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2장 – 땅의 울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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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12장 – 땅의 울음 (1)


네 이웃을 사랑하라.

-사람들 사이를 끝없이 떠도는 케케묵은 충고들 중 가장 무가치한 충고가 무엇이냐는 토론이 벌어지던 중 의견을 요청받은 우슬라 사르마크 부인이 한 대답.


땅의 울음

다스도는 마지막 언덕을 올라섰다. 언덕이 가로막고 있던 차가운 바람이 일순 다스도를 덮쳤다. 살을 후벼 파는 듯한 삭풍이었다. 엉겁결에 눈을 찌푸린 다스도는, 그러나 곧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토록 긴 여정의 끝에서 마침내 다스도는 두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다스도의 눈앞에는 그가 지난 닷새 동안 보아 온 것과 똑같은 황량한 빙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다스도가 서 있는 언덕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지나치게 오랫동안 수평적인 풍경에 익숙해진 다스도의 눈에 거의 기적으로까지 보이는 구조물이 있었다. 빙원 한가운데 돋아난 뿔처럼 서 있는 두 개의 구조물은 거대한 돌기둥들이었다. 기둥 뿌리는 눈과 얼음에 뒤덮여 확인할 수 없었고 기둥의 본체에는 금강석 같은 얼음 가루가 두껍게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기둥 머리에는 얼어붙은 눈덩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상인방도 없고 문짝도 없고 담도 없는 문이었다.

두 개의 돌기둥 뒤로는 다시 아무것도 없는 빙원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나타난 얼음산이 빙원을 집어삼켰다.

얼음산의 크기는 추측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빙원 한가운데 외로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음산은 지평선을 거의 감추고 있었다. 그랬기에 다스도는 오래전부터 그 산을 보며 걸어올 수 있었다. 따라서 다스도의 환호는 산의 발견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다. 다스도가 보낸 환호의 대상은 산자락 아래 거대한 얼음덩이 사이에 자리 잡은 웅장한 건물이었다.

높은 지붕과 거대한 열주들, 그리고 넓은 계단은 모두 희미한 얼룩무늬가 들어가 있는 흰빛이었다. 보다 번잡한 색깔들의 세계에서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그 줄무늬들은 이곳 백색의 세계에서는 호랑이처럼 찬연하게 두드러지고 있었다. 그 얼룩무늬야말로 레콘인 다스도에겐 그 어떤 깃발도 필요 없는 확실한 표식이었다.

다스도는 또다시 환호를 내질렀다. 이번의 환호는 그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위축되었던 근육이 팽창하며 얼어붙은 깃털들이 일시에 일어났다. 다스도의 몸에서 얼음 가루가 폭발했다. 다스도는 자신이 만든 눈 폭풍에서 뛰쳐나왔고, 다음 순간 빙원을 달리고 있었다.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지만 다스도는 두 개의 돌기둥과 그 뒤의 건물을 잇는 직선의 연장선을 벗어나지 않았다. 두 돌기둥이 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실제로 그 기둥 사이가 아닌 다른 장소로는 이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안으로 보면 똑같은 빙원이지만 언덕과 돌기둥, 그리고 건물을 잇는 직선을 벗어나면 그곳은 땅이 아니라 얼음에 뒤덮인 바다다. 물론 혹독한 추위 때문에 얼음은 두꺼웠지만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말하긴 힘들며, 특히나 흥분하여 정신없이 달리는 레콘의 발아래에서라면 얼음이나 양피지나 큰 차이가 없다. 다스도의 연모의 대상인 건물이 안겨 있는 거대한 얼음산은 산이라기보다는 바다 한가운데 솟아 있는 섬에 가깝다. 그리고 다스도가 올랐던 언덕 역시 일종의 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옛날, 레콘들이 얼음 위에서 반미치광이가 된 채 기다시피 걸어가야 했던 시절도 있다고 한다. 극연왕의 4대 경이 중 하나가 이곳에 건설되지 않았다면 다스도 또한 매 순간 물에 빠져 죽는 악몽에 시달리며 빙판 위를 기어갔어야 했을 것이다. 고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기꺼워하던 다스도는, 건물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열주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화살인 양 뛰쳐나왔다.

그것은 다스도를 향해 곧장 달려오고 있었다. 다스도는 깜짝 놀라서 속도를 늦추고는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를 향해 달려오는 것은 어떤 레콘이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는 길다란 쇠창이 들려 있었다. 다스도는 그 쇠창이 꽤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왜 정신없이 달려오는지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얼굴 가득히 축하의 표정을 떠올린 채 다스도는 가까이 다가온 상대방에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그게 당신이 받은 무기인가요?”

그러나 대답을 듣기 전부터 다스도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달려오는 레콘은 다스도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다스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다스도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을 목격했다. 거의 10초가 지난 후에야 다스도는 자신이 철창을 들고 있던 레콘의 어깨에 얹힌 채 건물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스도가 뭔가 반항을 시도해 보려 했을 때는 이미 건물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상대방은 다스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스도는 헐떡이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콘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어딘가를 향해 사납게 외쳤다.

“빨리 와!”

화를 내기에 앞서 다스도는 레콘과 같은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열주들이 아름답게 늘어서 있는 거대한 홀이었다. 몇 명의 레콘이 기둥 사이로 오가고 있었고 그중 어떤 레콘들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스도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것은 이 거인들의 세계에서 턱없이 작아 보이는 도깨비와 인간이었다. 그들 모두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종족이었다. 다스도는 자신을 낚아채 온 레콘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레콘은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한 모습으로 외쳤다.

“빨리 오라니까!”

다스도는 도깨비와 인간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레콘에게도 꽤 거대한 그 홀은 도깨비와 인간에겐 전력 질주로 달려도 레콘의 조급증을 달래기 어려운 넓이였다. 게다가 그들은 두꺼운 털옷을 입고 있었다. 깃털이 없는 그들이었기에 그런 옷이 없으면 이곳에서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도깨비와 인간은 기진맥진하여 도착했다. 인간은 무릎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스도는 그가 무슨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움푹 들어간 뺨은 창백했고 다리도 단지 달려온 것 때문이라고 보기엔 좀 지나치리만큼 떨리고 있었다. 도깨비 역시 꽤 피로한 모습이었지만, 인간보다는 좀 나은 듯 들고 온 물건을 내놓았다.

그것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였다. 도깨비는 심호흡을 하여 호흡을 평온하게 한 다음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레콘 역시 더 이상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 그는 부리를 꽉 다문 채 도깨비의 동작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긴장된 모습에 다스도는 감히 항의나 질문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참으로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상자의 내용물을 꺼낸 도깨비는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조그만 비단 꾸러미였다. 도깨비는 꾸러미의 매듭을 풀었다. 레콘은 이제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그리고 인간은 빛나는 눈빛으로 꾸러미와 다스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스도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엄숙하고 중요한 일이 벌어진 곳에 잘못 들어선 불청객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마침내 꾸러미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무더기의 사금파리가 나타났다.

다스도는 자신의 기분을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눈을 비벼 보았다.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그러고 나서 다스도는 자신의 속물 근성을 탓해 보았다. ‘한 무더기의 사금파리에도 뭔가 귀중한 의미가 있을지 몰라.’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은 그저 깨진 그릇 조각들일 뿐이었다. 다스도는 그것이 아마도 깨진 접시 조각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발견 역시 그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차츰 다스도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혹 정신 나간 자들에게 붙잡혀 온 것 아닐까? 저자들은 이제부터 맛있는 과일 좀 드시라고 말하며 저 사금파리들을 권하려는 것 아닐까?

그런 황당한 제안을 하는 대신, 도깨비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레콘을 바라보았다.

병색을 띤 인간 역시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뭔가 실망감 같은 것으로 바뀐 듯했다. 다스도는 자신이 그들에게 실망을 안겨 준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드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때 레콘이 벼락처럼 외쳤다.

“붙어!”

레콘의 고함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사금파리들이 움직였다. 다스도는 다시 긴장하며 사금파리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 다스도는 의심에 찬 눈으로 레콘과 도깨비, 그리고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 파편들의 움직임은 레콘이 악에 받혀 내뿜은 계명성 때문에 조금 흔들거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도깨비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닌가 본데요?”

레콘은 수염 볏을 부르르 떨며 접시 파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가.”

사금파리들이 어딘가로 가지 않을까 기대하던 다스도는 조금 후에야 그것이 자신에게 건네진 말임을 깨달았다. 다스도는 불쾌함에 볏을 뻣뻣하게 세웠다.

“도대체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

“가라고.”

“이거 보세요. 설명을 해야……….”

“나는 티나한이고! 저기 도깨비는 비형 스라블이다! 저 인간은 케이건 드라카야! 알겠어? 티나한! 비형 스라블! 케이건 드라카! 알겠냐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너는, 너는, 어, 이런 제기랄! 너, 너, 도대체 너 누구냐!”

다스도는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다스도라고 합니다만.”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너 다스도지! 다스도일 수밖에 없어! 제기랄, 내가 네 녀석 이름을 알게 뭐야? 다스도? 좋아. 잘 들어. 너는 다스도야. 다스도일 뿐이라고! 왜 다스도인 거냐! 접시가 안 붙잖아! 그러니 부탁하겠어. 제발 그 덜 여문 수염 볏 내 눈앞에서 당장 치워. 그러지 않으면 때려 죽일 테다! 이 다스도 같은 애송아!”

그보다 덜 폭력적인 존재라 해도 참기 어려운 상황에서 다스도 같은 레콘이 참을 리 없었다. 다스도는 깃털을 잔뜩 곤두세우며 티나한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스도가 티나한의 부리를 그 머릿속으로 쑤셔 넣어 주려 마음먹었을 때 두 명의 레콘이 갑자기 다가왔다. 그 두 명의 레콘은 다스도와 티나한 사이에 끼어들 듯이 섰다. 다스도는 그 레콘들이 자신과 비슷한 정도의 연배임을 알아보았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피고트라고 합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저 작자 손 좀 봐주고 그럽시다!”

피고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전에 이야기부터 나눠야 합니다. 이리로.”

그리고 피고트와 또 다른 젊은 레콘은 다스도의 어깨를 감싸 안고 허리를 감았다. 다스도는 그들을 뿌리치려 했지만 두 명이나 되는 레콘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정중했지만 완강했다. 또한 다스도는 레콘에게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힘든 행동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싸움을 말리는 레콘이라니? 다스도는 결국 포기한 채 그들에게 끌려갔다. 다스도는 끌려가면서도 티나한을 노려보았지만 티나한은 이미 다스도에 대해 잊은 듯 바닥에 있는 접시 조각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꽤 침통했다. 그리고 비형이라는 도깨비와 케이건이라는 인간도 도저히 행복해 보인다고는 하기 힘든 표정으로 접시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피고트와 젊은 레콘은 몇 개의 기둥을 지나쳐 홀 반대편에 도달한 후에야 다스도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많이 놀랐지요?”

“안 그럴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저 정신 나간 작자는 뭡니까? 그리고 어떻게 인간과 도깨비가 여기에 있는 겁니까?”

또 다른 젊은 레콘은 빙긋 웃으며 피고트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설명해 줘. 나는 이만 가 보겠어.”

“알았어. 고마워, 헤치카.”

헤치카라 불린 레콘은 다스도에게 목례한 다음 떠났다. 그리고 피고트는,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은 사람처럼 능숙하고 빠르게 말을 꺼냈다.

“다스도라고 했지요? 저 사람들에 대해 설명해 주겠습니다. 저 사람들은 어떤 레콘을 찾아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찾는 레콘이 누군지 모릅니다만, 만약 그들이 올바른 사람을 찾아내면 저 접시가 도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다스도는 놀랐다.

“지금 농담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한 번 그렇게 했습니다. 저 접시는 즈믄누리의 성주 바우 머리돌이 즈믄누리의 마지막 방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입니다. 그들은 즈믄누리에서 저 접시를 깨트렸습니다. 그 파편들 중 하나가 사라졌지요. 그들은 남은 파편을 주워 모은 다음 1년 동안이나 사라진 파편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사라진 파편을 찾아내었을 때 그들은 그곳에서 어떤 도깨비를 만났습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그 도깨비의 이름은 시우쇠였지요.”

다스도는 경악했다. 그는 그 유명한 이름을 알고 있었다.

“시우쇠? 그렇다면 저 사람들이 바로…”

피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화신의 수탐자들입니다.”

다스도는 조금 전과 다른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피고트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은 채 그와 함께 수탐자들을 보며 말했다.

“시우쇠 님을 찾아내었을 때 깨진 접시는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 번째 화신을 찾기 위해 다시 접시를 깨트렸습니다. 2년이 지난 후 그들은 이곳에서 겨우 사라진 파편을 발견했지요. 하지만 이곳은 좀 문제가 있는 지점입니다.”

다스도는 왜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피고트는 안됐다는 듯이 말했다.

“이곳에는 레콘들밖에 없고, 그것도 세상의 모든 레콘이 한 번씩 방문하는 곳이지요. 그들은 이곳에서 두 번째 화신을 찾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끝내 접시는 하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대장간을 찾아오는 레콘들마다 붙잡고 화신인지 확인하려 애쓰고 있는 겁니다. 나도 이곳에 처음 도달했을 때 당신과 똑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사정을 알게 된 다음 저 자를 용서했습니다. 당신은 어쩌겠습니까?”

다스도는 피고트와 똑같은 결정을 내렸다. 그와 피고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수탐자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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