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1장 – 침수(浸水) (3)

랜덤 이미지

눈물을 마시는 새 : 11장 – 침수(浸水) (3)


구름이 서서히 흩어져 맑은 하늘이 그 틈에서 드러났다. 엔거 평원을 뒤덮고 있던 안개도 사라져 흙탕물로 뒤덮인 땅이 지평선까지 펼쳐졌다. 륜은 평원 곳곳을 덮고 있는 그 물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적들은, 이왕이면 강이나 거대한 호수를 낀 지역을 선택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수 규리하는 그런 지역으로 절대 다가가지 않았다. 그러자 적들은 예상 전장으로 지목된 엔거 평원에 구름을 끌어모아 사흘 동안 비를 퍼부었다. 전장 전체를 ‘적셔 두는’ 그 행동에 라수 상장군은 감탄했다. 그리고 라수는 ‘전투 역시 일종의 사회관계—대단히 극단적인 형태이긴 하지만—이고 따라서 서로 간의 양보는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 정도의 요구는 들어 주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그들은 적들이 전장을 충분히 적시기를 기다리며 그곳에 머물렀다.

사흘이 지난 지금, 마침내 적들은 비를 물러가게 했다. 전투 시작을 통고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생각의 그 지점에서 륜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연의 힘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적들과의 오랜 투쟁의 결과로, 그즈음 ‘자연스럽다’는 표현은 냉소적 농담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기병 5천 명, 그리고 보병 3만 5천 명이 도열해 있었지만 엔거 평원은 고요했다. 그래서 바위를 향해 걸어오는 대호의 발소리가 잘 들릴 정도였다.

왕은 언제나처럼 대호 마루나래에 올라탄 채 금군과 함께 걸어왔다.

왕을 보호하는 금군을 인간이나 레콘들로 구성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은 끊이지 않고 제기되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의견 제시에 머물고 말았다. 나가와의 전투를 평생 숙원으로 천명하고 종군하고 있는 레콘들은 왕의 주위를 지키느니 최전선에서 싸우기를 원했고, 원수부는 왕의 주위에 인간을 두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래서 왕은 언제나처럼 스물두 명의 두억시니들로 이루어진 금군의 호위를 받으며 바위로 향했다. 그리고 금군의 모습을 본 인간들은 원수부의 결정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신체 곳곳이 흉기나 다름없는 그 두억시니들은 열성적인 대장장이들의 도움으로 그들에게 적합한 여러 개성적인 장비들을 갖추어 더욱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되 태어났다.

왕을 보며 륜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감각을 최대한 확장시켰다. 거의 10킬로미터 이상 감각을 확장시킨 륜은 이미 몇 번씩 확인한 결론을 다시 얻었다. 왕을 겨냥한 불순한 물의 움직임은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움직임이 발생하면 취할 조처들을 꼼꼼히 되새기며 륜은 왕을 쳐다보았다.

바위에 도달한 마루나래는 가볍게 그 위로 뛰어올랐다. 대호 위에 탄 왕은 상당한 높이에서 병사들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왕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 유명한 가면은 장병들로 하여금 왕이 모든 방향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했다.

왕이 자리를 잡자 레콘 한 명이 바위 앞으로 다가가서는 왕과 같은 방향을 향해 섰다. 왕에게 등을 보이는 무례는 이 경우 불가피한 것이기에 용납될 수 있다. 레콘이 똑바로 선 것을 확인한 왕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짐의 말을 들어라.”

“짐의 말을 들어라.”

레콘이 왕의 말을 따라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덕분에 그곳에 모인 4만 명 모두가 왕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별 필요 없는 배려일지도 모른다. 왕이 하는 말은 언제나 똑같았으니까.

“지고 돌아오는 것은 백 번이라도 용서하겠지만, 이기고 죽어 버리는 것은 용서하지 않겠다.”

륜 페이는 라수 규리하가 한숨을 내쉬는 것을 목격했다. 라수 상장군은 단 한 번만이라도 ‘짐을 사랑한다면 나가서 적을 도륙하라!’라고 말해 달라고 왕에게 졸랐지만 왕은 요지부동이었다. 언젠가 왕은 라수 규리하를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까지 몰아넣은 다음 진지하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짐이 자네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텐가?” 라는 코방귀를 뀌었다. ‘왕보다는 제 목숨을 더 사랑한다고 대답할 겁니다.’ 륜과 다른 이들은 라수의 뻔뻔함에 질려 버렸지만 왕은 싱긋 웃으며 라수의 무례를 용서했다. 그리고 라수의 요청도 묵살했다.

륜도 왕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의 예기(銳氣)를 북돋자는 라수 상장군의 요청은 륜에게도 당연한 상식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왕은 ‘승리’도 ‘명예와 자존심’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도 말하지 않았다. 왕은 언제나 ‘살아 돌아오라’는 말만 했다.

‘그걸 원하지 않는 병사가 어디 있다고’

륜이 잠시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왕은 바위에서 내려와 금군과 함께 물러났다. 전투 배치 신호가 울렸고 장군들은 자신의 군단을 움직였다. 군기들이 움직이고 나팔과 호각 소리가 소란을 떨었다. 교위들의 함성이 들려왔고 그보다 더 난폭한 부위들의 욕지거리들도 들려왔다.

전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비록 왕이 맥 빠지는 소리를 했지만, 병사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휘관들은 그들을 죽음과 삶을 가르는 가느다란 선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추하고 희미한, 비정함으로 가득한 선이었다.


지난 사흘 동안 엔거 평원을 뒤덮고 있던 구름이 마침내 소멸했다. 그 사이로 드러난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마호가니 군단의 군단장 그로스는 자신이 이룩한 일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해 했다.

사실, 그가 해낸 일이다.

그로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더욱 자신만만해졌다. 저 멀리 있는 코끼리 부대의 모습이 특히 그를 즐겁게 했다. 나가 보병들을 짓밟아 대는 적군 기병들에 대한 대비책으로 제안된 코끼리 부대는 예상을 뛰어넘는 맹활약을 보여 주었다. 빼어난 정신 억압자 수디 가리브를 주축으로 한 정신 억압자 무리는 이제 자신들의 코끼리와 완전히 한 몸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고, 실제로 다른 병사들 또한 그것을 나가의 두뇌와 코끼리의 육체가 결합된 하나의 생물로 여기고 있었다. 실로 파괴적인 생물이었다. 그로스는 지난번 전투에서 적 기병의 말을 짓밟고 그 기수를 코끼리의 상아에 꿴 채 전장을 누비고 다니던 수디 가리브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2만에 달하는 마호가니 군단의 보병들의 모습 또한 장려했다. 비록 그로스의 야심 찬 계획, 즉 적군의 작살검에 대비하여 군단병 전원을 중장갑으로 무장시킨다는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폐기되었지만 나가에겐 좋은 대장장이들이 부족했다. 사이커를 움켜쥔 보병들의 위엄 있는 모습은 그런 약점 따위를 잊게 만들었다.

흡족해하고 있는 그로스에게 부관이 다가왔다.

<군단장님. 마지막으로 닐러 드리겠습니다. 정말 전투를 시작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로스는 좋던 기분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부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로스는 곧 자신을 회복했다. 어쨌든 그의 부관은 여자였다. 그리고 남자 지휘관들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게 된 여인들도 남자들의 지휘에 대해 트집을 잡을 권리까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로스는 부관을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부관. 전투를 시작할 생각이네. 대호왕(大虎王)은 내 항복 권고를 거부했어.>

<사흘만 더 비를 뿌리시며 기다리면 갈로텍 대장군께서 도착하실 텐데요.>

<그리고 우리 수호 장군들은 지쳐 빠지겠지. 무의미한 일이야.>

<하지만 대장군께서는 자신의 도착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전투에 참여하려는 대장군의 그런 태도 때문에 전선의 확장이 늦어지고 있어. 가끔은 믿고 군단장들에게 맡겨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지. 그리고 대장군의 그런 태도는 당연해. 모든 장군들이 실수를 무서워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거부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대장군 혼자 이 넓은 전선을 감당할 수는 없어. 이제는 우리 능력을 보여 줘야 해.>

<니름 옳습니다만 저곳에는 그들의 왕이 있잖습니까? 게다가 륜 페이도 있습니다. 군단장님께서는 우리 군단의 수호 장군들만으로도 륜 페이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하셨고 저 또한 그 판단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 병사들은 수호 장군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적군들과 상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도륙할 걸세. 기병은 수디가 제거할 테고 우리 보병들은 홀로 불신자 열 명이라도 쓰러뜨릴 수 있어. 뭐가 문제인가?>

부관은 솔직히 문제를 제시할 수 없었다. 그들의 군단은 2만 명의 보병과 500기의 코끼리병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숫자는 확실히 4만의 적병을 제압할 수 있는 숫자였다. 하지만 부관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의 전투 경험이 그 느낌을 지지하고 있었다. 좋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기분을 설명할 니름을 떠올리기 전에 그로스가 준엄하게 닐렀다.

<나는 그들의 왕에게 항복을 제안했고 그들은 살아날 기회를 포기했어. 이제 우리는 그들을 도륙하기만 하면 되네. 부관.>

부관은 마지막 갈등을 느꼈다. 결정을 내릴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하지만 제가 이 전투를 반대했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고 싶습니다.>

그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고집을! 그로스는 날카롭게 닐렀다.

<좋아. 자네는 반대했어. 비아스 마케로우!>

<감사합니다.>

비아스는 완전히 무감각한 니름으로 대꾸한 다음 뒤로 물러났다. 그로스는 그녀를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그로스는 진격을 명령했다.

횃불이 크게 움직였다. 코끼리들과 병사들은 전장을 향해 걸어갔다.

전쟁터에 도달한 그로스는 엔거 평원의 북쪽을 바라보았고 적군이 이미 배치를 끝냈음을 깨달았다. 그로스는 그것이 누구의 솜씨인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괄하이드 대장군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었다. 하지만 그로스는 서두르지 않고 진형을 갖추었다. 괄하이드는 기다려 줄 것이다. 과거 나가들이 진형을 갖추느라 어수선한 척하며 괄하이드를 유인한 적이 있었다. 돌격해 온 괄하이드는 지하수의 분출과 강력한 진눈깨비에 노출되고 말았다. 륜 페이가 나서지 않았다면 괄하이드는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당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 괄하이드 규리하는 경의를 가지고 나가들이 진형을 다 갖추기를 기다렸다. 그로스는 그런 괄하이드를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늑장을 부리리라 마음먹었다.

잠시 후, 그로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불신자들의 부대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스는 그 사실에 놀랐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로스가 보내는 강력한 니름에 의해 전선 곳곳에 펼쳐져 있는 수호 장군들은 준비를 갖추었다. 다른 장수들이 수력을 통제할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을 확인한 그로스는 적군을 관찰하며 태연하게 병력 배치를 계속했다. 그로스의 예상대로 적군은 돌격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전방에 배치된 보병들이 좌우로 갈라 설 뿐이었다. 그로스는 북부군이 왜 그런 움직임을 취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좌우로 움직이는 보병들은 결과적으로 기병들의 앞을 가로막게 되었고, 그 때문에 기병들은 당장은 돌진할 수 없게 되었다. 왜 저런 쓸모없는 짓을?

문득 불길한 예감이 그로스를 엄습했다. 그로스는 적군을 뚫어지게 관찰했다. 그때 같은 의심을 하고 있었던 듯 곁에 있던 비아스가 닐렀다.

<도깨비불은 아니군요. 진짜 병사들입니다. 왜 저런 움직임을 취하는 걸까요?>

그로스는 짧게 고민했다.

<뭔가 새로운 진형을 시험해 볼 것인지를 놓고 조금 전까지 고민하다가 방금 결심했나 보군. 괄하이드답지 않은 일인데. 필사적인 심경인 모양이군.>

<괄하이드는 노련한 전략가입니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

그로스는 비아스의 니름에 대해 뭔가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곧 그 대답을 잊어 먹고 말았다.

좌우로 갈라진 보병 사이로 걸어 나온 것을 본 순간 그로스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왜 괄하이드가 기다려 주지 않았는지, 왜 보병들이 좌우로 갈라졌는지.

그리고 왜 그들이 항복하지 않았는지.

그것은 도깨비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존재들보다는 도깨비를 더 닮아 있다는 뜻이다. 그 피부는 달아오른 쇳덩이처럼 빛나고 있었고 관절 부위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은 있었지만 눈알은 없었으며, 이마 아래에 있는 그 두 개의 구멍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작렬하는 화염뿐이었다. 똑같은 화염이 콧구멍에서도, 입 안에서도, 그리고 온몸의 털이 나 있어야 하는 곳마다 솟구치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백열 하는 불덩이에 도깨비의 피부를 씌워 놓은 존재였으며, 대파멸의 요구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다. 그로스는 비늘을 부딪치며 절규했다.

<시우쇠!>

시우쇠는 거대한 두 팔을 좌우로 펼쳤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리며 불똥을 흩날렸다. 화염의 화신은 산더미 같은 불덩이를 토했다. 그리고 자신이 내뿜은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다. 불꽃은 그대로 그의 몸에 엉겨 붙었다. 시우쇠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러자 그의 몸에 엉겨 붙은 불꽃은 수십 미터에 달하는 망토처럼 그의 뒤에서 춤췄다.

자신을 죽이는 신의 화신은 나가들을 향해 달렸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