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50화
적사와 방삼은 토굴에서 생활했다. 토굴 생활도 여의치 않았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 아닌가 싶어 기웃거리는 통에 며칠 있지도 못하고 장소를 옮기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두 사람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척박한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숲은 연못에 있는 섬처럼 수천 평의 논이 펼쳐진 한가운데 있는 논 속의 섬이다. 농사꾼의 더위를 식혀줄 소나무 몇 그루가 고작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나마도 이용하지 않는 듯했다. 숲에는 무덤 두 구가 있는데 아주 정성스럽게 손질된 것으로 보아 마을 유지의 숲인 것 같다.
적사와 방삼은 서로 등을 맞대고 주위를 살폈다. 그들은 은신처를 찾을 때는 사방이 환히 조망되는 곳을 제일 조건으로 선택했다.
“영주”
“아직도 영주인가? 묵월광이 없어진 지가 언제인데…”
“저는 계속 영주죠.”
“…”
“견가이호가 보고 싶군요.”
몽고 제일의 호수, 견가이호. 몽고인들에게 견가이호는 마음의 고향이다.
“보게 될 거야.”
“영주님은 중원인인데.. 견가이호가 보고 싶습니까?”
“보고 싶지. 어머니 품처럼 따뜻한 호수지.”
적사와 방삼은 왜 종리추가 그런 얼굴을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청부살인이란 것이… 한 명만 나서도 틀림없이 해치울 수 있는 가벼운 것들뿐이었다. 그건 청부살인이 아니라 도살이다. 청부를 할 것도 없이 청부자가 직접 죽일 수 있는 자들이다. 조금만 독하게 마음먹으면 이런 일에 왜 두 명이나 보냈는지… 이런 하잘 것 없는 일을 시키면서 왜 그렇게 무거운 표정을 지었는지. 이제는 이해가 됐다.
사람이 사람에게 쫓기는 일처럼 피곤한 것은 없다. 동물에게 쫓기는 것이라면 잠시 숨을 돌릴 수도 있지만 사람에게 쫓기는 것은 한 치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는다. 적사와 방삼은 쫓기고 있다. 그들은 또 예감하고 있다. 자신들이 멀리 도주하지 못할 것임을. 적들은… 기가 막히게도 자신들의 행동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으니.
“몽고에서는 축혼팔도 하면 전설의 무공이었는데 중원에서는 형편없이 쫓기는군요. 이렇게 쫓길 줄이야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 말 하는 걸 보니 모르는 게 있군.”
“뭡니까? 그게?”
“절대적인 무공은 없다는 거.”
“아하!”
적사와 방삼은 말을 끊고 논 저쪽을 바라봤다. 검은 그림자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잡초가 살랑이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 머리만 한 바위가 구르다 멈춘 것 같기도 하다.
“지독하군요. 또 찾아냈어요.”
방삼이 말했다.
“저들은… 살수가 무엇인지 알아. 숨을 곳, 피할 곳을 모두 알고 있어.”
“그럼 살수답지 않게 행동해야겠군요.”
“그게 문제야. 살수는 살수답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거든. 드러난 사람들이니까.”
“결국 방법이 없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지.”
적사와 방삼은 몸을 일으켰다. 쉴 만큼 쉬었으니 또 움직여야 하지 않은가.
쒸이이익!
비망신사의 말이 옳다. 이들은 비망사의 절기를 모두 익혔다. 찰나간에 사방 다섯 방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무공은 가히 상대할 생각을 잃게 만든다.
페에엑….!
축혼팔도가 펼쳐졌다. 다른 때 같으면 일도에 혈우가 내렸으리라.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연속적으로 축혼팔도는 네 번이나 쳐내고도 비객들의 합공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했다.
‘제길! 내가 이 정도인데 다른 놈들은 죽을 맛이겠군.’
적사는 육도객이 걱정되었다. 물론 그들과 같이 간 사람들은 절정살수들이니 믿을 만하다. 혈영신마, 혈살편복, 음양철극… 모두 제 몫을 해줄 사람들이다.
종리추는 두 명을 한 조로 묶었다. 그는 단 한마디만 했다.
“목숨을 맡겨야 할 거야. 철저히 믿고 맡기면 두 사람 모두 살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맡기지 않으면 둘 다 죽어.”
‘목숨을 맡겨라! 제길, 좀 쉽게 풀어서 말해줬으면 오죽 좋아.’
폐에엑! 싸악!
축혼팔도를 전개해 옆에서 찔러오는 선장을 비껴냈다. 상대의 병기가 선장인 것을 보니 불문의 제자인 듯싶은데… 머리도 길렀고 승복도 입지 않았다. 유일하게 승려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건 목에 걸린 염주뿐이다.
적사는 선장을 비켜내자마자 곧바로 좌측을 향해 축혼팔도를 뻗어냈다.
타앙!
틀림없다. 한 가지는 알았다. 전방에서 흘러 들어온 공격을 비켜내는 순간 좌측에 있는 자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공격을 가해온다. 적사의 눈에 방삼이 보였다. 그는 겨우 큰 걸음으로 서너 걸음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건만 상태는 자신과 크게 달랐다. 전신이 피투성이다. 입으로 피를 쏟아내고 있고 도를 잡고 있는 팔에서도 핏물이 줄줄 흐르고 있다.
‘목숨을 맡겨라. 맡기면 살고, 맡기지 않으면 둘 다 죽는다! 제길! 그래, 맡겨보자!’
“방삼!”
소리를 빽 질렀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방삼은 마지막 한 번의 공격을 남겨뒀을 뿐이다. 다음 공격에서 그는 죽는다. 방삼이 죽으면 자신은 아홉 명의 살공을 견뎌내야 한다. 다섯 명만 해도 쩔쩔매고 있는데…
방삼이 고개를 쳐들었다. 허공에 둥실 떠올라 비조처럼 날아오는 적사의 모습을 보았다.
“영주!”
“축혼!”
“팔도!”
적사와 방삼은 마주 외치며 축혼팔도를 전개했다. 방삼은 전방을 향해 쓸어냈다. 대도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쳐 나갔고, 상대는 맞받지 못하고 슬쩍 물러섰다. 축혼팔도였으니 지금까지 버텼다.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 땅바닥에 드러누웠을 게다. 아니, 논바닥에.
적사는 좌측으로 일도를 쳐냈다.
째앵!
적사의 일도는 마침 막 공격을 시작하려던 자의 검과 부딪쳤다.
쓰으윽…!
적사는 정말 오랜만에 팔뚝으로 전달되는 감촉을 느꼈다. 사람 살을 파고들었을 때, 대도가 흥분에 겨워 흘려내는 울음이다.
“크윽!”
비명은 나중에 터졌다. 적사와 방삼은 종리추가 서로에게 목숨을 맡기라는 뜻을 알아냈다.
무당파에는 양의검진이라는 소진이 있다. 단 두 명이 펼치는 검진으로 쌍둥이처럼 서로가 영감으로 상대의 뜻을 읽을 수 있을 때 펼칠 수 있다고 한다. 완벽한 조합이 이루어진다. 말도 없고, 행동도 없고, 초식도 사전에 약정한 바 없다. 서로의 내공도, 무공도 각기 다르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하나로 꿰뚫고 있다. 상대의 몸과 마음이 내 영육에 합일하여 진정한 하나가 된다.
양의검진의 구결이나 심법은 무당파의 진산비기라 알 수 없다. 종리추를 비롯해 중원 무인들이 아는 양의검진이란 상식적인 무리에 불과하다. 종리추는 거기서 생각해 냈다. 완벽한 조합을. 살문 살수들은 양의검진을 펼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쌍둥이는 아니지만 쌍둥이보다 더 상대의 마음을 깊이 이해한다.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대의 눈빛만 보고도, 아니, 손끝이 움직이는 모습만 보고도 무엇을 하려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된다.
종리추는 양의검진을 말했다. 적사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자신과 방삼은 축혼팔도를 익힐 때부터 손발이 맞았다. 도를 조금 높이 쳐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면 방삼은 생각처럼 도를 조금 높이 쳐들었다. 자신이 나설 때 방삼이 걸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치밀한 종리추의 안배다.
‘괘씸한 자식! 틀리기만 해봐, 가만 안 놔둘 테니!’
적사는 팔꿈치로 방삼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와 동시에
“타앗!”
적사는 일직선으로 쭉 치달리며 연달아 삼 초나 축혼팔도를 뻗어냈다. 방삼은 과연 그의 생각대로 따라왔다. 뒷걸음질로 쭉 따라오며 뒤를 완벽하게 막아주었다.
창! 창!
두 번은 병기와 부딪쳤다.
쓰으윽!
드디어 손목이 흔들렸다. 손목이 흔들리는 정도로 짐작하건대 적어도 옆구리 절반 이상이 베여졌다.
적사는 어깨를 뒤로 젖혀 방삼의 어깨에 부딪쳤다.
“타앗!”
다시 고함을 터뜨렸다. 그가 이번에 신형을 날린 곳은 비객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죽은 자가 있는 곳이다. 아홉 명이 둘러싼 곳 중에서 유일하게 뚫린 곳이기도 하다.
적사와 방삼은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까지 도주해 왔으면서도 한참 동안이나 흥분되는 마음을 삭이지 못했다. 처음 무공을 배웠을 때의 흥분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듯했다.
“무엇을 느꼈느냐?”
“영주님의 호흡이요.”
방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도 그래.”
적사도 숨기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호흡을 읽었다. 호흡이 움직이는 방향을 알았고, 대도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축혼팔도를 흘려냈다. 자신이 축혼팔도를 쳐낸 것이 아니다. 호흡이 흘렀고, 대도가 따라갔고, 가장 나중에 진기를 실었다.
“다시 한번 해보자.”
“네.”
방삼도 상기된 표정이었다.
‘안 돼! 읽을 수 없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읽을 수 있었던 호흡이 느껴지지 않는다. 방삼의 등은 따뜻하기만 하다. 어깨는 호흡을 할 때마다 들먹이지만 전에 느꼈던 호흡… 살아 있는 숨결은 느껴지지 않는다.
“어때? 읽혀지나?”
“아…뇨, 죽었어요.”
방삼도 당황했다. 두 사람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두 사람이 움직이고 있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일사불란했다.
“너무 피곤한 모양이군. 잠시 쉬자.”
적사는 운공조식으로 피로를 풀었다. 전신을 가장 좋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 적절한 긴장도 유지시켰다. 그는 알고 있다. 이런 기회는 평생에 한두 번밖에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것은 깨달음이다. 축혼팔도를 배 이상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검리가 코앞에 있다. 아마도 초식이란 것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자신이 익히고 있는 축혼팔도를 만든 사람도 이런 현상을 경험했을 게다.
‘축혼팔도, 축혼팔도…’
축혼팔도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방삼과 일체가 되어 싸웠던 순간도 되새겼다.
“영주님, 해보죠.”
방삼이 먼저 서둘렀다. 방삼도 무인이다. 축혼팔도를 절정으로 익힌 도객이다. 그는 적사가 자부하던 죽음의 수련에서 벗어난 강자다.
적사와 방삼은 다시 어깨를 마주했다. 등 뒤로 방삼의 등이 와 닿는다.
‘이런…!’
적사는 또 실망했다. 운공조식도 하고 몸도 즉각적으로 축혼팔도를 전개할 수 있도록 최상의 긴장감을 유지시키고 있는데 조금 전의 느낌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도가 죽었어. 도기가 일어나지 않아. 내 도기는 일어나는데 방삼의 도기가 일어나지 않아. 하나는 살았는데 하나는 죽었어.’
문득 다른 생각도 들었다. 방삼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내 도기가 느껴지나?”
“아뇨.”
“아!”
적사는 세찬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중심까지 잃어버린 신형이 비틀거렸다. 눈앞의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도를 잡고 있을 힘도 없이 놓아버렸다. 두 무릎을 땅에 꿇고 두 손을 땅에 짚고… 황소처럼 씩씩 터져 나오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해답은 간단한 곳에 있다. 좀 전에는 서로의 목숨을 주었는데 지금은 지키고 있다. 내 목숨을 굳게 지킨 상태에서 상대의 도기만 읽으려고 한다. 방삼도 적사가 느낀 듯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먼 산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다시 해볼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이제는 마음 놓고 대도를 전개할 수 있다. 이것은 축혼팔도라는 도법을 진일보시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좀 더 넓게 열어주었다. 이런 일도 있다. 단전을 더욱 강하게 만든 것도 아니고 진기를 더욱 강하게 쏟아낸 것도 아니다. 도법이 더욱 강해진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무공은 한층 강해졌다.
마음이 열리니, 목숨을 맡기니… 신지가 열리며 축혼팔도를 놀리는 손길이 정교해졌다. 축혼팔도는 빠른 도법이니 정교하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조금 더 빨라진 느낌이다.
‘중단전… 종리추가 말하던 중단전이야. 마음의 밭.’
종리추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살문 살수들에게 전수했다. 미안하게도 종리추에게서는 배울 점이 거의 없었다. 그는 늘 엉뚱한 이야기만 했다. 바람이 어떻다느니 물결이 어떻다느니… 중단전, 상단전, 하단전… 삼단전이 합일될 수 있다는 묘한 소리도 했다. 종리추의 무학은 깨달음의 무학이다.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그의 세계에 돌아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 중턱에서 세상을 본 자와 산정에서 본 자는 분명히 다른 것을 본다. 한 사람은 산 너머 멀리 펼쳐진 호수나 강을 볼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은 고작해야 나무밖에 보지 못한다. 나무를 보는 사람에게 눈을 좀 더 들면 바다가 보인다고 백 번 말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중단전이 열리고 있어.’
적사와 방삼은 중단전의 실체를 경험했다. 대체로 속가와 불가는 하단전을 이용한다. 도가는 상단전을 이용한다. 무림이란 곳에서 서로 교류하다 보면 상대의 장점을 배우게 되어 있고 현재는 거의 대다수 문파가 상단전과 하단전을 모두 응용한다. 중단전을 말하는 문파는 거의 없다.
불가에서 참선을 하면 마음이 열린다고 한다. 도가에서 득도를 하면 마음이 열린다고… 마음이 열리고 있다.
“가자, 놈들에게 보답을 해줘야지.”
적사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