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2 : 죽었다고 지옥을 아는가? [퇴마록(세계편) ‘아르타로트의 약속’ 직후] : 9화 – 할렘 지구
할렘 지구
차조차도 주저앉아 버린 다음이라 어떻게 빌의 건물까지 안내 할지 더글러스는 잠시 걱정했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 다. 바깥에는 아주 크고 비싸 보이는 검은 차가 서 있었다. 그리고 이반 교수가 말없이 운전석에 올랐다. 더글러스는 배낭을 든 채 엉거주춤하며 차를 훑어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모델이었지만 척 보기에도 주눅이 들 만큼 비싸 보였다. 고급스럽기도 했으나 몹시 클래식한 골동품 같은 디자인의 차였다. 더글러스는 배낭을 감싸 안은 채 이반 교수의 옆자리에 앉아 물었다.
“당신, 미국에 사시오?”
“아니오”
“그럼 이 차는? 이런 건 생전 처음 보는데…………”
“배로 실어 온 거요.”
이반 교수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능숙하게 핸들을 잡았다.
‘갈 길이나 알려 주시오.”
그래도 더글러스는 겁이 났다.
“정말 이대로 빌의 건물로 가는 거요?”
“그렇소.”
“맙소사.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빌은 이 도시의 보스요. 그를 잡 으려면 내가 아무리 형사라도 절대로 이렇게는 안 하오. 백명이 상의 완전 무장한 스와트 팀과 헬기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엄두도 내지 않을 거요!”
뒷자리에서 승희가 말했다.
“이반 교수님이 계시니 괜찮아요.”
더글러스는 울화통을 터뜨렸다.
흡혈귀학으로 갱을 상대할 거요? 다시 한번 말하겠소. 당신들 능력은 알고 있소만 그들은 모두 총을 가지고 있다고! 아주 커다 란 총!! 더구나 보통 갱도 아니오. 군사 훈련까지 받았다는 소문이 있어요!”
“길이나 알려 달라고 했잖소. 일단 출발하겠소.”
이반 교수가 무덤덤하게 말하며 차를 출발시키자 더글러스는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아! 정말 미치겠군. 그러면 하다못해 미스 승희만이라도 두고 가는 게 어떻겠소? 미국에 대해서 잘 아는지 모르겠는데, 거기는 할렘 중에서도 할렘이라고! 정상적인 젊은 여자라면 발걸음도 들여 놔서는 안 되는 마의 지역이란 말이오 미스 승희만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허나 승희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현암군 옆이 제일 안전해요.”
그 말을 듣자 현암은 좀 부끄러운지 시선을 돌렸지만 더글러스 는 그냥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아니,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캐나다에서 봤소. 하지만 당신, 총 맞아도 괜찮소?”
“아니라니까요?”
“그래, 나도 그건 알지. 그런데 당신이 상대하려는 자들은 그 총 을 가진 수십 명의 갱들이라고!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놈 들이 득시글거리는데………….”
“우리도 믿는 바가 있거든요”
현암이 짧게 말하자 더글러스는 미치겠다는 듯 말했다.
“뭘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분명히 당신 입으로 조금 전에 말했잖아. 총 맞으면 당신도 죽는다고!”
“아, 물론이죠. 오른팔만 빼고는요.”
현암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더글러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른팔 당신 그 팔, 기계요?”
현암은 웃었다.
“지난번 캐나다에서 말씀드렸잖습니까? 순수 자연산이라고.”
“그런데도 총알이 못 뚫고 들어간다고?”
현암은 고개만 조금 끄덕여 보였다. 더글러스는 탄식했다.
“뭐, 하긴……………. 당신들에게 불가능이란 없을 것 같군. 몇 번 봐왔지만 참 신기하오.”
현암은 다소 차갑고 냉정한 눈빛이 되며 말했다.
“저는 그것보다 어떻게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는지가 더 신기합니다.”
현암의 영어는 매끄러운 편이 아니었기에 승희가 곧 현암의 말 을 이어받듯 재잘거렸다.
“어떻게 자기와 똑같은 인간을 하찮은 이유로 죽이는 정신 상태 가 되는지. 그게 신기하다는 거예요.”
이반 교수도 씁쓸히 웃었다.
“그거야말로 이 세상이 빚어낸 가장 어둡고 사악한 기적 중 하나겠지.”
“그런 놈들이야 세상에 널려 있지 않소?”
“그러니까 더더욱 사악한 기적이라고 하는 거요.”
더글러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이반 교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저 갈림길에서 어느 쪽이오?”
더글러스는 눈짓으로 오른쪽을 보며 말했다.
“저쪽요.”
이반 교수는 깐깐하게 따졌다.
“저쪽이라고만 하면 어떻게 하오? 명확히 말해 주시오. 갈림길에서 왼쪽이오? 오른쪽이오?”
“오른쪽이오.”
“고맙소.”
전혀 고마운 것 같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러다가 더글러스는 갈림길 오른쪽 너머 지역에 대해 떠올렸다.
“그런데 그쪽 지역으로 이 차를 몰고 가는 건…………. 나라면 안 그러겠소.”
“왜 그렇소?”
“거긴 할렘 지구요.”
“그래서?”
“할렘 녀석들은 부자를 증오하오.”
뒷좌석에서 승희가 웃었다.
“빌도 부자 아닐까요? 그를 그렇게 증오해 준다면 일이 훨씬 편할 건데.”
“물론 빌이 도시에서 누구보다도 부자겠지만 그는 예외요. 그자 가 두목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정말 계속 갈 거요?”
“물론.”
“그렇다면… 빌의 아지트에 도착하기 전에는 절대 멈추지 마시오.”
더글러스가 말하자 이반 교수는 물었다.
“왜요? 빌의 부하들이라도 있는 거요?”
“빌의 부하 말고 아무 상관없는 놈들일지라도 할렘 녀석들이라니까. 이런 차가 그 지역에 잠시라도 멈추면 그냥 넘기지 않을 거요. 쇠 파이프니 돌이니 닥치는 대로 몰려들어 차를 때려 부술 거 요. 총질을 당할 수도 있소”
“왜?”
이반 교수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묻자 더글러스는 다소 홍분해 말했다.
“비싼 차니까!”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오? 나는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데……………. 이유가 뭐요?”
이반 교수가 여전히 이해 안 된다는 듯 말하자 더글러스는 답답 해하며 말했다.
“거기가 할렘이라는 게 바로 이유요. 당신들의 기이한 세계와 비교해도 조금도 꿀리지 않을 만큼 이상한 세상이라고요. 어쨌든 멈추지 마시오. 알겠소?”
“앞에서 누가 나타나서 길을 막아도 말이오?”
“그냥 피하시오. 아니면 밟고 가던지. 여기서 이런 차를 세우는 건 자살행위요. 차라리 수영복 차림으로 사자 떼 앞을 지나는 것 이 낫지.”
“미국이란 나라를 이해할 수 없군.”
“당신이 이해하든 말든 우리는 알아서 잘 살고 있소. 저런 놈들도 있지만 일반 시민들은 안전해요! 할렘 같은 건 일종의 구역인 셈이니까.”
“남의 차를 맘대로 부수고 총질하는 자들이 구역은 지키는 거요?”
“구역은 공권력과 룰로 유지되는 거요. 아, 설명하기 힘들군.” 더글러스는 머리를 쥐어뜯었다가 푸념처럼 말했다.
“선량한 미국 시민들은 세상의 누구보다도 선량하오. 함부로 그 렇게 총질을 해대는 미국인도 있지만, 모든 미국인이 다 그런 것 은 아니오.”
이반 교수가 말했다.
“미국인들이 모두 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오?”
“도시에 사는 샐러리맨들의 구십 퍼센트는 총을 평생 만져 본 적도 없을 거요. 자기 집 벽장에서 총이 나오면 놀라서 엉덩방아 를 찧으며 도망가겠지. 총알을 뒤집어 넣으면 뒤로 총이 발사된다 고 믿을 정도로 순진한 미국인도 널렸고, 반대로 총을 닥치는 대 로 휘두르는 미국인들도 많소. 이것을 알지 못하면 당신은 미국인 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요.”
“일반화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나라군.”
“당신이 미국식 유머를 맘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은 자유요. 그렇 다고 함부로 미국인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답답한……”
더글러스가 거기까지 이야기하는데 막 창문 너머로 할렘 거리 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미끈하고 어딘가 졸부스러운 화려함 으로 단장된 기묘한 형태의 건물이 차창을 통해 보이기 시작했다.
더글러스는 하던 말을 멈추고 말했다.
“저게 빌의 소굴이오.”
더글러스가 빌의 건물을 지목하자 차를 몰고 있던 이반 교수나 현암, 승희 등도 약간은 긴장했다. 더글러스는 조금 힘이 빠져 다 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정식으로 영장 발부받고 스와트 팀도 불러야지. 우리만으로는 통과하기가…………….”
그 말에 현암이 짧게 말했다.
“우린 시간이 없어요.”
“미스터 현암, 당신의 능력이 대단한 건 알겠지만 총알을 막아 낼 재주는 없지 않소? 대체 이렇게까지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있 소? 당신들이 시간이 없다고는 했지만.”
승희가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보며 말을 걸었다.
“이보세요. 형사님. 시간이 없는 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이라고요”
“뭐? 내가? 그게 무슨 말이오?”
“생각 좀 해 보세요. 당신의 증언은 다 사실이었죠? 저 큰 건물 에 숨어 있는 빌이라는 자가 악령을 시켜 사람을 죽여 왔고 지금 도 죽이고 있다는 거.”
“당신들이 믿어 준다면 정말 다행이오만.”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죠. 그리고 그 악령이 형사님에게도 왔잖아요.”
“그랬지.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오.”
“하지만 형사님을 해치우진 못했어요. 형사님의………… 그ᆞᆞᆞᆞᆞᆞ 뭐라고 할까. 절망적이면서도 영웅적인 사투라고 할까요? 그 포기를 모르는 기백 덕분에.”
“놀리지 마시오.”
“놀리는 게 아니라 칭찬하는 거예요. 덕분에 어쨌든 그들은 실 패했고 한 박자 늦게 됐죠. 그런데 그 몇 시간도 지나지 않는 사이 에 곤살레스를 죽였으니 빌의 성질은 몹시 급한 것 같네요.”
“실제 소문도 그렇소.”
“그리고 악당이고요.”
“그건 불변의 사실이지.”
“그러면 빌의 입장에서는 자신만의 비밀을 형사님이 안다는 사실이 몹시 찜찜할 거예요. 아무리 악령 같은 걸 믿어 줄 사람이 없 다고 해요. 그렇겠죠?”
“확실히 그렇겠지.”
“그러니까 빌은 어떻게든 형사님을 없애 버리려고 할 거라고요. 물론 일을 벌인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으니 아직까지 빌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한 거지만요.”
그 말을 듣자 더글러스는 으슬으슬했다.
“당신들이 서둘러 달려와서 옆에 조력자가 생겼기에 머뭇거렸을지도 모르겠군.”
“우리가 이렇게 서둘러 온 건 형사님 주변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여럿 보았기 때문이에요.”
“보다니? 어떻게?”
“봤다기보다는 느꼈다고 할까요? 저 그런 능력 가진 거 모르지 않잖아요?”
“우리가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형사님은 벌써 이름 없는 킬 러들의 손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요.”
“하지만 어떻게 알고……”
“빌이나 악령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투시하기가 어렵죠. 하지만 우린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잖아요? 내가 일단 신경 쓰면 형사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모를 것 같아요?”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홍. 그까짓 몇백 킬로미터.”
더글러스의 머리가 멍해졌다. 승희는 계속 날카롭게 떠들었다.
“그래서 현암 군이 서두르는 거라고요! 물론 빌이 사람을 마구 죽여 나가는 것을 그대로 둘 수도 없지만, 무엇보다 형사님이 위 험하기 때문에요. 그리고・・・・・・ 빌과 갱들도요.”
“가만, 빌과 갱 이야기는 뭐요?”
“아, 이해 안 되실 텐데,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죠. 어쨌든 형사님 이 위험하니 서둘러야 한다는 건 이해하셨죠?”
“그・・・・・・ 그렇소.”
“물론 우리도 시간이 많지 않아요. 또 이런 일에 끼어드는 것도 사실 달갑지 않고요. 그러니 우린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하고 사라지는 방법밖에 없거든요. 현암 군이라고 총알이 안 무섭고, 저 라고 안 무섭겠어요? 하지만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예요. 이대로 밀고 들어가서 빨리 빌이라는 자를 막지 않으면 사람들이 계속 죽을 거고, 아마 그 순서를 리스트로 적는다면 형 사님의 이름이 맨 앞에 있을 거예요. 우리가 영원히 형사님을 지 켜 줄 수도 없고요.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알았소. 하지만 정말로 빌이 내 주위를 감시하고 있단 말이오?” 승희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형사님, 아주 멀리서 감시한다면 아무도 알 수 없죠. 저들도 그 렇게 경찰 주위를 드러내 놓고 감시할 만큼 바보는 아닐 거고요. 하지만 틀림없이 여럿이 느껴졌어요. 더구나 형사님 잊고 있는 거 있지 않아요? 무엇 때문에 형사님이 우리를 부르셨죠?”
그제야 더글러스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악령?”
“그래요, 악령. 나도 그 아이린이라는 여자 유령이 왜 빌을 돕는 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악령이라는 것은 사람처럼 항상 그렇 게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에요. 눈에 띄려면 띌 수 있고, 안 띄려 면 얼마든지 몸을 숨길 수 있죠. 그리고 악령 스스로가 마음만 먹 는다면 어떤 탐지기나 카메라도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할 테 니까요.”
더글러스는 저절로 소름이 끼쳐 왔다.
“그・・・・・・ 그러면? 아이린의 악령이 사라진 게 아니라 날 지켜볼 수도 있는 거요? 그………… 그게……………”
“당연히 그렇다고 봐야겠죠. 형사님은 지금 지극히 위험한 상태라고요.”
“가스 폭발 때문에 사라진 게 아니고?”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는 악령이 가스 폭발을 겁낼 리 있어 요? 아마도 밖에서 기다리던 빌이 놀라 시끄러워지니 도망친 거 겠죠”
더글러스는 뭔가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아이린의 악령이 아무 힘도 없는 건 아니잖소.”
“그렇죠. 드문 일이지만, 물리적으로 싱크대 문을 파괴해 보일 정도라면 누구든 마음먹으면 직접 해칠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지금까지 왜 안 그랬지?”
“그러게요. 빌이 총질을 하지 않고도 더 완벽하게 위장할 수 있 었을건데, 빌이 아마 아이린의 힘을 모르거나 또 다른 이유가 있 을지도 모르죠.”
거기까지 말하고 승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글러스는 천천 히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아이린이 나를 죽이려 했다면 폭발 이후에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다는 거잖아.”
“그건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에요. 형사님이 나름대로 애쓴 것 은 알지만, 아이린이 정말 그러려 했다면 언제든 가능할 거예요. 물리력을 갖춘 악령은 정말 위험해요. 저승사자나 다름없죠. 물론 진짜 빌의 편을 드는지도 사실은 의문이고요.”
“뭐, 뭐라고? 분명히 빌의 꼭두각시가 돼 사람들을 죽이는 데 협조하고 있잖소. 나도 죽이려고 했고.”
“글쎄요. 정말 죽이려고 했을까요?”
“무슨 소리요?”
“형사님, 입장을 바꿔서 형사님이 악령이고 누구를 없애려 한 다 해 보세요. 형사님은 남의 공격은 하나도 받지 않고 언제든지 모습을 감출 수 있어요. 아무도 자기를 찾아내지 못하게 만들 수 도 있고 손톱만으로 문짝을 찢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괴력도 있 어요. 그런데 왜 상대가 온갖 실험을 다 할 때까지 천천히 몰아가 려고만 했을까요? 확실하진 않았지만 제가 이런 이상한 상황들을 확인한 이후 우리는 정말 서둘렀어요. 사력을 다해 달려오는 몇 시간 사이에도 형사님이 얼마든지 해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에 요. 그런데 도착해 보니 형사님은 멀쩡했고, 그 이후에 특별히 악 령이 나타난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 그건 낮이라서 그런 거 아니었소?”
“아, 형사님…… 아직도 그 얘길 믿으세요? 물론 낮이 되면 유 령들이 힘을 쓰기가 좀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의 원한이 맺히고 물리력을 행사할 정도의 악령이면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 아요.”
“허, 글쎄. 그렇다면・・・・・・ 우리 원점으로 돌아갑시다. 아이린이 빌에게 죽은 것이 확실하다면……………. 아니, 빌에게 죽은 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소. 그랬다면 이렇게 됐을 리가 없잖아. 혹시 정말 아이린이 조종되고 있지는 않은 거요?”
“간혹 가다 그런 주술을 쓰는 경우들도 있지요. 그러면 그들은 거의 멍한 상태가 되고,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없어져요. 하지만 아까 논의했듯이 아이린의 경우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면 왜 그런 거지?”
“그게 앞으로 알아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일 거예요.”
대화가 자연스레 멈추자 모두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반 교수 가 간혹 길을 물어보고, 더글러스가 간혹 길을 안내할 뿐이었다. 할렘 거리의 모습은 사실 보통 사람들도 알아보기 쉽다. 대부분 의 건물들이 창문이 깨지고 손질되지 않아 거리 전체가 버려지거 나 죽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군데군데 노숙자들이나 자그마한 점 포 같은 것도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거리 같다. 왜냐하면 부랑자나 노숙자들에게 침식당하게 되 면 원래의 거주자들은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한 집을 버린 채 뒤 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돌봐 줄 것 도 없고 소유주도 불분명하게 된 죽은 건물들의 블록이 탄생하고, 거기에 범죄자나 부랑자들이 자연스레 들끓는 것이다. 물론 거기 에 사는 주민들이라고 무조건 피에 굶주린 악당인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질서도 있고 인간적인 맛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렇게 이질적인 존재. 그러니까 상당히 값비싸 보이는 클래식카가 천천 히 미끄러져 들어왔을 때는 당연히 악의 어린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생각에 잠겼던 더글러스는 이반 교수의 차의 속도가 슬며시 떨어지는 것을 느끼자 급히 말했다.
“아니, 아니, 속도를 늦추면 안 돼요.”
“왜 그렇소?”
“아까 말했잖습니까. 여긴 할렘 지구니까요. 저들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면……..”
“하지만 저쪽 담장을 넘으면 빌의 건물로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더글러스가 돌아보니 그건 그랬다.
“하지만 차는요?”
그 말에 이반 교수는 쫏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늦은 것 같군.”
더글러스가 놀라 둘러보니, 죽어 버린 건물 틈바구니에서 새로 창조라도 된 양 꾸물거리며 군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 맙소사.”
더글러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쨌든 절대 멈춰서는 안 됩니다.”
더글러스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반 교수는 속도를 줄여 구석에 정차 준비를 했다.
“아니, 왜 멈추는 거요? 저들 안 보여요? 차를 부수러 오잖소!”
더글러스는 당황했지만 이반 교수는 씩 웃어 보였다.
“그래 주면 고맙지.”
“뭐라고요? 당신 차를 부수는데?”
“저들이 차를 부순다면 우리에겐 신경을 덜 쓸 것 아니오. 여러분, 빨리 내리시오.”
그 말에 현암과 승희는 두말도 하지 않고 문을 연 다음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있는 더글러스를 남겨 두고 이반 교수조차 차에서 내렸다. 이반 교수가 차에서 내려 재 빠른 동작으로 더글러스 쪽 문을 열어 배낭을 도로 가져가 짊어지 자 더글러스도 급히 안전벨트를 풀었다. 일행은 이반 교수가 발견 한 담장 쪽 길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들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할렘의 깡패 무리는 킥킥 웃으며 차 쪽으로 다가들었다. 더글러스도 이대로 있으면 차 와 함께 망가질 판이라 급히 차에서 내려 그들의 뒤를 따랐다. 곧 이어 깡패들은 더 자신감을 얻었는지 킥킥 웃으며 다가와 차를 때 려 부수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런 설명도 뭣도 없었지만 더글러스 에게는 그렇게 생소한 광경은 아니었다.
더글러스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의 차를 때려 부수 라고 내미는 이 노인의 마음 상태가 이해가 되지 않아 더글러스는 급히 그에게 물었다.
“지금 당신 차가 저렇게 부서지고 있소”
이반 교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편하게 가고 있지 않소.”
“아, 정말 저 차, 그래도 상당히……..”
그러자 이반 교수는 조용히 말했다.
“그냥 기계요.”
“이런 제기랄. 그래도……”
더글러스는 미국인답게 차에 대한 동경이 강하고 차를 자신의 분신이나 일부분처럼 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차가 모욕당하는 것은 자신 스스로가 모욕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렇게 비싸 보이는 좋은 차를 단순히 기계라고 하는 한마디에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래, 뭐 대학교도 가지고 있을 정도에다가 흡혈귀학이라고 했 나・・・・・・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으니 이럴 수도 있겠지.’ 이렇게 억지로 생각하려 했지만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제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고 해도 미국에서 자신 의 차가 저런 꼴이 되는 것은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돈이 썩 어 넘쳐서 흐르는 자라고 해도 그렇게 넘어갈 수 없는 법인데, 이 사람은 그냥 단순히 기계라고만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아니, 아니, 차를 놓고 이렇게 얘기하는 건 좀 그런가?’
불평을 할 만한 건덕지는 없었지만 더글러스는 불만스러웠다. 다만 이반 교수의 말이 맞기는 했다. 그들이 순순히 차에서 내려 물러난 덕분에 이 할렘 무리들도 오래간만에 그들이 중증오해 마지 않는 부자의 비싼 차를 때려 부수는데 완전히 도취한 것 같았다. 주변의 다른 놈들까지 모조리 쏟아져 나와 조금이라도 차를 더 때려 부수려고 난리법석이었다. 그사이 더글러스를 비롯한 네 사람은 무사히 할렘 거리를 벗어나 빌의 건물 부근까지 걸어서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