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1장 – 침수(浸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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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11장 – 침수(浸水) (1)


지배자, 상인, ・・・등 ・・・의 권능을 소원하는 많은 이들이 분명히 ・・・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용인들 중에는 영웅이나 위인은커녕 이름이 좀 알려진 ・・・조차 없다. 용인의 권능은 타인을 지배하거나 타인이 소유한 정보를 얻어내는 데 ……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에게 지배당할 위험에 노출되게 만드는 것이 용인의 능력이다.

・・・들은, 둔감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 는 이 사실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부분들이 훼손되어 안타까움을 일으키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카시다 암각문> 중 일부.


침수(浸水)

사흘을 퍼붓던 비는 기력을 소진한 듯 간헐적인 헐떡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빗줄기는 정오가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끈질긴 빗줄기 아래로 광대한 엔거 평원은 축축하고 질척하고 찰박거렸다. 종아리에 닿을락 말락 하는 엷은 안개층이 평원의 지면을 뒤덮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재와 뒤섞인 보기 흉한 진흙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평원 한 귀퉁이, 언덕 위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던 괄하이드 규리하는 무심한 손길로 이마를 닦아내었다. 날씨는 온화했다. 비를 쏟아붓는 것과 동시에 적들은 엔거 평원의 기온을 상당히 높여 놓았다. 그들로서는 키보렌과 비슷한 온도까지 올려놓고 싶었겠지만, 그런 고온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비를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온은 피아 모두에게 크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에 머물렀다.

괄하이드는 대도에 씌워 둔 덮개를 만지작거렸다. 널리 쓰이는 작살검 대신 하이드는 자신의 대도를 고집했고, 아무도 노무사의 고집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대도는 작살검 수십 자루가 해낼 일을 홀로 해내곤 했기 때문이다.

덮개 아래로 느껴지는 대도의 믿음직한 감촉이 노무사에게 향수와도 같고 설렘과도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감정이다. 괄하이드는 씩 웃었다.

“녀석. 보채지 마라. 오늘도 포식할 거다.”

언덕 위에 있던 다른 장수들도 난폭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괄하이드의 말에 맞장구를 치거나 재치 있는 말 한마디를 보태는 등의 행동을 하는 자는 없었다. 괄하이드는 그 사실에 만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릿한 슬픔을 느꼈다. 밝은 청년들, 젊음의 단점이자 특권이기도 한 밝은 성품을 주체하지 못하던 젊은이들이 너무 많이 사라졌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괄하이드는 그의 골칫거리였던 그 사랑스러운 젊은이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사마귀 페서다. 난폭자 그리몰스, 상사병자 디구르, 난쟁이 고하, 자러 나온 귀하츠…….

귀하츠의 별명을 되새긴 괄하이드는 우수 어린 미소를 지었다.

‘자러 나온 귀하츠라.’

슈라도스에서 온 귀하츠 신뷰레는 독특한 전쟁관을 피력하곤 했다. 그 잘생긴 젊은이는 침대가 자신의 전장(戰場)이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전장에는 모자란 잠을 보충하러 나온다고 설명하여 전우들을 당황하게 했다. 진격 나팔 소리를 들으며 ‘취침 나팔이 울렸군. 달콤한 꿈의 시간인가.’ 라고 중얼거리던 귀하츠의 모습은 뻣뻣하게 긴장해 있던 동료 장수들을 웃게 만들었고 다가올 공포에 위축되어 있던 병사들을 감탄하게 했다. 전장에서 쓰러뜨린 적보다 침대에서 상대한 여자가 더 많은 것 아니냐는 짓궂은 질문에 대해 귀하츠가 확실한 대답을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절대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귀하츠는 그의 표현대로 자러 나온 전장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하지만 괄하이드는 귀하츠가 침대를 전장이라고 부른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 생각 깊은 귀하츠는 살을 파먹고 뼈를 부수는 것 같은 악몽 때문에 제대로 잘 수 없음을 고백하느니 막돼먹은 호색한으로 남는 쪽을 택했다. 그 편이 부하들을 안심시키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악몽을 꿀 일은 없겠지. 편히 쉬게. 귀하츠.’

빗줄기를 보며 괄하이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치게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다. 탐스러운 열매를 보장할 아름다운 꽃들이 참혹한 폭우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무덤 앞에 살아남은 노병이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긴 시간 동안 괄하이드의 능력은 위대한 승리의 쟁취보다는 몰살을 전력 도주로 바꾸는 쪽에서 주로 발휘되고 있었다. 물론 살아서 도망친 자들에겐 그것은 무엇보다 고마운 재능이었다. 하지만 괄하이드 규리하는 페서다, 그리몰스, 디구르, 고하, 그리고 귀하츠가 그렇게 말해 줄 거라고 감히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지키지 못한 도시들도.

슈라도스의 아름다움은 이제 옛 노래 속에서나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보로의 전설적인 성벽은 끝내 그 시민들의 신뢰를 배신하고 말았다. 상고(上古)의 위대한 도시들 중에서도 으뜸이던 판사이의 육형제 탑이 영원히 수면 아래로 잠겨 버렸을 때 베미온 마립간은 미쳐 버렸다. 그는 지금까지도 탑들이 익사하며 내지르는 비명을 듣고 있었고, 레콘보다 더 심한 공수증을 보이고 있었다.

‘나를 용서해 다오. 위대한 도시들이여.’

고통스러운 회한에 빠져 있던 괄하이드의 눈에 빗줄기 저편에서 언덕을 달려 올라오는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찰박거리며 달려오는 병사를 보며 괄하이드는 우려를 느꼈다. ‘저렇게 달리다간 넘어지고 말 텐데.’ 아니나 다를까, 달려오던 병사는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안개층에 얼굴을 들이박는 병사를 보며 괄하이드는 혀를 찼다. 하지만 병사는 곧 씩씩하게 일어나 괄하이드를 향해 달려왔다. 괄하이드의 앞에 멈춰 선 병사는 우렁차게 외쳤다.

“원수부로부터의 전갈을 가지고 왔습니다! 대장군님!”

“얼굴이나 좀 닦고 말하게.”

병사는 얼굴에서 1킬로그램은 됨 직한 진흙을 닦아내었고 그러자 그 아래에서 빨갛게 변한 소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쓰디쓴 추억에 빠져 있던 괄하이드 대장군도 부지불식간에 미소를 짓고 말았다. 대장군의 미소를 본 소녀 병사는 외워 온 말을 떠올리기 위해 그렇잖아도 붉은 두 뺨을 더욱 빨갛게 물들였다.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아니었는데도.

“기상이 곧 변할 겁니다! 대장군님! 곧 사열이 있을 겁니다! 대장군님!”

“알았다. 그리고 데오늬. 땅이 이 모양일 때는 좀 천천히 달리는 편이 어떨까.”

“천천히 달리겠습니다! 대장군님!”

“자네만 있다면 내가 대장군이라는 거 잊어 먹을 일은 없겠군. 돌아가 봐.”

“돌아가겠습니다! 대장군님!”

데오늬 달비는 몸을 돌렸고, 천천히 달려갔다. 너무 천천히 달렸다. 결과적으로 데오늬는 중심을 잃고 요란한 동작으로 진흙탕에 처박히고 말았다. 하지만 괄하이드가 예상하고 그 광경을 본 모든 사람이 그러리라 짐작했던 것처럼 데오늬 달비는 벌떡 일어나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씩씩하게 달려갔다. 데오늬 달비에 대한 중론은 그녀가 곰굴에 던져져도 난처하다는 듯 얼굴만 조금 붉힌 다음 씩씩하게 달려나올 것이라는 쪽에 쏠려 있다. 그리고 당황한 곰이 그녀를 따라 영문도 모르고 달릴 거라는,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어 낸 부연도 따른다. 괄하이드는 헛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괄하이드는 빗줄기 저편을 노려보았다.

‘사라져 간 영웅들이여. 무너진 도시들이여. 그대들을 위해 슬퍼하지만, 그러나 미래는 저 데오늬 달비의 것이겠구나.’

노무사는 다시 대도의 덮개를 만지작거렸다. 상대방의 살을 파헤치는, 가장 극단적인 친선의 도구. 괄하이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당신들 곁으로 가 함께 웃고 함께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희망 속에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겠다. 그때까지, 나는 저 무릎 성할 날이 없는 소녀를 위해 싸우겠다.’

장수들을 향해 몸을 돌렸을 때 괄하이드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리고 회한에 젖어 있지도 않았다. 싸워야 할 이유가 있었고, 싸워야 할 적도 있었다.

싸워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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