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70화
종리추가 백석강에 이어 비객, 천객 무인들과 일장 격돌을 벌이기까지 노심초사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등천조다. 백석강 싸움이 끝나고 하후가와 양가의 무인들이 이유도 없이 물러섰다는 소문이 나돌 때쯤 등천조는 종리추의 전서를 받았다.
직투, 암은.
싸울 테니 몸을 숨기라는 말이다.
등천조에게 전서를 가져온 사람은 놀랍게도 개방 장로인 분운추월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승산이 없는 싸움인데……”
등천조의 판단으로는 숨어야 할 때다. 싸울 때가 아니다.
“낸들 아나? 놈이 하는 일인데. 쯧! 세상을 잘못 타고 태어났어. 아니지, 적지인살 같은 놈을 만난 게 잘못이지. 적지인살만 만나지 않았어도 살수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저… 상황이……”
“네놈도 알고 있잖아? 그대로야.”
등천조는 할 말을 잃었다. 언제나 허를 찌르는 문주이지만 이번만은 너무 무모한 것 같다.
“뭐라고 써 있어? 숨으라고 써 있지 않아?”
“네? 네.”
“모두들 위험해졌어. 나도 빨리 돌아가 봐야 해. 후개께서도 백척간두에 몸을 매달았으니. 잘 숨어. 한동안 정보니 뭐니 하면서 설치지 말고.”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등천조는 진심 어린 포권지례를 취했다. 분운추월 같은 노고수는 등천조 같은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만도 황감하다.
“그런 인사는 나중에 살아서 해도 돼. 살아남으면 술이나 한잔하자. 안주는 내가 장만하지.”
“개… 고기 말입니까?”
“왜? 싫어?”
“아뇨,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럼 됐어. 문주가 염려되겠지만…… 명심해 들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문주를 도와주는 길이야.”
“네.”
분운추월은 무표정한 눈길로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나 등천조는 그 눈길 속에서 따뜻한 인정을 읽었다. 전에는 모두 이런 눈길이었다. 하오문 문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쩌다 정파 무인들을 만나면 이렇게 포근했다. 그들의 가슴은 진정 넓었고 안온했다.
분운추월이 돌아가고 난 후 등천조는 바쁘게 움직였다. 서둘러서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는 해두었다. 그는 먼저 십점에게 전서를 띄웠다. 종리추가 보내온 전서 내용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다만 거기에 절대라는 말을 추가했다. 십점은 등천조가 직접 관리하는 수족이다. 그들 한 명을 잃으면 무려 만 명에 해당하는 정보망을 잃는 것과 같다. 전서구가 힘차게 날갯짓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 까마득히 멀어질 때까지.
다음에는 그동안 수집해 놓았던 정보들을 불사를 차례다. 살문에는 뛰어난 정보 수집가가 한 명 더 있다. 지금도 지도 제작을 위해 중원 곳곳을 누비고 있는 용금화. 용금화는 지도 제작을 위해서라지만 중원 곳곳을 누비고 있는 만큼 뛰어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는 또 등천조에게 한 가지 기법을 전수해 주었다. 수집한 정보는 반드시 분산시켜 놓을 것. 사본 한 부는 은밀한 곳에 은닉해 둘 것. 등천조는 용금화에게서 배운 기법을 고스란히 활용했다. 외장이 수집한 정보는 모두 네 군데에 걸쳐 분산되어 있다. 종합적으로 한곳에는 이미 지나가 버려 쓸모없어진 정보부터 최근의 정보까지 모두 모아져 있다. 그의 거처에 있는 정보들은 불살라 버려도 상관없다.
등천조는 미련 없이 집을 불살랐다. 그는 야트막한 야산에 올라 집이 완전히 불타 잿더미가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화르륵……!
불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생명체다. 살아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됐어. 이제 내 몸만 빼면…… 어디로 간다? 완전히 숨으라고 했으니 역시 큰 곳이 좋지. 이 기회에 미인이 많다는 항주나 돌아봐야겠군.’
등천조는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엇!’
불타는 집을 지켜본 사람은 그만이 아니다. 또 다른 노인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잿더미가 된 집을 쳐다보고 있다. 그걸 이제야 발견하다니. 등천조는 노인을 무시하고, 아니, 무시할 수 없지만 애써 무시하는 척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등천조.”
등천조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노인은 목적이 있다. 무림인이 분명하고……
‘천외천이군. 하! 사는 게 문주님을 도와주는 길이라는 말을 방금 들었는데…… 분운추월 장로님, 우리 술 한잔은 못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문주님,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놈이 누굽니까? 이런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으면 등천조가 아니죠.’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천외천이 자신을 찾아냈다면 십점 역시 찾아냈을 게다. 지금 이 시각, 그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낯선 손님을 대접하고 있을지도.
“후! 나도 늙었군. 퇴물이 됐어. 너 같은 자를 죽이려고 이렇게 먼 길을 왔으니.”
“존함이……?”
“무림 동도는 철권이라고 부르지.”
“철… 권 구양춘 선배님.”
이 노인이 무림삼정 중의 일인, 철권 구양춘이다.
“선배? 허허허! 선배는 무슨 빌어먹을 선배. 네놈이 부르라고 선배라는 말이 있는 게 아냐.”
“……”
“뭐 해? 빨리 죽지.”
“……?”
“죽으라니까! 죽여줘?”
등천조는 철권 구양춘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구양춘은 자신이 손을 쓰는 것조차 치욕스러워한다. 하기는 한낱 하오문도에 불과한 사람에게 손을 쓰는 게 수치스럽기는 할 게다. 등천조는 소검을 꺼내 자신의 가슴을 겨눴다. 구양춘은 쳐다볼 필요도 없다.
‘정말 사람들이 많이 변했어, 많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를 때가 좋았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다정한 줄 알았다. 무공이 높을수록 인품도 높은 줄 알았다. 세상이란 걸 알게 되면서 실망도 늘었다. 살문에 몸을 담그라는 천은탁 망주의 명령이 못마땅했지만, 정작 살문에 들어와 보니 인면수심으로 가득한 무림보다는 한결 좋았다. 적어도 살문은 거짓으로 위장되어 있지는 않다.
‘문주, 부디 사물령이 되시기를……’
등천조는 가슴에 소검을 틀어박았다.
탕탕탕……!
쇠망치 소리가 밤낮으로 이어졌다.
살천문주는 근 삼 일간 곡기를 입에 대지 않고 망치질에만 몰두했다. 주문이 많은 것도 아니고, 명기를 만드는 것도 아니지만 쉬지 않고 망치질을 했다.
“후욱! 후욱!”
입으로는 연신 거친 숨을 토해냈다.
살천문주는 진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본신의 선천적인 신력만으로 망치질을 했다. 숨이 가빠왔다. 섬서성에서 은밀히 청부 살인을 하던 광부와 좌리살검은 죽음의 길을 떠났다. 그들이 살아올지 죽어서 만날지는 신밖에 모른다. 수하들의 목숨을 자신보다 아끼는 종리추이니 죽음의 길로는 몰아넣지는 않으리라. 그러나저러나 이번 싸움은 너무 무모하다.
종리추는 천외천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 무인들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것과 같다. 천하는 넓다. 천외천만 상대하면 될 줄 알겠지만 그와 같은 조직은 얼마든지 나타난다. 끝도 없는 싸움을 시작한 게다. 좀 더 차분히 일을 풀어 나갔어도 된다. 자신을 무엇 때문에 합류시켰는가. 살문은 대래봉에서 움직일 수 없으니 자신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려는 목적이었지 않은가. 그래서 멀쩡한 사곡을 멸문시키면서까지 섬서성을 차지했는데. 모든 게 너무 급하게 흘러간다.
살천문주에게는 어쩔 수 없이 악마의 아가리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가리 저쪽은 도산검림이 가득한데 몸을 빼려 해도 뺄 수가 없어 강제로 질질 끌려 들어가는 모습.
“후욱! 후욱!”
탕탕탕……!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는 형체를 잃었다. 검을 만들고자, 낫을 만들고자 했다면 형체를 잡으며 망치질을 했겠지만 지금은 무작정 두들기는, 번뇌를 지우는 역할만으로 족하다.
“후후! 숨으라고? 나보고 또 숨으라고? 숨는 데는 소질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 숨으라니 말이 되나.”
살천문주는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모두들 떠났다. 그나마 잠시 정이 들었던 개방 호법들도 후개의 신변 보호를 위해 떠났다. 하오문주와도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다. 모두가 그때부터다. 종리추가 중원 전역에 걸쳐 살행을 시작한 때부터.
“이놈의 자식! 네가 사물령이냐! 네가 사물령이야!”
분풀이라도 하듯 내려치는 망치질에 쇳덩이가 흐물흐물 짓물렀다. 사물령이 간절히 생각난다. 살수가 되려면 사물령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언제나 이런 꼴이다.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검에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평생 살아온 길이 그런 길이었다. 내생에서는 절대 살수가 되지 않으리라. 젊어서 검을 들었고 살인을 했기에 계속 이 길을 걸어왔지만 다시 한 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살수가 되지 않으리라.
사물령?
웃기는 소리다. 천하를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종리추는 대단한 자다. 인정한다. 지금껏 살수들 중에 종리추처럼 싸움을 시작해 본 사람도 없었다. 모두들 구파일방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지 누가 검을 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만하면 뛰어난 게다.
탕탕탕……!
살천문주는 연달아 스무 번이나 망치질을 한 다음 망치를 한쪽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죽일 테면 빨리 죽이고.”
살천문주는 우두커니 섰다. 공격을 해보면 방어하거나 반격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다. 어쩌면 상대할 수 없는 자이기에 미리 포기하자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대장간 지붕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미타불! 살천문주, 끝내 악행 속에 몸을 빼지 못하는구려. 살천문이 몰락했을 때 몸을 뺐어야 하는데. 하기는 그렇게 쉽게 뺄 것 같았으면 평생을 걸어오지도 않았겠지만.”
“군소리는 그만하고.”
“아미타불!”
살천문주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누군지 안다. 간혹 살천문에 찾아와 무리한 요구를 했으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이자가 찾아온 다음에는 항상 살천문이 휘청거렸다. 무림의 절정고수를 암습하는 일이니 상당한 수의 살수가 죽을 수밖에 없고, 그런 직후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혈배를 들고자 하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이자는 도움만 청했지 도와주지는 않는 자다. 혈배를 들고자 하는 자가 아무리 강해도, 막강한 조직을 갖췄어도 혼자 해결해야만 한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자인데 죽음의 마당에서까지 이자에게 배웅을 받아야 하다니.
이런 자가 소림사의 계율원 원주라니. 명망 높은 고승 혜선 대사의 숨은 이면에 살수보다 더 강한 살심이 묻혀 있다니. 중원 천하에 고래고래 고함쳐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후후! 이게 살수의 운명이겠지. 종리추! 사물령이 되지 못하면 지옥에 올 생각도 하지 마! 멀쩡히 잘사는 사람을 살문에 끌어들여 가지고는.’
쉬에엑!
미미한 경풍이 불었다. 노리는 부위는 백회혈이다.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며 내뻗은 일격이니 묵중한 파괴력을 지녔을 게다. 아니, 꼭 지형적인 요건에서라기보다 이자가 지닌 무공은 너무 지고해서 검을 들어 상대할 수 없다.
퍼억!
살천문주는 백회혈에 묵중한 타격이 가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 이상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미타불!”
고승이 살천문주의 단단한 육체에 합장배례를 했지만 그가 무얼 하는지 살천문주는 알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