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2장 – 은루(銀淚) (17)
솜나니 페이는 앙칼진 이름들을 쏟아내었다. 평의회 의장실에서 감히 꺼낼 이름들이 아니었지만, 라토 센 의장은 그녀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비아스를 향해 살벌한 이름들을 쏟아내던 솜나니는 결국 의장에게 화살을 돌렸다.
<의장님, 도대체 어떻게 그걸 허락하실 수 있어요?>
<조용히 해, 솜나니. 의원들이 모두 찬성하는 기색이었다는 것은 자네도 알 텐데. 그 상황에서 내가 비아스의 요구를 거부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났겠나? 시간을 좀 끌 수야 있겠지만 그랬다간 비아스는 당장 의원 투표를 요구했을 거야. 그리고 반드시 승리했을 테고. 내가 자네 가문을 위해 그런 수모와 위험까지 겪었어야 했단 이름인가?>
솜나니는 약간 진정했다.
<도와주신 것은 잊지 않겠어요. 의장님. 제기랄, 그년이 보상금을 거절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설마 남자를 상대로 쇼자인을 요구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이름을 잘라 먹지 마. 의미가 이상해지니까. 쉬크톨이 없잖아.>
의장이 별걸 가지고 깐깐하게 군다고 생각하던 솜나니는 곧 의장이 그런 의미로 이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센 의장은 책상 위에 놓인 꾸러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솜나니는 그것을 가리키며, 하지만 그걸 가리키기 싫다는 듯이 손을 당기며 아주 이상한 모습으로 일렀다.
<쉬크톨입니까?>
<그래.>
솜나니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저는 그걸 가져갈 수 없어요. 어떻게 사모에게 그걸 가져다준단 이름입니까!>
<하지만 가져다줘야 해.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까. 알고 있겠지만 사모 페이가 유언을 남기고 주위를 정리할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은 사흘이야. 사흘 안에 이 쉬크톨을 가지고 떠나야 해. 그리고 륜 페이의 목을 가져오기 전까진 절대로 멈출 수도, 잠시 쉴 수도, 돌아올 수도 없어.>
<굳이 그렇게 이르시지 않아도………….>
<잠자코 들어! 그대로 전해 주란 이름이야. 여기엔 타협도 없고 속임수도 안 되고 흐지부지 끝나는 것도 없어! 륜 자신이 죽거나 암살자가 죽었다는 것이 확실해지기 전까진 절대로 쇼자인테쉬크톨은 끝나지 않아.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화리트 마케로우의 목숨값이 지불되는 거야. 알겠나!>
<마케로우 가문은 화리트의 죽음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에요. 사모를 하텐그라쥬에서 쫓아내려는 거예요!>
<물론 알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의원들이 모두 비아스에게 동조했으니까. 사모의 태도가 다른 가문들에겐 끔찍한 오만으로 보일 거라는 것을 몰랐나? 아이를 가지지도 않으면서 남자란 남자는 다 휩쓸어 가는 것이? 사모가 차라리 아이라도 가졌다면 덜 약 올랐을 거야. 순수한 경쟁에서 패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사모는 먹지도 않을 쥐를 뺏어서 물에 던지는 꼴이야. 그게 얼마나 가증스러운 건지 모르겠단 이름이야?>
<사모는 그럴 생각 조금도 없었어요!>
<알고 있어! 하지만 그렇더라 해도 너희들이 사모를 달랬어야 했어! 결국 너희들의 실수였어. 륜 페이를 얼빠진 살인자로 만든 것도, 사모 페이를 증오의 과녁으로 만든 것도 너희들이 사모라는 행운을 즐길 줄만 알았지 조심성은 발휘할 줄 몰랐기 때문이야! 그러니 이젠 그 대가를 치러야 되는 거야. 그러지 않고선 하텐그라쥬에 발 붙이고 살 수 없어!>
솜나니는 굳어 버린 얼굴로 의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거부하는 표정이었지만 의장은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늙은 의장은 피곤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대며 책상 위의 쉬크톨을 바라보았다.
암살자를 위해서만 만들어지고 암살자에 의해서만 사용되는 견고하고 예리한 검. 그것이 견고한 까닭은 세상의 끝까지라도 암살 대상을 추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그것이 예리한 까닭은 육친을 벨 때 고통을 덜 주기 위해서이다. 타고난 전사들인 레콘들이 이 검을 몹시 탐내지만, 쉬크톨이 나가 이외의 다른 종족의 손에 들어간 적은 없다. 암살이 끝난 다음 암살자들이 쉬크톨을 부러뜨리기 때문이다.
라토 센 의장은 쉬크톨을 가리키는 옛 문구 하나를 떠올렸다. ‘피붙이의 피를 마시기 위해 창조된 난폭한 괴물.’ 센 의장은 힘겹게 이름을 맺었다.
<차라리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도록 해, 솜나니. 사모가 륜의 모가지를 베어 오면 그녀에 대한 다른 가문들의 증오가 조금이라도 덜어질 테니까. 너희 가문엔 아무 쓸모도 없는 남자 하나만 잡으면 되는 거야.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그 시각, 마케로우 가문에서는 비아스가 가주로부터 받은 열렬한 칭찬에 우쭐해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두세나 마케로우는 딸이 해낸 일을 거의 믿을 수 없었다.
<정말 잘했다! 이야말로 ‘몸 빠진 살’로 용을 잡은 꼴이다. 그 도깨비 같은 년이 마침내 하텐그라쥬를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되었구나!>
<륜 페이 덕분이지요.>
<남자의 멍청한 짓이 쓸모가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죽은 건 우리의 멍청한 아들이었고,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으니 아직 마케로우라고? 정말 멋진 지적이었다. 버린 미끼들로 대어를 낚다니, 네 재주가 정말 대단하구나. 난 네가 약술에만 재능이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이런 가문의 일에 재주를 보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비아스는 긴장했다. 두세나는 그저 호인처럼 허허거리며 좋아하면서 동시에 그 이름 속에 정교한 함정을 파 놓고 있었다. 여기서 서툴게 겸양을 표시한다면 야심가로 낙인찍힐 것이다. 겨우 한 가지 위업을 해낸 것으로 소메로 마케로우가 받는 신임에 도전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차라리 거만하게 굴어 버릴까? 가주는 그것을 자신감의 표현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위험하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굉장한 고민을 한 끝에 비아스는 적절한 대답을 골라내었다.
<저는 화리트의 죽음이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적출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죽었던 것이겠지요. 그리고 적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아직 우리의 책임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두세나는 웃었다.
<논리적이군. 그것이 학자의 태도냐?>
<상대방이 페이 가문이었다는 것이 행운이죠.>
다행히도 두세나는 만족했다. 비아스는 인사를 한 다음 물러 나왔다. 마케로우 가문은 이름 그대로 잔치 분위기였다. 아마 하텐그라쥬에 있는 가문들 거의 대부분이 비아스 마케로우가 한 일을 놓고 즐거워하고 있을 것이다. 비아스는 소메로와 두 이모에게서도 대단한 찬사를 받았고, 응접실에서는 다른 가문들이 보낸 서신과 선물들을 한 꾸러미 가득 받아 들게 되었다. 그 선물들 중 특히 인상적인 것은 금촉과 금 깃이 달린 훌륭한 몸 빠진 살이었다. 비아스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몸 빠진 살’은 가느다랗고 잘 휘어지는 화살을 이른다. 몸 빠진 살로 사냥을 할 때는 그것을 명중시킨 다음 상처 입은 동물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추적하는 방법을 쓸 정도로 덜 치명적인 화살이다. 당연히 초식 동물이 그 대상이며, 맹폭하게 달려드는 야수들에게 몸 빠진 살을 날리는 것은 시비를 거는 일밖에 안 된다. 따라서 ‘몸 빠진 살로 용을 잡는다.’는 이름은 턱없이 작은 일격으로 거대한 목표를 쓰러뜨리는 믿기 어려운 위업을 의미한다. 비아스는 어느 가문이 이 상징적인 선물을 보내었는지 궁금해했고 그것이 센 가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문다운 품격이 있는 선물이었다.
즐거워하며 자기 방으로 돌아온 비아스는, 방 한가운데서 오도카니 앉아 있는 카린돌을 보곤 웃음을 거뒀다.
<어떻게 들어왔지?>
방문은 잠겨 있었다. 비아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카린돌을 바라보았지만 카린돌은 해명을 하거나, 하다못해 미소를 짓거나 하지도 않았다. 다만 무표정한 얼굴로 비아스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것은 비아스를 언짢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의 찬사를 받은 사람에게 보내는 시선으로는 무례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시선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그건 다 뭐지?>
카린돌은 비아스가 들고 있는 선물 꾸러미와 서신들을 가리키며 일렀다. 비아스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쏟아 놓았다.
<여기저기서 선물을 보내는군.>
카린돌 역시 센 가문의 선물을 발견했다. 카린돌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일렀다.
<몸 빠진 살로 용을 잡았다는 이름이군. 어디서 보낸 거야?>
<센 가문의 라디올 센.>
<가주인 라토 센이나 최연장자인 수이신 센이 아니라는 거지. 역시 대단한 가문이야. 인상적인 선물을 주면서도 빠져나갈 궁리는 해 두는군. 라디올 센이 얼간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
비아스는 기분을 망쳤다.
<다른 사람이 받은 선물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 네 취미 생활인 줄은 몰랐군. 남자를 평가 절하하는 쪽 아니었나.>
<남자를 죽이는 것보다야 나은 취미라고 생각하는데.>
비아스는 가까스로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카린돌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비아스를 지나쳐 탁자로 걸어갔다. 카린돌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선물 중 장신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열을 잘 흡수하는 구리로 만들어진 근사한 장신구였다.
<잘 가질게.>
비아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야? 무슨…….>
<몇 년 전에 방 열쇠를 잃었지?>
비아스는 정신을 닫았다. 그녀는 카린돌이 어떻게 잠긴 방 안으로 들어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카린돌을 노려보던 비아스는 카린돌의 무표정한 얼굴이 공포를 감추기 위한 가면임을 깨달았다. 카린돌은 장신구를 들여다보며 일렀다.
<그날, 언니를 찾아왔었어.>
<그날?>
<적출식 날. 화리트가 죽던 날.>
비아스는 흠칫하며 옆의 침대를 흘긋 돌아보았다. 카린돌은 냉랭하게 일렀다.
<침대 아래에 뭐가 있나 보지?>
비아스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것까지 알고 있었나? 카린돌이 숨겨둔 사이커를 발견했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비아스는 이를 악문 채 맨몸으로 덤빌 각오를 했다.
하지만 비아스는 카린돌이 장신구를 매다는 것을 보며 동작을 멈췄다.
카린돌이 자신을 고발할 생각이라면 저런 장신구를 달라고 할 필요는 없다. 그 순간 비아스는 어떤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거래?’ 그리고 비아스는 카린돌이 했던 이름 전부를 되새겨 보았다. ‘인상적인 선물을 주면서도 빠져나갈 궁리는 해 두는군.’ 비아스의 입가에 드디어 미소가 떠올랐다.
장신구를 매단 카린돌은 무관심한 얼굴로 벽을 보며 일렀다.
<그날 이름이야.>
<그날?>
<여러 가지 알려줘서 고마워. 약술은 너무 어려워. 언니 같은 뛰어난 약술사가 가족이라 다행이야.>
비아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찾아와.>
<그러지. 그럼.>
카린돌은 방을 나갔다.
홀로 남게 된 비아스는 누가 이기고 누가 더 많은 것을 얻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물론 카린돌이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카린돌은 비아스가 그날 방을 비운 것도 알고 있었고 범행 도구였던 사이커까지 가지고 있다. 혹시나 해서 침대 아래를 본 비아스는 그것이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사소한 것이지만 카린돌은 장신구 하나도 가져갔다.
하지만 이긴 쪽은 분명치 않았다. 아마도 카린돌은 소메로보다 비아스가 다음 가주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비아스를 고발하기보다 그녀의 약점을 쥐는 것에 만족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카린돌이 장신구로써 상징해 보인 ‘거래’는 위험한 거래였다. 어쨌든 카린돌이 비아스의 공모자가 되어 준 지금, 이긴 것은 둘 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아스는 그제야 집 안에서 열쇠 고장이나 분실이 자주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린돌은 도대체 몇 개나 되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걸까? 문득 비아스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소메로처럼 최연장자도 아니고 비아스처럼 야심에 찬 것도 아닌 카린돌이 살아남기 위해 해온 것이 열쇠를 수집하는 것뿐일까? 비아스는 카린돌을 잘 관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에 앞서 방문의 자물쇠를 바꿔야겠다고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