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2 : 죽었다고 지옥을 아는가? [퇴마록(세계편) ‘아르타로트의 약속’ 직후] : 7화 – 그들이 오다
그들이 오다
“누구…………… 어? 벌써 왔소?”
문을 열어 찾아온 사람들을 맞이하며 더글러스는 눈을 휘둥그 레 떴다.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한 것이 하루는 커녕 예닐곱 시간 전이다. 그런데 벌써 달려와 줄 줄은 미처 예상 못했던 일이다. 문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다. 둘은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이고 하나는 아니다. 맨 앞에는 날카로운 눈 매지만 동양적으로 예쁘게 생긴 미녀, 승희가 있었다. 그 뒤에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깊은 눈빛을 한, 말도 표정도 없을 것 같은 무뚝뚝한 남자 현암이 보였다. 그런데 또 그 뒤에는 깡마르고 훌 쩍 큰 키에 회색으로 바싹 마른 해골 같은 얼굴, 거기에 한없이 무 뚝뚝한 표정을 머금은 공포 영화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아 보이 는 회색 머리의 백인이 서 있었다.
더글러스는 특히 그 낯선 백인을 말도 없이 멍하니 바라보았 다. 깡마른 몸매에는 조금 헐렁한, 지나치게 격식을 갖춰 차려입 은 고급 복장은 나무랄 데 없었지만 그 옷과 등에 걸친 커다란 배 남은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양복 차림과는 안 어울리게 옆구리에도 몰리 벨트를 걸고 큼직한 주머니들을 주렁주렁 늘어뜨려 걸고 있었다. 짐에 눌려 앙상한 다리가 폭삭 꺾일 것 같았다.
‘이 사람 누구야? 그리고 도대체 뭘 이렇게 싸 짊어지고 다니는 거지?
더글러스가 놀라는 기색이자 맨 앞에 서 있던 승희가 웃으며, 그러나 약간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글쎄요. 도움이 필요하다니 빨리 오는 게 당연하죠, 뭐. 여기 현암군이 어서 가자고 성화를 해 대서・・・・・・ 그런데 탐정님?”
“아, 이젠 복직해서 탐정이 아니오. 형사요.”
“그렇군요. 형사님.”
더글러스는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다가 할 수 없이 말했다.
승희가 웃는 얼굴로 다소 당돌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건 아세요? 우린 사실 지난번 일 때문에 그렇게 컨디션 이 좋은 편이 아니에요. 몇몇은 병원에 있고요. 한데 현암 군이고 집쟁이가 서둘러야 된다고 해서 온갖 것을 갈아타며 달려온 거예 요. 뭐…………… 늦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지만, 몹시 피곤하거든요.”
“아, 그것참・・・・・・ 미안하오.”
“미안한 것은 됐고, 좀 들어가면 안 될까요?”
“들….들어오시죠.”
그러자 키 크고 마른 백인 노인이 퉁명하면서도 깐깐한 독일식 악센트의 영어로 말했다.
“원치 않는다면 괜찮소.”
“아뇨. 그………… 그게 아닙니다. 집 안이 사고로 엉망이 돼서… 들어오세요. 환영합니다.
더글러스가 멋쩍게 사람들을 안으로 안내하자 그들도 집 안의 엉망진창이 된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급히 도움을 청한 것 은 사실이지만, 불행히도 이들이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 있던 것 치고는 너무도 빨리 달려왔기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것을 정리할 시간조차 없었다. 더구나 여기저기 깨지고 부서진 것은 더글러스 가 직접 부순 것이라고 해도 맨 마지막 가스 폭발로 인해 자연스 럽게 파괴의 흔적이 남은 데다 천장에서 작동된 스프링클러의 물 이 모든 것을 적셔 버린 탓에 집 내부가 마치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뒤의 폐허처럼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보기만 참담한 게 아니라 소파나 의자까지 모두 젖어 방의 침대(그나마 시트를 모두 걷어 매트 리스 상태였고, 그것도 눅눅했다)를 제외하고는 앉을 곳마저 없었다. 승희가 선 채로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글쎄, 뭐랄까……………. 참 편안하고 아늑한 곳에 사시는군요.”
더글러스는 부끄러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원래 항상 이 정도는 아니오. 전화로 간략하게 말했듯이 일을 겪어서…………….”
“음. 악령 이야기는 저도 들었지만, 일개 중대 정도는 왔던 모양이죠? 무슨 전쟁이라도 치른 것 같은데.”
“아니, 아니. 하여튼 됐고, 그런데 정말 당신들은 내 말을 믿어 주는 거요? 악령이니 뭐니 말하는데도?”
승희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었다.
“아, 그럼요. 적어도 탐정, 아니 형사님은 거짓말하실 분은 아니 니까. 그리고 거짓말하는지 아닌지 제가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 렇죠?”
그제야 더글러스는 눈앞의 동양인 아가씨가 사람의 마음속을 읽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그렇다면 더 이상 자 세하게 설명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승희는 그러면서 내심 불만스러운 듯, 온통 아수라장이 된 집 안에서 어디 앉을 곳이라도 없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찾기 시작 했다. 그때 말없이 서 있던 현암이 더글러스에게 다가왔다. 현암 의 영어 발음은 여전히 서툴렀지만 더글러스가 알아들을 만은 했 다. 그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악령은 우리에게는 낯선 일이 아닙니다. 물론 직접 보셨으니 이젠 더 말씀드릴 필요도 없겠지만요.”
더글러스는 말했다.
“사실 나는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소. 그걸 내가 정말 본 건지. 아니면 내가 혹시 꿈이라도 꾸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건 뭐 정 말 도대체 내가 믿었던 것과는 너무 달라서…………….”
더글러스가 자기도 모르게 위안이라도 찾으려는 듯 중얼중얼 늘어놓자 현암은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더글러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은근히 믿음이 가고 신뢰가 가는 깊은 눈빛이라 더글러스는 자기도 모르게 수다쟁이처럼 계속 떠들었다.
“이거 정말 세상이 원래 이랬던 거요? 세상이 이렇게 돌아간다 면 이건 정말, 흠……”
현암은 안심이라도 시키듯 말했다.
“그렇다면 세상은 벌써 엉망이 됐게요. 글쎄, 이거 제가 영어가 부족해서 제대로 표현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내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라서.”
뒤에서 서 있던 뻣뻣하고 멋대가리 없어서 거의 무서울 정도인 백인 노인이 입을 열어 말했다.
“자신이 겪은 특수성을 일반성과 혼동하는 건 현명한 일이 아 닐 거요. 결코 흔한 일은 아니지. 다만 분명 존재하기는 해도 너 무 겁을 먹을 건 없소. 세상을 바꿀 만큼 자주 일어나는 것도 아니 고, 뭐 일종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사고라고 보면 될 거요. 거의 벼락을 맞을 확률에 가깝지. 물론 악령을 보아 당신은 무섭겠지만 벼락이 무서워서 큰길을 못 나가는 건 아니지 않소? 그리고 악령 이 따지고 보면 벼락보다 죽음이나 쇼크를 받을 확률이 더 적은, 그러니까 그리 무서운 것도 아닌..
“아니, 아니. 나는 그런 설명을 들으려 한 건 아닌데요. 하여튼 참 위안이 되는군요.”
“정말 안심한 것 같진 않소만.”
“아닙니다. 제일 막막했던 건 두려움보다도 이걸 정말 누군가와 말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하는 거였어요. 일 단 들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정말 맘이 많이 놓입니다.”
“한데……………. 서로 간에 초면인 것 같은데, 소개나 인사가 너무 늦 은 것 같지 않소?”
역시 쨍쨍해 보이는 인상다운 노인의 말이 나오자 옆에 있던 승 희가 조금 급조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정말 그러네요? 중요한 걸 잊고 있었군요. 우리는 구면이지 만 형사님은 처음이시죠? 더글러스 형사님, 이쪽은 이반 교수님이 라고 하세요.”
더글러스는 딱딱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메우고 싶어서 본래 자기에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유머 감각 비슷한 것을 최대한 끌 어내 보려 했다. 아무래도 이 노인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분위 기를 가라앉히는 것 같아 조금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더글러 스는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러세요? 교수님이셨군요. 저는 대학은 나오지 못했습니 다만, 그래서 교수님에 대한, 그리고 학식이 높은 분들에 대한 존 경심을 가지고 있지요.”
더글러스가 웃으며 손을 내미는데 이반 교수는 아무런 말도 하 지 않고는 깡마르고 물기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는 커다란 손바닥 을 말없이 내밀어 별로 성의 없이 더글러스와 악수했다. 더글러스 는 분위기가 더 어색해진 것 같아 급히 말의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혹시 전공이?”
더글러스가 최대한 상대를 맞춰 주려 하자, 이반 교수는 여전히 손도 놓지 않고 표정 없는 얼굴로 딱딱하게 말했다.
“흡혈귀학.”
“예…………… 예? 그………… 그런 게 정말…… 아, 아뇨・・・・・・ 있을 수 있 겠죠. 예, 당연하죠. 여기 계신 두 분만 해도…………. 그리고 오늘 내 가 본 것만 해도…………. 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 다만.. 하여튼 그렇군요. 네네・・・・・・ 그런데 수강하는 학생은 많습니까?”
이반 교수는 표정도 바꾸지 않고 딱딱하게 말했다.
“네 명 있소.”
‘아. 그거 좀.. 수강 인원이 생각보다 적군요. 그….. 그 게………… 그런데도 강의가 유지가 됩니까? 난 대학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원래 솜씨 없는 말이 점점 꼬여 가는데 이반 교수는 더더욱 퉁명스럽게 말했다.
“상관없소. 그 학교는 내 거거든.”
더글러스는 이제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민망한 상 태가 됐는데, 이반 교수는 그런 더글러스에게 쐐기를 박듯 잡았던 손에 약간 힘을 주며 말했다.
“그리고 한마디 말하겠는데, 나는 미국식 유머를 굉장히 싫어하오.”
더글러스는 이제 거의 포기하고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군요. 애당초 나는 그조차 없어 서 거의 사람 취급도 못 받는 형편없는 미국인이니까요.”
그러자 이반 교수는 여전히 딱딱한, 오히려 그 자신이 흡혈귀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얼굴을 향해 살짝 들이밀면서 음울한 회색빛 눈동자로 더글러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모욕하려는 뜻은 없었소. 난 오히려 그 점에서 당신이 마음에 든다는 소리였으니까.”
‘젠장. 이게 마음에 드는 거면 마음에 안 들었을 땐 어떻게 해? 잡아 놓고 피라도 빨생각인가?’
더글러스는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으나 도와주러 온 사람들에 게 대놓고 입을 열어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반 교수가 잔뜩 주렁주렁 짊어진 그 짐 덩어리들이 보였다. 그 속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흡혈귀를 잡는 나무 말뚝? 마늘? 알 수 없는 기괴한 마법서? 아니면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은으로 된 거대한 칼이나 고문 용 구, 단두대가 들어 있을지도…………….’
‘더 생각하기도 싫어’
더글러스는 속으로 외치며, 그래도 이반 교수보다는 훨씬 믿음 이 가고 은근히 편하게 느껴지는 현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당신들 정말 그런 것과 상대할 수 있는 겁니까?”
그 말에 현암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만 갸웃해보였다. 오히려 더글러스가 더 흥분해서 말했다.
“그 빌어먹을 여자 유령은 총알도 안 통해요. 칼도 소용없고”
“물리력이 안 통하는 존재라면 그건 당연한거죠”
현암이 짧게 대답했으나 더글러스는 악령을 입에 올리자마자 흥분되는 듯 또다시 정신없이 주절거렸다.
“그것뿐이 아니에요. 마지막 발악으로 나는 가스 폭발을 일으켰지만, 그걸로 악령이 죽었을 것 같진 않아요”
“그래서 집이 이렇게 된 건가요?”
승희가 물었지만 더글러스는 계속 말했다.
“수돗물도 소용없었소.”
“수돗물요?”
“그러니까 물, 그리고 수돗물에 들어가 있는 염소도 소용이 없 을 거요. 레몬주스의 산성도 소용이 없었고, 술의 알코올도 소용 없었소. 깨진 유리 조각이나 나무나 돌이나 유리나 어떤 재질의 물건도 소용이 없었어요. 강한 빛도 소용이 없고 스탠드도 휘둘러 봤으니 전기도 소용없는 것 같았고
더글러스가 정신없이 자기 나름대로는 최선의 의지를 가지고 실험한 결과를 읊어 대자 옆에서 듣고 있던 승희가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 악령하고 한 백 번쯤 싸우셨나요?”
“아니오 아냐.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딱 한 번이었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오!”
“그런데 언제 그런 걸 다 해 보셨대요?”
승희가 반쯤은 놀리듯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더글러스는 화가 날 뻔했다. 그러나 현암이 조용히 말했다.
“승희의 말투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쨌든 애쓰셨습니다.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죠.”
현암이 믿음직스럽게 말하는데 옆에서 승희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아, 정말……. 여기는 미국이라고, 미국, 정말로 이번에는 플로 리다 해변에 꼭 현암 군을 데리고 가 보고 싶었는데. 아, 정말… 나는 왜 이리 재수가 없는지…………….”
자기 자신이 재수가 없다고 탄식하는 것 같지만, 실은 은근히 이런 일에 얽히게 만든 더글러스를 원망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말 주변도 없고 기도 꺾여 버린 더글러스는 그냥 한숨만 쉬었다. 현 암이 위안하듯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런 일이 있으면 누군가는 해결해야겠 죠. 제대로 우릴 잘 부르셨어요. 물론 준후나 신부님이 있었으 면 훨씬 쉽겠지만, 들어 보니 별것도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마시고………..”
사실 현암도 말솜씨 없기는 더글러스에 뒤지지 않을 정도인 데 다가 영어가 그렇게까지 능통하지는 못한 바람에 본질의 의미를 왜곡하고 말았다. 더글러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별거 아니라고? 저기 저 싱크대 문틀을 보시겠소? 아니 거기 아니고, 응. 거기. 저게 무슨 사고나 폭발 때문에 벌어진 게 아니오. 만져지지도 않는 존재였는데, 빨간 손톱으로 긁자마자 문 짝이 저렇게 잘려 나갔단 말이오. 이런 게 별거 아니라고?”
그러자 뒤에 있던 승희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현암은 그만큼 성의 없는 사람은 아니어서 조용히 문짝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글쎄요. 이제 이 싱크대 문짝은 못 쓸 것 같습니다만………….. 맞죠?”
“맞소.”
대답을 듣자 현암은 장난이라도 하듯 아주 살짝 싱크대 문짝으 로 손을 올린 다음 손가락으로 싱크대 문짝을 톡 쳤다. 그야말로 톡 친 것 같았는데, 문짝은 그 순간에 와르르 부서져서 아까 악령 이 떼어 낸 것보다 수십 배는 더 잘게, 그야말로 박살이 나버렸 다. 그러면서 현암은 말했다.
“안심시켜 드리려고 한 겁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아, 그렇지, 당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또 잊고 있었던 것 같군. 어쨌든 도와주시오. 이제는 정말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기 는 하오만…………….”
그러다가 더글러스는 옆에 역시 말없이 하나도 놀라지 않고 서 있는 이반 교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흡혈귀학을 전문으로 하셨다는 이분도 능력자?”
더글러스가 묻자 현암이나 승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반 교수가 먼저 딱딱하게 말했다.
“난 능력 같은 건 없소.”
“네? 아니. 하지만 흡혈귀학의 교수시라고…………….”
“물론 내가 주로 상대한 건 흡혈귀고, 이런 악령은 내 목표는 아 니지. 하지만 친애하는 친구들을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소. 안 그래도 이번에 큰일이 생겼는데, 제대로 도움이 된 것 같지 않 아 마음이 좀 언짢았거든. 한데 미스터 현암이나 승희 양에게 일 이 생겼다니. 어떻게든 돕고 싶어서 온 거요. 그리고 당신에게 말 해 두겠는데, 나는 저분들 같은 능력자가 아니오.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반 교수가 말하는데, 승희가 끼어들었다.
“더글러스 형사님도 사실은 아주 특이한 능력을 지니고 계시죠. 사이코메트리라고…..”
그 말에 이반 교수는 호기심이 간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젖히며 말했다.
“오, 그렇소? 대단하시군.”
더글러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문제는 난 그걸 마음대로 발동시킬 줄도 모르고 컨트롤되는 것도 아니라는 거죠. 사실 그게 아니었으면, 이런 일에 얽히지도 않 았을 텐데……”
현암이 더글러스를 위로하듯 말했다.
“능력이라는 건 공연히 생기는 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승희도 위로하듯 덧붙였다.
“큰 의미로 볼 때 꼭 필요하기 때문에 있는 거라 생각하는 편이 낫지 않나요? 마음도 편하고……………. 자, 이제 사건에 대해서나 좀 들 어 볼까요?”
“아, 그렇지. 잊고 있었군. 그래요.”
더글러스는 간신히 안정을 되찾아 사건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 작했다. 자기도 일종의 능력자라는 것을 일깨워 준 덕분에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을 겪었지만 숨기거나 둘러대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좀 편해졌기 때 문이다.
악령이 사람들을 몰아붙여 인적 없는 장소로 가게 한 다음 빌이 처단하는 방식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물론 어떤 경로로 빌 이 아이린의 영혼을 지배해서 부리고 있는지는 현암이나 승희도 추정하지 못했다. 빌에 대해 투시를 행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 직 승희는 빌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고, 굳이 그럴 필요 있느냐 는 생각이기도 했다. 더글러스에게는 까무러칠 정도로 놀랄 만한 사건이었지만, 이들에게는 극히 흔한, 마치 동네 슈퍼에서 세일을 시작한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더글러스 의 이야기 중 아이린 부분이 나오자 현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좀 이상한데요?”
더글러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이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요.”
승희와 이반 교수도 비슷한 의아함을 가지는 것 같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의아함은 역시 아이린의 행동이었다. 아이린이 빌에 의해 죽은 것이 확실하다면 왜 빌의 명령에 따르는 것일까? 이것만은 현암이나 승희도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더글러스는 물었다.
“혹시 무슨 마법이나 주술이 있는 것 아니오? 다른 사람이나 영혼을 조종하는……”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있죠. 허나 그런 건 아닐 겁니다.”
“그런 게 없다는 거요?”
“없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이 경우는 그런 게 아니에요.”
“어떻게 확신하지?”
더글러스가 묻자 현암 대신 승희가 설명했다.
“어떤 존재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큰 능력 이에요. 더구나 빌은 흡혈귀나 초자연적인 존재도 아닌 보통 사람 일 테니 더 어렵죠. 빌에게 정말 그런 능력이 있다면 귀찮게 굳이 유령을 조종할 필요도 없겠죠. 목표가 된 대상자를 직접 불러내거 나, 귀찮게 총을 쏠 것도 없이 자살해 버려라 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런 건가?”
“백 퍼센트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럴걸요? 그리고 정말 그런 능력이 실존한다면 그건 우리가 가진 힘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일 거예요.”
“글쎄, 내가 볼 때는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아니죠 아니죠. 사용법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세요. 조금이라도 머리를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능력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요.”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마음대로 하게 만든다라…………….”
“그건 당신의 사이코메트리나 현암 군의 공력, 내 투시 능력보 다 몇십 배, 아니 몇백 배 더 위험한 거죠. 우리의 힘이 이런 악령 사건 차원에서 뭔가 할 수 있는 정도라면, 그건 그냥 세계를 뒤엎 을 정도의 힘일 건데요.”
승희는 단언했고 현암도 동의하는 기색이었으나 더글러스는 아 직도 좀 개운치 않았다.
“하지만 유령을 부리는 능력이 있다면 그렇게 복잡하지 않을 수도 있잖소.”
그 말에 승희는 약간 싸늘한 조소를 보냈다.
“유령에 대해 뭘 아시는 데요?”
“어..그… 그건….”
더글러스가 당황해하자 이반 교수가 딱딱하게 말했다.
“사람 모습을 하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게 유령이오? 유령들 도 보통 옷을 입고 있는데, 그럼 옷도 유령이 되는 거요? 피를 흘 리거나 칼이 꽂혀 있는 모습도 보일 때가 있는데, 그럼 유령도 피 를 흘리고, 칼도 유령이 되는 거요?”
“그・・・・・・ 그건 모르겠소. 난 유령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 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데 유령을 맘대로 부린다는 생각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소? 조종한다는 건 장난감 자동차를 운전한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오. 대상이 장난감 자동차 같은 존재라면 몰라도. 지능이 있고 인격이 있으면 절대 쉽지 않지.”
“그건 그럴 테죠.”
“그런데 유령은 작동 방법이 정해진 기계 같은 게 아니오 사람 에서 비롯된 거니까. 유령이 아무 생각 없는 존재라면 누구도 부릴 수 없겠지. 애당초 명령을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까! 하지만 빌처럼 누군가를 목표로 정해 그 사람을 어디로 몰고 오라는 명령을 내리 려면 적어도 그 유령이 지능이 없어서는 불가능하지 않겠소?”
“그・・・・・・ 그렇겠군요. 그런데 유령도 종류가 다릅니까?”
“천차만별이오. 눈의 착각이나 환상부터 인간 영혼, 환영, 유체, 염체, 정령, 사념, 자연령, 동물령, 다른 차원의 방문자, 초자연적 존재・・・・・・ 모두 유령이라고 싸잡아 부르지만 몇 종류나 있는지 셀 수도 없소. 모조리 유령이라 싸잡아 부르는 개념 자체가 틀린 거 요…….”
“허어・・・・・・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린의 경우는?”
이번에는 승희가 더글러스의 질문을 받았다.
“어쨌든 아이린의 유령에겐 기억이나 지능이 있어야만 해요. 그 래야 명령을 들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렇다면 정신적으로는 인간 과 흡사할 테니, 감정이나 인격도 존재하겠죠? 아이린은 초자연적 인 탄생물도 아니고 사람이었으니 사람과 닮았다 생각하는 편이 맞겠죠?”
“그렇겠군.”
“그러니 빌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 아이린의 유령 스스로가 그의 말을 따르고 있다는 거예요.”
더글러스는 아직 유령이 뭔지는 잘 이해 가지 않았다. 허나 대 강 이들의 설명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대로 남 는다. 아이린은 왜 빌의 명령을 듣는가? 인간의 마음을 근본적으 로 속박하는 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기에?
현암이 말했다.
“아이린이 빌에게 죽지 않은 건 아닐까요?”
더글러스는 다시 생각해 보고 말했다.
“그럴 가능성도 있군.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곤살레스의 정보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인데……………. 아이린은 사체도 발견되지 않았 으니 검시해 볼 수도 없고”
“곤살레스가 누구죠?”
“빌의 똘마니였던 하찮은 갱이오. 내가 그를 다그쳤더니 아이린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더군.”
“빌의 부하였다면 거짓말했을 수도 있잖아요.”
승희가 말하자 더글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난 그렇게 생각 안 하오. 진심을 말하는 눈빛이었거든.”
그때 이반 교수가 제안했다.
“그는 만나기 어렵소? 빌에 대해 더 알아보기 전에 곤살레스를 만나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이반 교수는 넌지시 승희 쪽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보고 승희는 씩 웃었다.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난 곤살레스가 누군지도 모르니 투시 못 해요. 뭐, 옆에 있다면 진실을 말하는지 정도는 쉽게…….”
“아! 맞아 그랬지. 그럼 문제없소.”
더글러스는 캐나다에서 보았던 승희의 능력을 기억해 냈다. 금 방 의문이 해결될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 더글러스는 씩 웃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역시 당신들이 오니 일이 척척 풀리는군. 곤살레스 녀석을 바 로 찾아보겠소. 요즘 그는ᆞᆞᆞᆞᆞᆞ”
더글러스는 곧 용케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거실의 전화 수화 기를 들어 전화를 걸면서도 계속 떠들어 댔다.
“보통 할렘 귀퉁이의 바에 처박혀 있거든. 낮이나 밤이나…..내가 바꿔 달라고 하면…………. 아, 그래. 쿠퍼? 나 더글러스야. 거기 곤살레스 있지? 뭐? 없다고? 그럴 리 있나? 곤살레스 어디 있는지…….”
말하던 더글러스의 눈빛이 갑자기 흐려지며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이어 더글러스는 아무 말도 없이 서에 전화를 걸어 또 곤살레스에 대해 물었다. 질문도 하지 않고 한동안 듣기만 하다가 더글러스는 이내 수화기를 천천히 귀에서 떼며 팔을 늘어뜨렸다. 현암이 더글러스를 긴장된 눈매로 보자 더글러스는 전화를 끊으 며 힘없이 말했다.
“죽었다고 하오…….”
“어떻게요?”
현암이 얼굴을 굳히며 묻자 더글러스는 멍하니 대답했다.
“할렘 거리의 구석진 막다른 골목에서……………. 이마에 총을 맞고・・・・・・・ 여태까지 죽었던 자들과 똑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