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9장 – 북부의 왕 (2)
쥬타기 대선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방 가운데 앉았다. 그를 위해 방석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대선사는 고집스럽게 방석을 옆으로 밀어 버리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좌우로 도열해 있던 승려들의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다. 대선사의 앞쪽에 좌탁을 놓고 앉아 있던 고위 승려들은 황감한 표정까지 지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라샤린 선사가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쥬타기 대선사. 방석에 편히 앉으십시오.”
“이대로도 좋습니다.”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종단의 최고위자를 그런 모습으로 무릎 꿇려 놓고 마음이 편할 리 없었지만, 라샤린 선사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자리는 종규해석소(宗規解析所)다.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 이름과 달리 종규해석소는 일종의 재판정이다. 필요하다면 종단의 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이지만 대선사에게 파문을 내릴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장소인 것이다.
그러나 종규해석소의 진행 방식은 평범한 토론장과 비슷하다. 즉, 대선사의 좌우로 늘어서 있는 스무 명의 승려들은 자유롭게 대선사에게 질문을 할 수 있으며 그 질문에 대해 대선사를 옹호하는 대답을 할 수도 있다. 대선사의 정면에 앉은 세 명의 고위 승려들의 임무 또한 토론장의 의사 진행자와 비슷하다.
자칫 산만하게 바뀔 수도 있는 느슨한 체제이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종규 해석에는 시간 제한이 없으며, 해당 사건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내려져야 한다. 그 말은 이들 스물 네 명은 해당 사건에 대한 종단의 대응 방침이 결정될 때까지 종규해석소를 퇴장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그 때문에 라샤린 선사는 시작을 선포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지체할 수는 없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의 가호를 바라며 제294차 종규 해석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른 승려들 또한 그 말에 긴장했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라샤린 선사 자신이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의 무게감에 당황하던 선사는 문득 대선사의 차분한 거동을 보고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침착을 되찾으려 애쓰면서 선사는 승려들의 출석을 불렀다. 물론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전부 볼 수 있으므로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지만, 참석자 개개인의 책임감을 일깨워 주는 효과는 분명하다. 출석 확인을 끝낸 선사는 호규원장 듀케리 대사를 바라보았다.
“호규원장 듀케리 대사는 쥬타기 대선사가 종단의 안위를 침해하고 종단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음을 들어 쥬타기 대선사의 멸적(籍)을 요구했습니다. 듀케리 대사, 고발장을 낭독해 주십시오.”
승려들 사이에서 숨 막힌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리고 호규원장 듀케리 대사는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대선사를 멸적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누군가는 대선사를 고발해야 했고, 그것은 당연히 종규의 수호 책임을 맡고 있는 호규원장의 몫이었다.
호규원장은 라샤린 선사가 당황할 거라 예상하며 강급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대선사의 법계를 깎자는 제안은 분명히 라샤린 선사를 놀라게 할 거라는 것이 호규원장의 나무랄 수 없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라샤린 선사는 태연히 멸적을 제안함으로써 호규원장을 기겁하게 했다. 호규원장은 강급을 제안했던 것도 잊은 채 어떻게 종단의 최고위자에게 멸적이라는 망발을 사용할 수 있느냐며 항의했지만 라샤린 선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듀케리 대사는 스물 두 명의 동료들 앞에서 대선사의 승적을 말소하고 사원 바깥으로 추방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는, 실로 괴기스럽기까지 한 역할을 받아들여야 했다.
고발장을 집어든 듀케리 대사는 그에게 그런 짐을 지운 라샤린 선사를 한 번 흘겨보고는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티나한은 벼슬을 빳빳하게 세운 채 으르릉거렸다.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는군! 대선사는 속은 거야. 지금 가장 속 쓰린 사람일 텐데, 위로해 줘도 모자랄 판에 왜 붙잡아다 놓고 괴롭히는 거냐? 엉?”
오레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으로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말이야?”
“지금 종규 해석소의 심판에 참여 중인 스님들의 의견은 거의 완전히 일치합니다. 아마 면직이나, 어쩌면 심한 경우 강급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올지도 모르지만.”
오레놀도 종규 해석소에서 감히 대선사를 상대로 멸적을 논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오늘 내로 쥬타기 대선사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결정이 나올 겁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더라도 나가들의 계략에 속아 넘어간 부주의를 탓하여 견책 처분이 있는 정도일 겁니다. 그것도 아마 문서 견책이 아니라 구두 견책 정도겠지요.”
“뭐야? 이런, 썩을 용서할 거면 그냥 용서할 거지, 왜 그런 장난 같은 짓거리를 하는 거야?”
“장래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혹 누군가가 나가들에게 속아 넘어간 대선사님의 과오를 탓하며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지요.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잖습니까. 종규 해석보다 더 높은 권위의 심판은 없고, 이미 종규 해석의 심판을 받았다면 또 받을 일도 없지요.”
티나한은 오레놀의 설명에 대해 약간 생각해야 했다.
“으흠. 그러니까 앞으로 투덜거릴 녀석들이 나타나는 것을 아예 원천 봉쇄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확실하게, 가장 높은 권위로 대선사를 용서한다는 뜻을 분명히 해 버린다는 것이군?”
“정확하십니다.”
“말해 줘야겠는데, 너희들 일 정말 더럽게 복잡하게 한다. 젠장.”
오레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복잡하더라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조만간 우리는 여신의 힘을 손에 넣은 나가들에 대항해 싸워야 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단의 모든 힘이 결집되어야 합니다. 그런 결집을 이루려면 우리들 사이에 어떤 분쟁의 소지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는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정리한 다음 앞으로 다가올 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티나한은 그 설명에 깊은 감명을 느꼈다.
“어, 그런 거냐? 더럽게 복잡하다느니 하는 말은 취소하겠어. 무슨 뜻인지 알겠군.”
오레놀은 감사하다는 듯 목례하고는 말했다.
“그러니 대선사님에 대해서는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케이건이 걱정입니다. 지금 어떠시지요?”
“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오레놀은 의아한 얼굴로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은 수염 볏을 비틀며 느리게 말했다.
“일단, 차분해. 몇 달 전 마지막 주막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큼이나 말이야.”
“다행이군요.”
“그런데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무슨 말씀이십니까?”
“녀석이 화를 내고 있다면 차라리 안심하겠단 말이다. 지금, 글쎄.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벌겋게 타오르는 쇳물에는 아무도 손을 안 대지. 보면 위험하다는 것 알 수 있고, 놔두면 식지. 하지만 꽝꽝 얼어붙은 쇠는? 나가가 아닌 이상이야 눈으로 봐도 그게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지. 그런 것에 멋모르고 손을 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살이 달라붙지요.”
“그래. 쇠가 살점을 뜯어 먹지. 그런데 케이건이 차분하게 있는 꼴을 보니 나는 꼭 그런 쇠가 생각난단 말이야. 꽁꽁 얼어붙어 있는 강철 말이야.”
오레놀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염 볏을 지나치게 비튼 티나한은 그것이 조금 아프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케이건은 자기에게 모든 나가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했어.”
“그런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티나한.”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그렇게 말해 줬고. 그런데 말이야. 그 친구의 대답을 듣고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음. 그 권리라는 거, 상당히 모호한 말이더라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게 하늘치의 등에 올라갈 권리가 있나?”
오레놀은 당황하여 티나한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야에 티나한은 뾰족한 부리로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치의 등에요? 글쎄요. 당신은 그러려고 하고 있고, 거기에 당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있지요. 그러니 당신은 모든 것을 다 걸고 있는 도전하는 자의 권리는 가지고 있을 겁니다.”
“케이건도 모든 걸 다 걸고 그렇게 하는 걸 텐데. 오레놀.”
오레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나한 권리라는 것은 결국 ‘양해’라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누구도 고양이에게 쥐를 잡아먹을 권리가 있는지 따지지는 않아요. 고양이는 쥐에게 양해를 구할 능력이 없으니 그건 과도한 요구지요. 하지만 우리 사람들은 상대방의 양해를 구할 수 있어요. 그러니 그렇게 해야지요. 타인의 양해를 얻었을 때 권리라는 것도 생기는 겁니다. 당신은 하늘치에게 양해를 구할 수 없어요.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만일 하늘치와 당신이 의사소통이 된다면, 당신은 그 등에 오르기 전에 하늘치에게 올라가도 되냐고 물어보고 양해를 구해야 할 겁니다.”
티나한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케이건은 양해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예?”
“내가 알기로, 나가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 삼아 케이건에게 무슨 약속을 한 것 같더군. 그리고 그 약속을 어겼고, 그 순간 나가들은 자신의 목숨을 케이건의 손에 맡긴 것 아냐?”
“……그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응.”
“그 나가들은 담보로 걸 수 없는 것을 걸었습니다. 티나한. 아시잖습니까.”
“글쎄. 아는지 잘 모르겠어.”
티나한은 두 손을 드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내 솔직한 생각을 말해 볼까? 나는 그 놈들이 아주 고약한 잡것들이라고 생각해. 나가들의 장례식을 주관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지만, 누가 나에게 추모사를 맡기면 아주 난감해할 거야. 별로 추모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 잡것들이 여신의 힘을 휘두르면서 쳐들어온다면, 나는 내게 놈들을 죽일 권리가 있는지 따위를 고민하지는 않을 거야. 피를 흘리느냐 피를 묻히느냐 둘 중 하나라면 나는 일단 피를 묻히는 쪽이야.”
오레놀은 그 말에 반대하고 싶었지만 당장은 나가들을 옹호하고픈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가들이 자신들의 여신을 억류한 사실에서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혐오감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다른 길로 샜는데, 왜 찾아오신 거죠?”
티나한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자신이 볼일이 있어 쥬타기 대선사를 찾아왔고, 대선사가 종규 해석에 참석하고 있느라 오레놀을 상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난 이제 떠날 건데, 약속했던 발굴 지원금이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려고.”
“예? 떠나실 겁니까?”
“그래.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내 일에 신경 써야지.”
오레놀은 왈칵 화를 내고 싶었다. 지금 대확장 전쟁이 재개될 판국인데 그깟 하늘치 유적 발굴이 중요하냐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레놀은 지난번 대확장 전쟁―그렇게 말하니 퍽 근래의 일인 것 같았다.―에서 레콘들이 한 일들은 모두 자신의 일을 지키려는 시도뿐이었음을 떠올렸다.
오레놀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수는 당신들을 가리켜 숙원을 걸머지고 오만하게 걸어가는 거인들이라고 했지요. 알겠습니다. 발굴 지원금은 이미 당신의 동료인 롭스가 수령했습니다. 영수증을 보여 드릴까요?”
“아, 그래? 그렇다면 됐어.”
“그럼 이대로 떠나실 겁니까?”
티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타 중대사는 수심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최악의 상황이 그렇다는 겁니다. 어쩌면 그 나가들은 이 보잘것없는 북쪽 땅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서 그저 자기들끼리의 세력 다툼에만 그 힘을 사용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여러분들 중 남쪽에 근거를 두신 분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셔서 방비 태세를 재정비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코마 성주가 손을 들었다. 그의 땅 칼리도는 한계선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중대사님. 염려해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이왕이면 나가들이 손에 넣었다는 그 ‘힘’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면 더 도움이 되겠습니다. 적을 알아야 대비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다른 군웅들도 웅성거리며 지코마 성주의 말에 찬성하는 기색을 보였다. 중대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지금 말씀드리기에는 지나치게 미묘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것에서 여러분들이 추측하실 수 있는 것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나가들이 한계선을 넘을지도 모른다는 제 우려에서 여러분들은 그 힘의 성격을 짐작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머리는 좋지만 자제력은 좀 부족한 편인 무핀토 추장이 질문했다.
‘그 힘은 기온을 바꿀 수 있는 힘입니까?”
지배자들은 당황했다. 무핀토 추장의 앙숙인 세미쿼 추장은 얼굴에 새긴 문신을 온통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 뒤죽박죽인 머릿속에서 나올 법한 기괴한 생각이군.”
무핀토 추장은 눈을 불태우며 세미쿼 추장을 노려보았다. 조타 중대사는 그들 사이에서 ‘우정을 의미한다’던 속어가 오가는 것을 들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른 지배자들도 그 두 추장의 말다툼에 신물이 난다는 표정이 되었고 결국 그중 한 명이 두 추장에게 ‘제발 닥쳐 주면 우리 모두 행복하지 않을까요’에 해당하는 제안을 꺼냈다. 두 추장은 잠잠해지기는커녕 ‘끼어드는 재주를 아무 데서나 발휘하지 말라’고 대꾸했고, 그러자 상황은 점점 험악해졌다. 당황한 조타 중대사는 어떻게든 사태를 중재해 보려 했지만 그곳에 있는 자들은 머리 깎은 산승 한 명이 통제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라샤린 선사라면 혹 가능할지 모르지만 선사는 지금 종규 해석소에 출석한 상태였다.
중대사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무의미하게 손을 흔들고 있을 때 무리 가운데서 낮지만 강한 목소리가 주위를 압도하며 터져 나왔다.
“예를 생각하시오. 소중한 조언을 주시려 우리를 불러 주신 분 앞에서 무슨 망발들이오?”
사람들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고 그것이 괄하이드 규리하라는 것을 알고는 입을 다물었다. 관록에서든 무력에서든 연장자에 대한 예의에서든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이 완전히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그때 큼직한 머리 위에 뿔관을 얹은 코네도 빌파가 거들 듯이 말했다.
“변경백의 말씀이 옳소. 중대사님의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변경백의 표정은 복잡했다. 코네도 대족장이 자신을 거든 것에 고마워하고 싶었지만, 괄하이드 변경백 또한 발케네의 지배자가 두 아들을 주체로 하는 모종의 계획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라짓의 마지막 신하임을 자부하는 변경백의 입장에서 대족장의 계획은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다. 결국 변경백은 모호한 목례를 하는 정도로만 감사 표시를 했다.
사람들이 조용해지자 조타 중대사는 간신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무핀토 추장께서 조금 전 기온을 바꿀 수 있는 힘이지 않냐고 말씀하셨는데, 예, 우리는 그런 상황까지 가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지배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중대사는 황급히 말했다.
“물론 그것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지배자들의 귀에 그 말은 유일한 상황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지코마 성주가 다시 손을 들었다.
“예, 지코마 성주?”
“중대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걱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다행히 이곳에 계신 여러 영웅들의 영용한 모습에서 제가 위안을 얻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에 한 분이 빠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즈믄누리의 성주 바우 머리돌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그 분께 이 사안에 대한 의견을 구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옛말에 나가 잡는 건 도깨비라고 했습니다. 스님들께서는 즈믄누리와의 연락을 위한 딱정벌레를 소유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탐탁잖은 투로 말했다.
“대확장 전쟁 때도 도깨비들은 물러나기만 했소. 지코마 성주.”
“하지만 아킨스로우 협곡에서 10만의 나가를 태워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건 인상적인 일이긴 하지만 본질은 정신 나간 자의 실수였소. 도깨비들 전체의 뜻이 아니었소.”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즈믄누리의 성주에겐 대대로 몇 가지 특권이 있습니다. 혹자는 놀라운 직관력이라고 말하고 혹자는 ‘다섯째 딸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능력도 그중 하나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즈믄누리의 성주는 즈믄누리 안에 있을 때는 항상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께 우리의 행동 방침에 대한 조언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배자들은 놀란 표정으로 지코마 성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타 중대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코마 성주.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유쾌하게 수용할 수 있는 제안도 아닙니다. 예. 말씀하신 대로 즈믄누리의 성주가 내린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도깨비는 없습니다. 그리고 도깨비들은 결국 그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그들의 자유입니다만, 우리는 거기에서 논리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 성주들이 대부분의 경우 옳은 결정만 내려 온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즈믄누리의 성주가 내린 다음 번 결정이 맞을지 틀릴지 여전히 알 수 없는 겁니다. 게다가, 혹 그 믿기 힘든 능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건 도깨비들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도깨비가 아닙니다. 한 집단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결정이 다른 집단에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재난인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가들은 대확장 전쟁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대확장 전쟁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세상의 반을 뺏겼고, 그리고 왕도 잃었습니다.”
‘왕’이라는 말에 코네도 대족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 대족장은 자신을 쏘아보는 눈길을 느꼈고, 고개를 돌려 괄하이드 변경백을 보게 되었다. 변경백은 대족장의 가슴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코네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괄하이드의 시선을 외면했다.
지코마 성주는 다시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저는 즈믄누리의 성주가 가진 그 의사 결정 능력을 이런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 능력은 최소한 도깨비라는 한 집단을 긴 세월 동안 올바르게 이끈 능력이라고. 그렇다면 거기에는 상황을 파악하고 최선의 결정을 도출하는 데 꼭 필요한 명철함이 내포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명철함을 참고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분께 조언을 청하는 것 자체는 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곳에 딱정벌레가 있습니다. 그 분의 조언을 들은 다음 그것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차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사원의 딱정벌레를 바우 성주에게 보내겠습니다. 작금의 사태를 설명하고 고견을 요청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쭐 것이 있는데, 무학당에 계신 손님들은 언제 보여 주시겠습니까?”
지배자들의 얼굴이 대번에 바뀌었다. 중대사는 우물쭈물하며 지코마 성주를 바라보았다. 지코마 성주는 변경백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분들 중 한 분이 괄하이드 변경백과 겨룬 수백 합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괄하이드 변경백. 각자가 가진 무기의 차이가 없었다면 그 격투의 결과는 누구도………….”
“내가 졌소.”
괄하이드는 지코마 성주가 건넨 선물―무기의 성능 차이라는 변명―을 받지 않았다. 지코마 성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야 할 시간이었다. 패배를 인정하더라도 잃을 명예가 적은 젊은이의 선언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나를 가지고 놀았소. 그것이 추잡한 악취미의 발현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오. 내가 추측하기로 그는 우리들의 시선을 무학당에서 떨어뜨려 두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오. 만약 그것이 저질스러운 희롱이었다면 나는 그 자, 그리고 나 자신을 참아 내기 어려웠을 거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소.”
군웅들은 존경심을 담아 괄하이드 변경백을 바라본 다음 다시 조타 중대사를 돌아보았다. 지코마 성주가 다시 말했다.
“조금 전 존경하는 변경백께서 확인해 주신 바와 같이 그 분들이 예사 분들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곳에서 나가와 두억시니들, 그리고 대호와 믿기 어렵습니다만 용까지 목격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염집의 마당에서 볼 수 있는 조합은 아닙니다. 사실, 한 세기에 한 번 목격할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조합이군요. 그 놀라운 조합이 왜 하인샤 대사원의 무학당에서 목격되는 겁니까? 그 분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 분들과 나가들이 기온을 바꿀 수도 있는 엄청난 힘을 획득한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겁니까? 중대사님. 저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그러리라 생각됩니다만, ‘도깨비 지나가자 불이 났다.’는 식의 대답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조타 중대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생각과는 정반대로 행동해 버렸다. 지배자들은 실로 의심스럽다는 듯이 중대사를 쏘아보았다. 중대사는 한참 후에야 겨우 할 말을 정리할 수 있었다.
“여러분들의 의혹과 호기심은 당연합니다.”
중대사는 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 분들의 동의 없이는 그 분들에 대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그 분들은 나가의 책략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집된 분들입니다. 그리고 괄하이드 변경백의 대도가 부러진 날, 우리는 그것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나가의 교활한 속임수에 의해 우리는 실패했고, 그 때문에 나가들은 제가 말씀드린 것 같은 ‘힘’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분들과 우리는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열성적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