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4장 – 왕 잡아먹는 괴물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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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4장 – 왕 잡아먹는 괴물 (8)


티나한은 무적왕 일행이 혹 왕국을 세운다면 그들의 건국 신화 속에 자신이 황야에서 홀연히 나타나 모래와 흙으로 고기를 만들어 낸 신의 사자로 기록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따위는 떠올리지도 않았다. 그가 고기를 나눠준 것은 좀 더 현실적인(그러나 여전히 가능성은 없는) 이유에서였다. 티나한은 혹 이 자들이 다른 자들과 달리 왕국을 세우는 데 성공하기라도 한다면 훗날 자금을 좀 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하늘치의 등을 정복하려는 그의 꿈은 어쨌든 돈을 많이 잡아먹는 꿈이었다.

그래서 티나한은 케이건이 만들어 놓은 훈제육을 엄숙한 얼굴로 ‘선물했고’, 무적왕이라는 자가 감사의 표시로 그를 ‘아라짓 전사’에 임명하겠다고 제안했을 때도 폭소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아라짓 전사라고 했냐?”

무적왕은 티나한의 말투가 거슬리는 기색이었지만 꾹 참으며 훈제육을 씹었다.

“그렇소. 짐의 조상이신 영웅왕 폐하의 본을 받아 짐 또한 짐의 저 강대한 전사들을 아라짓 전사라 부르고 있소.”

티나한은 그 강대한 전사라는 자들이 일하기 싫어서 집을 뛰쳐나온 청년들이거나 무전취식을 필생의 야망으로 삼는 건달들일 테고, 공짜 밥을 먹을 수 있기에 기치 창검을 높이 들며 국왕 폐하 어쩌고저쩌고 하는 놀이에 동참하고 있을 거라는 짐작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내 일이 있거든. 아, 훗날 내 일로 도움을 청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때 여유가 되면 좀 도와주면 좋겠군.”

“반드시 그러겠소. 여봐라, 기록관! 이 일을 기록해 두도록 하라.”

고기를 씹던 병사 하나가 자신의 짐을 주섬주섬 뒤적거렸다. 케이건이 사냥을 해 올 것을 생각해서 티나한은 가지고 있던 식량을 거의 다 주었고 그것은 꽤 양이 많아서 마흔 명이나 되는 무적왕의 부하들 모두에게 조금씩이나마 돌아갔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티나한은 이름의 철자를 묻는 기록관에게 아무렇게나 써두라고 대답한 다음 다시 무적왕에게 질문했다.

“오래 굶주렸나 보군. 이렇게 식량도 구하기 힘든 곳에 왜 들어왔나?”

무적왕은 선지자를 돌아보았다. 선지자는 입 속으로 들어온 수염을 끄집어내며 말했다.

“위대한 무적왕 폐하께서는 과거 페치렌에서 피혁 장사를 하고 계셨소. 영웅왕의 적손에게 도무지 어울리는 일이 아니지만, 폐하께선 자신의 혈통을 모르고 계셨거든. 그러나 페치렌에 붉은 번개가 치던 날, 폐하께선 피혁들 사이에서 기어 나온 사악한 발 달린 뱀을 한 자루 검으로 물리침으로써 자신의 고귀한 혈통을 드러내어 보이셨소.”

“발 달린 뱀?”

선지자는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곧 병사들이 목함 같은 것을 가져왔다.

선지자는 심호흡을 하고는 목함의 뚜껑을 들어 올렸다. 목함 안쪽에는 귀한 천으로 안감이 대어져 있었다. 목함 안을 들여다본 티나한은 일종의 기형 뱀을 볼 수 있었다. 40센티미터쯤 되는 그 뱀의 머리는 잘려 있었고 몸 중간쯤에는, 굳이 발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그렇게도 보이는 돌출물이 하나 붙어 있었다. 티나한은 척추에서 꼬리 하나가 잘못 생겨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런 기형은 오래 살지 못한다.

‘혹 죽은 뱀을 벤 것이 아닐까?’

하지만 선지자는 그 뱀을 보는 것조차 무섭다는 듯이 목함을 외면하며 말했다.

“참으로 무시무시하지 않소? 보셨다면 이만 덮고 싶소이다. 비록 죽었지만 이 사악한 피조물은 그 생전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여자를 임신시키고 남자에겐 질병을 전염시켰소. 실제로 무적왕 폐하의 따님께서는 이 뱀을 본 것 때문에 임신하시어…….”

“흐음. 흠. 뭐, 덮어도 좋아.”

선지자는 말이 끊겨서 좀 불쾌한 기색이었지만 순순히 목함의 뚜껑을 덮었다. 그러곤 다시 기운차게 말했다.

“어쨌건, 이 사특한 괴수를 벰으로써 무적왕 폐하께서는 그 위명을 높이셨소. 운수납자(雲水)였던 본인은 그 소문을 듣고 참으로 놀라워 폐하를 찾아뵈었소.”

운수납자라는 말에 티나한은 노인의 머리가 왜 짧은지 알 수 있었다. 전(前) 승려였던 노인은 턱으로 목함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 뱀을 보고 폐하의 용안을 본 순간 폐하께서 영웅왕 폐하의 적손임을 단번에 깨달았소. 그때의 감격은 지금 되돌이켜 보아도 가슴이 뜨거워지는구려. 제 설명을 들은 폐하께선 그날로 사업을 중단하시고 뜻 있고 의기로운 젊은이들을 가려 뽑아 그들을 무장시킨 다음 위대한 왕국 재건의 길에 들어서신 거요. 왕호를 정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소. 나는 사특한 괴수를 물리친 업적을 기려 무적왕이라는 왕호를 지어드렸소이다. 그리고 폐하께선 황송하게도 본인에게 선지자라는 과분한 칭호를 하사하셨소.”

그리고 선지자와 무적왕은 서로를 뜨거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티나한은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그 모습은 선지자에게 ‘하늘의 뜻이 행사되는 방식의 신비로움에 감동하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이렇듯 왕국 재건의 길을 위한 모든 것이 갖추어졌으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소. 왕국에는 국모가 있어야 하오. 그런데 폐하께선 상처하신 지 오래요.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진정한 하늘의 뜻을 깨달았소. 하늘이 사특한 괴수를 내시어 영웅왕의 적손을 드러나게 했고 나를 폐하께 인도하시어 그 왕통을 확인하게 하셨으니, 이제 하늘의 여인을 보내어 그 마지막 증거를 보이실 거요.”

“아아, 그래서 왕비감을 찾아다니신다? 특별한 여자겠군?”

“그렇소. 괴수가 나온 날 붉은 번개가 쳤으니 나는 아마도 푸른 번개가 치는 곳에서 왕비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보았소. 하지만 그런 풍문은 들리지 않았소. 저 용맹한 아라짓 전사들은 한자리에 머무는 것을 답답해했고, 그래서 나는 폐하께 영웅왕의 흔적을 따라 주유할 것을 권했소. 영웅왕의 업적을 기리고 그 정기를 받을 수도 있거니와, 어떤 조짐이 발견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들이니까.”

“그래서 이 높새바람 탑으로 온 건가? 영웅왕이 세운 거니까?”

“그렇소. 하지만 이곳에도 국모가 되실 여인은 없구려.”

선지자는 말을 끝내며 아쉽다는 듯이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라는 것이 마치 이제 정체를 드러내어 여자로 변신해 보면 어떻겠냐고 강요하는 듯한 눈빛이어서 티나한은 능력만 된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은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때였다.

“도와…… 줘요.”

탑에서 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탑을 돌아보며 반쯤 일어서던 티나한은 케이건이 경고했던 것을 떠올리곤 다시 자리에 앉아 무적왕 일행을 돌아보았다. 무적왕과 선지자는 눈을 크게 뜬 채 탑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적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름다워. 진짜 아름다운 소리다. 이런 목소리는 생전 처음 들었어.”

정성껏 갈고닦았던 어투는 사라지고 어느새 무적왕은 평범한 장사치처럼 말하고 있었다. 티나한은 근본을 못 속이겠다고 생각하며 그만 킬킬거리고 말았다. 그 웃음을 본 선지자가 대로하며 일어섰다.

“이 마귀!”

티나한은 울컥했지만 곧 왕을 비웃는 것이 실례라는 것을 깨닫고는 사과하려 했다. 그러나 선지자는 티나한에게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선지자는 껑충 뛰듯이 일어나서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용맹한 아라짓 전사들이여, 왕을 보호하라! 마귀가 여기 있다!”

“이봐. 웃은 건 미안하지만 마귀라니. 너무하잖아.”

선지자는 티나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상황을 도통 파악하지 못한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고 전(前) 피혁상 또한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티나한과 선지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선지자는 그의 팔을 낚아채서는 질질 끌 듯이 하며 뒤로 물러났다.

“폐하, 일어나소서! 마귀입니다. 마귀에요!”

무적왕은 일어서려고 했지만 선지자가 워낙 잡아끄는 통에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결국 무적왕은 선지자의 팔을 뿌리치고서야 겨우 일어났다. 숨이 찬지 얼굴이 빨갛게 된 무적왕은 떨리는 손으로 옷을 털었다.

“선지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저 자는 마귀입니다!”

“하지만 서, 선지자. 저자는 우리에게 음식을 나눠줬잖아?”

그러자 선지자는 무적왕의 입에 손가락을 쑤셔 넣으려 했다. 경악한 무적왕이 가까스로 그 손가락을 피하자 선지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토하십시오! 빨리 토해요! 저자는 마귀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높새바람 탑을 가리키며 티나한이 절대로 잊을 수 없을 말을 외쳤다.

“하늘이 내신 여인이 저기 있습니다. 저 귀신이 가둔 겁니다! 저 마귀는 폐하께서 왕비님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흙먼지와 벌레를 먹인 겁니다!”

무적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적왕은 재빨리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쑤셔 넣어 토하려 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에게 이미 다른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폐하! 검을!”

무적왕은 당황하며 허리에 찬 검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손이 떨리고 있었고 게다가 침이 잔뜩 묻어 있어서 칼자루를 놓치고 말았다. 무적왕은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검을 잡아당겼고 옷이 약간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가까스로 검이 뽑혀 나왔다. 병사들도 그제야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각자의 병장기를 쥔 채 일어났다.

티나한은 철창에 손을 얹어 놓은 채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어쩌는지 보려는 심산이었다. 무적왕 또한 검을 뽑아 들기는 했으나 그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달려온 병사들도 그들의 무적왕보다 더 앞쪽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그때 륜이 또다시 말했다.

“제발…… 도와줘요. 제발.”

티나한은 익숙해졌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그 목소리에 새삼 감탄했다. 과연 여자로 착각할 만하군.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무적왕과 병사들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힘을 얻은 선지자가 씩씩하게 외쳤다.

“네 이놈, 마귀야! 정체가 드러났으니 썩 꺼져라!”

선지자의 외침과 함께 병기들이 흉측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티나한은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말했다.

“한 번만 더 용서해 주기로 한다. 설명할 테니 잘 들어. 저건 내 동료야.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저 안에서 쉬고 있어.”

“동료? 동료 같은 소리하지 마라. 그럼 왜 들어가서 돌보지 않는 거냐!”

“들어가선 안 되는 사정이 있거든.”

설명하면서도 티나한은 자신의 설명이 과연 받아들여질지 의문스러웠다. 과연 무적왕 일행은 의심스럽기 그지없다는 표정을 보내어 왔다. 선지자는 기고만장하여 말했다.

“그 사정이 무엇인지 안다. 네 말이 거짓이기 때문이지!”

레콘도 아닌 주제에 꼬박꼬박 하대(下待)를 하는 선지자를 보며 티나한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설령 대선사라 하더라도 레콘에게 감히 그러지는 못한다. 그런데 파계승 따위가 레콘을 업신여기고 있는 것이다.

“보자보자 하니 이게 정말……. 진짜 마귀 짓 한 번 해 줄까!”

티나한의 말 끝부분은 거의 계명성이 될 뻔했다. 무적왕과 병사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 하지만 선지자는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라,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겠다는 거냐?”

“본색 같은 소리하고 있네. 잘 들어라! 저건 나가다! 하늘에서 내려온 여자 따위가 아니라고!”

겁을 잔뜩 집어먹었던 무적왕마저도 티나한의 말에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선지자는 티나한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동료라고 하더니 이젠 나가라고? 나가가 동료라는 거냐? 그렇다면 그 나가는 한계선을 넘어와서, 네 동료가 되어준, 목소리를 내는 나가라는 거냐? 완전히 정신 나간 마귀로구나.”

티나한은 벼슬을 부르르 떨며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나한이 일어섬에 따라 무적왕과 선지자, 그리고 마흔 명의 병사들의 고개가 희극적으로 따라 올라갔다. 전(前) 페치렌의 피혁상은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맙소사. 산이 움직이는 것 같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고개를 다 들지 못한 상태였다. 티나한은 무릎에 얹어두었던 철창을 똑바로 세워 땅을 짚었고 그러자 무적왕 일행은 7미터나 되는 그 창끝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뒤로 꺾일 지경이었다.

“더 이상 이런 불손을 못 받아주겠다. 미쳐도 곱게 미쳤다면 또 모를까, 아주 더럽게 미쳤군. 좋다! 정 원한다면 철로- 대─화─하자!”

티나한이 기어코 내지른 계명성에 몇 명의 병사는 뒤로 쓰러졌다. 쓰러지지 않은 축들도 귀를 막으며 뒤로 물러났고 말들은 요동을 쳤다. 뒤로 수십 발자국 물러난 일행들 앞에서 무적왕은 윙윙 울리는 귀를 몇 번 때린 다음에 말했다.

“철로 대화하자니, 무슨 소리야?”

선지자는 핏발 선 눈으로 티나한을 쏘아보며 말했다.

“살이 아닌 쇠로 대화하자는 말입니다. 폐하.”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혀가 아닌 무기죠. 싸우자는 소리입니다. 폐하. 저 마귀가 레콘 흉내를 아주 잘 내는군요. 폐하는 도전을 받은 겁니다.”

무적왕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리고 티나한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는 선지자라는 괘씸한 인간에게 도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선지자는 약삭빠르게 무적왕에게 그 도전을 떠넘겼다. 하지만 티나한은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선지자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철로 대화하기로 했으니 이제 말은 안 할 겁니다. 그리고 선공도 양보할 겁니다. 도전을 받은 쪽이 먼저 공격할 권한을 가집니다. 폐하.”

“선공이든 후공이든 레콘과 어떻게…….”

무적왕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여차하면 뒤로 돌격하자고 말할 기세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여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무적왕 폐하. 어떤 마귀도 감히 저를 대적하지는 못합니다. 제게 맡기십시오.”

무적왕은 감격한 표정으로 선지자를 바라보았고 티나한 또한 속으로 안도했다. 선지자가 공격하기만 하면 그를 붙잡아서 몇 대 가볍게 아주 가볍게 때려서 감히 레콘을 업신여긴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주겠노라고 생각하며 티나한은 미소까지 지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앞으로 나오는 대신 옆에 있는 병사에게 뭔가 귓속말을 했다. 병사는 뒤로 달려가더니 말에 매어둔 뭔가를 들고 왔다. 선지자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그제야 차갑게 웃으며 티나한에게 다가왔다.

‘어? 어? 야, 너!’ 라는 말은 티나한의 부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자신 있는 태도로 걸어왔고 티나한의 몸은 세 배로 부풀었다. 그때 다시 탑 안에서 륜의 비명이 들려왔다.

“제발 도와주세요!”

“걱정 마시오! 왕비여! 선지자가 저 마귀를 물리치실 거요! 그리고 내 그대를 만나리다!”

무적왕의 애절한 외침에도 티나한은 웃을 수 없었다. 그의 눈은 선지자의 손에 들린 것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몰랐다. 곤두선 깃털들은 이제 서로 부딪치며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선지자는 킬킬거렸다.

“이 마귀야! 감히 왕을 농락하려 한 죄값을 받아라!”

그리고 선지자는 커다란 물통의 마개를 뽑았다.

케이건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치셨겠군.”

티나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은 ‘그런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느냐, 수치를 알아라, 병신 같은 녀석아. 믿고 맡겼더니 겨우 물 몇 방울에 놀라 도망치냐.’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용히 질문했다.

“그래서, 그 다음엔?”

티나한은 도저히 벌어지지 않는 부리를 겨우 열었다.

“멀리서 봤어. 그 녀석들은 탑 안으로 들어갔어. 무슨 소동이 일어난 것 같은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어. 그런데 조금 후 그 선지자라는 새끼가 내 쪽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더라고.”

말을 하는 티나한의 손은 분함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부들부들 떨렸다. 케이건은 조용히 기다렸지만 비형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뭐라고 그랬는데요?”

“도망치려면 그냥 도망칠 것이지 왕비님을 왜 나가로 변신시켰냐고.”

비형은 탄성을 질렀고 케이건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티나한은 이제 어깨까지 떨며 말했다.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더군. 그런데 또 외치더군. ‘이 마귀야. 네 사악한 마법은 곧 깨어질 것이다. 폐하의 손이 닿자마자 왕비님의 흉측한 나가 껍데기가 찢어지기 시작했단다. 그것이 바로 왕의 혈통을 타고 나신 분의 위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녀석들은 들것을 만들어서 륜과 그 녀석의 옷가지와 짐까지 싣고 가버렸어. 그 놈의…… 그것 때문에 오금이 저려서 따라가지도 못했어.”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로운 우연이군. 그때 허물벗기가 시작된 모양이오.”

티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형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선지자라는 , 대단한데요! 그런 재주를 가지고 왜 이야기꾼이 되지 않았을까요?”

말을 끝낸 비형은 곧 자신들이 잡아온 여우를 돌아보아야 했다. 티나한이 죽일 듯이 쏘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나한은 곧 자신을 책망하기 시작했다.

“모두 내 잘못이야. 그 미친 놈들이 가까이 오자마자 쫓아버렸어야 되는 건데. 미친 놈들이 하는 수작이 미친 짓 말고 뭐가 있겠어? 게다가 인간을 상대로 도전이라니, 나도 잠깐 미쳤나 봐.”

케이건은 묵묵히 바닥을 살펴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지만 마흔 명이나 되는 인원이 지나간 후라 케이건은 별 어려움 없이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자취가 이어지는 방향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나직하게 말했다.

“륜이 걱정이오. 허물을 벗는 도중에 노출되었으니.”

자책하던 티나한은 케이건의 말에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아까 못 물어봤는데, 도대체 왜 들어가면 안 되는 거야? 나는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륜은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별 이상은 없는 것 같던데?”

“음? 아아. 알몸을 보이는 거잖소.”

티나한의 떨림이 멈췄다. 티나한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질문했다.

“뭐야? 겨우 그런 이유야? 그것 때문에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고 한 거야?”

“그렇소. 티나한.”

케이건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티나한은 벼슬을 움켜쥐며 절규했다.

“이런, 썩을! 그게 무슨 이유라고! 겨우 그런 이유였으면 나는 륜을 데리고 도망쳤을 거라고!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놔두고 도망친 거야! 알몸? 알몸 좀 보이면 어때서!”

케이건은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티나한을 보다가 조용히 설명했다.

“꼭 적합한 설명이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설명해야 한다면 이런 비유 정도가 가능할 듯하오. 무릇 정숙한 처녀는 몸을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 법이오.”

티나한은 케이건이 농담하는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건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분명 그 얼굴에는 농담하는 기색이 없었다. 티나한은 거의 울부짖듯이 외쳤다.

“륜은 남자잖아!”

“그렇소. ‘나가’ 남자요. 나가의 남녀 관계는 우리와는 다르오. 만약 륜이 여자였다면 알몸쯤 보여도 그토록 불행하게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비형이 또다시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티나한도 그제서야 케이건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맙소사.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여……. 우라질!”

그러고도 티나한은 한참 더 욕설을 퍼부어 대었다. 비형은 그 욕설이 듣기 싫다는 듯 귀를 막는 동작을 과장되게 취해 보였지만 티나한은 본체만체했다. 결국 비형은 티나한을 내버려둔 채 케이건에게 질문했다.

“저, 케이건. 정숙한 처녀라도 같은 여자에게라면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륜에게 우린 같은 남자잖습니까?”

“그래서 꼭 적합한 설명은 아니라고 말한 거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소만, 이렇게 알아두면 될 듯하오. 나가 남자들이 벗은 몸을 보여줘도 되는 경우는 어느 가문을 방문해서 어떤 여인이 벗겨주었을 때뿐이오. 그 외에는 모두 수치스러운 경우요. 아마 남자들이 모두 뿌리도 없이 떠돌아다니다 보니 나가 여자들이 남자에게 그런 완고한 규범을 주입시킨 것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추측이오. 그런 도덕 때문에 나가 남자들은 수치스럽지 않게 여자를 만나려면 어떤 가문을 방문할 수밖에 없지. 밀림 아무 곳에서나 여자와 놀아나는 대신.”

비형은 입을 헤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은 하늘을 몹시 꾸짖고 있는 티나한을 불렀다.

“갑시다. 티나한. 륜은 지금 고통과 수치심으로 대단히 끔찍한 상태일 거요. 그리고 목숨의 위협도 받고 있소. 빨리 구해 내야 하오.”

티나한은 깜짝 놀라며 욕설을 멈췄다.

“목숨이라니, 무슨 말이냐? 자기네들 왕비 대접을 하고 있잖아?”

“제왕병에 걸린 자들 중에는 위험한 자들이 많소. 그 피혁상, 아니, 그를 부추기고 있다는 파계승도 만만찮게 돈 작자인 듯하오. 만약 허물벗기가 끝나도 륜이 여전히 나가인 것을 보면 그자는 륜의 껍질을 벗기려 들지도 모르오. 심장을 적출하지 않은 륜은 그런 짓을 당하면 죽게 될 거요.”

비형과 티나한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티나한은 철창을 단단히 움켜쥐며 말했다.

“좋다. 그런데 먼저 한 가지만 확실히 해두자. 그 놈들을 때려잡고 륜을 구출한 다음에, 그 늙은 미치광이는 내게 넘겨!”

케이건은 반대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에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레콘에게 물을 사용한 이상 그 선지자는 제 발로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린 셈이다. 추락은 도중 취소가 어려운 일 중 하나다. 케이건은 비형에게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비형은 정찰을 위해 나늬에 탄 다음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케이건과 복수심에 불타는 티나한은 높새바람 탑을 등진 채 어둠이 깔리는 평야를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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