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0장 – 출발하는 수탐자들 (9) [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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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10장 – 출발하는 수탐자들 (9)


세리스마는 감탄하며 닐렀다.

<먹으로 지웠다고?>

갈로텍은 세리스마처럼 감탄할 수 없었다. 분노 때문에 제자리에 앉아 있기도 힘들었던 갈로텍은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닐렀다.

<예. 심장병의 이름들을 먹으로 뭉개어 놓았습니다. 모두 몇 개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새도록 심장탑을 오르내린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탑 아래쪽 근방에 도달해서는 손바닥에 먹을 묻혀 손에 잡히는 대로 뭉개 버렸습니다. 도망치기 직전이라 그렇게 했겠지요. 아마 그중에는 틀림없이 자기들의 심장병도 포함되어 있겠지요.>

<그리고 수호자들의 심장병도 포함되어 있겠지. 대단한 재치군. 역시 내가 가려 뽑을 만한 놈들이야.>

<지금 수호자들의 이름을 우선으로 어떤 이름이 남아 있고 어떤 이름이 없는지 대조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제기랄, 그 놈들이 제 심장병을 깨 버렸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비늘이 빠질 지경입니다!>

<아마 도망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그랬겠지. 자네가 갑자기 죽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렇잖으면 그냥 제 심장병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지금쯤이면 벌써 밀림 속으로 들어가 버렸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추적할 수가 없습니다!>

세리스마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생각했다. 곧 그는 눈을 번득이며 닐렀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네?>

<그 녀석들은 우리가 여신을 감금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여자들에게 그것을 말하고 도와달라고 요청하지 않을까?>

갈로텍의 걸음이 멈췄다. 세리스마는 빠르게 닐렀다.

<대조 작업 따위 집어치우고 모두 하텐그라쥬를 수색하도록 해. 어쩌면 그것까지도 예상하고 정말로 밀림으로 도망쳤을 수도 있지만,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어. 녀석들이 밀림으로 도망쳤다는 것이라도 확인해야 해!>

대답은 없었다. 갈로텍은 이미 달려나간 후였다.

그러나 그날 하루, 그리고 그 후 사흘 동안 계속된 수색에서도 두 사람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밀림으로 도망친 것이 분명했다. 세리스마와 갈로텍은 그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괄하이드 규리하는 얼굴을 붉힌 채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앞쪽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말했어?”

“두 번씩 확인해야 되나.”

“형을 가리켜 산에게 부동심을 가르칠 수 있다고 나불거리던 자들이 그 광경을 봤으면 정말 당황했을 텐데. 혹 자신이 스무 살짜리 청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변경백은 불편한 헛기침을 했다.

“좀 감정적으로 말한 것은 인정하지만 내가 말했던 것은 모두 솔직한 진심이다. 라수.”

괄하이드 규리하의 사촌동생 라수 규리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긴 형에게 서신을 쓰며 그런 모습을 기대했지. 다른 자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형을 알거든. 산사에 틀어박혀 사는 것이 지루해졌고, 그래서 내 광대를 불러야겠다고 결심했지. 그래도 내 광대가 이 정도까지 나를 즐겁게 해 줄 줄은 몰랐어.”

규리하 변경백령의 강대한 지배자를 광대라고 부르는 발칙한 처사에 직면했지만 괄하이드가 보여준 반응은 쓴웃음을 짓는 것뿐이었다. 라수 규리하가 그를 아는 것처럼 그 역시 라수 규리하를 알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변경백은 방 안의 모습 또한 라수의 개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방 안은 웬만큼 대범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결벽증 환자가 아닐까 의심하게 될 꼬락서니였다. 사방의 벽은 그 앞에 쌓여 있는 무수한 책에 의해 칠할 이상 감춰져 있었고 천장 또한 보통 것보다 월등히 길고 넓은 시렁에 의해 감춰져 있었다. 그 시렁에는 온갖 물건들이 어지럽게 얹혀 있어 아래쪽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문득문득 목을 움츠리게 만들고 있었다. 라수는 ‘떨어져도 아래에 있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물건만 얹어 놓았다’고 장담하긴 했지만, 방바닥은 주로 집필 공간으로 사용되는 듯했다. 그 말은 엉망으로 구겨진 이불과 파지들, 그리고 벼루와 먹, 붓들이 방바닥을 점령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방 안에 서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큼직한 서탁에는 황당하게도 큼직한 콩나물 시루가 얹혀 있었다. 라수는 그것이 ‘관상용’이라고 설명했고 괄하이드는 왜 화분이나 수반을 놔두지 않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서탁이 그 지경인지라 라수는 방바닥에 엎드려 글을 쓰는 듯했다. 그 외에도 도대체 무엇에 사용되는 물건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어 방 안에는 한 사람이 더 들어오기 힘들 정도였다.

괄하이드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방 안을 둘러본 라수는 이렇게 아름다운 방도 없을 거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그래서, 왕놀음에 참가할 작정이야? 나가를 데리고? 사람들은 형이 노환으로 분별을 잃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사람들의 말에 신경 써 본 적은 없어. 그리고 케이건 드라카가 지명한 여인은 분명히 우리의 왕이야.”

“아무래도 형은 800년쯤 시기를 잘못 타고 태어난 것 같단 말이야. 그 나가는, 글쎄. 아마 왕이긴 할 거야.”

괄하이드는 고개를 번쩍 들어 사촌동생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 말 네 본심이냐?”

“역시 그게 목적이었군?”

“뭐?”

“그녀가 왕이라고 믿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뭔가 불안해서 자기보다 똑똑한 것이 분명한 사촌동생에게 확인을 받고 싶어서 온 것 아냐?”

라수의 악의 섞인 농담에 괄하이드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인해 주겠어?”

라수는 결국 자신이 사촌형을 존경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괄하이드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라수는 차분하게 말했다.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타개책인 것은 분명해. 사람들은 왕을 원하지만 제왕병자는 경멸하지. 물론 제왕병자들에게 환호를 보내는 자들이 있기에 그 희극적인 자들의 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실제로 힘을 가진 자들, 예를 들어 형과 같은 인물들은 제왕병자들을 싫어하지. 얼마나 싫어하냐 하면, 어떤 인간이 왕이 되겠다고 말하면 그 자가 실제로 그럴 만한 능력이 되더라도 일단은 제왕병자라고 판단해 버릴 만큼.”

“그 말은 인간은 왕이 되기 어렵다는 뜻인가?”

“인간의 경우 제왕병자로 오인될 위험이 있다는 거지. 주퀘도 사르마크처럼 힘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자는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아니야. 사모 페이라는 그 나가에게는 그런 위험이 없지. 그리고 두 번째로, 그녀는 신왕조의 개조가 될 수 없어. 짝이 없으니까.”

“그건 나쁜 점이잖아?”

“일반적인 경우라면 왕에게 후계자가 없다는 것은 문제지만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아. 북부의 왕권이 영원히 나가의 손에 장악되는 것은 아니라는 보증이 되니까. 그 점은 그녀 스스로 말한 한시성에 대한 담보가 되지. 그녀가 죽은 다음에, 혹은 그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여신이 해방된 다음에 왕권은 다시 인간, 혹은 레콘, 정말 가능성이 없지만 도깨비에게 올 수도 있지. 북부인들은 영웅왕의 시절에 이미 그런 경험을 했어. 이것은 그녀의 후계자가 되고 싶은 야심가들을 솔깃하게 할 장점이지.”

괄하이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말은 그녀가 왕이 될 경우 스스로를 사냥감으로 만든다는 의미잖아. 그녀의 야심만만한 신하들은 그녀를 죽이고 그 왕좌에 앉고 싶어 할 테니까.”

“왕은 언제나 제물이고 사냥감이고 희생양이야.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문제지. 그들은 다른 누군가가 국왕 시해를 시도하지 못하도록 서로를 견제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녀에게는 매수할 수 없는 수호수와 용을 데리고 있는 동생도 있잖아? 그리고 나가는 잘 죽지도 않아.”

괄하이드는 동의했다. 라수는 계속 말했다.

“그러니 형에게는 세 부류의 사람에게 줄 것이 있어. 왕이 되고 싶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것을 삼가고 있는 자들에겐 없는 것을 만들어 내기보다 이미 만들어진 것을 얻는 쪽이 더 낫다는 것을 주지시켜. 왕이 존재하지 않는 북부에서 왕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는 왕이 있는 북부에서 그 왕좌를 그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후계자도 없고 왕좌의 주인도 그것을 한시적으로만 맡겠다고 주장하는—얻는 것이 편하지.”

“흐음. 두 번째 부류는 뭐지?”

“왕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왕이 돌아오기를 원하는 형과 같은 자들. 그 자들에게 줄 것은 이미 케이건 드라카가 준비해 줬지. 왕의 상징인 흑사자의 모피를 가진 채 북부로 온 사람. 대호가 따르는 사람. 이 정도면 웬만한 제왕병자들은 꿈도 못 꿀 증거들이지. 거기에 덧붙여 나가인 그녀가 우리가 경멸해야 마땅할 제왕병자일 리는 없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겠군.”

괄하이드는 라수의 말을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말했다.

“세 부류라고 했지. 마지막은 어떤 부류지?”

“제일 다루기 까다로운 부류인데, 왕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왕의 귀환에도 별로 관심이 없지만, 나가가 어찌 우리의 왕이 되느냐고 화를 낼 수는 있는 부류지. 공교롭게도 숫자는 제일 많을 거야.”

“그렇군. 그 자들에게 뭘 주지?”

“나가가 아니라고 해.”

“뭐?”

“왜 얼굴을 공개해야 하지? 가면을 쓰게 해.”

“가면이라니. 만민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 왕이 어떻게 가면 ……”

“오, 고결한 이상주의여. 사람들은 진실에 관심이 없어. 멋진 가면을 더 좋아해. 지배자가 자신 또한 울고 웃는 한 명의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충격을 받을걸. 규리하를 다스리는 형도 그 정도는 알 텐데.”

“물론 나도 사람들 앞에서 더욱 나 자신에게 엄격하게 행동하지. 네가 말하는 가면이 그런 의미라면, 그래. 나도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쓴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네가 말하는 것은 얼굴을 감추는 가면이잖아?”

“상관없어. 그 기막힌 목소리만으로 신뢰감은 충분히 얻을 수 있어.”

“아아, 그 목소리.”

“그래. 가면 뒤에서 그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고 생각해 봐. 그녀가 나가라는 사실은 이곳에 모인 자들만 함구하면 돼.”

“그런 비밀이 지켜지겠어?”

“조금씩 흘러나가면 더 좋지. 얼마나 흥미진진하겠어. 많은 사람들은 나가가 말을 아예 못 한다고 믿어. 그런데 가면을 쓴 우리의 여왕은 목소리를 내는 거야. 그들은 믿어 마땅한 상식과 귓속말로 들은 소문 사이에서 흥분하겠지. 왕은 사람들에게 그런 여흥거리도 줘야 해. 아, 그렇군. 그 가면은 나늬 같이 아름다운 여왕의 용모에 사람들이 상사병으로 죽어 나가는 것을 막는 장치라고 말해. 역시 사람들을 즐겁게 할 설명이 되겠군.”

괄하이드는 탄복하면서도 꺼림칙한 표정으로 사촌동생을 바라보았다.

“라수.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너와 노닥거리고 있다 보면 내가 정말 교활한 악당이라도 된 것 같아.”

라수 규리하는 싱긋 웃었다.

“그런 악당의 감각을 기대하고 온 거잖아?”

그것을 기대하고 사촌동생을 찾았던 변경백은 덩달아 싱긋 웃었다.


사모 페이는 륜의 설명을 들으며 웃었다.

“그거 정말 재미있게 되었군.”

“재미있다고요?”

“그래. 케이건 드라카는 내게 왕이 되어서 눈물을 마신 다음 죽으라고 말했지. 그런데 내가 왕이 되려면 케이건은 내게 용의 수호를 맹세해야 하지. 용의 수호를 맹세한다면 케이건은 내가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군. 그렇다면 케이건은 내게 왕이 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면 내게 용의 수호를 맹세할 필요가 없지. 케이건은 정말 난처한 모순에 빠져 있군. 키탈저 사냥꾼들이 좋아한다는 그 모순 말이야.”

두 사람은 주위에서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이용하고 있었다. 사모의 이야기를 들은 비형은 당장 매혹에 빠졌다.

“맹세하면 왕이 되게 할 수 없고, 왕이 되지 않으면 맹세할 필요가 없고……..”

세 명의 이야깃꾼에 당한 듯한 모습으로 혼수 상태에 빠져 버린 비형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되었다. 티나한은 벼슬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이봐, 사모. 케이건이 용의 수호를 맹세하지 않으면 왕이 안 될 거야?”

사모는 미소 지었다.

“용의 수호가 어떤 건지 들으니 더욱 받고 싶어지는데. 티나한. 날더러 죽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를 위해 죽을 준비도 되어야 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지 않아?”

륜은 죽는다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말하는 사모를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무릎 옆에 누워 있던 아스화리탈은 륜의 몸이 굳는 것을 느끼고는 그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륜은 한숨을 내쉬며 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티나한은 수염 볏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쩐지 케이건이 하는 말과 비슷하군. 케이건은 거꾸로 말하지.만”

“거꾸로?”

“케이건은 자신이 상대방을 죽이니 상대방도 자기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하지.”

“공평한 성격이군.”

사모는 웃으며 마당 저편을 바라보았다.

마당 저편에서는 케이건과 오레놀, 그리고 쥬타기 대선사가 돗자리 위에 앉아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억시니들은 요 근래 그러했던 것처럼 더위에 슬퍼하며 그들 주위에 쓰러져 있었다. 대단히 살벌한 회담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여름의 긴 오후는 아직도 한창이었다. 이야기는 꽤 진지한 듯했고 마루에 앉아 있는 자들은 오레놀과 쥬타기 대선사가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케이건을 바라보던 륜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닐렀다.

<누님. 정말로 왕이 될 생각이십니까?>

<몇 번째 니르는 건지 모르겠군. 륜. 우리 두 사람의 힘만으로는 여신을 구출할 수 없어. 그리고 내가 곧장 죽는다고 생각하지는 마. 그들은 북부의 왕이 나가라는 사실을 알면 일단 대화해 보려고 할 거야. 간단히 북부를 얻게 되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대화가 결렬되면 어떻게 하죠?>

<그다음엔? 케이건의 말대로 되길 바라는 거지. 나는 죽고 남은 자들이 여신을 구출하는 거지.>

<누님!>

사모는 웃으며 륜을 바라보았다.

<륜. 나도 죽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아.>

륜은 자신을 위해 죽으려 했던 사모를 보며 몸을 떨었다. 륜의 마음을 짐작한 사모는 황급히 닐렀다.

<아니,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나는 스스로 조심할 거라는 의미로 니른 거야. 내 정체를 쉽게 밝힐 필요는 없겠지. 내가 사모 페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그 자들이 나를 어떻게 죽이겠어?>

<북부에 있는 나가는 저와 누님뿐입니다! 그 자들이 왜 모르겠습니까?>

<그렇다면 너라고 생각하겠지. 네가 여신의 힘으로 북부의 멍청이들을 누르고 왕이 되었다고 생각할 거야. 그것이 보통 할 수 있는 생각이잖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누님을 죽일지도…..>

<그들은 내가 암살을 포기했다는 것을 몰라. 너를 죽일 자로서 내가 필요하다고 믿을 거야.>

륜은 일이 그렇게 잘 되기만 할 수는 없다고 니르려고 했다. 그때 돗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났다.

쥬타기 대선사와 오레놀은 그대로 오솔길을 통해 떠났다. 남아 있던 케이건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케이건이 축대 위에 올라오자마자 비형은 조바심을 내며 질문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케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루 위에 올라오지도 않았다. 케이건은 축대 위에 선 채 사모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사모는 그 시선에 의아해했다.

“사모 페이.”

“응?”

“북부의 왕이 될 각오가 되어 있나?”

륜은 비늘을 곤두세웠다. 사모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자들이 모두 동의하고, 거기에 덧붙여 네가 용의 수호를 맹세한다면.”

“맹세하겠다.”

자연스러운 대답에 비형과 티나한은 깜짝 놀랐다. 사모 또한 얼굴의 웃음을 거두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 맹세를 받아들여 왕이 된다면, 그렇다면 너는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자를 목숨 걸고 보호하겠다는 것이 되지. 그래도 괜찮겠어?”

“너를 죽음의 길에 밀어 넣으려면 나 또한 죽음을 각오해야겠지.”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이기에 사모는 미소를 짓고 말았다. 케이건은 그 미소에 고개를 갸웃했다. 사모는 부드럽게 말했다.

“할 필요 없어.”

“응?”

“내게 용의 수호를 맹세할 필요는 없어.”

륜과 비형, 그리고 티나한은 화들짝 놀라서 사모를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사모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지?”

그의 목소리는 약간 잠겨 있었다. 하지만 놀란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사모는 천천히 말했다.

“그건 요스비의 제안일 뿐이야. 그리고 나는 그전에 이미 왕이 될 생각을 하고 있었고.”

“하지만 너는 그걸 조건으로 내세웠는데.”

“그때는 용의 수호라는 것이 뭔지 몰랐으니까. 그것이 네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중대한 맹세라면, 사양하겠어.”

그리고 사모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여자가 왜 남자의 보호를 받아야 하지?”

케이건은 한 번에 정의 내리기 어려운 표정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사모를 바라보던 케이건이 갑자기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것뿐, 케이건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정지한 채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기묘하게 많은 침묵을 불러일으켰다. 티나한과 비형, 그리고 륜마저도 아무런 말도, 아무런 니름도 꺼내지 못한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케이건은 옆을 보며 말했다.

“잘됐군.”

사모는 빙긋 웃었다.

“기쁜 모양이지?”

“아니. 다른 일을 말하는 거다.”

“다른 일?”

케이건의 몸이 고개를 따라 돌아갔다. 케이건은 다른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용의 수호를 맹세하면 나는 네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사원에서는 지금 한 가지 일을 추진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나를 길잡이로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거다.”

길잡이라는 말에 비형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티나한도 벼슬을 빳빳하게 세우며 외쳤다.

“무슨 일이냐, 그건?”

“셋이 하나를 상대하오.”

“응? 어, 그건 요스비라는 자가 했던 이야기 말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묘한 결론을 얻었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떤 결론이지?”

케이건은 다시 몸을 돌렸다. 사람들을 쳐다보는 케이건의 얼굴은 그들에게 익숙한 담담한 얼굴이었다.

“간단한 거요. 발자국 없는 여신의 힘을 상대하려면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 자신을 죽이는 신, 그리고 어디에도 없는 신의 힘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의미지.”

“엑?”

티나한은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비형은 당황하여 외쳤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나가들이야 신체를 감금해서 그렇게 했습니다만, 우리도 그런 일을 하자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 수는 없소. 그럴 능력도 없고. 다른 사제들은 발자국 없는 여신이 그녀의 신랑에게 준 것과 같은 신명을 받지 않았소.”

“그러면 어떻게?”

“화신을 찾아야 하오.”

륜과 비형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화신!”

“그렇소. 신체의 내면에 있는 신이 겉으로 드러난 화신. 나는 세 명의 화신을 찾아낼 작정이오. 그것이 여신의 힘을 손에 넣은 수호자들을 억압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면서 확실한 해결책이오. 셋이 하나를 상대하니까.”

비형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화신을 어디에서, 어, 어떻게 찾습니까?”

“쉬운 일은 아닐 거요. 지금으로선 일단 바우 머리돌 성주를 찾아볼 생각이오. 밤의 다섯째 따님이 뭔가 조언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혼란, 매혹, 감금, 은닉이 나를 방해할지도 모르지만.”

“거기서 조언을 얻지 못하면?”

“다른 방법도 몇 가지 생각해 두었소만, 어쩌면 기나긴 수탐이 될지도 모르오.”

티나한이 외치듯 질문했다.

“가능성이 있기는 한 거냐?”

“없지는 않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소.”

“그렇다면 됐어!”

티나한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축대에 뛰어내렸다.

“대적자 여기 있다!”

케이건은 티나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나한. 그건 가혹할 정도로 긴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오. 당신에겐 숙원이 있소. 하늘치 유적에 올라가야 하고, 부인들을 얻어야 하잖소.”

“젠장. 북부가 모두 나가 손에 들어가면 내 숙원도 소용 없어. 그리고 모르는 일이잖아? 화신을 찾으러 다니다가 부인감도 찾을 수 있을지.”

케이건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을 수는 없었다. 비형이 눈을 빛내며 일어났기 때문이다.

“요술쟁이 없이 어디를 갈 겁니까?”

티나한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케이건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형. 당신은 바우 성주의 몸종이오.”

“즈믄누리로 가실 거죠? 거기 가서 한 번 물어보죠. 어때요?”

케이건은 그 상황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낯설지는 않다는 느낌 또한 들었다. 케이건은 언제 이와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생각해 보았고 그것이 대충 15년 전의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한 800년 전의 일이기도 했다.

결국 케이건은 말했다.

“함께 가 준다면 기쁠 거요.”

비형과 티나한이 만세를 외쳤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이건은 문득 사모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사모는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사모를 바라보던 케이건은 천천히 축대 위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놀란 티나한과 비형이 그를 바라보았고 사모와 륜도 당황하여 엉거주춤 일어났다. 케이건은 사모에게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바로 떠나야 할 테니 폐하의 대관식에 참석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왕이여. 그러니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라짓 전사 케이건 드라카가 세 화신을 찾아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수탐에 폐하의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사모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비형이 굴러떨어지는 속도로 축대 옆에 내려가서는 케이건 옆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비형은 사모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위대한 사모 페이 폐하. 이렇듯 긴 시간 끝에 북부로 돌아오신 폐하의 손에 축복을 받는다면, 세상에 그보다 더 광영 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 주인이신 바우 머리돌 성주님께서는 이미 폐하를 지지할 것을 약속하셨고 제 주인의 왕이신 당신은 저의 왕이기도 합니다. 부디 저희들의 수탐에 하해와 같은 축복을 내려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비형은 티나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소리 없이 포효하며 벼슬을 붙잡아 뜯던 티나한은 결국 항복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케이건 옆에 무릎을 꿇었다.

“이런, 썅. 좋아. 왕! 축복해 줘!”

사모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무릎을 꿇은 세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동생을 돌아보았다. 륜은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얼굴을 한 채 세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모의 눈길을 느낀 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모를 쳐다보았다. 사모는 부드럽게 닐렀다.

<륜?>

륜은 가까스로 닐렀다.

<누님은 저들의 왕인 것 같군요.>

사모는 세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대들을 축복한다. 그대들의 수탐이 부디 성공하여 모든 사람들의 세계를 구할 수 있게 되길.”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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