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3장 –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1)
물을 싫어한다는 점에서 나가는 레콘과 같다. 하지만 레콘이 돌멩이보다 나을 것 없는 수영 실력 때문에 물을 두려워하는 것에 비해 볼 때 나가는 물의 차가움 때문에 수영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손이 부모의 이름을 잇는다는 점에서 나가는 인간과 같다. 하지만 인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르고 나가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른다. 죽음의 공포를 물리쳤다는 점에서 나가는 도깨비와 같다. 하지만 도깨비가 죽음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 비해 나가들은 심장을 적출함으로써 놀라운 생명력을 얻은 것에 불과하다. (중략) 영육(靈肉)이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이런 특징 때문에 혹자는 도깨비가 가장 신에 가까운 종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다. 도깨비들 또한 영과 육이 함께 탄생하며, 비록 육이 죽은 다음에도 영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다른 도깨비들의 육이 가까이 있을 때, 즉 도깨비들의 공동체와 접촉해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어떤 도깨비가 외진 곳에서 홀로 죽었다면 그 도깨비의 영은 불로써 자신을 감싼 다음 살아 있는 도깨비들을 찾아 무서운 기세로 날아간다. 간혹 도깨비가 없는 곳에서 도깨비불이 발견되곤 하는데, 이것이 바로 죽은 도깨비의 영이다. (중략) 살해할 수 없는 도깨비를 육체적 위협으로 분노하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도깨비들의 호의적인 성정을 무시하고 그들을 압박하는 실수를 저지를 경우, 그것은 최악의 재난의 첩경이 될 것이다. 저 무도하고 사악한 페시론 섬 사람들이 저지른 실수가 바로 그것이다.
-가이너 카쉬냅의 <생각하는 동물들>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아침, 잎맥을 타고 흐르던 이슬이 잎사귀 끝에 멈췄다. 그 안에 뒤집힌 세상을 담아보이며 부풀던 이슬은 마침내 세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진 이슬이 풀잎을 때리자 초향이 자욱하게 번져나갔다.
땅바닥을 살피던 케이건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키보렌에 있었다. 케이건의 주위로 거대한 기둥들이 장막처럼 펼쳐져 있고 그 어두운 결을 따라 이슬을 머금은 이끼들이 빛나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이 많은 그림자들이 뒤엉켜 쌓여 있는 거대한 원시림 속에서 케이건은 티끌처럼 작은 얼룩이었다.
케이건은 이슬을 잔뜩 머금은 꽃을 딴 다음 그것을 입에 물었다. 입술 사이로 꽃잎을 미끄러지게 한 케이건은 입 안에 남은 이슬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고요한 아침이었고, 비록 그가 사랑할 수 없는 숲이었지만 케이건은 그 침묵의 시간을 연장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곧 꽃을 던지며 몸을 돌렸다. 넝쿨과 관목을 헤치며 야영지로 돌아온 케이건은 티나한이 일어난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비형은 아직까지도 딱정벌레에 기댄 채 쿨쿨 자고 있었다. 케이건을 본 티나한은 깃털을 잔뜩 부풀리며 말했다.
“찌뿌드드하군……. 어디 갔나 왔냐?”
“자취를 좀 찾아보고 있었소. 나가 정찰대의 자취가 있더군.”
티나한은 긴장하며 자신의 철창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흘 전에 지나간 거요.”
“열흘? 허, 그렇게 오래된 자취가 남아 있나?”
“그렇게 요란한 자취를 남기고 다니는 자들도 드문 편이오. 소리에 신경 쓰지 않으니 나뭇가지건 풀잎이건 진흙탕이건 닥치는 대로 짓밟으면서 다니니까.”
정찰대는 모두 여덟이었다. 그들의 진행 방향과 엇갈리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다시 만날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나가 정찰대원들의 이동 방향은 불규칙하기 때문에 케이건은 확신하지는 않았다. 나가 정찰대는 제멋대로 움직인다. 그들에겐 집결지나 요새, 혹은 근거지 같은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나가 정찰대는 한번 정찰을 나설 경우 1년이나 2년, 심지어 5년까지도 계속 정찰을 다닌다. 다른 종족들이라면 보급의 문제 때문에 도저히 그런 식의 정찰이 불가능하겠지만, 키보렌 속에 있는 나가 정찰대는 보급창 속에서 정찰 활동을 하는 셈이다. 케이건이 이 위험한 여행을 감행하면서도 음식물 때문에 고민하지 않은 것 또한 이곳이 키보렌이기 때문이다. 케이건은 나가 정찰대들의 자취 이외에 무수한 숲의 동물들의 자취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무는 것은 바보짓일 거요. 비형을 깨워 출발합시다.”
한낮의 키보렌은 어둡고 습하고 무거웠다. 열을 감추기 위해 인간과 도깨비, 그리고 레콘은 팔다리를 가리는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나가 정찰대에 대해 주의력을 계속 혹사당하는 상태에서 걷고 있었다. 하지만 키보렌이 끝없이 가져다주는 중압감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태양의 모진 화살들은 키보렌의 머릿부분을 뚫지 못했고 그 아래쪽엔 끝없는 그늘들이 펼쳐져 있었다. 비형과 티나한은 이 땅 어디엔가는 분명히 수천 년 동안 햇빛이 닿은 적 없는 땅도 있으리라 확신했다.
일행은 펠도리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거대하고 두터운 나뭇잎들은 무례하게 뻗어 나와 그들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고 이끼에 뒤덮인 뿌리들은 무릎을 잡아채는 함정이었다. 나무들은 여행자나 지도 제작자의 편의 따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들만의 법칙으로 자라나 있었고, 따라서 백 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수백 미터를 돌아가야 하는 일쯤은 신경 쓸 일도 되지 못했다. 열 발자국 앞에 무엇이 있을지 장담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 되고 있었다. 딱딱한 땅이 나타날지, 죽은 나무들이 둥둥 떠 있는 물웅덩이가 나타날지, 절벽이 나타날지. 실제로 먼 곳에서 숲의 일부로 보였던 것이 가까이 다가가면 덩굴과 이끼, 나뭇잎 따위로 뒤덮인 낭떠러지인 것을 깨닫게 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그때마다 그들은 몇백 미터씩 돌아가야 했다. 일행은 몇 번이나 펠도리 강을 잃어버릴 뻔했다. 만약 침착하고 끈기 있게 일행을 인도해 나가는 케이건이 없었다면 구출대는 오래전에 키보렌의 밀림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형은 쾌활했다. 소리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기에 비형은 제멋대로 떠들고 큰 소리로 웃고 간혹 뒤를 따라오는 자신의 딱정벌레에게 노래까지도 불러주었다. 비형은 정말 이것을 즐기는 듯했고, 키보렌이 왜 악명을 얻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곤 했다. 케이건은 나가 정찰대와 조우하는 순간부터 즐거움 따위는 전설 비슷한 것이 되어버릴 것을 알고 있기에 비형의 유쾌함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멧돼지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걸어오고 있는 딱정벌레에게도 신경 쓰지 않았다.
케이건은 딱정벌레를 데리고 가는 것에 난색을 표했다. 그의 원래 계획은 키보렌에 도착하자마자 딱정벌레를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형은 딱정벌레가 두터운 외피 덕분에 열을 그다지 발산하지 않으며 어차피 변온 동물이기 때문에 나가 정찰대의 시선을 끌지는 않을 거라고 주장했다. 비형의 설명을 다 들은 케이건은 손을 들어 딱정벌레를 가리켰다.
“너무 커요.”
아무리 열을 적게 발산하더라도 길이가 6미터나 되는 생물이 걸어가는 것이 보이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비형은 크기로 말하자면 티나한이나 그의 철창이 훨씬 더 크며, 만일의 경우 딱정벌레를 타고 날아오를 수 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케이건은 후자의 가능성이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놈은 나무를 갉아먹고 꽃을 뜯어먹지 않소? 나무가 그 지경이 되면 우리의 수목 애호가들이 분노에 차서 추적할 텐데. 그 자들의 관심은 모두 나무에 돌려져 있거든.”
“야생 딱정벌레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금씩 먹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나늬는 소식하는 편이거든요. 덩치에 안 맞죠?”
나늬는 딱정벌레의 이름이었고 케이건과 티나한은 딱정벌레의 우람한 뿔과 두터운 갑피를 보며 이토록 소름 끼치는 작명 감각도 드물 거라 생각했다. 결국 케이건은 ‘길잡이’로서 딱정벌레의 동행을 허용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는 이답게 시도 때도 없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무를 갉아먹는 딱정벌레의 모습을 묵인했다. 비형의 보장대로 나늬는 나무에 이상을 끼치지는 않았지만 대신 한 시간이 멀다 하고 나무에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티나한은 비형과 나늬 중 누가 더 시끄러운지 판단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침내 비형과 그의 딱정벌레가 입 다물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케이건은 저녁거리를 장만해야겠다고 판단했고 나무 위를 오가는 원숭이를 목표로 정했다.
“티나한 부탁합시다.”
티나한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돌멩이를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비형이 뒤로 돌아설 때까지 기다린 다음 나무 위를 향해 돌멩이를 집어던졌다. 그것은 레콘의 기준에서만 돌멩이였지 원숭이에겐 거의 바위나 마찬가지였다.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바위는 원숭이를 일격에 즉사시켰고 부수적으로 나뭇가지와 잎을 잔뜩 떨어뜨렸다.
비형이 여전히 뒤로 돌아서 있는 동안 나늬가 땅을 팠고, 케이건과 티나한은 원숭이를 손질한 다음 거대한 나뭇잎들로 싸서 땅속에 묻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홀린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묵묵히 비형의 작업을 바라보았다.
동행자 중 한 명이 도깨비라는 것을 알았을 때 케이건은 도깨비로 하여금 화식(火食)의 습관을 어떻게 포기하게 할까 고민했다. 한계선을 오르내리며 나가를 무수히 상대해 본 케이건은, 나가처럼 산 채로 먹지야 않지만 불을 피우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날고기를 씹어 먹는 쪽을 선택한다. 따라서 케이건은 과일까지도 구워 먹는 도깨비가 어떻게 생식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비형은 도깨비다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아직까지도 확신이 없었던 티나한은 조심스럽게 땅을 만져보았고 비형은 그것을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땅은 차가웠다. 하지만 잠시 후 그들이 땅을 파헤치자 완전히 탄 나뭇잎과 잘 구워진 원숭이 고기가 나타났다. 비형은 땅속에 있는 것을 도깨비불로 구운 것이다. 익은 고기를 뜯으며, 케이건은 도깨비가 물속에서도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전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케이건은 자신 또한 유쾌하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케이건은 키보렌에 대해 호의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가 숲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단순하며 단단한 논리에 의해 도출된다. 케이건은 나가를 증오한다. 나가는 숲을 사랑한다. 따라서 케이건은 숲을 증오한다. 케이건에게 세상의 모든 숲을 불태울 권한과 세상의 모든 나가를 불태울 권한을 놓고 한 가지를 택하라고 말한다면 그는 주저 없이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태워 죽이는 것은 너무 간단하다. 하지만 숲을 불태우면 나가들에게 지독한 고통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서녘으로 지는 해가 세상을 향해 마지막 빛을 뿌릴 때, 숲이 일몰의 애가를 부르기 시작할 때, 숲의 머릿결 사이로 새어 드는 주홍빛 광선들이 질감을 가진 피륙처럼 허공을 미끄러질 때, 딱정벌레를 쓰다듬던 도깨비가 문득 돌아보며 익살맞은 미소를 지을 때, 케이건은 내일이라는 미지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느꼈다. 식사를 마친 다음, 케이건은 쌍신검의 내력을 설명해 달라는 비형의 요구를 선선히 들어주며 그런 자신을 불가사의하게 느꼈다.
“오래전, 검 한 자루에 만족하지 못했던 레콘 검사가 있었소. 그 레콘은 신발도 두 짝이고 장갑도 두 짝이니 칼도 두 자루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는 최후의 대장간에서 자신을 위해 두 자루의 아름다운 검을 만들었소.”
티나한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정벌레는 웅크리고 있었고 비형은 그 거대한 몸에 기대어 앉은 채 케이건을 마주 보고 있었다. 타오르는 저녁 속에 열대의 밀림은 붉게 변색된 그림처럼 보였고 풍경의 깊이감은 황당하리만큼 무시되고 있었다.
“그 칼들의 이름은 각자 해바라기와 달바라기였소. 그 레콘은 그 두 자루의 검으로 적들을 물리치고 위대한 일들을 이룩했소. 무수한 레콘을 쓰러뜨려 레콘 미녀들을 쟁취했고 사악한 두억시니들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들을 물리쳤소. 결국 그는 자신이 왕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그것은 레콘에 의해 건설된 처음이자 마지막 왕국이었소. 왕은 책임감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소. 그는 해바라기와 달바라기를 칼집에 꽂아놓은 다음 왕국을 다스렸지.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왕을 비껴가지 않았고 왕은 늙어갔소. 그러자 나가들이 노왕의 땅을 탐내게 되었소. 나가들은 노왕의 땅에 숲을 만들고자 했지. 노왕의 위대한 전설을 알고 있었지만, 나가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소. 노왕에겐 왕자가 없었거든.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은 아니오. 하지만 그 아들들은 왕의 곁에 남아 있지 않았지.”
티나한은 알 것 같았다. 가문의 이름을 잇는 것은 나가와 인간뿐이다. 레콘의 경우엔,
“모두들 신부를 찾아 떠나갔군?”
“그렇소. 당신네 레콘들이 왕국을 건설할 수 없는 까닭이 그것이지. 또한 당신네들의 일원의 이야기를 인간인 나에게 들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왕에겐 신하들이 있었을 텐데? 그 신하들은…………. 아!”
“그렇소. 인간이나 도깨비였지. 그들은 왕을 좋아했지만 왕처럼 강하진 않았소. 하지만 왕의 적은 불사의 나가들이었소. 그래서 노왕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일어섰소. 그가 전장에 나섰을 때 나가들은 왕이 노쇠했다고 말할 수 없었소. 나가의 역사에서 그런 치욕적인 패배는 다시는 없었을 거요. 트집 잡기 좋아하는 자들은 전쟁터가 너무 추웠다고, 그러니까 나가들이 정상적인 움직임을 취할 수 없을 정도의 기온이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 자들도 왕의 위대함을 폄하할 수는 없을 거요. 하지만 그 전투에서 왕은 한 손을 잃고 말았소. 어떤 믿기 어려운 전설에 따르면, 한 용맹한 나가가 검을 쥔 왕의 손을 삼켜버렸고, 왕은 자신의 손목과 함께 나가의 목을 베었다고 하더군요.”
비형은 그 광경을 상상해 보며 묘한 숨소리를 내었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어쨌든 왕은 자신의 두 자루 검을 쓸 수 없게 되었소. 하지만 노왕은 그것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할 수는 없었소. 그 칼들은 왕의 인생이었으니까. 그는 레콘이었소. 아마도 가장 레콘다운 레콘이었을 거요. 그가 세운 왕국보다 그 두 자루의 검이 진실로 왕이 살아온 나날에 대한 증거물이었소. 그리고 그가 획득했던 무수한 미녀들보다 그 두 자루의 검이 참된 왕의 반려였소.”
티나한은 자신의 철창을 돌아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렇소. 왕은 두 자루의 검을 들고 다시 최후의 대장간을 찾았소. 티나한 당신은 잘 알겠지만 최후의 대장간은 단 한 번만 무기를 만들어 주지. 두 번째는 없소. 하지만 왕의 요구는 두 번째의 무기를 만들어달라는 것이 아니었소. 해바라기와 달바라기를 하나로 합쳐달라는 것이었소. 최후의 대장장이는 그 요구를 수락했지. 완성된 검은, 두 개의 검신을 가졌지만 한 손으로 쓸 수 있도록 하나의 칼자루를 가진 모습이 되었소. 만족한 왕은 그 검을 바라기라 불렀소. 그것이 이 검이오. 왕의 자존심이지.”
세 명의 이야깃꾼은 도깨비를 죽일 수 있다. 이야기에 잔뜩 도취된 비형은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 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늙어 죽었소. 모든 이들이 왕이 죽으면 왕국이 산산조각 날 거라고 믿었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소. 왕의 부하들 중 인간 한 명이 그 왕국을 이어받아 다스렸고, 놀랍게도 왕국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이어졌소. 하지만 끝내 나가들의 무자비한 공격 앞에 무너졌지. 지금은 나가들의 숲 아래로 사라져 왕국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소. 남은 것은 그 무엇 앞에서도 물러설 줄 몰랐던 영웅 왕에게 헌정된 노래들과 이 바라기뿐이오.”
비형은 그 익숙한 이름에 놀랐다.
“영웅왕! 그 레콘 왕이 바로 영웅왕이었군요. 그럼 그게 영웅왕의 검입니까?”
“그렇소.”
“그럼 자그마치 1,500년 전의 칼일 텐데? 어떻게 아직까지 그렇게 완벽한 상태인 거죠?”
케이건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티나한이 자신의 철창을 가리키며 말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만들어지는 무기는 관리만 잘 하면 거의 영구적으로 쓸 수 있어. 그러니 평생 동안 한 자루만 만들어줘도 충분한 거지.”
고개를 끄덕이던 도깨비는 문득 인간의 얼굴을 보았고 그 시선은 그대로 고정되고 말았다. 케이건은 나무 밑동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가냘픈 햇빛 한 자락이 그의 턱과 가슴을 비스듬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케이건의 엄격한 시선은 흙투성이 발을 내려다보는 듯했지만, 동시에 더 이상 올려다볼 것 없는 남자의 시선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형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 속에서 질문했다.
“당신은 누굽니까?”
케이건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세파를 타 넘는 사소한 재주로 나날을 버티는 거칠고 지친 방랑자로 돌아왔다.
“나는 케이건 드라카요.”
비형은 단순히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형의 그런 생각은 다음 날 새벽에 확인되었다. 새벽녘, 티나한과 비형은 드디어 나가를 목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