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66화
“혈살편복!”
유구가 놀라 소리쳤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혈살편복이 죽는 모습은 너무도 뚜렷하게 보였다.
“유구.”
종리추가 조용하게 불렀다. 혈살편복의 죽음이 있었는데도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은 듯 고요한 음성이다.
“살고 싶나?”
“주공, 그게 무슨 말씀……”
“아까 모진아가 그러더군. 남만으로 데려가겠다고.”
“……”
유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는 낯선 물음이다. 그도 종리추와 모진아가 나누는 말을 들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자신을 데려가겠다는 말은.
“남만으로 가려면 전제 조건이 있어. 살아야 한다는 것. 모진아는 살고 싶어했어. 너도 그런가?”
“주공, 주공의 명이라면 지옥 불 속이라도……”
“살고 싶다는 말이군. 살수는.. 사는 데도 조건이 있다. 잘 도망 다녀야 돼. 도망가면 살고 머뭇거리면 죽어. 이 말을 꼭 명심해.”
유구는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종리추는 살문 살수들 모두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게다. 상대할 수 없는 무인을 만나면 도망가라. 억지로 싸우지 말고 도망가라. 자신의 역량과 상대의 역량을 냉철히 판단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하고만 싸워라.
종리추는 담담하지 못하다. 혈살편복의 죽음이 그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었기에.
종리추가 천객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구는 황급히 눈시울을 소매로 쓱 눌러 닦고 종리추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당신들… 정말 주종 간이네.”
소여은이 지나가는 듯 한마디 했다. 소고와 소여은의 눈동자도 종리추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살문 살수들이 물러간 구릉은 텅 비었다. 천객 세 명이 걸어가고 있는 길은 바람 한 점 없는 무풍지대다. 그들을 막을 것은 없다. 세 사람은 종리추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적이지만 대담한 놈이야. 나 같으면 줄행랑을 놓았을 텐데.”
양가창법의 달인인 양청이 말했다. 하후가와 양가가 기습을 가했다가 하후가주는 죽고 양가주는 의문의 후퇴를 했다. 양청에게는 뼈아픈 사건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싸움에서 물러섰다는 것은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보다도 충격이다. 충격을 넘어 치욕스러움에 몸이 떨린다.
무인들이 많이 살아남았다. 소고와 소여은은 죽음 직전이었고 유구는 공격에 휘말리려던 참이었다고 들었다. 모진아와 종리추가 버티고 있지만, 폭풍처럼 휘몰아친다면 죽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싸움에서 물러섰다.
아버지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소문을 듣고 난 다음에는 전혀 모르는 낯선 타인처럼 여겨졌다. 아버지는 진정한 무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진정한 무인 중 한 분이다. 죽음이 확실하다고 해도 진정한 무공을 보기 위해서는 창을 치켜들 분이다. 백석강 싸움은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이 싸움이 끝난 후 아버지에게 가르쳐 주겠어. 진정한 무인이 무엇인지!”
양청은 으스러져라 주먹을 말아 쥐며 외쳤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아버지를 치욕으로 몰아놓은 종리추가 걸어오고 있다.
양청은 등에 둘러메고 있던 창을 풀었다.
“저놈은 내게 맡겨.”
양청은 낚시꾼이 낚싯대를 걸치고 가듯 창을 어깨 위에 걸쳐 놓고 걸어갔다. 그의 안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치욕을 안겨준 종리추를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이야.
“네놈이 종리추란 놈이군.”
“……”
“난 양청이라고 해. 네놈에게 꽁지를 말고 도망간 양가주가 내 부친이지.”
“양가주는 무인이야.”
“호오! 그래?”
“그런데 넌 망나니에 불과해. 사람을 죽이는 망나니. 양가주가 자식 농사를 크게 잘못 지었군.”
“하하하! 네놈이 평생을 같이 산 나보다 내 아비를 더 잘 안다 이거지?”
“사람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
“죽는 것도 그렇지. 죽는 것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
“양가주에게 미안하군.”
“……?”
“널 죽이게 될 것 같으니까. 내 생각인데…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양가주는 크게 슬퍼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백석강을 떠날 때부터 네 죽음을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하하! 좋아, 결정했어.”
“……”
“십망이라는 게 있었지. 아주 좋은 거였어. 너 같은 작자는 사지가 잘리고 눈알이 파지는 고통을 맛봐야 돼. 십망. 널 십망에 처해주지. 좋지 않아? 기뻐할 줄 알았는데. 병신으로 살망정 죽지는 않잖아? 이봐 인상 좀 펴.”
양청의 말을 듣는 순간 종리추는 미간을 찌푸렸다. 청면 살수를 보았다. 십망을 당해 사지가 절단되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오직 입만 살아 있는 청면 살수를. 살아 있는 육신이 아니다. 죽음보다 못한 삶이다. 처절한 갈망이 없었다면 혀를 물고 진작 죽었을 게다. 다른 것은 몰라도 대소변마저 남의 손을 빌려서 사는 삶이라면.
양청은 십망이 어떤 것인지 정말 알기는 아는 것일까? 십망을 집도한 사람들은 죄책감이 전혀 없는 것일까? 청면 살수는 종리추를 살수계로 끌어들였다. 그의 말대로 종리추는 살문 살수들을 건사할 책임이 있다. 이들 손에, 천객들 손에 죽게 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
종리추는 애검 적룡검을 뽑았다.
스르릉……!
적룡검이 붉은 노을과 어울려 붉은 울음을 토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노을이 더 붉은지 적룡검이 더 붉은지.
“좋은 검이군.”
양청이 비웃듯 말했다.
“적룡검은 피를 묻히지 않아. 그래서 좋아. 핏방울이 방울져 떨어지지. 네 말대로 좋은 검이야.”
양청이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천객들에게는 일반적인 무리가 통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기수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초식이라는 개념조차도 없는 것 같다. 손에 든 병기가 무엇이든, 창이든 검이든… 나뭇가지라도 상관 없는 것 같다.
창과 검의 대결에서는 일족일도의 거리가 모호해진다. 검의 공격 범위 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창의 거리를 파고들어 가야 한다. 사실 창의 거리를 파고드는 순간부터 싸움이 시작되는 것을. 어디에서부터 일족일도의 거리를 계산할 것인가.
종리추는 기습적으로 신법을 펼쳐 창의 거리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하!”
양청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창은 웃음보다도 빨랐다. 어느새 어깨에 걸치고 있던 창이 독아를 드러냈고, 종리추의 몸통을 노리고 찔러왔다. 양청은 창의 중단을 잡고 있다. 그것조차도 순식간이다. 종리추가 파고든 만큼 창의 거리를 죽인 것이다.
쒜에엑……!
종리추는 적룡검을 휘둘러 창대를 후려쳤다. 창대를 자르고자 하는 욕심은 없다. 창의 방향만 꺾어놓으면 다행이다. 양청의 창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분명히 공격해 오고 있었는데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쒸이익……!
양청의 창은 머리를 찍어왔다. 몸통을 찔러오던 창이 뒤로 빠지고 다시 머리를 찍어올 때까지 종리추는 적룡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에 그쳤다. 그것도 창이 물러간 빈 공간을.
“하하! 너무 느려. 그렇게 느려서야 어디 날 죽일 수 있겠어? 쯧! 입심만큼이나 무공도 강했어야지.”
종리추는 머리를 비켰다. 신법을 펼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창날이 귓불을 찢으며 스쳐 갔다. 머리카락도 잘려져 나풀거렸다. 귀에서 흐르는 피가 뜨뜻하게 목을 적신다.
‘바람… 바람의 노래를 들어야 하는데…… 들리지 않아.’
무엇 때문인지 늘 심신을 평안하게 해주던 바람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 무풍이든 강풍이든 노래를 부르는데, 마음으로 들어야 들리는 노래인데 들리지 않는다. 중단전, 마음의 밭이 황폐해졌다. 바람의 노래는 그래서 들리지 않는다.
‘그렇군. 모진아… 모진아 때문이야. 집중이 분산되었어. 모진아… 남만으로 가고 싶다고 했나? 그럼 살아. 살아서 돌아가. 절대 중원에 뼈를 묻으면 안 돼.’
주종 간이나 주종 간이 아니다. 모진아는 친혈육이나 다름없다. 역석이 죽었을 때도, 유희가 죽었을 때도 일가붙이가 죽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무림에 뜻을 두었고 살수가 되었으니 죽음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모진아는 큰 싸움을 앞두고 있다. 본인 역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받아들인 종리추도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싸움을 빨리 끝내려고 했던 것이 화근이다. 덕분에 평온해야 넓어지는 마음의 밭이 황폐해졌으니.
종리추는 삼단전에 진기를 휘돌렸다. 상단전이 열리며 세상이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중단전이 넓어지며 마음이 고요해졌다. 하단전이 충실해지며 기운이 넘쳐흘렀다.
파아앗……!
종리추는 양청의 가슴팍으로 뛰어들었다. 양청은 즐거운 표정이다. 그에게는 종리추가 생쥐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자신은 언제든지 생쥐를 잡아먹을 수 있는, 지금은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고양이 입장일 테고.
종리추가 사용한 검법은 무형초자의 천풍신공이다. 무형필살 삼십육초천풍선법이라는 긴 이름도 가지고 있다. 소고가 익힌 혈암검공 외에 사령관으로 키울 수 있다고 자신한 또 다른 무공이다. 적사가, 야이간이, 적각녀가 익혔을 수도 있는 무공. 순간의 판단으로 종리추가 익히게 된 무공.
적룡검이 양청의 몸에 닿기도 전에 강력한 암경이 쏘아졌다. 양청의 미간에 은은한 경악이 스쳤다. 그가 내지른 창은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놀라운 속도로 창을 내질렀지만 종리추는 일 보 옆으로 이동하는 간단한 신법만으로 피해냈다.
천객의 무공은 시간을 주지 않는다. 신법이나 보법을 펼칠 시간은 물론 몸을 비트는 것과 같은 간단한 동작조차도 용납하지 않는다. 양청에게는 종리추가 보법을 전개해 피해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그것은 종리추 역시 천객과 같은 경지의 빠름을 지녔다는 것을 말해주니까.
피윳!
적룡검의 암경이 양청의 귓불을 찢었다. 양청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노, 놀랍군! 네, 네놈이 구절법을……”
“언젠가 수하들이 물은 적이 있지. 천객을 상대할 수 있냐고.”
“……”
“그때 대답해 줬어. 구절법 정도는 어렸을 적에 익혔다고. 네가 수련한 구절법과는 다르지만 그와 흡사한 방법으로 무공을 수련했으니 익혔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내게 구절법을 가르쳐 준 곳은 천폭이라는 폭포야.”
삼단전 합일. 종리추는 그 효과가 구절법과 상응한다고 보았다. 한성천류비결로 삼절수사 정군유를 죽이며 확인했다. 양청과 맞서면서 재삼 확인했다. 구절법과 자신의 무공은 수련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의 거봉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후후! 천폭이라는 폭포? 미친놈! 구절법이 어떤 것인지나 알아?”
양청은 말을 하는 가운데도 십창을 쏘아냈다. 한성천류비결에 일수비백비가 있다. 양청의 십창은 일수비백비에 버금가는 무공이다. 천하제일창이라는 양가의 무인들이 한 번 창을 휘두르는 동안 양청은 십창을 휘둘러댄다.
창창창창……!
적룡검과 양청의 창이 맑은 울음을 토해내며 부딪쳤다. 십창을 전개할 때까지는 양청이 주도권을 쥐었다. 종리추는 막아내기만 했다. 그러나 양청이 십창을 거뒀을 때부터 상황을 바뀌었다. 종리추는 일검을 더 휘두를 내력이 남아 있다.
쒜엑……!
호흡을 다시 가다듬기 전에 내지른 일검, 무형초자의 무형필살이다. 검의 암경이 실렸다. 변화가 막측해 검끝이 흔들린다. 검이 부르르 떨고 있는 듯하다.
“엇!”
양청이 다급히 고함치며 신형을 틀었다. 종리추의 검이 조금 빨랐다. 양청이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어도 피할 수 있었으련만, 찰나의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
“으음……!”
양청은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우측 어깨에서부터 심장까지 비스듬히 그어진 검상은 필살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나, 난… 한 호흡으로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양청은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게다. 천부에서 물고기와 더불어 무공을 수련했다. 호흡이라면 천객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폐기로 비어 있는 목과 금을 채워 하단전을 충실히 했다. 덕분에 오독마군의 대연신공을 완성했다.
오독마군은 모두들 하나로 알고 있는 하단전을 다섯 개로 분류한 사람이다. 구연진해는 뛰어난 각법이지만 대연신공을 완성하는 주춧돌에 불과하다. 구연진해를 익힘으로써 대연신공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종리추의 내력은 천객이 추측하는 것보다 훨씬 순양하다. 양청은 한 가지 잊은 게 있다. 싸울 때는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