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2 : 죽었다고 지옥을 아는가? [퇴마록(세계편) ‘아르타로트의 약속’ 직후] : 6화 – 폭발 이후
폭발 이후
얼굴에 차가운 뭔가가 흐른다. 물이다.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 라 위로부터 쏟아지듯 떨어져 내리고 있다.
‘비?’
그 비 때문에 더글러스는 정신을 차렸지만, 아직 눈을 뜨고 싶지는 않았다.
‘난 죽은건가? 저승에도 비가 내리나?”
죽었나 싶었다. 분명히 집 안에 있었는데 비가 내린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저승이라면 지옥이겠지. 그래서 눈을 뜨고 싶지 않 았다. 설령 살아 있다 해도 눈을 떠서 가스 불에 그슬려 숯덩이가 된 자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고통도 다른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은 마비된 것처럼 멍했다. 단지 차가운 물의 촉감이 느껴졌 을 뿐, 빗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귀도 망가졌을 테지. 어쩌면 저 승에서는 애당초 귀 같은 것은 필요 없을지도. 잠시 후 귓속 깊숙 이 있는 고막으로부터 조그마한 울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 더니 그 울림은 점차 쏴아 하는 물소리로 바뀌어 갔다. 샤워기를 세게 틀었을 때만큼이나 호탕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의 소리가 촉 감과 함께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두런거리는 발소리도 들 렸다. 이제는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다.
더글러스는 자신이 아직 죽지는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온 몸에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주 심하게 망가진 것 같다. 여전히 아까와 같은 이유로 눈을 뜨고 싶지는 않았지만 귀 로 들리는 소리는 막을 수 없는 법이다. 사람은 시각으로 대부분 의 정보를 접수한다고 생각하고 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눈을 부릅뜨는 법이지만, 실제로 상황 전체를 파악하는 데는 눈보다 청 각이 훨씬 유리하다. 사각지대도 없고 막을 수도 없으며 한군데 초점을 맞추지 않아도 주변의 모든 소리가 동시에 들려오니까. 저 벅거리는 발소리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그 이야기 소리가 다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단편적으로 들리는 그들의 대화 내용의 일 부만 듣고도 판단하건대, 결코 저승, 천국이나 지옥에서 쓸 것 같 은 말은 아니었다.
‘죽지는 않은건가?
속으로 나름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발소리 같은 것이 다가왔다. 곧이어 더글러스의 목 경동맥 부근에 살짝 손가락을 대는 감촉이 느껴졌다. 생사를 판별하는 방법이다. 굳이 그렇게까 지 확인할 정도로 내가 많이 망가졌나 하는 절망감 같은 것도 들 었다. 더글러스는 참지 못하고 입에 힘을 주었는데 예상외로 쉽게 말이 흘러나왔다.
“나……………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소.”
더글러스가 말하자 목 부분에 댔던 손가락의 감촉이 사라지며 너무도 평이하게 이를 데 없는 걸걸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다행이군. 괜찮소?”
“글쎄요ᆞᆞᆞᆞᆞᆞ 내가 묻고 싶소만……………. 나 괜찮은 거요?”
“글쎄요. 뭐라고 말할지…………. 혹시 두통이 심하다거나 매슥거림 같은 건 느껴지지 않소? 뇌진탕 기운이 있다면…….
남자가 나름대로 친절하게 설명하는데 사실 더글러스가 궁금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그건 문제가 아니오.”
“예?”
“지금· 내 꼴이 어떻소?”
“무슨 뜻이죠?”
남자가 묻자 더글러스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며
긴장된 듯 말했다.
“그러니까 뭐랄까. 팔다리는 제대로 붙어 있소? 그리고 혹시 온통 새카맣게 타 버린 것이라면……”
남자가 말했다.
“뭐, 그렇지는 않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근데・・・・・・ 근데 이 비는 뭐요?”
남자의 목소리가 “허!” 하며 웃는 것처럼 들렸으나 더글러스는 계속 말했다.
“이해가 되지 않소. 집 안에 비가 오다니. 그리도 당신도・・・・・・ 정 말 내게 말하는 것 맞소? 난 정말 살아 있는 건지…………….”
“뭔 소리요. 지금 이건 비가 아니오. 폭발 때문에 천장에 설치된 스프링클러가 작동된 것뿐이오.”
“아, 그런가…….”
더글러스는 그제야 이게 비가 아님을 깨달았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당신・・・・・・ 눈을 떠 보시오. 동공을 보여 달란 거요. 당신 상태를 좀 확인하고 싶으니까.”
“눈 떠도 되는 거요?”
“네?”
남자가 의아한 듯 묻자 더글러스는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가스 폭발에…………… 휘말렸는데, 새카맣게 타버린건…”
남자는 다시 “허!” 하며 웃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자신도 모 르게 더글러스는 눈을 번쩍 떴다. 예상했던 대로 911 제복을 입은 약간 뚱뚱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눈은 생각보다 멀쩡해서 중년의 살집이 다소 붙은 사람 얼굴까지 또렷이 보였다. 허나 911 대원의 표정은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 는 듯 웃음기가 선명했다.
“이 정도 폭발 가지고는 별 큰일 없소. 당신 집도 꽤 많이 망가 진 것 같지만 폭발 규모는 크지 않았어요. 웬만하면 가스레인지를 새것으로 교체해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아니, 폭발에 휘말렸는데 멀쩡하다고요?”
“글쎄, 폭발이라는 건 원래 순간적인 거요. 그리고 엄청나게 큰 규모도 아니었고.”
하지만 영화 같은 데선 엄청난 불기둥이…………….”
“아, 그럴 수도 있지만 이런 가스레인지에서 잠깐 샌 가스 정도 론 그렇게 안 되지. 가스 경보기도 안 울릴 정도의 양으론 말이오.”
“하・・・・・・지만 난 폭발에 휘말렸는데……..”
“혹 자살 시도한 거요? 새카맣게 타길 바라는 것 같소?”
“아니오. 그런 건 아니고…………….”
“그렇다면 운 좋은 줄 아시오. 불길이 보이는 건 한 0.1초쯤 될 까? 확 하고 터지니까 폭발이라고 하는 거요. 보통 불에 그슬리거 나 타는 건 그게 일어난 이후에 연속되는 화재 때문이지, 폭발 자 체만으로 그슬리거나 새카맣게 타 버리는 일 같은 건 없어요. 더 구나 여기 부엌을 보니 절대 큰 폭발이라곤 할 수 없었고…………. 뭐, 전문적인 분야라 설명하긴 그렇지만…………….”
911 대원은 중얼중얼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더글러스의 몸 여기저기를 쿡쿡 찔러보다 이내 웃으며 가볍게 윙크했다.
쉽게 말해, 당신은 무사할 거란 얘기요.”
“그러면 내가 그슬리지도 않고 팔다리도 멀쩡하다 이거요?”
‘사람 몸은 생각보다 튼튼해요.”
남자는 더글러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렇게 입을 잘 놀리는 걸 보니, 별문제는 없는 것 같고, 그리 고 외견상으로 뼈나 근육도 별 이상 없고 출혈도 없소. 물론 나중 에 어딘가 뻐근하면 병원에 가서 자세히 진단해 보길 권하오. 하 지만 지금은 그냥 일어나 보는 게 어떻소?”
더글러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나,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말한 대로 조금씩 조금씩 몸을 움직여서 힘을 넣어 보니, 팔다리 의 감각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작으나마 폭발에 휘말려 넘 어졌던 것은 사실이니 온몸이 쑤시기는 했지만, 자신이 너무 과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조금 부끄러운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911 대 원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소?”
“그런 것 같군요.”
“다행이군요.”
“고맙소.”
911 대원은 고개만 한 번 까딱해 보이고는 집 내부를 둘러보며 어깨를 조금 으쓱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군.”
“뭐가 말이오?”
“이 정도의 폭발치고는 집이 너무 심하게 망가졌어요.”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더글러스 자신이다. 911 대원에게 악령 의 습격을 받아서 그랬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어서 더글러스는 그냥 멍하니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냥 그게…………. 나도 모르겠소.”
“글쎄, 여기서 상황만 보면 마치 괴물이 들어와서 쓸고 지나간 것 같은데……………. 이 정도 폭발 가지고는 집이 저쪽까지 이렇게 엉 망이 될 수도 없고, 저 칼이 어떻게 튀어나와 문에 꽂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말이오. 그리고 벽에 총탄 구멍은…….”
“아, 나 사실 경찰이오.”
아무래도 총의 탄흔 흔적이 남은 것을 수상하게 볼 것 같아 더 글러스는 대충 얼버무리려 했다. 911 대원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그런데 집에서 총은 왜 봤소?”
“아, 그게……………. 휴, 나도 모르겠어요.”
그러자 911 대원의 표정이 아까 처음 더글러스를 검진할 때보다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당신, 진짜 괜찮소?”
“아, 괜찮소.”
“경찰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뭔가……………”
“아니, 난 괜찮다고요.”
“당신, 혹시 무슨 약이라도…………….”
“아닙니다…………….”
더글러스는 한숨을 푹 쉬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911 대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더글러스를 동정하듯 입을 다물었다.
“뭐…………… 사연이 있는 것 같군요. 나도 마누라가 짐 싸서 도망갔을 때 꼭 이런 기분.
“아. 제발요……..”
“흠흠. 뭐, 내 일은 아니지만………… 힘내시구려.”
더글러스는 울고 싶었다.
911 대원들이 다 철수하고, 몰려든 집주인과 이웃들까지 다 내 보내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아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면 서 현실 감각도 차차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다행히 죽지 않고 살 아났다. 가스의 폭발 때문에 악령이 도망간 것일까? 아니면 소란 이 일어나 스프링클러가 작동되고 경보가 울려 사람들이 달려왔 기에 사라진 것일까?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건 나 혼자 버틸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더글러스는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아까 대충 구겨 집어넣 었던 종이쪽지 하나를 꺼냈다. 스프링클러 때문에 종이쪽지도 물에 젖었지만, 전화번호는 아직 식별이 가능했다.
‘할 수 없지…….’
마음을 정한 더글러스는 쪽지의 전화번호를 외우기라도 하려는 듯 몇 번이나 눈으로 반복하며 뚫어지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