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73화
백천의는 여인의 머릿결처럼 윤기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은 세월의 무심함을 담고 흐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지난 일을 돌이켜 봐도 딱 꼬집어 생각나는 것이 없다. 일은 점점 틀어지고 있는데. 비객이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천객이 죽었다. 하양 진인은 무당파로 돌아갔는데, 사제는 점점 멀리 떨어져 나가고 있다. 개방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용두방주를 제거할 때만 해도 개방을 곧 움켜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뜻밖에도 후개라는 개방의 제도가 걸림돌이 되었다. 흑봉광괴는 그 점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생각은 했을 게다. 단지 후개가 그토록 거세게 반발할지 예측하지 못했을 뿐. 정보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니 속사정을 알 수 없다. 하후 가주가 왜 문도를 물렸는지, 양가주는 왜 물러섰는지 모든 게 미궁이다. 최근에 발생한 하양 진인의 돌연 복귀도 의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손아귀에 쥐었다고 생각했던 야이간도 점점 벗어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일이 틀어질 때는 손쉬운 것처럼 처리하는 게 순서.’
백천의는 사제부터 다잡을 마음을 굳혔다.
정운은 백천의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다. 사형이 찾아온 목적은 뻔한 것이다. 비객을 움직이라는. 동조할 생각이 없다. 사형에게는 원한이 많다. 동생 백천홍이 종리추에게 죽었고, 제수가 될 뻔했던 공화 소저도 팔부령에서 살문 살수들 손에 죽었다. 백천홍과 살문은 불구대천지수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무공도 천하제일을 다툴 만큼 높아졌고, 무엇보다 비객이라는 탄탄한 조직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다. 그가 할 일은 백천홍이 비객들 틈바구니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단단히 단속하는 일이다.
“사제.”
“말씀하시죠.”
정운은 앉은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백천의의 눈가에 노기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는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며 정운의 맞은편에 앉았다.
“비객이 사제를 제일비주로 뽑았다고?”
“강한 지도력을 필요로 해서.”
“잘했어.”
“하하! 잘하기는요. 귀찮은 일만 떠맡아서 성가신 판인데……”
“살문을 내버려 둘 건가?”
“사형이 있는데 뭘 걱정하겠습니까? 천외천 무인들도 득실거리고. 말이 났으니 말이지, 비객이라는 풋내기들보다는 백전노장의 천외천 고수들이 한결 낫죠.”
“……”
“봤잖습니까. 비객은 살문을 상대하지 못해요. 무려 절반 가까이나 죽었는데 더 나서봤자 피해만 커집니다.”
“그래서 사제의 생각은?”
“수련을 좀 더 시킬 생각입니다. 한 일 년이나 이 년쯤? 비객은 앞날을 위해서 비축해 두고 천외천 고수를 동원합시다.”
“사제, 진심인가?”
“사형도 참. 한참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에요.”
백천의는 정운의 생각을 읽었다. 이것은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 천외천 무인이 어디서 감히 무림 패권을 도모한단 말인가. 그런 짓은 하류 잡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순수한 뜻으로 사마외도를 완전히 몰살시키자는 것이 천외천의 뜻이다.
“사제는 명숙이 되었군.”
“아이쿠! 명숙이라뇨. 명숙은 사형이죠. 당금 무림에서 사형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백천의는 몸을 일으켰다. 정운의 뜻을 안 이상 오래 있을 필요가 없다. 구역질이 치민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비객들의 뜻이다. 한두 명도 아니고 오십여 명이 넘는데 그들 모두 정운의 뜻에 동조했단 말인가?
‘아니야, 여긴 뭔가 다른 게 있어.’
지금은 알아낼 수 없다. 비객들의 틈을 뚫고 들어갈 공간도 없을뿐더러 자칫하면 살문을 제거하기도 전에 정운과 싸움부터 일어난다.
백천의는 일어선 채로 말했다.
“사제의 뜻이… 무림제일인인가? 그렇게 되면 사문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하하! 사형도 참 걱정도 팔자십니다. 사문이야 어차피 봉문 상태 아닙니까. 앞으로 삼 년 동안은 무림에 나서고 싶어도 나서지 못하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좋아, 뜻대로 해봐.”
정운은 뜻밖의 말을 들은 듯 눈빛을 반짝였다.
“단!”
정운의 입가에 실소가 스쳐 갔다.
“비객을 한 번만 동원해 줘.”
“사형, 그건 아까 말했듯이.”
“그렇지 않으면 천외천과 싸우게 될 거야.”
“……”
천외천에는 진정한 강자들이 모여 있다. 비객이 그들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살수 비기를 익힌 정도다.
“후개를 죽여.”
“하하! 살문이 아니고 후개입니까?”
“소리 소문 없이.”
“사형, 살문은?”
“살문은 내가 처리하지.”
‘그다음은 네 차례가 될 거야, 구역질 나는 놈.’
사제가 이토록 미워 보인 적은 처음이다. 언제나 염려하고 보살펴 주었건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조차도 후회스럽다. 결국 이런 놈에 불과했던 것을.
정운을 만난 백천의는 발길을 옮겨 야이간을 찾았다. 여우처럼 간사한 자다.
‘네놈도 죽을 날이 있을 거야.’
백천의의 지금 심정으로는 단검에 베어버리고 싶은 놈이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개방이 완전히 손아귀에 들어올 때까지는. 무엇보다 백상을 완전히 움켜쥐기까지는 놈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백상의 자금력이면 천외천이 무난히 굴러간다. 구진법에 필요한 영물도 구할 수 있고, 때가 되면 자신과 비슷한 경지의 천객들도 양성할 수 있다. 천객이 스무 명만 돼도 사마외도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한 사람이 일 개 성만 맡아도 충분하다. 그때까지는… 그때까지는 이렇게 간사한 놈도 살려둬야 한다.
“어서 오십시오.”
야이간은 최대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배알도 없는 놈.’
백천의는 상석에 앉아 묵묵히 노려보기만 했다.
야이간은 뜻밖에도 침착하다. 백천의의 궁금증을 야이간이 먼저 꺼내놓았다.
“무림 정세를 살펴봤는데, 천객의 입지가 상당히 좁혀졌더군요. 살문은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리고, 반면에 비객과 천객은 죽어 나가고. 손해 보는 장사를 많이 했습니다.”
백천의는 야이간의 말투가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에는 존말을 사용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무엇인가 약점이 될 만한 것을 움켜쥔 게다.
‘역시 여우 같은 놈이었어.’
“거래를 제안합니다.”
야이간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능글거렸다.
“제안이라… 네놈이 죽고 싶은 게군.”
“하하! 이러지 마십시오. 이래 봬도 팔부령의 영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알고 있죠. 하후 가주까지 죽었으니 앓던 이가 쏙 빠진 느낌이에요.”
백천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놈이 움켜쥔 약점이 무엇인가. 완벽한 것이 아니면 본심을 드러낼 놈이 절대 아닌데.
‘놈을 너무 낮게 봤군.’
첫 대면에서 접한 야이간은 확실히 간사한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림에는 이런 인간이 비일비재하다. 길을 걸으면 발길에 채일 만큼 많다. 하후 가주에게 대충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라고 판단했다. 묵월광의 살수였다는 대목만으로도 죽여야 할 놈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살수는 절대 살려줄 수 없다.
“진주 언가에 백화탄금 언동 소저가 있습니다. 확 까놓고 말하죠. 중매를 서주십시오.”
“뭣!”
“직접 서주기 곤란하면 무림 명숙을 동원할 수도 있을 게고, 백상을 영도하는 신분이라면 언동 소저의 배필로 충분할 겁니다. 진주 언가의 사위가 되었는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제 나름대로 구명책이라고 생각해서 제안한 것이니.”
백천의는 착잡해졌다. 이제는 이런 놈에게까지 이런 말을 듣다니.
“네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야이간은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이 또한 얄밉기 그지없다.
“백상을 넘겨 드리겠습니다.”
“후후후! 백상은 네놈 것이……”
“천 노인을 장악하면 백상은 저절로 굴러 들어오죠. 천 노인이 제 수중에 있다면 믿겠습니까?”
“그걸 노리고 있었군.”
“부가로 정보도 드리겠습니다. 아! 그건 공짜입니다.”
야이간은 당당해졌다. 무공으로는 일 초 지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말한다. 사실 백천의가 백상을 손대지 못하고 있는 것도 천 노인 때문이다. 백상의 단결력은 무림인 이상이다. 그들은 각개로 흩어질 수도 있고, 한데 뭉칠 수도 있다. 그 역할은 천 노인만이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개방의 정보망으로도, 하오문의 정보로도.
“네놈이 지금 줄 수 있는 정보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실속있는 것이죠. 살문이 모자도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것.”
“뭣?!”
이런 정보는 없었다. 방대한 정보망을 가진 개방의 정보에도 걸려들지 않았다. 놈이 오고 있는 방향이 북쪽인 것만은 확실한데 팔부령도 북쪽에 있어 그리 가는 줄 알았다.
“확실한가?”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알게 될 겁니다.”
“좋아. 그럼 다른 정보도 알겠군. 하양 진인이 무당파로 돌아간 까닭은 무엇이지?”
“하하하! 후개 때문에 단단히 골머리를 앓고 있군요. 그러게 그런 자는 빨리 제거했어야 되는데. 그렇게 구멍이 뚫려서야 어디 대사를 도모하겠습니까? 하양 진인은 종리추와 비무를 했는데, 소문으로는 평수를 이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평수를 이룬 정도로 무당파로 돌아갈 리는 없고…… 아마도 천외천에 회의를 느끼지 않았나 싶습니다.”
백천의는 다시 한번 생각을 굳혔다. 야이간, 이자는 확실히 죽여야 할 자다.
“다른 부분은 중매가 이뤄진 다음에 거론하기로 하죠. 자, 그럼 소인은 이만. 조금 어루만져 줘야 할 여자가 있어서.”
야이간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깊게 허리를 숙였다. 모두들 구린내가 나는 자들뿐이다.
백천의는 모자도로 돌아오면서도 내내 분기를 삭이지 못했다. 정운… 야이간… 후개… 하오문주.
‘천외천을 강화시켜야 돼. 야이간이 천 노인을 수중에 넣었다면…… 그럴 리가? 아무리 개방에 구멍이 뚫렸다지만 그런 정보까지?’
속히 해치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살문부터 처리해야 한다. 혹 야이간이 잘못 안 것은 아닐까? 놈이 비록 간사하기는 하지만 거짓 정보를 흘릴 놈은 아니다. 하루 이틀이면 발각 날 정보를. 무엇보다 백천의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흑봉광괴가 개방을 움켜잡고 있으면서도 이런 하찮은 정보조차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방도 절반이 등을 돌리니 사태는 심각해진다.
‘우선 살문부터 처리하는 거야. 그다음은 후개.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 거야.’
백천의는 강력한 천외천을 꿈꿨다. 마두라는 자, 살수라는 자들이 감히 발도 못 붙이는 무림을 만들 생각이다. 힘이 없다면 모를까, 힘이 넘쳐흐르는데.
취국은 달콤한 잠에 빠져 있다. 볼수록 귀여운 여인이다. 아니, 사랑스럽다. 어떻게 이 여자를 모르고 살았나 싶은 마음이 든다. 야이간은 취국을 껴안았다.
“으응…… 안 자?”
“자야지.”
“자. 나 졸려.”
야이간은 취국의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다른 여인 같으면 신경질이라도 부릴 법한데 취국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아무리 피곤해도 몸을 만지는 것만은 거부하지 않는다. 모든 게 마음에 든다.
“후후!”
공연히 실소가 새어 나왔다. 백천의와 만났던 일만 생각하면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온다. 백상이 거둬들인 정보에 약간의 상상을 가미하자 그럴듯한 내용이 전개되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죽을 판이다. 어떤 수든지 써야 하는데…… 손에 잡히지 않은 백상이지만 무슨 수를 써서든지 요리해야 하는데.
백천의에게 모험을 걸었다. 각본은 머릿속에서 착실히 준비되었고, 준비된 대로 읊었다. 단 한 번의 모험이다. 백천의 같은 자에게 무공으로 싸운다면 정말 일 초 지적도 되지 못한다. 약간의 질투심도 끓어올랐다. 그가 거둬들인 정보에 의하면 종리추는 백천의 같은 자를 무려 두 명이나 죽였다. 모진아도 한 명을 죽였고, 혈영신마는 미련하게도 동귀어진을 했다. 죽으면 모두 소용없는 게다. 살아 있으면서 일을 도모해야 한다.
야이간은 백천의에게 백상을 인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역시 백화탄금 언동이야. 고것을 아내로 맞이하기만 하면 목숨은 부지되는 거지. 상권을 물려주지 않든 그것은 차후의 일. 백천의와 종리추를 잘만 붙이면…… 후후!’
하후 가주가 종리추에게 죽은 사건은 야이간에게 상당한 희망을 불어넣었다. 살문은 멸살한다. 무림 역사상 살문 같은 문파가 무림에 대항해서 살아남은 전례가 없다.
‘됐어. 내 꿈도…… 중원 제일의 갑부로 떵떵거리며 사는 거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 세상 잘 살다 죽으면 그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