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8장 – 열독 (14)
륜은 날카로워진 시간과 확장된 공간 가운데서 외롭게 앉아 있었다. 모든 객체들이 한없이 먼 곳에 있었다. 오직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아스화리탈만이 륜과 정상적인 도대체 무엇이 정상적인지 따지지 않기로 한다면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품속에 있는 아스화리탈이 수십 킬로미터 저편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도 이상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륜은 그 사실에 감사하며 용을 어루만졌다. 용은 꼬리로 륜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여신이 있었다.
모든 곳에 여신이 있었다.
몰려드는 이슬들, 춤추는 빛, 도치가 궁극의 화법이 되는, 한없이 많고 많은 대화들.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만다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누구의 몸도 젖지 않았다. 누군가의 몸에 닿기에는 빗줄기 사이의 간격이 지나치게 ‘넓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억수 같은 빗줄기였다. 긴장한 승려들이 토해 놓는 뜨거운 숨이 현란한 색채로 그들을 물들였다. 뜨거워진 그들의 몸에서 피어나는 열류들을 보며 륜은 미소 지었다. 륜은 안심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륜은 안심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다만, 륜은 수십 킬로미터 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륜은 아쉬워하며 그것을 포기했다. 륜은 천천히 일어났다.
접촉이나 애호(혹은 증오)의 대상이 되기에도 너무 멀기에 그저 관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세계 가운데 륜은 똑바로 섰다. 여신은 모든 곳에 있었다. 그래서 륜은 위아래─왼쪽─오른쪽─앞─뒤─겉─안으로 향해 닐렀다.
<라르간드. 나의 신부.〉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나의 신랑.>
여신이 대답했다.
케이건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뭔가를 목격한 것은 아니었다. 무학당이 있는 쪽의 풍경에는 변화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곳이 지나치게 멀다는 느낌을 받았다. 산의 정상에 똑바로 누운 채 바라보는 하늘처럼 막막하고 멀었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케이건은 알 수 있었다.
괄하이드는 케이건이 어딘가를 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곳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괄하이드는 그것이 상대의 시선, 혹은 부주의한 공격을 유도하는 전통적인 속임수가 아닌지 우려했다. 엉망진창이 된 대도를 세차게 움켜쥐며 괄하이드는 케이건을 향해 말했다.
“정말 왕이 될 생각이오?”
케이건은 다시 괄하이드를 내려다보았다. 여신과의 접촉이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할지 알 수 없는 이상 케이건은 되도록 오랫동안 이들을 붙잡아 놓고 있어야 했다. 케이건은 모호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나는 지금 이 싸움에 만족하고 있소.”
“그래서?”
“이것부터 결판을 내고 싶소. 괄하이드 변경백.”
괄하이드는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몸이 그를 배신했다. 팔은 무거웠고 다리는 아예 땅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괄하이드는 더 싸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단지 두 사람의 목숨만이 별 대수롭지 않은 전리품으로 걸려 있는 싸움을 계속해야 할 이유를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대도의 거칠어진 날을 다시 뒤로 끌어당겼다.
“나 역시 그걸 바란다는 것을 방금 깨달았소. 케이건. 이런 싸움을 흐지부지 끝낸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요.”
그러나 변경백은 그대로 돌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있을 때 당신에게 해 둘 말이 있소. 이 싸움이 끝났을 때 내가 가슴이 터져 죽거나 기절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거든.”
“해 보시오.”
괄하이드는 호흡을 고른 다음 말했다.
“내 가문에 대한 난잡한 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래, 그냥 툭 털어놓고 말하지. 제왕병에 걸렸지만 왕이 될 배짱은 없었기에 변경백이 된 자의 후손이라고 말하더군! 그 표현이 내게 일으키는 분노와 별개로, 나는 그 말의 진실성을 일부 인정하오. 현재의 규리하 가문이 진짜 규리하 가문의 적손은 아니라는 점 말이오.”
케이건은 염증을 느꼈다. 노무사에게 그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겠지만 케이건은 다른 자들의 가문사─그것도 복잡하게 뒤틀려 있고 꼬여 있는─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경의가 아닌, 그것이 시간을 충분히 소모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케이건은 잠자코 괄하이드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시오. 왕들이 있었을 때 규리하는 변경백을 두어 다스릴 수밖에 없었던 험지였소. 지금 그 땅이 어떻게 되어 있소? 지러쿼터 산맥 동쪽의 오만한 족속들이 꿈에도 탐내는 복토가 되어 있소. 누가 그렇게 만들었소? 왕도, 왕의 변경백도 아니오. 과텔 규리하와 케나린 규리하가 그렇게 만들었소. 왕이 그들을 도와줬소? 그들이 왕의 위엄을 빌려 그 일을 이룩했소? 왕은 없었소. 케이건. 그래, 좋소. 과텔과 케나린이 왕에게 받지 않은 변경백의 이름을 사용했소. 하지만 그들이 그 이름의 덕을 보았소? 왕은 없었소! 변경백의 지위는, 그렇게 값진 것이 아니었소!”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소.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것 아닌 것을 가졌다는 원칙적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소.”
“알고 있소! 나는 단지 그들이 무가치한 호칭을 불법적으로 취득한 것 때문에 그들이 이룩한 모든 것을 부정하지는 말아 달라고 요청하는 거요. 과텔과 케나린을 경의로 대해 주시오. 그들은 왕의 것을 훔쳤다는 말에는 승복하겠소. 하지만 왕이 존재하지 않을 때 왕의 것을 훔쳤다면, 그것은 임자 없는 것을 가졌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잖소?”
“임자 없는 것?”
“왕이 없었잖소! 아니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도 좋소. 나와 규리하는 왕이 돌아오기를 바라니까. 하지만 과텔과 케나린의 시대에는 왕은 이 땅에 없었소. 그들은 임자 없는 것을 가졌을 뿐이오!”
케이건은 소름 끼치는 기분을 맛봤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겁니다.
한 분의 신을 잃으면 이 세상이 두억시니 꼴이 된다는 말이군.
하지만, 세상이 좀 더 더워지면 어떨까?
그들은 임자 없는 것을 가졌을 뿐이오!
케이건은 다시 무학당을 바라보았다. 모든 의혹이 사라지며 사태는 한 가지 결론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케이건을 경악하고 격분하게 했다. 괄하이드는 갑자기 불타오르는 케이건의 눈빛에 놀랐다. 케이건이 외쳤다.
“이 싸움을 그만둡시다. 괄하이드!”
“무슨 말이오?”
“나는 지금 이런 놀이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소.”
케이건이 격분한 나머지 저지른 실수였다. 괄하이드에게 그것은 놀이가 아니었다. 괄하이드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차갑게 대답했다.
“당신은 어디로도 갈 수 없소. 케이건. 가려거든 나를 굴복시키시오!”
케이건은 하마터면 그렇게 할 뻔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럴 경우 괄하이드의 부하들이 달려들게 될 거라는 사실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케이건은 한번 더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괄하이드 변경백. 지금 설명할 시간은 없지만······”
그리고 케이건은 뒤로 훌쩍 뛰어야 했다. 괄하이드의 대도가 난폭한 기세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케이건은 분노하여 바라기를 휘둘렀고 그것을 대비하고 있던 괄하이드는 가볍게 피했다. 괄하이드는 수염을 흩날리며 외쳤다.
“비록 레콘은 아니지만, 나는 철로 대화하자고 제안하고 싶소!”
케이건은 으르릉거리며 바라기를 고쳐 쥐었다. 무용으로써 사태를 해결하려는 욕구는 케이건에겐 그다지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바라기가 소리 없는 포효를 발한 순간 괄하이드의 대도가 박살 났다.
강력한 충격은 대도의 자루를 지나 괄하이드의 팔과 어깨, 허리까지 전달되었다. 괄하이드는 볼썽사납게 쓰러졌다. 땅에 쓰러진 채 변경백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이미 바라기를 등 뒤에 걸고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괄하이드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달려갔다. 괄하이드의 부하들이 주춤거리며 그 앞을 막아섰다. 케이건은 난폭하게 외쳤다.
“비키지 않으면 다 베겠다!”
병사들은 무기를 들어 케이건을 겨냥했다. 괄하이드가 가까스로 외쳤다.
“모두 비켜라!”
병사들은 괄하이드를 돌아보았고 케이건 역시 짧은 순간 괄하이드를 바라보았다. 괄하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 병사가 필요하시오?”
케이건은 빠르게 생각했다.
“어쩌면.”
“좋소. 너희들은 그분을 따라가서 그분을 도와드려라.”
병사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케이건은 이미 그들 사이를 지나 대사원으로 달려 올라가고 있었다. 병사들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하이드를 바라보았다. 괄하이드는 무섭게 외쳤다.
“당장 따라가라! 나도 곧 뒤를 따르겠다!”
병사들은 그제야 케이건을 따라 달렸다. 그리고 사람들 또한 그쪽의 일이 더 중요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는 우르르 몰려갔다. 홀로 남게 된 괄하이드는 몸을 일으켰다. 부러진 대도를 주워 든 괄하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놀이였군.”
그리고 괄하이드 역시 오솔길을 달려 올라갔다. 그에겐 패배의 쓰라림도, 놀림당했다는 분노도 없었다. 늙은 변경백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욕구밖에 없었다.
그는 케이건이 무슨 일을 할 건지 반드시 확인하고 싶었다.
무학당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멀고 높았다. 대사원의 경내를 질풍처럼 가로지르며 케이건은 속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경사진 길을 따라 달려 올라가는 그의 뒤로 병사들과 사람들은 차츰 뒤처지기 시작했다. 케이건도 눈앞이 하얗게 바뀌는 기분을 몇 번 느껴야 했다. 불과 얼마 전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대호와 온몸으로 부딪쳤고 그런 몸으로 방금 이 시대 최고의 효웅들 중 하나와 두 시간 동안 싸운 직후였다. 기절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케이건은 기절한 채로도 달리겠다는 각오로 달렸다.
기절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탈진 상태가 되어 케이건은 가까스로 무학당에 도달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좌절감을 맛보았다. 너무 멀었다.
눈으로 보이는 모습은 겨우 몇십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그곳에 륜이 서 있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곳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케이건은 탈력감에 무릎을 꿇거나 그 자리에서 분통을 터뜨리는 등의 사치를 거부했다. 케이건은 노호하며 확장된 공간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케이건은 무한히 달렸다.
두 시간 동안 괄하이드와 싸우고 다시 하인샤 대사원의 넓은 경내를 달려 올라온 후 달리는 것이다.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허파 속에서 녹은 쇳물이 출렁이는 것 같았고 팔다리의 감각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케이건은 계속 달렸다.
레콘다운 감각에 의해 티나한은 옆을 돌아보았고, 케이건을 발견했다.
티나한은 케이건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그 표정도 볼 수 있었다. 시각적인 거리는 그토록 가까웠다. 케이건의 얼굴은 분노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티나한은 놀라며 철창을 움켜쥐었다. 그다지 급한 동작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케이건은 어떤 위험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먼 곳에 있었다. 티나한은 위험보다는 걱정을 느꼈다. 케이건은 수백 년 동안이라도 달리겠다는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티나한은 계명성을 내질렀다.
“케이건—! 무—슨—일—이—야—!”
티나한이 무의식중에 염려했던 것처럼 그의 계명성은 확장된 공간 안에 삼켜져 스러지고 말았다. 케이건이 그의 목소리를 들은 기색은 없었다. 대신 티나한은 케이건이 입을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티나한은 케이건이 자신과 똑같은 문제를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목청껏 고함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티나한에게 닿지 않았다. 너무 멀기 때문이다.
케이건이 쓰러졌다.
티나한은 움찔하며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도 걷지 않아 티나한은 격분했다.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티나한은 분노 속에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나 거리는 야속하리만큼 줄어들지 않았다.
케이건은 땅을 짚으며 일어났다. 가슴이 그대로 타버릴 것 같은 감각에 케이건은 몸서리를 쳤다. 온몸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땀 때문에 눈을 뜨기도 어려웠다. 케이건은 억지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시각마저 흐릿했지만, 케이건은 티나한이 그를 향해 가공할 속도로 달려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 공간에서 그들은 완전히 유리되어 있었다. 케이건은 더 이상 뛰는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케이건은 목청껏 외쳤다.
“티나한! 제발 륜을, 륜을 멈추게 하시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결론을 내린 티나한도 달리기를 멈췄다. 티나한은 케이건의 입 모양을 읽어 보려 애썼다. 하지만 케이건은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게다가 호흡마저 고르지 않아서 그 입 모양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티나한은 자신의 부리와 인간의 입 사이의 차이를 완전히 해소할 수 없었다. 케이건 또한 그 문제를 깨달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움직여 손짓을 보내었다.
케이건은 오른손으로 힘겹게 륜을 가리켰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티나한은 륜을 죽이라는 의미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케이건이 유사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손짓을 몇 가지나 반복한 후에 티나한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케이건은 륜을 제지할 것을 원하고 있었다. 티나한은 그 의미에 당황했다.
“저걸 멈추면 우리의 여신이 죽는데?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 죽는 것을 막을 수 없잖아?”
티나한은 그것을 어떻게 하면 손짓으로 전달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티나한은 그것을 시도했다. 케이건은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기분 속에서도 겨우 티나한의 괴상한 손짓을 읽어냈다. 그대로 기절하고픈 충동을 애써 물리치며 케이건은 고함을 지르며 손짓했다.
“놈들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