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57화
퍼억! 푸우우……!
검날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갈비뼈를 으스러뜨리고 내장을 토막냈다. 손목에 전해지는 울림은 묵직했다. 적에게는 죽음이 나에게는 삶이 선택되는 순간.
“크윽!”
뒤늦은 비명은 ‘이겼다’는 쾌감을 전해주는 날갯짓이다. 다른 때 같으면 죽는 자의 얼굴도 보았을 게다. 적어도 어산적 생활을 할 때는 그랬다. 죽는 자의 얼굴을 노려보았고, 고통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며 승리자의 쾌감을 누렸다.
죽음, 아니면 삶. 양단간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누구나 삶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설혹 수천 명을 죽여야만 한다고 해도 삶을 택하리라.
살신성인? 과연 그럴까? 불가의 승려들은, 도가의 도인들은 남을 죽이는 대신 자신이 죽을 수 있을까?
적은 죽었다. 검날이 몸통을 반이나 가르고 들어갔으니 죽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자는 거들떠볼 필요도 없다. 절정의 무공을 익혔어도 이런 상태에서는 반격할 힘이 없다.
소여은은 검을 뽑아냈다.
푸아악……!
옆구리에서 진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 혈흔이 묻어 나왔다. 진득하게 묻은 것이 아니라 물통 속에 담갔다가 꺼낸 것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여은은 손목을 꺾어 왼쪽에서 짓쳐오는 창날을 쳐냈다. 양가의 창법은 매섭기 이를 데 없다. 사용하는 병기는 창이되 때로는 단봉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죽장이 되기도 하며, 또 때로는 화살처럼 날아들기도 한다.
따앙!
나무로 만든 창대이건만 검에 맞부딪치는 소리는 쇠와 쇠가 얽히는 소리다. 창날이 등 뒤로 흘러갔다. 검에 튕겨져 나갔으니 되돌아오려면 약간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이것 역시 다른 때 같았으면 창대를 타고 바싹 다가들었으리라.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앞에서 몸을 양단할 듯 다가서는 강도를 맞이해야 한다.
따아앙……!
검이 도를 받아넘기며 강한 울음을 토해냈다.
소여은은 검으로 밀어 올리는 기세를 빌어 상대의 가슴팍으로 바싹 다가서며 좌장을 내쳤다. 야조일섬에 몸을 싣고 뻗어낸 복마장법.
퍼엉!
상대의 가슴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공동파의 절학 중에는 이런 초식이 없다. 야조일섬이란 신법은 음풍조라는 조법을 펼치기 위해 마련된 신법이다. 눈 뜨고 있어도 코 베어간다는 속담처럼 자각하고 있어도 당할 수밖에 없는 음유한 무공이다.
음유하다는 말이 풍기는 인상처럼 야조일섬이나 음풍조나 기습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녹림마왕은 양강의 성격을 지닌 복마장법에 야조일섬을 접목시켰다. 기습의 의미 대신 막강한 파괴력으로 일거에 승부를 결정지으려는 의도에서다. 녹림마왕의 경우에는 자의든 타의든 녹림에 몸을 담았고, 공동파 무인들과 손속을 겨루는 입장이었으니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없지도 않았을 게다.
그에게는 무리수가 가미된 공격이라 해도 공동파 무인들이 예상하지 못한 기습 공격이 절실히 필요했으리라. 조용하게 움직이는 몸에 거세게 뻗어내는 장법은 아무래도 조화롭지 못하다. 위력은 강하나 무리수를 가미한 공격이다. 일격이 실패할 경우에는 앞가슴에서부터 복부, 등 뒤까지 무방비 상태로 환히 노출되는 생사의 무공이다.
소여은은 녹림마왕의 절기라 할 수 없는 절기를 무의식중에 펼쳤다. 사실 어산적에게는 이런 기습 공격이 큰 효과를 보았다. 어산적 해적들은 일격에 내포된 허점을 발견해 내지 못했고, 더러 무공을 익힌 자가 허점을 포착하기도 했지만 반격을 가해올 만큼 고절한 무공을 지니지는 못했다.
어산적 생활을 하는 동안 무림인과 생사를 다툰 적도 많지만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녹림마왕의 비전비기는 목숨을 구해주는 구명줄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몸에 배어 어느 무공보다도 익숙한 공격이 오랜만에, 생사가 급박한 처지에서 쏟아져 나갔다. 녹림마왕이 절정고수에게는 절대 사용하지 말라던 당부를 까마득히 잊고. 아니, 잊었다기보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편이 옳을 게다.
푸아악……!
도로 공격한 자이니 하후가 무인, 그는 입에서 피화살을 솟아내며 뒤로 넘어갔다. 소여은은 다음 상대를 찾기 위해, 혹은 이미 짓쳐오고 있을 병기를 감지해 내기 위해 느낌을 찾았다. 팽팽하게 곤두서 있는 전신 감각은 설혹 등 뒤에서 조용히 짓쳐오는 비수라도 감지해 낸다. 그만큼 수련했고 믿을 수 있다.
‘헉!’
소여은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무엇인가 어두운 그림자 같은 것이 등을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경우는 오직 하나, 텅 빈 등을 노리고 달려드는 병기가 있을 때이다. 소여은은 힘껏 몸을 비틀었다. 지금은 경악성을 내지를 여유가 없다. 아니, 이런 상황에 익숙한 그녀의 몸과 감각이 경악성을 내지르는 대신에 신법을 전개하여 피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움직였다. 그러나,
파아앗!
벌겋게 달군 인두가 어깻죽지를 짓이겼다.
“아악!”
소여은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이를 악물고 참으려 했지만 전신 뼈마디가 가닥가닥 끊어지는 듯한 고통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지독한 것이었다.
창날이 보였다. 뒤쪽에서 어깨를 꿰뚫고 앞으로 삐져 나온 창날에는 붉은 피와 허연 살점이 묻어 있다. 소여은이 순간에 불과하지만 아주 잠깐 사이에 눈여겨본 것은 창날의 움직임이다. 창날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창을 찔러 넣을 때 순간 회전력을 가미했다는 증거다. 창날이 빙글빙글 돌며 뼈마디를 부수고 살을 찢어놨으니 고통이 그렇게 컸을 수밖에.
양가의 창수가 어떤 초식으로 창을 찔러 넣었는지는 모르지만 육신을 관통했으니 다음 수는 오직 하나, 창을 빼내는 것뿐이다. 전신랍창. 몸을 돌려 창을 당겨내야 한다.
소여은은 검을 들어 창대를 비스듬히 후려쳤다. 창대는 직각으로 갈라치면 절대 잘라지지 않는다. 비스듬히 결을 타고 잘라내야 한다.
써걱!
창날이 창대에서 분리되었다. 그 순간 예측했던 대로 창날이 쑥 빠져나갔다. 창날이 붙어 있었다면 또 한번 살점을 후벼놓고 빠져나갔을 터이지만 창날 없는 창대는 수월하게 빠져나갔다.
소여은은 번개처럼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검, 몸을 돌리며 전신의 회전력을 가미하는 검, 복마검법 중 휘호관일이라는 초식이다.
싸아악!
창대는 중간 어림에서 잘려 나갔다. 상대는 소여은이 예측한 대로 반마보 상태로 한 손은 창자루를 잡고, 다른 한 손은 중단을 잡은 채 창을 뽑아내고 있었다.
상대의 부릅뜬 눈이 바짝 다가왔다. 무척 놀랐을 게다. 일격을 정통으로 당하고도 반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게다. 소여은의 휘호관일은 창의 중단 부분까지 싹둑 잘라 버렸다.
쒜에엑!
창대를 자르고 하늘로 올라간 검이 비룡유사의 초식으로 바뀌며 급격하게 쏟아져 내렸다.
“헉!”
상대는 짧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는 물러서려고 했다. 그러나 몸의 중심이 뒤로 빠진 상태에서 신법을 제대로 펼쳐 낼 리 없다. 격전 도중이었으면, 치열하게 공방을 펼치고 있는 상태라면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마음이 풀어진 후다.
빠아악!
검날이 사정없이 머리를 두들겼다. 산뜻한 소리가 울리지 않고 둔탁한 소리가 난 것으로 보아 칼날이 정통으로 들어간 것 같지 않지만…… 상관없다. 상대를 죽일 정도의 힘은 깃들어 있다.
소여은은 무너지는 상대의 가슴팍으로 뛰어들었다. 상대를 마저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옆에서, 뒤에서 밀려오는 도기를 피하기 위해서다. 하후가 무인들과 양가 창수들은 서로 손발을 맞춘 것도 아닐 텐데 협공은 정확하게 아귀가 맞았다. 마치 협객술이라도 연마한 것처럼.
‘이러다간 당하고 말겠어!’
싸움에서 절대 금기시하는 조바심이 치밀었다. 벌써 몇 명이나 죽인 걸까? 죽이기는 죽였는데 몇 명이나 죽였는지 헤아리지도 못하겠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죽여서가 아니라 합공해 오는 무인들의 신랄함에 정신을 돌릴 겨를이 없다. 적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다. 다가서는 자를 물리치는 것만도 급급하다.
쒜엑! 쒜에엑……!
솜털까지 곤두서게 만드는 날카로운 도풍이 스쳐 지나갔다. 일도는 머리에 바짝 붙어서 머리카락을 잘라내며 지나갔고, 또 다른 일도는 옆구리에 섬뜩한 통증을 만들어내며 지나갔다.
쒜에엑……!
또다시 밀려오는 도기. 소여은은 지나간 자들을 쫓을 겨를도 없이 새로이 다가서는 적을 맞이했다. 도기는 하늘에서 벼락처럼 떨어져 내린다.
‘치잇!’
검을 들어 올렸다. 내려치는 도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나 지금은 반보조차 옮길 겨를이 없다. 만약 피하려고 보법을 전개하거나 신법을 전개했다가는 일도양단되기 십상이다.
어떤 자가 어떤 식으로 공격해 오는지조차 보지 못했지만, 보고 나서야 알 수 있다면 그는 상승 고수가 아니다. 병기를 들고 무림을 활보하려면 보지 않고도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지경 정도에는 이르러야 한다. 공격해 오는 자들…… 하후가 무인들, 양가 창수들… 그들은 모두 그런 지경까지 무공을 익혔다.
따앙!
검에서 험상궂은 소리가 터졌다. 도법을 전개한 자에게는 맑은 검음으로 들렸을 게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로, 하지만 소여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로 들렸다. 검이 중간에서 반 토막으로 부러져 나갔는데 듣기 좋을 리 있는가.
쒜에엑!
총격의 여파로 잠시 멈칫하던 도기가 다시 내려쳐 왔다. 소여은은 반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조금 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검이 부러졌지만 애검이 검신을 부러뜨리는 마지막 충성 덕분에 반 걸음 비켜설 여유를 얻었다.
예도가 오른팔에 긴 도혼을 그리며 흘렀다. 소여은의 상반신은 피로 물들었다. 적들이 흘린 피도 상당히 많이 묻었지만 자신이 쏟아낸 피도 만만치 않다.
‘틀렸어. 지독히도 강한 놈들!’
소여은은 반 토막 남은 검을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창이든 도든 어느 병기에든 목숨을 맡겨 버리고 싶은, 그냥 이제 편히 쉬고 싶은. 그때,
“차아아앗……!”
마른하늘에서 내리치는 천둥인가, 아니면 구름 속에 노니는 용의 울음인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거센 고함 소리에 소여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돌려지고…… 봤다.
소고가 힘겹게 싸움을 벌이고 있다. 몸을 움직이지도 못할 중상이건만 마지막 안간힘을 쏟아내고 있다. 도수 두 명만 해도 지금 상태로는 감당하기 힘들 터인데 창수 두 명까지 가세해 있다. 소고의 전신도 자신 못지않게 붉은 선혈로 뒤덮여 있다.
그러나 소고는 포기하지 않는다. 마지막 일격으로 동귀어진이라도 하겠다는 심산이 역력하다. 살기가 너무 진해 공격하는 자들까지도 소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이 소고의 목숨을 아직까지 살려놓고 있다. 만만치 않은 적이라면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일격을 쳐냈을 텐데, 소고처럼 중상을 입어 수족을 마음대로 놀릴 수 없는 여인에게 동귀어진당하는 것은 개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게다.
도수 두 명과 창수 두 명은 어린아이 놀리듯이 빙빙 돌며 소고의 전신을 난자하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소고는 제풀에 꺾여 쓰러질 게다. 누가 봐도 상황은 명확해 보인다.
‘언니마저! 그래! 난 적각녀야! 어산적에 있을 때부터 늘 죽음을 옆에 두고 살았어! 난 적각녀야!’
소여은은 반 토막으로 부러진 검을 버렸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적들이 무슨 뜻인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소여은은 녹피혜도 벗었다. 생각해 보니 사치다. 맨발로 산야를 뛰어다니던 적각녀가 사슴 가죽 신발을 신고 있다니. 묵월광에 몸담은 이후 참 많이 나태해졌다.
맨발로 땅을 딛자 땅의 촉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품속에 간직했던 은장도를 꺼내 들었다. 살혼부가 그녀에게 준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 극독이 묻어 있어 살갗을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는 독도. 살혼부 살수들이 중원 절정 고수들에게 쫓길 것을, 십망을 생각하며 무공도 모르는 어린 계집아이에게 줄 만큼 믿음직한 암도.
‘그래, 새로 시작하는 거야. 나는 적각녀!’
갑자기 기억 깊숙이 묻어두었던 한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온후한 인상에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할아버지 같았지만 옷을 벗기고 침상으로 끌어넣고 전신을 더듬던…… 양물을 물어뜯었을 때 내지르던 비명……
“감히 날 건드렸단 말이지! 차앗!”
소여은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창수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