숨통을 조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참았다. 그에게는 평생 꿈도 꾸지 못할 중원 제일의 갑부로 만들어줄 상인들이 있다. 이들은 진심으로 대해야 할 게다. 수작을 부리는 날에는… 죽게 될 테니까.

“자, 이제 앉으시지요. 저희는 천 노인을 천야라고 불렀습니다. 소협도 천야라고 부르도록 하죠.”

상인들 중 나이가 많은 늙은 상인이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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