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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88화


무불신개는 봉을 움켜잡고 싸움판을 예의주시했다.

어느 한쪽이 결정적으로 기울어지면 당장이라도 가세할 기세다. 고수끼리 겨루는 데 끼어드는 것이 도리는 아니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형편이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개방의 존속이 대두된 문제이지 않은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어느 한쪽으로 가세하여 길게 늘어지는 싸움을 종식시키고 싶지만, 혹여 있을지도 모를 다른 자들도 경계해야 한다.

‘그래도 다행이야.’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불어 쉬었다.

뜻을 달리한 장로들이 왔다면, 문도들이 왔다면 같은 개방도끼리 목숨을 겨뤄야 하는 골육상쟁이 될 뻔하지 않았던가. 흑봉광괴도 그것만은 피한 듯싶어 여간 다행스러운 게 아니다.

가만히 싸움을 지켜보던 후개가 말을 걸어왔다.

“오 장로, 호법을 정리해서 준비하세요.”

“…..네?”

“무슨……?”

“서로가 의지해서 뭉쳐 있어야 합니다. 흩어지면 죽습니다. 서로의 등에 의지해서 한쪽 방면만 막아야 합니다.”

“방주님, 지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바로 지금!”

쒜에엑!

차분히 말을 잇던 후개가 번개처럼 신형을 띄워 수풀 속으로 짓쳐들었다.

후개의 손에서 용두방주의 신물인 취옥장이 푸른 빛을 뿜어냈다.

따악!

단단한 바위를 후려치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불신개는 소리와 동시에 붉은 피보라가 허공에 난무하는 것을 보았다. 역시 천외천은 철권과 비영파파만 보내온 것이 아니다. 그건 그렇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뛰어나긴 했어도 후개의 무공은 비객을 크게 상회하지 않았다. 한때는 매화검수였으며 비객 제일 비주였던 유홍과 겨룬다면 비등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였다.

하나 지금은 일봉에 비객 한 명을 격살했다.

타구봉법 자체는 단 일성만 연성했을지 몰라도 무공에 큰 깨우침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방주…. 오! 방주!’

개방에 서광이 깃든다.

용두방주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후개와 더불어 용두방주의 재목으로 거론되던 청애유룡이 아깝기도 했지만, 역시 용두방주의 생각이 옳았다.

감탄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빨리 움직여야 한다.

무불신개는 호법들을 모았다.

“우린 모두 다섯, 오방을 맡는다. 등을 철저하게 맡기고 전면만 막아라. 달려들지 말라. 한 명이 달려나가면 네 명이 등을 내놓게 된다.”

“넷! 장로님!”

호법들도 사결씩이나 되는 사람들이다.

한마디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듣는 사람들.

무불신개와 네 호법은 서로 등을 의지하고 전장에 조금씩 다가갔다.

서로를 보호하고 있지만 어느 한쪽이 밀리면, 특히 비객 무리 속으로 뛰어들어 간 후개가 위험해지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야 한다.

비객은 아홉 명이 한 조다.

서로 한 생명처럼 손발을 맞췄다. 동시에 호흡을 풀고 동시에 진기를 끌어올리며 공격한다.

비객 살수들의 은신술을 배웠지만 살문 살수들과의 접전에서는 여지없이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무공에서도 뒤졌다. 모도에서 벌인 접전은 그야말로 참패다.

문일지백은 되지 않더라도 문일지십은 된다는 영재들이 그토록 경멸하던 살수들에게 참패를 당했다. 비객들은 놀고만 있지 않았다. 패인을 분석하고 보완책을 마련했으며, 무공 수련에 더욱 정진했다.

백천의 무공도 큰 자극을 주었다. 비공이 엇비슷하다고 자부했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절정 고수가 되어 등장할 수 있다면 자신들이라고 못할 리 없지 않은가. 칠성검문의 소문주인 진조고나 검곡의 소곡주인 우경삼 같은 경우에는 은근히 하수로 밀쳐놨던 자들이다. 그들 역시 상대할 수 없는 초절정 고수가 되어 나타났다.

개방의 구진법을 통과했다고 하지만 구진법 역시 무공 수련의 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다면 자신들도 할 수 있다.

비객들은 문파에서 배우고 익힌 무공을 참오하고 수련했다.

세상에 대한 생각은 일체 잊어버리고 오직 무공 수련에만 몰두했다.

세상사는 천외천이 주도하고 있다. 그들이 명을 내리면 비객은 행동에 옮긴다. 현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만,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당장은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온 마신들이라는 것을 뼛속 깊이 깨달았다. 비객들은 각 파의 무공을 교환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목숨을 부지하는 데 문파는 중요하지 않다. 당장 살문과 재접전을 벌인다면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종리추는 백천의에게 미룬다 해도 비객을 간단히 제압한 소고는 어떻게 할 것인가. 천애유룡을 단번에 죽여 버린 살문 살수들의 비기는 또 어떻게 막을 것인가.

후개를 암살하는 일은 비객들에게 좋은 실전 수련이 될 것이다.

사사사사삭…..!

쾌속하면서도 은밀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일조는 철권에게로 향했다. 이조는 분운추월에게로, 또 삼조는 무불신개와 사호법에게로 움직였다. 사조와 오조는 후개를 포위했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후개는 적으로 생각도 하지 않았다. 비객 한 명과 후개의 무공이 비등하다면 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지식이 풀리는 순간을 노렸다고는 하지만 후개는 비객 한 명을 너무도 쉽게 격살했다. 죽은 자는 아미파 고수다. 대정신공을 높은 경지까지 수련하여 향후 십 년만 지나면 내력으로는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거라는 찬사를 받은 자다.

그가 단 일봉에 죽었다. 이 개조가 매달리는 일이 있어도 단번에 승부를 끝내야 한다. 후개를 오래 살려둬서는 안 된다. 개방 장로들을 모두 놓치는 한이 있어도 후개만은 죽여야 한다.

사사사삭…..!

바람도 없는데 수풀이 일렁거렸다.

‘아차!’

후개는 성급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평소 같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터인데, 삼십육로 타구봉법에 성취를 얻은 다음이라 마음이 편안했다. 비객은 무시할 수 없는 자들이지만 마음 놓고 공격할 수 있었던 것도 누구든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첫 번째 비객을 격살할 때까지만 해도 잘못 행동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비객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기척조차 잡아낼 수 없을 때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단 한 번밖에 펼칠 수 없는 삼십육로 타구봉법을 전개할 수는 없다.

비객들은 다른 무공으로 제압해야 한다.

한데 그게 쉽지 않다.

쒜에엑….!

느닷없이 푸른 섬광이 터지더니 다리 쪽에서 싸늘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좌측에서는 철벽 같은 권벽이 밀려오고, 머리 위에서도 묵직한 느낌이 전해진다.

파라락….!

후개는 선풍처럼 회전하며 취옥장을 쓸어냈다. 취옥장은 단단하기가 쇠를 능가한다. 검이나 도와 부딪쳐도 잘라지지 않고 철퇴와 부딪쳐도 내력만 뒷받침된다면 절대 밀리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푸른빛 죽장에 지나지 않아 볼품없지만, 명검 보도에 뒤지지 않는 신병이다.

까앙! 파라락! 텅!

취옥장이 두세 개의 병기를 튕겨냈다. 후개가 펼친 취리건곤보는 분운추월에 뒤지지 않을 만큼 빠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물막을 촘촘히 좁혀온 비객들의 합공에는 금방 무력해지고 말았다. 분운추월처럼 취리건곤보를 충분히 밟을 수 있는 거리를 두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실수했어! 스스로 사지를 밟다니!’

무공이 지금보다 훨씬 못했던 집법당 당주 은잠룡 시절에도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다. 상대의 무공을 충분히 파악한 다음이 아니면 결정적인 일격을 날리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싸움은 언제나 시간을 오래 끌었지만 늘 승리했다.

아무래도 삼십육로 타구봉법을 수련한 도취감이 너무 컸다.

쒜에에엑….!

가공할 속도로 밀려오는 도기, 검기, 장공….. 기적이 없는 한….

‘엇!’

분운추월은 깜짝 놀랐다.

후개가 위험에 처했다. 어쩌자고 비객들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단 말인가.

한두 명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직감하고 있었으면서.

분운추월은 후개의 무공이 자신 이상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후개가 삼십육로 타구봉법을 수련했다고는 하지만 수련 기간이 너무 짧다.

선천적인 자질을 타고 태어났지만, 자질로 말하면 비객들도 모자라지 않는 영재들이다.

‘위험해!’

분운추월은 무불신개를 쳐다봤다. 전장에 끼어들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무불신개와 사호법이다. 그들이 움직여 주어야 하는데.

분운추월은 곧 안심했다.

후개가 위험해진 것을 본 무불신개와 사호법이 쏜살같이 치달려 가고 있다.

‘됐어. 나는…. 헉!’

쒜에에에엑!

분운추월은 난생처음 실수를 저질렀다.

정신을 올곧이 비영파파의 월영반에만 쏟아도 모자랄 판에 신경이 분산되는 우를 저지르다니, 후개의 신변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비영파파의 월영반은 정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을.

‘위험! 피해야……!’

파파팟……!

분운추월은 퇴보로 일보 물러선 다음 몸을 뒤집어 영원번측을 펼쳤다.

몸을 굴리며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월영반을 쳐내기 위한 신법이다.

타악!

첫 번째 월영반이 감각적인 각법에 걸렸다. 그러나 즐겁지 않다.

‘제길!’

쒜에에엑…..!

두 번째로 다가온 월영반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세 번째 월영반은 허벅지를, 네 번째 월영반은 다른 쪽 허벅지를 찢었다.

두 다리에 난 상처가 신법을 펼치기에는 무리할 정도로 깊다.

싸움을 잘 아는 비영파파이기에 다리부터 공격했을 게다. 아니다. 비영파파의 솜씨라면 두 번째 월영반으로 가슴을 찢는 것이 아니라 심장을 갈라 놓을 수 있다.

그녀는 손속에 사정을 남겼다.

“큭! 할망구, 그러지 마. 왜 사람을 구차하게 만들어.”

비영파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월영반을 거둬들임과 동시에 후개에게 치달려가는 무불신개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영파파가 달려오기 전 무불신개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쉬이익…..!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 실린 검풍에는 진득한 살기가 묻어 있다.

“조심해!”

무불신개는 고함을 지르며 첫 번째 검기에 부딪쳤다.

터엉!

검이 튕겨 나갔다. 들어오는 검은 볼 틈이 없었지만 나가는 검은 분명히 보았다.

무불신개는 곧바로 뒤쫓아가며 개방의 또 다른 절기인 용음십이수를 전개했다.

우우웅….!

손에서 용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손이 공기를 가르며 내는 울음소리다.

퍼엉!

가슴을 두드리는 기분 좋은 감촉이 전달되었다. 뼈마디가 부서지는 느낌도 전달된다. 다른 때 같으면 손속에 사정이라도 두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다.

피를 뿜어내며 쓰러져 가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텐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불신개의 눈에는 오직 위기에 처한 후개만이 들어왔다. 그러나 마음처럼 쉽게 몸을 빼지 못했다.

쒜에에엑….!

비영파파의 월영반이 무서운 속도로 짓쳐온다. 뿐만 아니라 땅거죽이 뒤집히며 눈에 익은 공격이 짓쳐온다. 그중에는…. 잔인하기도 하지. 개방의 타구십팔초도 섞여 있지 않은가.

비객…. 그들에게는 개방도도 포함되어 있다.

무불신개는 자신을 공격하는 자가 누구인지 안다. 호광성 덕안 분타주로 개방에서는 십걸 축에 드는 영걸이다.

“네놈이 감히!”

무불신개는 고함을 질렀지만 비영파파의 월영반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섬광처럼 날아오는 월영반은 무조건 피하는 수밖에 없다. 봉을 들어 막기라도 하는 날에는 눈이 달린 영사처럼 방향을 꺾어 봉을 미끄러져 공격해 온다.

그러나 지금은 피할 수도 없다. 그가 신형을 피하면 등을 맞대고 있는 사호법이 위험해진다. 사호법 역시 고전이다. 비객 두 명을 상대로 연수를 받고 있으니 쉽게 끝낼 수 없을 것 같다.

까앙! 까앙! 깡깡깡…!

무불신개는 천환봉법을 무려 이십여 초나 전개한 후에야 월영반의 그물막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공격해 오는 사람은 비영파파만이 아니었다.

쑤욱! 퍽!

지면을 바짝 스치고 불어온 타구봉이 복부를 내질렀다.

창자가 가닥가닥 끊기는 고통이 엄습했다. 눈앞이 번쩍 하며 별똥이 튄다.

세상이 캄캄해지고 숨이 턱 막힌다.

‘겨우 오결 제자에게…..’

무불신개는 서 있을 힘도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사력을 쥐어짜내 뒤로 빠지는 봉 끝은 잡아챘다.

“네 이놈!”

무불신개의 타구봉이 상대의 안면을 가격했다.

덕운 분타주는 타구봉이 잡히는 순간 봉을 놓아버리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역시 무불신개의 역습이 한 발 빨랐다.

뻐억!

덕안 분타주가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이마에서 가는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곧 가는 피는 굵은 혈우가 되어 줄줄 흘렀다. 덕안 분타주가 손을 들어 피를 받았다. 잠시.. 아주 잠시… 신형이 무너지기 전까지 아주 잠시.

무불신개의 광노는 반도를 죽였다. 하지만 그런 광노가 자신마저도 사지로 몰아넣었다.

쑤욱! 쒜에엑…..!

덕안 분타주와 같이 협공을 가했던 비객들의 검과 도가 일제히 무불신개의 육신을 파고 들었다.

“커억! 네 이놈들!”

검이 빠져나갔다. 들어올 때보다 직각으로 방향이 꺾인 검은 살과 뼈를 가르며 빠져나갔다. 가슴을 파고든 도는 잔혹하다. 도는 허파를 갈라 버린다.

“….”

폐에 구멍이 생기면서 무불신개는 말도 하지 못했다. 눈만 부릅뜬 채 후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 서광이 서렸다.

‘아! 방주!’

그는 보았다. 후개의 놀라운 신위를. 이것이 바로 삼십육로 타구봉법의 실체인 것을.

‘일성이라고 했어. 일성… 일성이 이 정도… 후후후! 이제 개방은 영원 제일…’

그는 눈을 감았다. 서 있는 자세 그대로 꼿꼿이.

‘어쩔 수 없어.’

후개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르자 오직 한 가지 무공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삼십육로 타구봉법을 써야 한다.

수련과 실전은 많은 차이가 있으니 타구봉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위기를 벗어난다고 장담하지는 못한다.

‘타구봉법을 사용하면 반드시 적을 죽여야 한다. 어쩌면 내가 처음으로 개방에 오점을 남길 수도.’

생각은 지극히 짧은 순간에 이루어졌다.

기회를 잡은 비객들의 합공은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일로, 오른발을 앞으로 일보 내딛고 상체를 우측으로 틀어 개보가 되며…’

삼십육로 타구봉법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수련할 때는 근 한 시진에 걸쳐 천천히 수련했지만, 평상시대로 움직이면 일 다경 만에 삼십육로를 밟을 수 있지만 지금은 찰나간에 십여 로를 밟았다.

이것은 후개에게도 모험이다. 그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무공을 수련한 적이 없다. 하지만 사방에서 짓쳐오는 검과 도, 봉 등 숱한 공격을 막으려면 이런 식으로 풀어 나갈 수밖에 없다.

극점에 모인 진기는 첫 번째 상대에게 부딪친다. 두 번째, 세 번째 상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진기를 잃고 실 끊어진 연처럼 휘청거리는 취옥장으로 내력이 가득 실린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아니, 삼십육로 타구봉법이 빠르기는 하지만 첫 번째 상대와 부딪친 다음에도 빠름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진기를 모두 쏟아냈는데도?

퍼엉! 따따따따닥…!

첫 번째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좌우지간 그는 병기를 놓쳐 버렸다. 비객쯤 되는 사람이 병기를 놓쳤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내력이 밀려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격음이 연속되었다. 머리에, 얼굴에, 어깨에… 첫 번째 상대는 알맹이를 드러낸 꽈리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나가떨어졌다.

따다다닥….!

취옥장은 여전히 살아 움직였다. 한 가지 의문은 풀렸다. 첫 번째 상대를 눕히고도 취옥장에는 극점에서 쏟아져 나온 진기가 실려 있다는 것.

터엉! 텅텅텅….!

병기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일부는 첫 상대처럼 병기를 놓쳤고, 일부는 타격을 당했다. 또 일부는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후개는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취옥장을 놓고 싶다. 몸에 걸치고 있는 옷조차도 무겁게 느껴진다.

머리가 자꾸 숙여지고 전신에서는 비 오듯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뒤로 물러선 비객들이 경악에 찬 눈으로 쳐다본다.

그들은 몰랐다. 진정 몰랐다. 자신들과 비슷한 경지를 이룬 줄 알았는데 이토록 놀라운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니. 이 정도라면 천객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싸움이 멈췄다. 후개의 놀라운 무공은 여러 곳에서 벌어지던 싸움을 일시에 멈추게 했다. 후개는 엄밀히 말하면 방주가 아니다. 개방이 처한 특수한 사정만 아니라면 후개가 이곳에 와 있는 비객들이나 다를 바 없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곳에 와서 싸움을 벌이기 전까지는.

괄목상대라는 말이 있다. 삼국시대 오왕 손권의 장수인 여몽이 한 말이다.

“무릇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는 눈을 비비고 볼 정도로 달라져 있어야 하는 법이야.”

후개가 그렇다.

어제까지의 후개가 아니다. 그는 무공만으로 논한다면 대개방의 방주 직을 이어가기에 충분한 무공을 지녔다. 능히 강호 초절정 고수 반열에 들 수 있는 무공이다.

“물….러 간다면 ….용서…하지요.”

후개는 하기 싫은 말을 하는 듯 힘들게 말했다.

비객들이 주춤거렸다.

일전에서 죽은 자만 네 명이다. 제일 처음 격살당한 비객을 제외하면 세 명이 죽었지만, 병기를 놓친 자가 세 명이나 더 있다. 함께 협공을 가했던 다른 세 명도 큰 충격을 받고 휘청거린다.

일조 아홉 명이 공격했다가 철저히 당했다.

혹시나 하여 마지막 숨을 끊어놓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다른 일조는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엄청난 내력의 차이다.

어떻게 진기가 이렇게 급상승할 수 있단 말인가. 평생 내력만 수련한 사람도 이처럼 강한 내력은 뿜어낼 수 없을 텐데. 천하제일의 내력을 지녔다고 추측되는 소림사 방장 혜공 선사의 내력이라면 모를까.

다들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철권 구양춘이 웃음을 지었다.

“놀랍군. 젊은 나이에… 아마도 그것이 개방 용두방주만 익힌다는 삼십육로 타구봉법이겠지. 모두들 속았군. 취옥장만 전수받은 줄 알았는데 타구봉법까지 전수받았어. 허허허! 용두방주…. 과연 치밀한 사람이오. 모도에서 벗어나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췄구려. 허허허허!”

철권 구양춘은 경악도, 경탄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후개, 용서하게. 타구봉법이 무섭기는 하지만… 솔직히 나도 자신 없지만… 보아하니 자네 성취가 너무 낮군. 내 짐작이 맞다면 자네는 지금 취옥장을 들고 있을 힘도 없을 거야. 강인한 정신력으로 꿋꿋이 버티고 서 있을 뿐이지.”

“…..”

후개는 대답하지 않았다.

흔들림이 없는 고요한 눈빛으로 철권 구양춘을 볼 뿐이다. 마치 시험해 보고 싶으면 시험해 보라는 듯.

“취옥장에 타구봉법, 자네는 갖지 말아야 할 것만 가졌군. 비객들은 안심하고 치도록 해. 후개는 지금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철권 구양춘은 강호에서 늙은 구렁이답게 후개의 상황을 정확히 읽어냈다.

읽어낸 사람은 또 있다. 비영파파, 분운추월, 화두망…. 그들도 후개의 상태를 알아봤다. 꿋꿋이 서 있는 모습이지만 문풍지 떨리듯 가늘게 떨리고 있는 옷자락만 보고도 짐작할 수 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을.

일조가 뒤로 물러서고 이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굳이 숨지도 않았다. 그들 역시 철권 구양춘의 말을 듣는 순간 후개의 모습에서 잡히는 감이 있었다.

화두망은 철권과 비객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무불신개는 즉사했고 사호법은 비객들을 상대하기도 벅차다. 비영파파가 본격적으로 손을 쓴다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허허허! 하늘이 개방을 버렸는가!’

분운추월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 온 뒤의 하늘은 더욱 맑다. 티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다. 하늘은 어쩌면 오늘 같은 날 이렇게 맑을 수 있단 말인가. 슬프게 눈물이라도 흘려줄 것이지.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후두둑! 후두두둑….!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니다. 비가 아니다. 소녀라면 기겁을 할 뱀 무더기가 떨어져 내리고 있다.

“어엇!”

분운추월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기겁을 했다.

개방 주변에는 뱀이 살지 않는다. 쥐나 뱀이나 고양이나 들에 사는 들짐승들은 개방도에게 좋은 식량을 제공해 준다. 너무 잡아먹어 씨가 마를 지경이다.

그런데 뱀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백 수천 마리는 될 것 같다. 한결같이 삼각 머리를 하고 빨간 눈을 지닌 게 극독을 함유한 독사들이다.

‘살문!’

분운추월의 머리 속으로 한 인영이 순간적으로 스쳐 갔다.

개방 총단에 뱀 무리를 쏟아 넣을 자는 세상천지에 단 한 명.

종리추뿐이다.

흑봉광괴가 길을 열어주지 않는 한, 일 장마다 한 명씩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개방 총단을 제 집 드나들 듯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살문 살수들뿐이다.

스스스스…..!

뱀들은 적아의 구분이 없다.

“엇!”

분운추월은 타구봉을 들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독사를 후려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이성을 잊지 않았다.

“방주님을 보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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