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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67화


혈영신마는 기회를 잡았다. 종리추가 믿고 이번 일을 맡겨준 것이 고마울 뿐이다. 그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최강의 무인과 싸우게 해준다는 것. 당금 무림에서 천객처럼 강한 자는 없다. 전에는 막연히 강하다는 생각만 했는데, 혈살편복이 당하는 모습을 보니 치가 떨리게 빠르다.

천객의 무공은 순간밖에 허락하지 않는다. 그토록 강한 무공이 어디 있던가. 혈영신공은 강하다. 무엇보다도 강하다. 거치적거리는 것이 있으면 모두 깨부수고 나갈 수 있는 무공이다. 그러나 빠르지는 않다. 파괴력이 강한 반면 빠름에서는 한 수 뒤진다. 종리추에게 그래서 졌다. 모진아와 싸울 때도 빠름에 뒤져 내내 고전했다. 천객은 모진아보다도 빠르다. 공격을 하는 순간 반격이 시작되고, 피를 부른다.

혈영신마는 종리추와 양청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싸움에 가담하지 않은 다른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다면 혈영신마에게 주어진 기회는 물거품이 되어 날아간다.

‘몸이 근질거릴 거야.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겠지. 어서 검을 쳐내. 어서!’

혈영신마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음인지 칠성검문 소문주 진조고의 검이 꿈틀거렸다. 양청과 종리추의 싸움이 예상외로 길어지고, 양청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 무렵이다.

천객은 감각적인 무공을 지닌 만큼 싸움을 보는 눈도 탁월하다. 양청과 종리추의 싸움 형세가 어떤지는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쉬이익……!

진조고가 신형을 날렸다. 양청에게 맡겨두어도 괜찮다 싶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있을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삼절수사 정군유가 종리추의 손에 죽었지 않은가.

혈영신마도 움직였다. 진조고의 발목이 눈앞을 스쳐 가는 순간 붉은 반점이 생긴 장심으로 발목을 움켜잡았다.

“엇!”

진조고가 놀랐는지 헛바람을 내질렀다. 천객에게도 시마공과 폭혈공은 통한다. 인체의 생기를 완전히 말살시킨 무공이니 통하지 않을 리 없다. 혈살편복이 당한 것은 그의 무공이 천객에게 뒤졌기 때문이다. 급습의 효력을 능가할 만한 무공을 지녔어야 한다.

잡은 발목을 확 끌어당긴 혈영신마는 벌떡 신형을 일으키며 일장을 쏘아냈다.

‘퍼엉!’

혈영신마는 가죽 북 터지는 소리를 기대했다. 중심이 무너진 상대는 얻어맞을 수밖에 없다. 붉은 반점으로 물든 장심은 진조고의 살갗에 스며들어 심장을 파괴할 것이다. 심장이 맞지 않아도 좋다. 복부를 가격하면 내장이 으스러진다. 몸 어느 곳에 맞아도 치명적인 내상을 당해 즉사한다.

혈영신공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파괴력이 강하다. 그런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혈영신마는 눈을 부릅떴다.

쒜에엑……!

가랑이를 쭉 벌린 진조고가 일장을 피해내고 일검을 뻗어왔다.

‘위험!’

생각과 동시에 신형을 띄웠다. 인간이란 동물은 위험에 직면했을 때 한 가지 반응만 나타낸다. 위험에서 피하고자 하는 동물적인 본능. 무인은 무공 수련을 통해 평범한 상식을 뛰어넘는다. 혈영신마가 몸을 날린 곳은 검권 밖이 아니라 안이다.

푸욱!

진조고의 검은 사정없이 복부에 틀어박혔다. 그 순간 혈영신마의 일장이 진조고의 머리를 짓눌렀다.

퍼엉!

인간의 머리가 터지는데…… 가죽 북 터지는 소리가 난다. 혈영신마가 듣고 싶었던 소리다.

“후후후!”

혈영신마는 잘게 웃었다. 겨우 천객 한 명하고 동귀어진을 할 줄이야. 진조고가 내뻗은 검은 등을 뚫고 삐죽 나와 있다.

여기에도 상식을 끌어 붙인다면 진조고는 죽지 않았어야 한다. 검이 복부를 뚫고 들어가는 순간, 손목을 약간 비틀기만 했어도 혈영신마는 반격할 기회를 잃었다. 쇠로 만든 흉기가 복부를 뚫고 들어와 장기를 잘라내는 고통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하다. 일장에 진기를 모아 무의식 중에 펼쳤어도 정확히 가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조고는 당황했다. 설마 혈영신마가 검권 안으로 뛰어들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진조고의 무공은 강했다. 하지만 무공만 강했지 진정한 무인은 되지 못한다. 진정한 무인이란 강한 무공을 익힌 것만이 아니라 오랜 수련을 통해 심신을 단련했을 때에만 탄생한다.

진조고는 강한 무공에 비해 수련이 턱없이 부족했다.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구비했지만, 그만큼 자신이 죽을 기회도 많아진 셈이다. 태산이 무너져도 당황하지 말라는 평범한 진리조차도 깨닫지 못한 무인을 어디다 쓰랴.

혈영신마는 풀썩 무릎을 꿇었다. 뒤늦게야 고통이 엄습했다. 전신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지독한 고통이다. 하지만…… 아직 쓰러질 때가 아니다. 양청과 종리추의 대결도 봐야 하고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모진아와 청운 진인의 싸움도 봐야 한다.

모진아는 두 번째 움직임을 포착했다. 첫 번째 움직임은 혈영신마의 몫이다. 모진아의 각법보다는 혈영신마의 장공이 좀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종리추의 판단은 적중했다. 혈영신마는 진조고를 급습했고, 성공했지만 빠름에서 뒤졌다. 조금만 더 빨랐어도…… 자신 정도만 빨랐어도 동귀어진 대신 일방적인 격살도 가능했는데.

진조고가 기습을 받자 청운 진인도 움직였다. 그가 노리는 사람은 역시 종리추다. 종리추는 천외천 무인들에게 상당한 짐이 된 것 같다. 모두들 종리추만 노리고 있으니.

그런 생각은 살문 살수들도 하고 있다. 중원에 산재했던 살수 문파들이 일제히 도륙당했다. 살문도 종리추가 있었기에 살아남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팔부령 싸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게다. 굳이 무인들이 손을 쓰지 않고, 그들이 동원한 살수들의 공격에 무너졌을지도. 대부분의 살수 문파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종리추 한 사람이 살문 전체를 감싸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외천이 유독 종리추만 노리는 것도 납득할 수 있고.

모진아도 혈영신마와 마찬가지로 청운 진인 바로 곁까지 다가가 기다렸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모진아는 누운 채로 신형을 빙글 돌리며 흑살각을 구사했다.

흑살각은 격중되는 순간 시커먼 멍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살갗만 시커멓게 멍드는 것이 아니라 내장이 뒤틀리도록 강력한 충격을 준다. 모진아가 노리는 곳은 다리다. 좀 더 몸을 일으켜 복부를 가격하고 싶지만 천객의 빠름을 무시했다가는 혈살편복처럼 죽음을 맞는다. 다리라도 부러뜨리면 성공이다. 청운 진인은 움직일 수 없게 되고, 그런 상태라면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다.

휙!

청운 진인은 간단히 다리를 들어 올려 급습을 피해냈다. 분명히 종리추를 향해 신형을 띄우는 중이었는데도 모진아의 급습을 피해냈으니.

모진아는 이런 경우까지 생각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다른 다리로 원음각을 펼쳤다. 원음각은 아무런 기교도 들어 있지 않다. 어린아이가 발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무의미한 발길질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간과했다가는 큰코를 다친다. 원음각은 타격 시점에서 전신 진기를 몰아치기에 흑살각에 격중된 것 같은 타격을 받는다.

청운 진인이 다시 다리를 들어 올리며 검을 뽑았다. 신속하게 뽑은 검이 아니라. 모진아를 보며 즐기듯 천천히 뽑아 들었다.

‘제길! 틀렸군.’

모진아는 기습에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혈영신마는 멋지게 성공했지만, 그보다 빠른 자신은 실패했다. 역시 거리를 요하는 각법보다는 느리기는 하지만 거리가 단축되는 장공이 기습에는 좋다. 특히 천객처럼 찰나의 시간에 생사를 판가름하는 무인을 기습할 때는.

모진아는 미련을 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모습을 보니… 모진아라는 자군.”

“중원인과는 조금 다르게 생겼지.”

“살결이 너무 검어. 남만 햇볕이 제법 따가운 모양이지?”

“황무지에서 억척스러운 잡초가 자라는 법이니까.”

청운 진인은 빙긋 웃었다. 중원인은 참 묘하다. 암연족 같으면 절대 말을 걸지 않는다. 말을 걸 필요도 없다. 어차피 너 아니면 내가 죽는 마당에 말을 나눠서 뭐 하랴. 그런데 중원인은 꼭 싸우기 전에 말을 건네온다. 자신의 식견을 자랑하는 것인지, 상대를 놀리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것인지.

“발음도 서툴고…… 못 올 데를 와서 날뛰었군.”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다. 이자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생각하는 시간을 벌었다. 천객이 빠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빠를 줄이야. 빠름이라면 구연진해도 못지않은데 이건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으니. 더군다나 청운 진인은 검을 들고 있고 자신은 육신뿐이다.

모진아는 혈영신마를 보았다. 순식간에 싸움을 끝내고 풀썩 주저앉은 혈영신마가 모진아를 보며 빙그레 웃어주었다. 고달픈 웃음이다. 고통이 스며 있는 웃음이다.

혈영신마는 등 뒤까지 튀어나온 장검을 뽑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검을 뽑는 순간 죽음이 일찍 다가온다는 것을 잘 알기에. 검을 뽑지 않으면 고통이 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보고 싶은 것은 종리추가 이기는 것, 그리고 자신이 청운 진인을 이기는 것이리라.

‘이 친구… 무공만 강한 게 아니었군. 진정한 무인이야. 허허! 하기는 십망까지 서슴없이 받아들였던 친구이니.’

혈영신마는 한 가지 소원이 있다. 혈영신공이 진정으로 강한 무공이라는 것을 무림에 알리는 것이다. 사마외도의 무공이라는 무림인들의 인식을 불식시키고 정종 무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

바랄 수 없는 소원이다. 십망을 받지 않았다면, 살수가 되지 않았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는 더 철저하게 굳어졌다. 사마외도의 무공으로.

‘어쩐지 남만의 폭우가 그립더니……’

모진아는 빙글빙글 웃는 청운 진인을 향해 신형을 쏘아냈다.

페에엑……!

그의 각법에서 강철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철편조차 끊어버린다는 단철각이다. 단철각에 이어 수라각을 펼쳤다. 사납기로는 아수라를 능가한다. 단철각마저 옆으로 흘러버리자 금강각을 뻗어냈다. 금강역사가 내지른 각법이다.

각 각법마다 내력의 운용 방법이 다르다. 초식은 상관하지 않는다. 똑같은 초식을 펼쳐도 수라각이 될 수도 있고 금강각이 될 수도 있다. 원음각처럼 평범하게 내지른 발길질이나 금강각처럼 막대한 힘이 깃든 각법이나 초식은 같을 수 있다.

모진아는 초식을 버린 지 오래다. 싸움에서는 초식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수많은 초식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섞어서 펼칠 수 있느냐에 따라서 싸움이 달라진다.

쒜에엑……!

청운 진인은 느릿하게 검을 전개했다. 모진아의 눈에는 분명히 느려 보였다. 하지만 순식간에 지척에 이른 검은 모진아가 자랑하던 철각을 자르고 지나갔다.

“크으윽……!”

모진아는 털썩 주저앉았다. 오른쪽 다리가 허벅지부터 잘려 나갔다. 상대 역시 초식을 펼치지 않은 것 같다. 검으로 다리를 베는 단순한 동작에 불과했다. 속도도 별로 빠른 것 같지 않았는데……

“사람이 말할 때는 들어야지. 못 올 데를 와서 날뛴다고 했잖아. 쯧! 그렇게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야. 하긴 그러니까 야만인이라는 소리를 듣지.”

모진아는 청운 진인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혈도를 지압해 출혈부터 막았다. 목숨에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다. 두 발로 상대했을 때도 상대가 되지 못했는데 한 발로는 더더욱 상대할 수 없다.

“그만…… 죽이지.”

모진아는 청운 진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래 주려고 했어.”

청운 진인은 무방비 상태로 다가왔다. 착각이다. 절대 무방비 상태가 아니다. 천객은 이런 상태에서 모든 급습을 막아내고 반격했다. 그때 ‘엇!’ 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양청이 다급하게 내지른 경악 소리다.

아주 잠깐에 불과하지만 청운 진인의 고개가 돌려졌다.

‘몸에 붙어 있어. 발을 들어 올리기만 하면 돼.’

모진아는 양팔로 땅을 짚었다. 그리고 남은 한 발로 힘차게 자오각을 떨쳐 냈다. 청운 진인은 쉽게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가슴에 일격을 받은 양청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반면에 종리추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천객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일구어냈다.

‘응?’

청운 진인이 무엇인가 이상한 예감을 느끼고 반응을 시작했을 때,

퍼엉!

모진아의 자오각이 낭심을 걷어찼다. 청운 진인은 펄쩍 뛰어올랐다가 나뒹굴었다. 그는 낭심을 움켜잡고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낭심이 터졌는지 붉은 핏물이 바지를 적셨다. 잠시 후 청운 진인은 축 늘어졌다.

“혈… 영… 신마!”

“주공.”

혈영신마는 밝게 웃었다. 종리추는 손을 쓰지 못했다. 부지불식간에 내뻗은 검이지만 정확히 내장을 관통했고 등뼈마저 갈라 버렸다. 혈영신마가 아직까지 숨을 거두지 않고 의식을 지킨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소원이……”

“말해.”

“혈영신공은… 정종 무공……”

혈영신마의 숨결이 점점 가늘어졌다.

“벽 총관에게 비급을…… 후인을 거둬… 반드시 정종 무공으로…… 똑같은 우를 범하지 않게 잘 지도해……”

혈영신마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종리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원한 소원이다. 종리추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또 혈영신공이 비급만으로 배울 수 있는 무공이던가.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 감사…… 그럼… 진조고가 기다…… 리고 있어서.”

혈영신마는 마침내 숨을 떨궜다. 그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다 보았다. 종리추가 이기는 것도, 모진아가 죽지 않은 것도.

“이, 이……”

모진아가 혈영신마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울먹였다. 살문 내에서 모진아와 쌍벽을 이루던 고수였기에 모진아의 슬픔은 더욱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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