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3 : 천기의 수호자 : 2화 – 천기의 수호자
천기의 수호자
준후는 몹시 놀랐다. ‘천기의 수호자’라는 명칭조차 처음 듣는 것이지만, 인류를 수호하는 입장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 다. 옥결은 웃으며 지나가듯 말했다.
“그렇다고 인간들 일에 함부로 간섭하지는 않아. 그래서 할 일 도 그리 많지는 않지. 뭐, 예를 들면 우주 저편에서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돌덩어리를 부순다거나………….”
1 『퇴마록』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인 「왜란종결자에서 400여 년 전 강은 호(온동)가 맡았던 반신(神)적인 역할로 우주 관계들 중 지구를 포함한 세계인 생계 를 수호하는 일을 한다. 은동이 300여 년 전쯤에 있었던 진정한 대위기를 막기 위해 사라진 이후 그의 아들 강옥이 그 역할을 이어받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면(面)에 서 지구를 수호하고 있다. 처음에는 마계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마계가 섭리(온동)에 의해 눌린 이후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들에는 개입하지 않고 이면 에서나 힘을 쓰는 등 하는 일의 성격이 다소 변했다. 이 모두가 인간에게는 비밀이므 로 인간들은 그 존재를 모르며, 본문에서도 준후가 영혼 상태이기 때문에 천기의 수호 자인 옥을 만날 수 있었다.
“운석을요?”
준후가 놀라 말했지만 옥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응.”
“항상 그러나요?”
“뭐, 간혹 있는 일이니 바쁘진 않아. 그래도 게을리하면 안 돼. 한백년쯤 전에 귀찮아서 하찮아 보이는 혜성 같은 걸 놔뒀더니 좀 크게 난리가 났더라고. 다행히 죽은 사람이 없었지만 많이 혼났다고.”
준후는 옥결의 말을 듣고 1908년에 일어났다는 퉁구스카 대폭 발 사건을 기억해 냈다. 이 사태의 원인은 지금도 명확하지는 않 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혜성형 운석의 탓으로 분석되곤 한다. 그 때 떨어진 운석은 무려 이십 메가톤 정도의 핵무기급 위력으로 지 면에 작렬해 주변 일대를 전부 초토화시켰다. 다행히 인적이 거의 없는 시베리아 한복판에 떨어져서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위력과 충격은 아직까지도 종종 여기저기에서 소개되곤 했다. “그런 운석들을 당신이 다 막아 주는 겁니까?”
“그랬지. 뭐 적어도 내가 천기의 수호자를 맡은 사백 년 정도는 줄곧.”
옥결은 귀엽게 기지개를 켜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거 생각보다 귀찮아. 아예 사람들이 무지했을 때는 차라리 편했는데, 망원경이 점점 발달하니까 사람들이 볼 수 있잖아. 그러 니 점점 먼 데서부터 잘 생각해서 일찌감치 없애 버려야 하거든. 심지어는 몇백 몇천 광년 너머까지 들여다봐야 하니 귀찮다고.”
“왜 그래야 하죠?”
“사람들이 몰라야 하니까.”
“왜 몰라야 하는데요?”
옥결은 어이없다는 듯 멍하니 준후를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더니 준후의 질문은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했다.
“그런데 곧 더 이상 안 해도 될 거야.”
“더 이상 지구를 향한 운석이 없다는 건가요?”
그 말에 옥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젠 인간들이 더 많은 것을 보기 시작했으니까. 이제는 자기들이 알아서 해야지.”
“실패하면요?”
옥결은 단호하게 말했다.
“알아서 책임져야지.”
그리고 다소 인상을 찌푸리며 준후에게 말했다.
“알 만한 녀석이 왜 그래? 아무 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인간이 멸종하는 건 막아 줄 수 있지. 그러나 자기들이 안 이상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그게 아니면 또 떼쓰려는거야?”
옥결의 말은 평범했지만 준후의 가슴속을 꿰뚫듯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준후는 이것이 기회 같아서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 을 물었다.
“그러면 악마 같은 존재들은 왜 그냥 내버려두시나요?”
그 말에 옥결은 웃으며 손가락을 하나 들어 가볍게 저어 보였다.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 보통 악마라고 하지만, 사실은 마계의 권속들이지.”
“마게요?”
“그래. 아까 말했잖아. 신성광생사유환마. 우주 팔계 중의 마계 너희 인간 입장에선 그들이 모든 악의 근원 같겠지만, 꼭 그런 것 만도 아니니까. 큰 섭리의 일환일 뿐.”
“그러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어요. 더구나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다고요. 제 주변 사람들도 그들 때문에…………….”
준후가 다시 눈물을 흘리자 옥결은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아, 그래. 그건 참 안됐어. 그런데 그게 참 애매한 일이어서 말 이지.”
“뭐가요?”
“마계 존재들이 인간들을 미워하는 건 사실인데, 그들도 좀 변 했거든.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멸망시키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그러려고 했어요! 수천 년 전부터 계획 을 세워서…………….”
“알아, 알아. 그래서 문제가 된 거야. 사실 내가 태어날 즈음해서 마계가 제일 설쳤었지. 그런데 그때 우주의 대섭리가 누군가에게 깃들어서 한 번 그들을 손봐줬어.”
“누구에게요?”
그 말에 옥결은 다소 자부심이 느껴지는 듯,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아버지.”
“아.”
“그래서 그 이후로 마계는 근본적으로 변했지. 뭐, 어떻게 했는 지는 정말 아는 자가 없어서 모르지만…………… 지구 수억 개는 들어갈 만한 한 세계 전체를 무릎 꿇리고 복속시킨 건 사실이야. 마계를 때려 엎거나 깡그리 소멸시키는 것보다 그게 더 힘든 일이었는데 그걸 아버지는 해냈지. 아무튼 그래서 그 이후로 마계는 많이 순 해졌는데, 그래도 이전에 인간들을 미워하던 증오심만은 남아 있 어. 그래도 어떻게든 통제 가능한 정도라고.”
“그런 존재들이 왜 있는 거죠?”
옥결은 다시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너희 잘못도 크니까. 오히려 마계가 억울한 면이 있으니까. 아마 정확히 아는 존재는 거의 없을 테지만, 믿을 만한 위대한 존재들이 마계를 인정하고 이 정도로 그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그 이유를 당신도 모르나요?”
“슬프게도 난 몰라. 어쩌면 아버지는 알지도 모르는데, 이미 아 버지는 우리 세계에서 사라져 버렸어.”
“돌아가셨나요?”
“그건 절대 아냐. 절대 죽을 수 없는 존재거든. 네 곁에 있던 해밀 턴과는 격이 다르게. 전 우주가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는 존재가 우리 아버지야. 나도 천기의 수호자지만, 아버지와는 비교할 수 없어. 우주 전체가 아버지에게 전권을 위임했었으니 당연한 거지.”
“그럼 당신의 아버님이 신이셨던 건가요?”
“그것도 아니야!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신은 아니라고! 제일 간단하고 정확하게 말해 줄까?”
“네?”
옥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도 엔트로피 (Entropy)를 감소시킬 수는 없었어. 대답이 됐어?”
준후도 엔트로피의 개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엔트로피란 어 떤 행동을 하려 하면 에너지가 증가하는 것을 뜻했다. 특히 시간 과 관련된 행동은 원래대로 되돌리려고 하는 양자 복원 원리에 맞 물려 무한한 행동의 반복을 일으켰다. 그렇게 되면 영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전 우주조차도 마침내는 모든 것을 잃고 영원한 공 허로 빠지게 될지 몰랐다. 사실상 우주가 언젠가는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증거도 바로 이 엔트로피 원리 때문에 확정적 으로 증명되는 것이었다.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방법은 아직도 개념적으로 추정만 할 뿐이었다. 결국 우주 전체의 가장 근본적 원리이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밝혀진 것이 없는 것. 그것이 엔트로 피였다.
준후는 곧 옥이 비록 신은 아니지만 지금껏 자신이 믿어 왔던 신격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신의 모습을 처음 추정할 때의 낡은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게 실수였는지도. 그것도 나름의 가치는 있지만 사실 이편이 더 정상일지도 몰랐다. 그 시대에 맞는 개념과 언어와 형상을 사용하며, 그럼에도 인간이 절대 다가갈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는.
“그게 신의 절대적인 조건인가요?”
준후가 묻자 옥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마도 최소 조건이겠지.”
“그렇군요.”
“그런데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할 거야?”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번에 저희가 겪은 위기는요? 악마들이 라고 해도 세상의 멸망까지는 바라지 않는다면, 왜 이런 위기가 생기는 거죠?”
“아, 그게 몇천 년 전부터의 계획이라서 문제가 됐던 거야. 그들 은 이미 몇만 년 전부터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갖은 수를 썼어. 내 가 운석 때문에 바쁘다고 말했지? 원래 운석은 확률적으로 자주 떨어지는 게 아닌데, 내가 왜 바빴겠어?”
“설마 마계가 운석을……………”
“그래. 아예 노골적으로 쏟아지게끔 작업을 해 뒀더라고. 심지 어는 가까이 있으면 들통나니까 아주 먼 수십, 수백 광년 너머까 지 별이 터지고 운석이 지구를 향하게 장치해 둔 게 엄청나게 많 았다고. 그래서 오는 데만 수천수만 년이 걸리더라도 어떻게든 언 제가 되었든 지구를 부숴 버리려 한 거야.”
“엄청나네요.”
“나중에 상황이 바뀌긴 했지만 그때 놈들이 해 놓은 짓 때문에 내가 엄청나게 바빴다고. 상당수가 내가 천기의 수호자가 될 즈음 부터 떨어지게 돼 있어서. 그래도 인간이 망하진 않았으니 나도 패한거 맞잖아?”
“그러네요. 엄청난 일을 하고 계셨군요.”
“아부는 됐어. 아무튼 너희들이 겪는 위기는 이 운석 문제와 마 찬가지야. 몇천 년 전에 계획은 짜놨는데, 그사이 마계 존재들의 의식 자체가 변해 버린 거지. 그래서 아주 애매한 상태가 돼 버렸 어. 그들도 계획을 짠 건 생각나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지도 잊었 고, 이제는 은근히 그러기도 싫어졌던 거야.”
“그게 무슨…….”
“마계 전체의 의식이 변해서 그렇게 된 거야. 그래서 사실 이계 획에서 마계 존재들, 너희들이 악마라고 하는 자들은 상당히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었고, 다소 애매한 태도를 취했어.”
준후는 놀랐지만, 그래도 조금 이해는 갈 것 같았다. 사실 아무 리 퇴마사들이 애를 써도 악마들 자체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힘의 격차가 컸다.
“과거 마스터라는 적이 있었죠. 그가 지옥문을 열려고 했을 때, 우리는 모두 완전히 압도당했어요. 그리고 마스터는 지옥문을 열 었죠. 그런데 거기서 나온 악마가…………….”
옥결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아스타로트? 너희는 그렇게 불렀지?”
“네. 그런데 그는 오히려 마스터를 역으로 해치워 버렸어요. 물론 인간들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지 않았지만…………….”
그 말에 옥결은 웃었다.
“아마 많이 짜증 났을 거야. 그때 이미 마계는 인간 세상을 대놓 고 멸망시키지는 않게 됐는데, 굳이 그 녀석이 자기를 불러서 혼 날 일을 시키니까 열받고 화도 났겠지. 아, 물론 그렇다고 마계의 존재가 너희 편이라는 건 아냐. 그들은 여전히 인간을 적대시하니 까. 다만 크게 보아서 우주 질서 안에는 편입됐다는 거지.”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이후에도 아스타로트나 블랙 엔젤 등의 태도가 애매하긴 했어요.”
“아, 그 나이 많은 누나?”
“누나・・・・・・라고요?”
“아, 그냥 내가 그렇게 불러. 만난 적 있거든.”
“아무튼 블랙 엔젤은 백호 아저씨를 죽게 했고…….”
“잘 생각해 봐. 마계 존재가 인간을 직접 죽이는 건 상당히 큰 범죄야. 가령 너희가 악마와 상대한다 쳐도, 그들은 너희를 죽이 지 못해. 실제로 그럴 수 있다면 그냥 너희부터 죽이면 간단했을 거잖아.”
“그런 거였나요? 저는 섭리 때문에 그런 줄로…………….”
“물론 예전부터 그들도 섭리를 따르는 척은 했지. 그러나 아버 지가 뭔가 하신 이후로는 그들도 이제는 온전히 섭리를 따르게 됐 다고. 그 누나도 백호라는 사람을 직접 죽이진 못했을 건데?”
“그건・・・・・・ 그래요. 그러나 백호 아저씨를 이용했고 결국은 자살 하게 만들었죠.”
“그건 할 수 없지. 그들도 증오심은 있으니까. 직접적인 방법만 아니면 그런 것으로까지 그들을 제재할 순 없거든. 너희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라서 말이야.”
옥결이 아주 쉽게 말하자 준후는 침통하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한 일은 뭐죠? 악마들이 정말 세상을 멸망시킬 생각이 없었다면, 말세의 위기도 아니었다는 건가요?” 그 말에 옥결은 정색하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럴 리 없잖아. 분명 그건 인류 입장에선 엄청난 위기였어. 비 록 악마들이 조금 소극적이었더라도, 미친 인간들하고………… 뭐랄 까. 요즘 말로 시너지를 일으켜서 아주 막장으로 가던 상황이었다 고, 특히 그 아하스 페르츠 같은 인간까지 엮여서…………….”
“해밀턴 씨 말인가요?”
“그래. 그 인간이 정말 골칫거리였어. 인간에 초월 경지도 아닌 주제에 그 몸에 한해서는 우주적인 법칙까지 왜곡시키도록 돼 있 었으니 말이야. 그런데 인간일 뿐이니 초월자들이 간섭할 수도 없 었지. 거기에 마계가 과거에 남긴 자취에 미친 인간들이 자발적으 로 꼬여 들어 버려서 오히려 손조차 댈 수 없었어.”
“왜 손을 못대죠?”
그 말에 옥결은 어이가 없다는 듯 가차 없이 말했다.
“이봐, 장준후, 네 입장에서야 지구와 인간이 중요하겠지만, 그 것도 어디까지나 큰 원칙과 섭리하에서야. 그렇게 손을 댈 거면 자유의지란 걸 왜 남겨 놨겠어? 가장 옳은 생각, 가장 안전한 길 만 던져 줄 바에야 그냥 모든 인간의 생각을 다 없애 버리고 박제 해서 전시해 놓는게 낫지 않겠어? 너희 인간들이 저지른 짓은 최 소한 너희 인간 선에서 정리해야 하는 거야!”
옥결의 말은 조금 언성을 높인 정도지만, 그 말은 준후의 마음 에 마치 칼처럼 박혀 들어와 순간 굉장한 고통을 주었다. 심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옥결의 평범한 말 한마디에도 굉장한 힘이 깃든 것 같았다. 준후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자 옥결은 좀 심 했다 싶었는지 슬쩍 말꼬리를 돌렸다.
“아, 미안. 좀 아팠어?”
“괜찮아요.”
“말할 땐 힘을 완전히 빼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사과할게.”
“별것 아닙니다. 정말 괜찮으니 그렇게 사과하실 것 없어요.”
준후의 말에 옥결은 피식 웃었다.
“너 정말 괜찮았던 것 같아? 너 사실, 방금 완전히 소립자 단위로 분해됐었어.”
“네? 언제요?”
“재빨리 복원해 놔서 눈치 못 챘지? 아예 가루가 됐었으니 당연 히 기억도 없겠지. 그래도 일 나노초 동안은 소멸됐는데 사과 정 도는 해야 맞잖아. 미안했어.”
준후가 놀라자 옥결은 얼버무리듯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말이야. 네가 한 상황을 보고 하도 답이 없어서 그냥 지 구를 싹 밀고 다시 시작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까지 했었다고.”
“그런・・・・・・가요?”
“그런데 아하스 페르츠도 너희 일행이 마음을 돌려줬지. 그 인간 이 만약 이번에 너희 편이 되지 않고 설쳤으면 거기에다 과거 마 계에서 설계한 것들과 못된 녀석들의 좁은 생각이 합쳐졌다면……… 최소한 인류는 분명 끝장났을 거야. 너희는 정말 공이 크다고 그러 니 생존한 네가 초월의 경지로 올라설 수 있었지. 권능도 아무에게 나 주어지는 거 아니라고. 우리 아버지만은 못했지만.”
준후는 초월 경지에 들어선 자신조차 느끼지도 못할 사이 분해 했다가 다시 만드는 옥결의 능력에 새삼 반쯤 넋이 나갔다. 그러 자 옥결은 은근히 실수한 것이 맘에 걸리는 듯, 묻지도 않는 말을 변명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영락없이 아이 같았다.
“그런데 이거 알아? 우리 아버지가 일 대 천기의 수호자이긴 하 지만, 나는 예전에 우리 아버지가 그냥 처자식을 버리고 가출한 망나니인 줄로만 알았어. 그런데 이런 따분한 자리를 세습하라고 하잖아. 아주 화났고 짜증 났었지.”
“그래서요?”
“도망쳤지! 여기도 사실 우리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곳이라 우 주 팔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거든? 아, 사실 그냥 팔계라고는 하지만, 신계(神界)는 원래 못 가고 그때는 마계에 갈 수도 없었어. 그땐 아버지에게 마계는 적지였으니까. 물론 지금은 가려고 하면 갈수 있지.”
후는 보기보다 이 공간이 엄청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옥결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아무튼 그래서 아무 세계로나 막 도망 다녔어. 참 철이 없었지. 아까 본 애도 그때 유계에서 주운 거야. 일단 한번 도망쳐 보니 무 엇보다도 어머니가 무섭더라고. 어머니가 화나시니 정말 무서웠 어. 잡히면 정말 끝장날 것 같아서 정말 죽을힘을 다해 도망 다녔 는데, 그러다가 아버지의 행적을 여기저기서 찾게 됐어. 마계에서 결정적인 이야기를 알게 됐고.”
옥결은 잠시 말을 끊고 자부심이 담긴 뿌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라 생각했고, 내게 아무것도 해준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내가 가는 모든 세계, 모든 것이 아버지 의 도움을 받은 거였어. 그래서 돌아왔고, 아버지를 이어 이 자리 를 맡은 거야.”
“아버님이 굉장한 분이셨군요.”
“아, 굉장했지. 아마 능력만으로 따지면 우주 역사상 최고였을 거야. 우주 전체가 전폭적으로 모든 힘을 밀어줬으니까.”
“그분의 성함은..”
“모르는 게 나을 거야. 아버지가 그랬다는 건 상당한 비밀이니 까. 어머니에게조차 말할 수 없거든. 그래도 네겐 말해도 상관없 으니 오랜만에 떠들어 본 거야. 난 말할 상대가 별로 없어서 말이지. 그래도 아버지의 이름까진 말할 수 없어.”
옥결이 웃으며 긴 말을 마치자 준후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왜 제겐 말해도 상관없는 거죠?”
“알고 싶어?”
“예.”
그러자 옥길은 준후를 보며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이봐, 장준후, 네겐 사실 비밀 따위 아무 의미 없어.”
“초월 경지에 들어섰기 때문인가요?”
옥결은 다소 슬프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넌 이미 죽은 존재고, 조금 있으면 아마 우주 전체에서 사라질 테니까. 그러니 비밀 따윈 상관없는 것뿐이야. 네 불완전 한 계획은 완벽하게 실패했고, 이제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