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1)
한때 공포와 존경의 대상이었던 위대한 흑사자기는 더 이상 전장에서 나부끼지 못했다. 왕궁의 벽에 걸린 찬란한 흑사자기는 왕에게 위엄을 부여하는 대신 물려받은 권위와 풍요를 낭비한 불민한 후손을 꾸짖는 듯했다. 건전한 반성은 찾아오지 않았고 무익한 공포와 처절한 절망감만이 왕좌와 왕국을 지배했다. 이토록 암울했던 시절, 왕에게 도움이 되고자 찾아온 손길이 있었으니 저 용맹한 키탈저 사냥꾼들의 만민 회의 참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지성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저 권능왕은 감히 이 용맹한 자들을 모욕하고 조롱했으니, 키탈저 사냥꾼들은 그 모욕에 대꾸하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이 만민 회의장을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아름다운 고향 키탈저로 돌아가기 전, 한 사냥꾼이 왕도(王都)의 하늘을 향해 저 유명한 저주를 외쳤다.
“이제 왕은 없다. 그리고 왕이 이 모욕에 사과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왕이 없으리라!”
그리고 북부에는 더 이상 왕이 존재하지 않았다. 무려 구십여 년 동안 고독하게 싸웠던 키탈저 사냥꾼들 또한 사라진 지금에 와서는 오래된 모욕을 청산하는 일조차 불가능해졌다.
-라수의 <왕국의 몰락>
철혈(鐵血)
비아스 마케로우는 분노했다.
심장이 없는 나가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녀가 이미 한 번 시도했던 방법—저 심장탑의 사서 유벡스를 죽였을 때처럼 온몸을 토막 내는 방법만이 가장 확실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카린돌처럼 자기 집에 있는 여자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방법이었다. 그 외에는 뼈까지 태우거나 물에 빠뜨리는 방법 등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황당해지는 방법들뿐이었다. 그러나 비아스는 자신에게 포기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거대한 불가능성에 대한 분노마저도 카린돌에게 돌렸다. 간단히 말해서 쉽게 죽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죽이고 싶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카린돌은 그런 비아스에 대한 조롱의 강도를 매일 높여갔다. ‘고명한 약술사이시니 남자의 그것도 한 번 조제해 보시면 어떠할까. 불가능에 도전하는 수고 없이 아기를 얻을 수 있을 텐데.’와 같은 조롱에 이르러서는 최연장자 소메로마저도 카린돌을 꾸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두지 못하겠어?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는 니름이 아니야. 너희들이 집안 분위기를 그렇게 만드니 남자들이 방문하지 않잖아. 그리고 있던 남자들도 떠나고 있고, 남자들은 너희들이 벌이는 언쟁의 가부 같은 것에는 관심 없어. 오로지 편한 것만 찾는단 말이야.>
실제로 마케로우 가문의 방문자 수는 격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린돌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밖으로 나가서 데려와. 나처럼.>
<그런 수치스러운 짓을 하는 건 너 하나로도 이미 너무 많아. 이걸 마지막 경고로 생각하고 내 니름 잘 들어. 비아스와 더 이상 언쟁을 벌이지 마. 집안 분위기를 흐리는 짓도 하지 말고.>
<경고에는 보통 협박 문구가 붙는 걸로 아는데? 그런 거 준비했어?>
<물론 준비했어. 내 니름을 따르지 않으면 너를 정찰대에 보내겠어. 그렇게 밖으로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너에게 어울리는 처벌이 될 거야.>
카린돌은 분한 표정으로 소메로를 바라보았다. 원칙적으로 소메로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다. 가문의 일원을 정찰대에 보내는 것은 가주의 권한이다. 하지만 비아스와 카린돌이 싸우는 동안 소메로는 원래 얻고 있던 신뢰를 더욱 강고히 해 둔 상태였다. 따라서 소메로가 ‘그것이 가장 적절한 대처’라고 니른다면 가주 두세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카린돌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소동을 멈춘 소메로에게 두세나의 칭찬이 있었음은, 그리고 최연장자에 대한 가주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비아스는 분노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녀의 눈에 카린돌은 남자를 다 약탈해 감으로써 그녀의 아기를 가질 기회를 박탈한 것으로 모자라 그녀의 적수를 이롭게 해주는 원수였다. 야심이나 술수 등과는 거리가 먼, 덕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고 평가되는 소메로에 대한 가주의 신뢰가 그토록 두터워진 상황의 배후에는 카린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카린돌이 획책한 일이었다.
<그래. 나는 소메로가 나서주길 바랐어. 좀 늦게 나서줬지만 어쨌든 나서줬지.>
카린돌은 쥐를 집어 들며 닐렀다. 마케로우 가문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방문자 중 한 명인 스바치는 감탄하며 닐렀다.
<여자의 세계는 참 복잡하군요. 그럼 당신은 소메로 마케로우 님을 가주로 추대할 생각인가요?>
<비아스가 가주가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지만, 어쨌든 그래.>
스바치는 상자 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쥐들을 보며 닐렀다.
<당신 자신이 가주가 되는 방법도 있잖습니까?>
<내가 가진 장점은 가주의 친자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어. 최연소자인데다 아직 아이도 없지.>
<자녀가 없다는 것은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잖습니까?>
<그래. 그래서 네게 요구할 생각이야.>
<요구요?>
카린돌의 손이 갑자기 확 뻗어 왔다. 스바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카린돌의 손은 상자 속의 쥐를 낚아챘다. 카린돌은 낚아챈 쥐를 스바치에게 건네며 닐렀다.
<조만간 소메로의 가임기가 찾아올 거야. 그때 그녀를 모셔. 스바치.>
스바치는 쥐를 받아들 생각도 못한 채 카린돌을 바라보았다. 당황 속에서 그는 약간의 배신감 같은 것도 느꼈다.
<저를 그분께 주는 겁니까?>
<그래. 그녀에게 아이를 줘. 소메로에 대한 가주님의 신뢰가 더욱 굳어질 거야.>
<제가 그래야 할 이유가 어디 있죠? 저도 다른 남자들처럼 마케로우 가문을 떠나면 그만입니다. 왜 당신의 명령을 받아야 하죠?>
카린돌은 스바치가 받아들지 않은 쥐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오며 닐렀다.
<네가 바라는 것을 내가 줄 테니까.>
<바라는 것?>
<내숭 떨지 마. 스바치. 분명히 원하는 것이 있을 거야. 다른 남자들처럼 우리 집을 떠나지 않은 너에겐 분명히. 짐작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남자들이 바라는 것을 모르겠어. 그러니 직접 묻는 거야. 내게 바라는 것이 뭐지?>
스바치는 잠시 정신을 닫았다. 물어볼 수 있을까? 스바치는 위험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친다면 다른 기회 같은 것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스바치는 조심스럽게 니름을 가다듬었다.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당신의 요구를 따라야 되는 이유를 말해 주세요.>
<내가 요구했으니까.>
<아니요. 당신은 비아스 마케로우 님이 가주가 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소메로 마케로우 님께 저를 보내신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비아스 마케로우 님이 가주가 되어선 안 되는 이유를 말해 주세요.>
<나를 죽이려 드니까.>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녀를 분노하게 하고, 마침내 그녀가 당신을 죽이려 시도하다가 큰 실수를 저지르게끔 유도하신 거죠. 왜 그렇게 유도하신 거죠? 당신 자신이 가주가 되길 원하시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잖아요. 당신은 왜 비아스 마케로우 님을 파멸시키려 하는 거죠? 납득할 만한 이유를 닐러 주신다면 당신의 요구대로 소메로 마케로우 님을 모시겠습니다.>
카린돌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침착하게 닐렀다.
<화를 돋운다는 이유로 동생을 죽이는 여자라면 제거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스바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비아스의 동생은 카린돌과 화리트 두 명이다. 그리고 카린돌은 ‘죽이는’이라고 표현했다. ‘죽이려 드는’ 이라면 그 동생은 카린돌일 테고 ‘죽인’이라면 화리트가 되겠지만, ‘죽이는’이라면? 스바치는 필사적으로 적절한 니름을 찾았다.
<글쎄요. 서로를 향해 그런 생각 한 번쯤 품어보지 않은 자매들이 있을까요? 자매들이란 결국 가주 계승의 경쟁자잖아요.>
스바치는 비아스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이미 한 번 피붙이를 죽였다.’는 니름을 기다렸다. 하지만 카린돌은 그가 원하는 니름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가 이미 확인했듯이 나는 가주 계승을 원하지 않아. 그리고 지난 28년 동안 나를 보아온 비아스는 나에 대해 너보다 훨씬 더 잘 알지. 그녀는 내가 가주 계승의 경쟁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 경쟁자도 아닌 동생을 죽이려 드는 건 위험한 자라는 증거가 될 텐데.>
젠장! 스바치는 긴장 때문에 비늘이 곤두서는 것을 억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그분을 조롱한 것 때문에 오해한 것일 수도 있죠. 비아스 마케로우 님은 당신이 마침내 가주가 되려는 결심을 한 거라고 오해하신 것 아닐까요? 아니, 이건 계속해서 꼬리를 무는 니름이 되는군요. 당신의 니름을 정리해 볼까요? 당신은 화를 돋운다는 이유로 동생을 죽이는 여자는 위험하기 때문에 화를 돋우었다고 닐렀어요. 니름이 안 되지 않아요?>
카린돌은 가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네 니름이 맞군.>
스바치는 태연한 척하며 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삼키며 닐렀다.
<비아스 마케로우 님에 대한 당신의 혐오가 그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거라면, 저는 당신의 요구를 따를 수 없습니다.>
스바치는 쥐를 삼키느라 얼굴 표정을 감출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지금 그의 얼굴은 기대감과 불안감으로 가득할 것이다. 어쩌면 카린돌은 그대로 정신을 닫아 버릴지도 모른다. 이 가문 저 가문을 떠돌아다니는 남자에게 위험한 비밀을 가르쳐 줄 리가 없다.
“스바치.”
스바치의 입에서 쥐가 도로 튀어나올 뻔했다. 스바치는 놀란 표정으로 카린돌을 바라보았다. 카린돌은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가리켜 보였다.
“그래. 육성으로 말하고 있어. 청력에 집중해. 그리고 너도 육성으로 대답하도록.”
스바치는 쥐를 겨우 삼킨 다음 말했다.
“무, 무슨 일로?”
“누가 엿듣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야.”
스바치는 힘겹게 호흡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목소리로 말해진 제 이름은 대단히 아름답게 들리는군요. 평생 동안 형편없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카린돌은 빙긋 웃었다.
“스바치.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장 솔직한 진심을 말하고 있어. 비아스 마케로우가 가주가 되면 나는 죽을 거야. 나는 그녀가 반드시 숨겨야 되는 비밀을 알고 있어.”
스바치는 비늘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 비밀이라는 것이 남동생을 베어 죽이는 취미가 있다는 것인지 물어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그렇게 위험한 비밀인가요?”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그녀가 나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그건 그녀의 첫 번째이자 세 번째 살인일 거야.”
스바치는 속으로 환호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