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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51화


분운추월과 무불신개, 그리고 육장로 화두망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방주를 죽인 자들인데 후계인들 죽이지 못할까. 후계가 죽으면 개방의 맥은 끊어진다고 봐야 한다. 지금도 다른 제자들은 끊어졌다고 본다. 방주가 취임 직전에 전수받는 타구봉법이 후계에게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올바르게 아는 세 장로는 혼신을 다해 후계의 신변을 지켰다.

“먼저 폐관 수련부터…”

후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구봉법은 깨달음의 무학이지요. 권각으로 익히는 무학이 아닙니다. 제가 우둔하여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폐관 수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저의 경혈은 몹시 혼탁해져 있기 때문에 주화입마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타구봉법을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절대 말씀하셔서는 안 됩니다.”

“하하! 저도 어린아이가 아니니 안심하세요.”

말은 그렇지만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흑봉광괴의 생각은 결코 나쁘지 않다. 워낙 악을 미워한 사람이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생각을 행동으로 이어갔다는 것이다. 구진법이 무엇인가? 너무나 참혹하여 개방에서조차 금기시한 무공이지 않은가. 그걸 무림기재들에게 수련시켰으니.

‘어느 문파나 구진법을 깰 무학이 있다. 파훼법이 너무 간단하니까…’

후개는 용두방주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되새겼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그것이 고작이었다. 개방도가 수만을 헤아린다지만 후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심장로와 호법들 몇 뿐이다. 나머지는 옥석을 분별할 수 없다.

‘먼저 천객들의 무공을 눌러야 해. 그런 다음 개방을 되찾는 수밖에 없어. 각 파도 모두 개방과 같은 상황일 테니…’

어디서부터 일을 풀어가야 되는가. 다른 문파에 지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사를 물어볼 수는 없다. 천외천은 정도인들이 모인 곳이다. 악을 원수처럼 미워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살인을 할 용의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가입할 수 있다. 누가 가입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파훼법이 너무 간단하다… 각 문파에 모두 파훼법이 있다. 그렇다면 의외로 초식이 간단하다는 것인데…’

후개는 백천의의 무공을 생각했다. 방주와 싸울 때 전개하던 검공을. 그리고 정운의 검공도 떠올렸다. 비록 등 뒤에서 가한 일격이지만 평소 방주의 무공으로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그날은 그러지 못했다. 고스란히 당했다. 정운의 검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피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파훼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후개는 밥을 먹지 않는다. 간혹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지만 근본적으로는 풀을 먹는다. 주변에 널려 있는 것이 모두 음식이다. 아무것이나 따서 물에 쓱 담갔다 꺼내면 싱싱한 음식이 된다. 생식을 시작한 지도 벌써 십여 년이 훌쩍 넘었다.

후개는 풀을 뽑아 물에 씻었다. 풀에는 모든 맛이 있다. 쓴 것도 있고, 단 것도 있으며, 뒷맛이 떨떠름한 것도 있다. 생긴 것만큼이나 모두 맛이 다르다.

후개는 풀 서너 개를 하나로 모아 입에 넣었다. 그때,

“맛있냐?”

후개에게 던진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반말이 아닌가? 후개는 태연히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아는 사람만 있다. 삼장로, 분운추월과 무불신개와 화두망. 그런데 분운추월과 무불신개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화두망을 노려보고 있다. 화두망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뜻밖에도 젊었다.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역시 젊은 소리다. 후개는 몹시 놀랐지만 마음속 격동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화두망이 아니군.”

“화두망은 변장하기 어려워. 이 큰 머리하며, 붉은 머리칼하며.”

갑자기 분운추월이 빽! 소리를 질렀다.

“종리추!”

살문주의 인피면구는 무림에 널리 알려져 모르는 사람이 없다. 혈영신마를 구해갈 때, 하후가의 삼 형제를 이용한 것은 지금도 말들이 많다.

“사, 살문주, 화두망은?”

분운추월이 노기 반, 걱정 반이 담긴 눈길로 물었다.

“이게 인피면구인데 살아 있으면 얼굴 가죽이 없겠지.”

“뭐, 뭣! 네, 네 이놈!”

“하하! 걱정 마시오. 그 노인네. 얼굴이 너무 더러워서 만질 수가 있어야지. 지금 곤히 잠들어 있을 테니 깨우지 마시고.”

“뭐? 그, 그럼 그 얼굴은?”

“인피면구라고 꼭 사람 가죽을 이용하는 건 아니오. 동물 가죽을 이용해도 충분하지. 솜씨만 좋으면. 특히 개방도 얼굴은 아주 쉽게 얻어낼 수 있지. 너무 지저분해서 아무 가죽이나 상관없으니까.”

“뭐, 뭐라고! 하하하!”

분운추월은 실컷 웃었다. 무불신개는 웃지 못했다. 그는 종리추를 잡기 위해 무림군웅들을 이끌고 팔부령에서 대치한 적이 있다. 옥진 도인과 함께 천우잔을 깨기 위해서, 퇴로를 막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다. 종리추에게 죽은 문도의 얼굴이 지금도 되살아난다.

“후개, 할 말이 있을 텐데?”

후개도 담담히 대꾸했다.

“사람을 보냈는데 거절했더군.”

“목숨을 구해준 거야.”

“그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나중에야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소.”

분운추월과 무불신개는 놀랐다. 종리추가 뛰어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무공 부분이고 총명에서만은 단연 후개가 앞선다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 이야기는 오히려 후개가 덕을 봤다지 않은가.

“수지호법은 괜히 있는 거야. 빼서 다른 일을 쓰는 것이 좋을걸.”

“참조하겠소.”

“자, 그건 그렇고…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볼까?”

종리추의 말에 후개는 개울가를 가리켰다. 삼장로조차도 말을 들을 수 없는 한적한 곳이다. 개방 용두방주가 비밀 대화를 나눌 때 사용한 곳이기도 하다.

종리추와 후개는 근 서너 시진 동안이나 깊고 깊은 대화를 나눴다. 두 젊은 용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분운추월도, 무불신개도 뒤늦게 달려온 화두망도 듣지 못했다.

종리추와 후개는 개울가에서 풀을 씹어 먹으며 이야기했다. 어떤 때는 웃기도 했으나 대부분 검미를 찡그리며 이야기한 경우가 많았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

삼장로는 한쪽에 물러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기만 했다. 마음이 착잡했다. 개방이라면 구파일방 중에서도 알아주는 대방파다. 그런데 이제는 방주가 살해당했어도 복수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살인을 유도한 자가 개방 제일장로이니 말해 무엇 하랴. 그것도 모자라 살수와 손을 잡는다. 종리추는 어쨌든 살수다.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살수다. 도저히 용납해서는 안 될 자와 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붉은 노을을 뿌려낼 때 종리추와 후개가 일어섰다. 두 사람은 서로 포권지례를 취했다. 한여름날에 있었던 두 사람의 대화. 두 용이 두 번째 만난 날이다. 첫 번째는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 헤어졌으나 두 번째는 웃으며 헤어졌다.


하오문주는 야심한 밤에 찾아온 손님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누가 보냈다고?”

“개방 후개께서 보내셨습니다.”

전서를 가져온 걸개는 허리에 사결 매듭을 하고 있다. 결코 전서나 나를 사람이 아니다. 사결 매듭이라면 호법 이상일 텐데… 그렇다면 아주 중요한 극비 문서다. 이마가 툭 불거져 나온 짱구머리에 기다란 검상… 개방에 이런 자로 사결 매듭을 한 자는 수천호법뿐이다.

‘수천이 직접 오다니.’

하오문주는 전서를 뜯었다.

“이, 이건!”

전서를 읽어 내려가던 하오문주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내용이 얼마나 섬뜩했던지 손발이 후들거린다.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담력을 소유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게 시간이 있소?”

“없습니다.”

“지금 가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오?”

“목숨을 버릴 요량이면 바로 대답을 주실 것이라는 부분이셨습니다.”

“후개가 직접 그런 말을 했소?”

“네.”

“음….!”

하오문주는 신음을 터뜨렸다. 그는 한 번도 후개를 본 적이 없다. 그는 많은 젊은이를 만났지만 그중 가장 뛰어난 젊은이는 종리추였다. 이제 생각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차후 개방을 이끌어갈 후개도 종리추에 못지않은 기재다. 전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개방에 서광이 비치는가…’

하오문주는 잠시 고민했다.

“알겠소. 따르겠다고 전해주시오.”

기어이 후개가 원하는 대답을 주었다.

수천호법이 떠나자마자 하오문주는 급히 오기를 불렀다. 네 사내와 한 여인, 하오문주가 보기에 가장 뛰어난 재주를 지닌 사람들이다. 무공이 이들보다 뛰어난 자들은 많다. 향주 중에도, 방주, 모지 중에도. 하지만 하오문에서 가장 필요한 한 사람, 손 기술이 뛰어난 자들은 바로 이들이다.

하오문주는 오기를 뽑으면서 어느 한 가지에 치중하지 않았다. 도곤이면서 소투이고, 소투이면서 배수다. 이들은 각 부분에서 고루 두각을 나타낸다. 배문에 들여보내도, 투문에 들여보내도 될 자들이다.

“목숨을 원하려는데… 주겠느냐?”

“네! 드리겠습니다.”

오기는 선선히 대답했다. 하오문도 중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충성심이다.

하오문주는 서신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펴보아라.”

오기 한 사내가 서신을 펼쳤다.

천음 백석강.

“문주님, 여기는….?”

“지금부터 너희는 살문 살수가 된다.”

“네?”

“문주님, 그건…?”

“살문주의 명에 죽고 살아라. 하하! 살문에는 하오문 식솔이 많이 있으니 그리 외롭지는 않을 게다.”

“문주님, 이건…”

“오래 걸리지 않아. 너희들이 죽는 데는 말이다.”

“…”

“아마도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다면 백석강으로 가라.”

하오문주의 얼굴빛은 어두웠다.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살문주에게 가서 충성하라. 아마도 올해가 지나기 전에 죽으리라. 도대체 무슨 일인가?

오기 중 배문에서 온 자가 물었다.

“저희들의 죽음이.. 문주님께 좋은 겁니까? 아니면 하오문을 위한 겁니까?”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가?”

“들려주십시오.”

“나.”

오기는 잠자코 있었다. 가문에서 온 여인이 곱게 일어서서 허리를 반으로 굽혀 인사했다. 네 사내가 뒤따라 일어섰다.

“하오문에는 정이 없습니다. 모두들 이용만 했지 정을 주지 않더군요. 하오문에는 그런 단점이 있습니다. 모두 약한 처지이다 보니 이용을 너무 많이 해요.”

“…”

“사람을 부리는 것은 좋지만 이용하는 것은 나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문주님께 뽑혔을 때 감지덕지했습니다. 문주님은 사람을 이용하는 분이 아니시니까.”

“하하! 잘못 알았군. 난 가장 잘 이용하는 사람이지.”

말하던 사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문주님을 위해서라면 살문 살수가 되겠습니다. 종리추란 사내…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 사내를 위해 목숨을 바치죠. 문주님을 복위시켜 준 사내이니 이 오기의 목숨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문주님! 부디 오래 사십시오!”

오기는 투박하게 인사하며 나갔다.

‘하하! 사람들하고는… 아마도 나 역시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 같아. 우린 너무 큰일에 말려들었어.’

하오문주는 처음으로 후회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뿌듯했다.

수천호법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하오문주의 대청이 환히 보이는 나무 위에 걸터앉아 몇 사내와 한 여인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그들이 나왔다.

“살문주, 젊은 애송이 놈이라고 들었는데 맘에 안 들면 콱 속곳을 훔쳐 버릴 거야!”

‘됐어, 이것으로… 그러나저러나 자칫하면 속곳 잃어버리겠는데?’

수천호법은 얼굴에서 면구를 벗었다. 차디차면서 맑은 얼굴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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