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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54화


검은 물감을 뿌려놓은 듯한 어둠이 사위를 휘감았다. 하늘과 산과 들과 바위와 나무와…… 어둠 속에서 자연은 색의 농도가 진하고 옅음에 따라 구분되었다.

구류검수는 모닥불을 지켜봤다. 모닥불은 컴컴한 어둠 속에서 유독 빛을 밝히는 부조화물이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구류검수의 마음을 강하게 잡아당긴다. 마치 마음 깊은 곳에 애써 눌러두었던 열정이 되살아나는 듯.

“주공, 왜 저에게는……”

모두들 일거리를 받았지만 구류검수만은 아무 언질도 듣지 못했다. 명령을 받기는 받았다. 자신을 비롯하여 사령 살수 몇 명, 그리고 무공이 빈약한 아녀자들은 오곡동을 지키란다. 모두들 중원으로 나가면서.

구류검수는 거칠게 항의했다.

“……”

종리추는 대답 대신 얼음이 풀풀 날리는 차디찬 눈으로 쳐다봤다. 심혼을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눈이다. 마음속을 환히 들여다보는 눈길이다. 구류검수는 마주 쳐다보지 못하고 벽리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벽리군은 고개를 숙인 채 동혈 바닥만 쳐다보고 있다. 종리추와 구류검수 간의 대화에는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이다. 어린을 봤다. 항상 밝고 활기 찬 여인이다. 한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딴 곳을 응시하고 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모두들 그렇다.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냉담한 표정들이다. 어린의 눈길을 피한 채 구류검수의 궁금증은 풀어주었다.

“갈 길이 있잖아?”

구류검수는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그, 그렇군…… 갈 길……’

종리추가 왜 자신에게는 아무 명령도 내리지 않았는지, 모두들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무심히 쳐다보는지 비로소 알았다. 살문 살수들치고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 그들 모두 언젠가는 자신만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그런 날이 올 때를 학수고대하고 있기도 하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날이 왔다. 화산파 매화검수들이 지척에서 부딪치고 있으니 기회가 빨리 왔는지도. 이제 외톨이가 되어 혼자만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지옥이 될지 천국이 될지 모를 길을. 지금까지는 같이 왔지만, 이제부터는 누구도 같이 갈 수 없는 길을. 언젠가는 가야 할 그 길… 그 길이 눈앞에 닥쳤다.

“…주공.”

종리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린 오래 걸릴 거야. 한 달 이상 소요될 것 같은데……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은 몰랐지만 약속을 지키게 되어서 다행이야. 죽을지 살지… 기왕이면 살았으면 좋겠지만, 가슴에 맺힌 한을 풀도록 해. 벽 총관이 잘 도와줄 거야.”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가슴에 맺힌 한을 풀도록 하라는 말에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날이 마구 뒤엉켰다. 천객도 비객도 중요하지 않았다. 살문, 묵월광, 팔부령, 대래봉…… 모든 말들이 무의미했다. 가슴에 맺힌 한을 풀도록 하라는 말이 떨어진 순간 구류검수에게 남은 것은 검 한 자루와 알몸뚱이 육신뿐이었다.

구류검수라는 말도, 살문 살수라는 말도 모두… 모두 기억 저편으로 아스라이 사라져 갔다. 구류검수는 검을 풀어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살문 살수들 모두를 향해 큰절을 했다. 주공에게도, 형, 아우들에게도. 살문에 몸을 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종리추가 떠난 며칠 후, 살문 외장이 거둬들인 정보대로 그토록 소망하던 여숙상이 왔다. 비객이 되어서 왔다. 가녀리고 해맑던 여숙상은 사라지고 전신에서 독기가 풀풀 풍기는 독나방이 되어서 왔다. 그녀에게서는 오로지 죽음의 냄새만이 피어난다.

대낮에 검을 뽑아 들면 햇볕에 반사된 검광이 눈을 아리게 한다. 밤에 뽑아 들면 월광과 조화를 이룬 검광이 시리디시리게 가슴을 저며온다.

그녀가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있다. 더군다나 여름에 피우는 모닥불에는 의미가 있다. 연기를 내어 모기를 쫓는다는 일반적인 의미는 아니다.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그녀는 소리치고 있다.

“비겁하게 숨어 있지 말고 나와!”

구류검수는 귀신에 홀린 듯 검을 들고 일어섰다. 순간 어깨를 짓누르는 손길.

구류검수는 고개를 돌렸다. 벽리군이다.

“조금만 더 참아요.”

구류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의 눈에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보였다.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오곡동에서 바라보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지는 절벽 바로 밑에서 지옥불처럼 요염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기관이 열리는 시간은 일 다경이에요. 그 안에 끌어들여야 해요.”

“총관, 만약……”

“알아요. 일이 잘못되더라도 해코지하지 않을게요. 얌전히 돌려보내겠어요.”

“진심으로 약속해 주시오.”

“약속하죠.”

구류검수는 벽리군의 약속을 믿었다. 살문 사람들의 약속은 천금이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분위기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쪽으로 흐르면서 행동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죽인다면 죽이고, 살린다면 살리고, 보내준다면 보내준다.

구류검수는 심호흡을 크게 해서 맑은 공기를 들이켰다. 아무리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해도 쉽게 되지 않았다. 여숙상…… 그녀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할까.


동이 틀 무렵,

쉬익! 쉬이익……!

제칠비객들은 수월하게 비적마의의 숲을 타 넘었다. 하후가 무인들이 성공한 방법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성공했다. 문제는 하후가 무인들이 실패한 절벽이다. 비적마의를 넘어섰다고 살문 살수들과 검을 맞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천험의 지형이 있다. 하후가 무인들은 지형을 이용한 암습에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물러서고 말았다.

아홉 비객은 비적마의를 넘자마자 살수들의 움직임을 보였다. 땅에 배를 붙이고 납작하게 엎드렸다. 두 명이 한 조를 이뤄 전후좌우를 살폈으며, 여숙상은 한가운데서 총괄적으로 사위를 살폈다. 상대하는 적이 살수이니 암습을 가해올 것은 자명하고, 이쪽도 이제 암습이라면 자신이 있는 터이다.

살문은 허를 찌를 속셈인가? 암습을 가해와야 당연하건만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비적마의의 날갯짓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조용해도 너무 기분 나쁘게 조용했다.

여숙상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쉬익! 쉬이익……!

엎드려 있는 비객들 중 좌우에 있던 네 명이 번개처럼 일어나 치달렸다. 행동에 망설임은 없다. 비객 개개인이 무림 기재로 정평난 무인들이다. 모두들 가슴속에 무림제일인이라는 야망을 한 번씩은 간직했던 사람들이다.

구파일방은 이들을 비객으로 내놓음으로써 막대한 손실을 감수했다. 적어도 일대가 단절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거기에 살수들의 습성까지 낱낱이 꿰뚫어 보게 되었으니 살수의 역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강한 살수 집단일 수도 있다.

비객 네 명은 전면으로 달려나가 절벽 밑에 찰싹 몸을 붙인 후 사방을 예리하게 훑어냈다. 하후가 무인들은 여기서 좌절했다. 그들은 절벽을 기어오르지 못했고, 그래서 살문 살수들과 검을 맞대지 못했다. 검만 부딪치면 산산이 가루를 낼 수 있는데, 마지막 일 보에서 물러서야만 했다.

지금은 아무도 없다. 비적마의의 관문이 뚫렸는데도 살문은 설마 침입자가 있겠냐는 듯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비객 무인들은 언제 어디서 적이 공격해 오더라도 반응할 태세를 갖췄다.

여숙상은 비객 무인들의 행동을 지켜본 다음 다시 한 번 주위를 훑어봤다. 구석구석 빠짐없이 살폈다. 사람이 은신할 만한 구석은 바위 속이라도 꿰뚫어 볼 듯 예리하게 관찰했다.

‘없어.’

여숙상은 눈짓을 했고, 남아 있던 비객 무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들은 절벽에 달라붙은 비객 무인들의 등 뒤에 달라붙었다. 앞선 비객 무인들을 엄호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차지했고, 은신처를 고른 다음 몸을 꼭꼭 숨겼다.

주위는 조용하기만 했다. 산새는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기 위해 조잘거렸고,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잎은 수줍은 듯 똑! 눈물을 떨궜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비객 무인들은 평온함 속에 숨어 있는 피비린내를 맡았다. 무엇인가 알지 못할 기운이 자꾸 머리를 잡아당겼다. 불길한 예감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재삼재사 주위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쁜 기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기분도 든다. 무림군웅들이 뚫어보지 못한 전인미답을 걷는 기분도 남다르거니와 살수 문파 살문을 암습으로 제거한다는 쾌감도 육신을 흥분에 들뜨게 만든다.

여숙상이 다시 살짝 손을 들자 절벽에 달라붙어 있던 비객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그들은 절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구르르릉……!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팔부령이 심하게 흔들렸다. 수백 년 동안 지진이라고는 일어난 적이 없는 산이니 인위적인 흔들림이 분명하다.

‘산사태?’

여숙상은 제일 먼저 산사태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는 산을 뒤흔들 까닭이 없다. 아마도 이 정도 지축을 흔들려면 수십 근의 화약을 사용했으리라. 산사태는 없었다. 땅만 흔들렸을 뿐, 작은 돌 조각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비적마의가 쳐놓은 담벼락을 넘어서면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것조차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제칠비객은 숨죽이고 사태를 살폈다. 절벽을 기어 올라가던 무인들도 움직임을 멈추고 변화를 주시했다. 방금 전에 지축을 뒤흔든 것이 자신들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 종적이 발각된 것은 아닌지 알아야 한다.

조용했다.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여숙상은 손을 들어 올려 까딱거렸다. 은신해 있던 비객 무인들은 재빨리 뛰쳐나와 절벽에 달라붙었고, 절벽에 붙어 있던 무인들도 다시 움직였다.

스슥……! 스으으윽……!

제칠비객들 중 한 명이 주변을 예리하게 살피다가 무심히 기어오는 뱀 한 마리를 보았다.

‘희귀한 뱀이군. 희귀한 뱀?’

그는 눈을 돌려 다른 곳도 살폈다.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곳까지 세심하게 훑었다. 그의 관심은 뱀에게 쏠렸다.

‘있다! 있어! 위험하다!’

또 다른 곳에서 처음 발견한 것과 똑같은 연녹색 뱀을 발견한 그는 입을 오므려 산새 소리를 냈다.

“짹! 째짹! 째재재재잭…..!”

제칠비객들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그는 손으로 연녹색 뱀을 가리켰다. 군데군데 땅을 뚫고 나오는 뱀, 거꾸로 세워놓은 콩나물처럼 몸은 땅속에 묻어두고 머리만 바짝 쳐든 뱀.

절벽을 올라가던 비객 무인들이 신속하게 내려왔다. 사태가 변화하면 모든 행동은 중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암습을 의미하며, 살수들과의 싸움에서 기선을 제압당하면 십 중 오륙은 패배로 직결된다.

연녹색 뱀들은 슬금슬금 기어왔다. 서두를 것 없다는 듯이 천천히.

“이런 일이!”

여숙상은 당황했다. 연녹색 뱀은 무척 빠르다. 허공을 나는 비적마의처럼 훌쩍 뛰어올라 공격을 하기도 한다. 물리면 즉사하는 독사이기도 하지만 더욱 징그러운 점은 뱀들이 먹이를 찢어 먹는다는 것이다. 연녹색 뱀과 비객 무인들의 사이를 유유자적 가로지르던 두더지가 뱀 두 마리에게 찢겨 먹혔다.

이런 뱀은 없다. 이런 뱀은……. 하긴 비적마의라는 요물 또한 보기 힘든 마물이 분명한 터. 그러나 그런 점은 여숙상을 당황하게 하지 못한다. 그녀가 당황한 것은 뱀들을 피해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제칠비객과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이다.

뱀들은 제칠비객을 뿔뿔이 흩어놓았다. 뱀들의 공격을 피해 조금씩 조금씩 움직인 것뿐인데 어느새 제칠비객들은 비적마의가 있는 곳으로 물러났고, 자신은 혼자가 되어 절벽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위험하다!’

경각심이 더욱 크게 작용했다. 뱀들이 휘젓고 다니는, 아니, 뱀의 소굴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들어선 게 우연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뱀이 이렇게 많지도 않았다. 전방을 유심히 살핀 후 아무도 없다고 확인한 후에나 움직였다. 그때도 사람은 물론 개미 한 마리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적마의 때문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신경 쓰이던 판이다. 뱀이 있었다면… 이렇게 우글거리는 곳이었다면 애당초 들어서지도 않았을 게다.

‘분명히 없었는데…… 그래! 그거야, 산울림! 산울림이 있고 난 다음부터 뱀이 나타났어. 치잇! 발각당했군. 이런 식으로 공격해 오다니. 살수 놈들! 살문은 확실히 다른 살수 문파들과 다른 점이 있다. 한낱 미물로 천하의 무인들을 가로막는다는 발상 자체가 쉽게 떠올릴 수 없다.

“이런!”

제일비주는 좀 더 좋은 위치에서 제칠비객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무엇인가에 쫓겨 제자리를 벗어났다. 은신술을 펼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은폐다. 적으로부터 철저하게 숨어야 한다.

제칠비객은 은신술의 기본조차 모르고 있는 듯하다. 결코 은신술을 펼쳤다고 할 수 없다. 조금씩 물러서고 있는데 환히 노출되어 있다. 누가 공격을 해온다면 살수로서의 싸움이 아니라 무인으로서의 싸움을 해야 한다. 그것이 겁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여느 살수들과는 다른 살문 살수들과의 싸움인 이상 불길한 조짐이다.

살수들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상호 공조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안아야 한다. 서로에게 호법이 되어주는 밀접한 관계,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제칠비객은 무너졌다. 은신술이 깨지고, 서로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거리도 벗어났다. 그들은 살수들의 비기인 암습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무인들의 정통 무공으로 싸워야 한다. 서로를 도울 수도 없는 위치에서 각자 지닌 무공으로 싸워야 한다.

‘무엇인가……!’

급습도 받지 않은 제칠비객이 왜 저토록 쩔쩔매며 물러서는지 원인을 알아내는 것도 급하지만, 그것보다는 점점 안으로 파고드는 여숙상에게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른 칠비객들은 밖으로 물러서고 있는데 여숙상만은 절벽을 끼고 돌아 팔부령 안쪽으로 파고든다. 당연히 칠비객과 그녀의 거리는 점점 벌어져 연계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지경이다.

‘여매가 일부러 간격을 벌릴 리는 없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한 거야. 급해!’

제일비주 유홍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쉬이이익……!

그렇잖아도 제칠비객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불안해하던 제일비객들이 비호같이 움직여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러다가는 당한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그래 봤자 일개 살수들이야. 놈들을 죽이기만 한다면……’

여숙상은 물러서던 발길에서 움직이는 발길로 바꿨다. 그녀 역시 자신 혼자만이 떨어져 나왔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활하기 이를 데 없는 녹색 뱀들은 사람의 조종이라도 받는 듯 제칠비객과 여숙상의 간격을 철저히 벌려놓았다.

여숙상은 판단했다. 이러다가는 협공을 받아 손도 써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살문 살수들의 능력이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습을 가해올 수 있을 것이라고.

그녀의 판단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불에는 불!’

단신으로라도 오곡동으로 들어갈 생각을 굳히자 마음이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쉬익!

여숙상의 신법이 빨라졌다. 달려드는 뱀들을 쳐내는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기로 작정하니 걸음이 한결 빨라질 수밖에 없다. 적은 뱀이 아니라 사람이다. 살수다. 그들과 부딪치기 전에 힘을 소진하는 것은 낭비다.

쉬이익!

여숙상은 안으로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발길을 멈췄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며 작은 울림이 흘러나왔다. 악다문 입에서 신음처럼,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진……백강!”

한 사내가 웃통을 벗고 앉아 있다. 우람하고 단단한 근육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사내는 병기를 들고 있지 않다. 두 손도 합장한 것이 아니라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상태다.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구류검수라고 하지. 몇 년 동안 그렇게 불렸어.”

“……”

“내가 살문에 몸담은 것은……”

“듣기 싫어!”

여숙상의 눈에서 하얀 독기가 흘러나왔다.

“네놈이 무슨 짓을 했든! 살수든 아니든 상관없어! 내 손에 죽기만 하면 돼!”

구류검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가에 쓸쓸한 고소가 스쳐 갔다. 사매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는데…… 그것마저도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매는 그때의 일을 증폭시켜 왔다. 마음속으로 되새기고 되새기면서 분노를 더욱 키웠다. 지금에 와서는 분노가 변질되어 오히려 그때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사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원한, 분노, 증오는 그때의 일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스스로 키워온 무자비한 증오다. 강간. 강간은 사랑을 얻는 방법이 될 수 없다.

구류검수는 너무 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과거사가 되어버린 후에야. 순간의 행동이 세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자신은 긍지와 자부심을 충만시켜 준 화산파에서 쫓겨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사형, 사제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에 비하면 그런 고통은 고통도 아니다. 순진하고 청초하던 한 여인은 독심미화라는 오명을 얻었다. 비무를 할 때도 사람이 다칠까 봐 마음대로 초식을 전개하지 못하던 여인이 서슴없이 살을 베어내는 무정한 꽃으로 변했다.

그녀는 변했다. 선녀의 얼굴이 악귀의 얼굴로 변했다. 언제나 방실방실 웃던 얼굴에서 서툰 농담조차 건넬 수 없는 한녀로 변했다.

또 한 사람의 운명도 변했다. 차기 화산파 장문인으로 내정된 유홍. 매화검수 중에서도 무공, 지략, 인품 모든 면에서 가장 탁월했던 유홍이 화산파를 등지고 비객이 되었다. 살수들처럼 무림을 떠도는 들개가 되었다.

‘그렇군. 사매… 넌 내가 넘볼 수 없는 여자였어. 네 몸과 마음은 오로지 사형에게 가 있는 것을……’

구류검수는 여숙상의 마음을 확실히 알았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만났다. 말도 몇 마디 건네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을 읽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얼굴 표정만 보고도 알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잘못된 일이었다, 그날 일은…… 차라리 평생 마음속에 품고 살 것을. 그랬다면… 그랬다면 다른 사람을 향한 웃음이라도 매일 볼 수 있었을 텐데……’

쉬익!

검풍이 느껴졌다.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가슴에서 피어났다. 독심미화 여숙상은 망설임 없이 검을 쳐냈다. 그녀는 구류검수에 대한 미련이 조금도 없었다. 구류검수는 단지 처녀를 앗아간 도둑이자 원수일 뿐이다. 죽여 없애야 할 원수.

피유웃!

검이 다시 허공을 날았다. 그녀가 노린 곳은 몸과 머리를 잇는 목이다. 순간,

피유웃! 피윳!

사방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일어났다.

“안 돼! 물러서!”

구류검수가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호호호호!”

여숙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음을 터뜨리며 일 장 뒤로 물러섰다. 여숙상 앞에 길들여지지 않는 늑대 세 마리가 나타났다. 늑대다. 그들은 늑대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늑대다. 여숙상은 나타난 자들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다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이 자들은 정말 살수들이다.’

여숙상은 긴장했다. 많은 살수들을 만났지만, 그리고 죽였지만 눈앞에 나타난 자들처럼 강한 기세를 뿜어낸 자들은 없었다. 굳이 찾으라면 살수들이 아니라 정도 무인들 중에서 찾아야 한다. 천외천 천객들.

늑대 세 명은 천객과 같은 기운을 지닌 자들이다. 무공은 어떤지 모르지만 일신에서 뿜어내는 살의만은 하늘과 맞바꿔도 될 만한 자들이다.

‘살문에 고수가 득실거린다더니 맞는 말이군. 도대체 이 자들은…… 그렇군. 묵월광이 합류했다더니 사령 살수들이군.’

나타난 자들의 정체를 짐작해냈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물러서!”

구류검수가 냉랭하게 말했다.

“형님, 이 여자가 지금……”

“물러서!”

“형님!”

“지금 물러서지 않으면…… 내가 죽인다.”

사령 살수 세 명은 한동안 구류검수를 바라봤다.

“좋소, 형님이 선택한 길이니…… 하지만 임금님도 사람을 죽일 때는 변명 한마디쯤은 들어보는 법이오. 하지만 이 여자는 그러지도 않았소. 정말 목숨을 내놓을 생각이시라면……”

“물러서라.”

구류검수의 음성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사령 살수들은 서로를 쳐다보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듯 사방을 경계하며 물러섰다.


구류검수는 벽리군을 떠올렸다. 지혜로운 여인이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만 해도 한낱 기루의 창기 정도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랬다. 벽리군은 하오문의 향주 이상도 이하도 아닌 꼭 그만큼의 기녀였다.

그녀가 달라진 것은 살문 총관을 맡으면서부터다. 총관을 맡아서 달라진 것이 아니라 종리추를 사랑하면서부터 달라졌다. 직위가 사람을 바꾸기도 하고 주변 사람이 사람을 변하게도 만들지만 벽리군은 양쪽 모두의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한다. 어쨌든 그녀는 지혜로운 여인으로 변모했다. 처음부터 지혜가 탁월한 여인이었으나 환경 탓에 부각되지 못했는지, 아니면 종리추를 만난 후 부단히 노력해서인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겠지만.

벽리군의 안배는 구류검수의 목숨을 잠시나마 지체하게 해주었다. 사령 살수들은 여숙상을 공격할 의도가 없었다. 그들은 검을 부딪칠 정도로 미숙하지 않다. 만일 공격하고자 마음먹었다면 벌써 짙은 피 냄새가 허공에 흩어져 있을 게다. 여숙상이 죽든가, 오히려 사령 살수들이 당했든가 양단간에 승부가 났으리라.

그들은 단지 여숙상의 살검만 저지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활화산처럼 터져 버린 여숙상의 분노가 조금만 진정되기를, 생을 포기해 버린 구류검수의 허탈한 마음이 조금만 가다듬어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해서.

방금 전 벽리군이 사령 살수들을 조종해 여숙상의 살검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자신의 목은 땅바닥에 뒹굴고 있을 게다. 벽리군의 노력은 여기까지다. 살문 살수들은 약속을 지킨다. 여숙상과 구류검수. 둘 중 누가 죽어도, 두 사람이 모두 죽어도 살문 살수들은 두 번 다시 검을 들지 않을 게다. 죽을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떠나고…… 모든 것이 정리된 다음에야 모습을 드러내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 고작이리라.

그것이 구류검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니까. 단적인 예로 사령 살수들은 구류검수에게 ‘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들은 구류검수를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적사와의 인간 관계를 고려하여 수족으로 남기를 자처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형님’이라고 부른 것은 조금이라도 주의를 분산시켜 한곳으로만 빠져드는 마음을 건져 내려는 의도다.

구류검수에게 벽리군의 마음이 따스하게 전해졌다.

‘그래도… 소용없는 것을……’

구류검수는 죽음을 각오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여숙상은 변명 한마디 들어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만한 가치조차도 없는 게다. 그런데 더 무슨 말을 하랴. 냉정한 마음을 찾아서 같이 검이라도 들고 싸우라는 겐가?

구류검수에게는 산다는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사매, 아니, 사매라는 말도 모욕이 되겠군.”

이토록 세상을 살기 싫었던 적은 없다. ‘사매’라는 말이 아니라 ‘여매’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꿈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다.

“독심미화라고 불러야겠지. 후후! 독심미화, 싸워볼까? 아무래도 여기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죽어야 할 것 같군.”

구류검수는 사령 살수들이 벌어준 시간을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 벽리군과 사령 살수들이 바란 것은 구류검수가 여숙상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사랑하고 있는지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이 오직 한 여인, 여숙상에게 있다는 것을…… 그래서 여숙상의 마음이 돌려지기를.

구류검수는 불필요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서글픈 마음은 자신만의 생각이고 여숙상은 복수귀가 되어 혈검을 들고 있다.

‘빨리 죽는 것이 좋겠어.’

구류검수는 여숙상을 재촉했다. 빨리 검을 들어 공격해 오라고.

쉬이익……! 검광이 허공을 날았다. 초식을 보니 너무나 눈에 익다. 이십사수 매화검법으로 구류검수도 침식을 잊고 수련하던 검법이다.

‘매화몽염, 훌륭한 초식이군. 아주 잘 익혔어.’

구류검수는 여숙상과 함께 매화검법을 수련했다. 서로 장단점을 비교하면서 버릴 부분은 버리고 보충할 부분은 더욱 열심히 수련했다.

그때는 늘 웃었다. 구류검수도, 여숙상도… 그리고 두 사람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그시 쳐다보던 유홍도. 사형과 사매가 주고받는 눈길에서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면 그때 일은 없었을 것을. 아니다, 그래도 그와 같은 일은 벌어졌을 게다. 사형과 사매는 서로 연모하는 사이였고 자신은 혼자만의 짝사랑에 불과했으니.

‘사매, 네 손에 죽어 다행……’

구류검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의 목을 막 베어내려던 검이 뚝 멈췄다.

“왜 웃는 거지?”

“……!”

할 말이 없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준비해 둔 말이 없다.

“비웃는 거야!”

“……”

그것은 아닌데, 옛날 다정했던 때를 떠올렸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래서 웃은 것뿐인데…… 뭐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검은 왜 안 가져왔어! 동정심이라도 유발해서 살려주기를 바라는 거야! 몸은 빼앗아도 차마 목숨은 못 빼앗겠어?”

“사, 사매!”

“더러운 입 나불거리지 마!”

“……”

여숙상이 검을 내렸다. 구류검수는 죽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사내다. 말을 나눠서 아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안다.

한참 동안 노려보기만 하던 여숙상이 입을 열었다.

“널 여기서 데리고 나가야겠어. 만인이 네 얼굴에 침 뱉는 모습을 봐야겠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만들어줄게. 호호호! 따라올래?”

‘사매……’

구류검수는 마음이 아렸다. 하지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왜? 겁나?”

“한 가지만 약속해 준다면……”

“호호호! 목숨은 아깝지 않다면서 두려운 건 있는 모양이지? 내게 지금 뭘 약속해 달라는 거야? 뻔뻔스러운 자식!”

여숙상의 얼굴은 분노로 이글거렸고 그럴수록 구류검수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내… 마지막 숨…… 이 세상에서 내쉬는 마지막 호흡만은… 직접 거둬주기 바래.”

“…….!”

“그 약속… 그 약속만 지켜준다면……”

여숙상은 냉정했다.

“약속? 약속은 인간끼리 하는 거야. 마음이 있는 사람끼리 하는 게 약속이야. 네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 더러운 자식! 일어서!”

검이 들이밀어져 턱 밑을 추켜올렸다. 구류검수는 묵묵히 일어섰다. 살문 살수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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