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2장 – 땅의 울음 (14)
수호자 세리스마는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호자 보트린은 조심스럽게 닐렀다.
<갈로텍은 곧 그 관문 요새를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세리스마는 침울하게 닐렀다.
<그렇게 상황이 녹록지 않아. 갈로텍은 그 높은 곳의 날씨를 바꾸는 것에 힘을 다 소모하고 있어. 휘하의 수호 장군들이 일으키는 폭풍은 관문 요새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해. 그곳은 원래 날씨가 험악한 곳이니까. 게다가 갈로텍이 그곳의 수력을 거의 다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수호 장군들은 다른 곳에서 폭풍을 만들어 와야 하지. 또한 그 폭풍은 갈로텍의 날씨 조절을 방해할 수도 있어.>
<그렇다면 결국 병사 대 병사의 싸움이잖습니까? 그곳에는 주퀘도 사르마크도 있습니다. 그 자는 전쟁의 달인이잖습니까.>
<그런데 관문 요새는 그 달인을 거꾸러뜨린 유일한 상대지. 아무래도 통행료를 보내주는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군.>
보트린은 비늘을 약간 세웠다. 세리스마의 제안은 처음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갈로텍이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에 묶여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을 때 세리스마는 곧 그들에게 통행료로 쓸 대금을 보내 줄 방도를 궁리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접근하여 통행료를 건네줄 수 있는 부대들은 모두 남진 중인 북부군을 막기 위해 급히 회군 중이었다. 통행료를 전달하는 데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있는 위치가 몇 명의 수호 장군들이 기온을 조절하지 않는 이상 접근하기도 힘든 추운 지방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런데 남진하는 북부군을 상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수호 장군이었다. 시우쇠와 뇌룡공을 저지할 수호 장군이 없다면 병사가 수십 명이든 수십만 명이든 별 차이가 없다. 세리스마가 내놓은 해결책은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을 모조리 모아 통행료 수송 부대를 꾸린다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호자들이 수호 장군이 되어 떠났기 때문에 하텐그라쥬에는 수호자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하텐그라쥬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보트린은 그 의견에 반대했다.
<얼마 남지 않은 수호자들까지 이곳을 떠난다면 도시는 누가 지킵니까? 지도그라쥬가 이 도시를 보호해 주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세리스마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텐그라쥬에 대한 지도그라쥬의 영향력이 커진다면 차기 대수호자의 자리가 누구에게 돌아갈지는 분명했다. 세리스마는 지도그라쥬의 오라기를 떠올리며 비늘을 부딪쳤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투자하여 이 모든 일을 준비하고 실행해 온 그는 도저히 그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리스마는 단호하게 닐렀다.
<수호자들을 보내지는 않아.>
<그러면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북부에 대해 우리보다 잘 아는 자가 필요해. 우리는 이곳을 떠난 적이 없어. 하지만 지금 이 도시에는 북부에 가 본 나가들이 많이 들어와 있잖아? 그중엔 우리보다 더 나은 생각을 해낼 수 있는 자가 있을 거야.>
보트린은 안도했다. 할 니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쥬어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센 가문에서 태어난 남자인데, 그 가문의 가주 자리를 원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무슨 니름인가?>
<그는 모험가라고 불러야 할 만한 사람입니다.>
보트린은 쥬어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닐렀다. 세리스마는 의아해했다.
<그 녀석은 어떻게 북부를 돌아다닌 거지?>
<군단을 따라다닌 거죠. 나가들로부터 불신자를 지켜주려는 척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즉 나가의 공격이 임박한 장소에서 주로 활동했다는 니름이지요.>
<그렇군. 공격하기 위해 수호 장군들이 기후를 바꿔 놓은 곳이군. 하지만 그러려면 재주가 비상해야겠군.>
<그렇습니다. 군단과 항상 적당한 거리를 두는 재주가 있어야 하지요. 자칫 잘못하면 차가운 지역에 고립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 녀석이 좋겠군. 그렇게 비상한 자라면 뭔가 괜찮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 자를 만나 봐. 보트린.>
<알겠습니다.>
보트린은 세리스마에게 인사한 다음 그의 방에서 물러났다. 계단을 내려오던 보트린은 어느 층계참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심장탑의 특별한 부분이었다. 내려가는 계단과 옆을 번갈아 보며 고민하던 보트린은 결국 몸을 돌렸다.
문 앞에는 두 명의 수련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련자들은 그곳의 책임자를 알아보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보트린은 간단히 화답한 다음 열쇠를 꺼내었다. 잠긴 문을 연 보트린은 안으로 들어가 빗장을 질렀다.
방 저편에는 거대한 금속 상자가 차갑게 번득이고 있었다. 카린돌 마케로우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냉동 장치였다. 보트린은 냉동 장치의 한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만 보고서도 그 장치가 이상 없이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했다. 무수한 시간 동안 이미 익숙해진 동작으로 보트린은 일상적인 점검을 시작했다. 냉동 장치의 냉기가 새는 부분이 없는지 조사하는 것은 나가의 눈에는 간단한 일이었다. 줄어든 약품을 보충하고 모든 것이 정상임을 확인하자 점검은 완료되었다.
하지만 보트린은 점검이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돌려 빗장을 확인한 보트린은 다시 냉동 장치를 바라보았다. 우물거릴 시간은 없었다. 밖에서 지키고 있는 수련자들은 일상적인 점검에 필요한 시간을 잘 알고 있었다. 보트린은 결심을 굳히고는 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걸려 있는 털옷을 걸친 보트린은 다시 냉동 장치로 돌아가 그 문을 붙잡았다. 그리고 주저 없이 열었다.
냉기가 그를 엄습했다. 보트린은 털옷을 단단히 여미면서 어두운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점차 윤곽과 빛깔이 뚜렷해졌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경험한 일이었지만 보트린은 언제나처럼 흥분과 긴장을 느꼈다.
보트린은 자신의 신부를 바라보았다.
‘왜 그들은 여신을 민감하게 느끼는 내 능력을 단지 쓸모 있는 능력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도 이 분의 신랑들인 걸!’
보트린은 왜 그런지 알고 있었다. 신랑이니 신부니 하고 니르지만, 그것은 나가의 세계와 무관한 명칭이었다. 그들의 세계에는 남녀의 항구적인 결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트린은 공상에 빠져들었다. 불신자들의 풍습인 결혼이 그 공상의 주된 내용이었다. 결혼.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 보트린은 나가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이국적인 풍습에 자신과 여신을 대입했다. 어처구니 없지만, 그렇기에 매혹적인 상상이었다. 그는 여신을 느꼈다. 그랬기에 여신을 동정했다.
그는 여신을 사랑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은 보트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냉동 장치 안의 냉기가 희미해져 있었다. 보트린은 황급히 문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것을 닫는 대신 보트린은 멍한 표정으로 카린돌 마케로우를 바라보았다. 냉기가 사라지자 그 모습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그 눈꺼풀은 금방이라도 열려 보트린을 바라볼 것 같았다.
가까스로 보트린은 문을 닫았다.
뒤로 물러나 털옷을 벗으면서 보트린은 비늘을 곤두세웠다. 채 가시지 않은 흥분과 공상의 즐거움, 그리고 다음 번에는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텐그라쥬 외곽의 공터에서, 쥬어의 의용군들은 한자리에 모여 앉아 자신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해 고민했다. 처음 자신들이 마호가니 군단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북부의 경험이 풍부한 그 자들은 군단과 그들의 행동에 커다란 차이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굳이 차이를 둔다면 군단은 불신자들을 죽이고 나서 전리품이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알아보지만 그들은 전리품이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알아본 다음에 죽인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오히려 군단에 편입된다는 사실을 반기기까지 했다. 그 사실을 반기는 자들은 쥬어가 사업을 그만두고 센 가문인지 뭔지를 계승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자들로서, 그런 축들은 군단에 들어갔으니 다시 북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아스는 하텐그라쥬를 떠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들은 이제 동료가 된 군단병들에게 질문을 던졌고 자신들이 하텐그라쥬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어리둥절해졌다. ‘하텐그라쥬를 방어하다니, 지도그라쥬가 쳐들어오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런 추리는 그들을 질겁하게 했다. 마음껏 쳐 죽일 수 있는 불신자들과 나가는 분명히 다른 상대였다. 군단을 따라다녔기에 그들은 수호 장군들의 능력과 군단의 힘을 충분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런 자들을 적으로 두게 된다는 것은 도저히 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한 반응으로서 그들은 쥬어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서로 가는 길이 달라도 함께 했던 나날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다면 그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느냐는 취지의 니름을 전달했다. 떠날 테니 북부에서 얻은 보물을 나눠 달라고 니른 것이다. 하지만 무섭도록 추운 북쪽에 있다가 따뜻한 남쪽으로 돌아오자 정신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인지 쥬어는 그들을 몹시 당혹시키는 대답을 했다. 그들은 탈영하는 자는 사형이라는 니름에 동의했지만 그것이 자신들에게 해당하는 니름이라는 사실은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결국 그들은 실망하고 의기소침해져서 모였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번잡하고 황당한 니름들이 오가는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그들의 니름에 별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누워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의용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의용군의 사업에 별 애정이 없었고, 따라서 군단에 편입되는 것에도 별다른 거부감은 없는 듯했다. 의용군들은 그들도 논의에 포함시켜야 되지 않나 생각했지만 두 사람은 지도그라쥬와 싸우든 누구와 싸우든 배만 끓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무신경한 태도로 다른 자들의 호의를 거부했다. 그들이 태평하게 잠든 모습을 보자 다른 자들은 호의를 베풀 마음도 없어졌다.
만약 그들 중 청력에 주의를 기울인 자가 있었다면 두 사람이 옆으로 돌아누운 채 육성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기묘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는 없었고, 그래서 두 사람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카루. 정말 지도그라쥬가 여길 공격하려는 것일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아. 스바치. 마호가니 군단에는 가장 많은 수호 장군이 있지. 만약 지도그라쥬가 내습한다면 수호 장군들이 절실하게 필요해. 하지만 저 꼴을 봐. 병사들의 숫자도 부족하지만, 무엇보다도 수호 장군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지휘를 맡고 있는 것은 비아스 마케로우였어.”
“제기랄, 비아스라니. 우리를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스바치는 비늘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입 모양이 보이지 않도록 돌아누워 있었지만 비늘이 움직인다면 다른 자들이 의아해할 것이기 때문에 스바치는 자신을 억누르려 애썼다. 쉽지는 않았다. 카루는 우울하게 대답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여신을 해방시켜야지. 이 웃기는 패거리들 덕분에 하텐그라쥬에 돌아오는 데는 성공했어. 이젠 우리가 미루어 두었던 그 마지막 단계를 생각해 봐야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지?”
스바치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약간 떠오른 것이 있어. 만약 이곳에 대한 공격이, 그게 어떤 세력에 의한 공격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공격이 일어난다면 심장탑의 방어가 약해질 거야. 수호자들도 모두 방어에 나설지도 모르니까.”
“그 틈에 심장탑에 잠입한다?”
“바로 그래.”
“그렇다면 여기를 떠나야겠군. 이곳에 계속 있는다면 바로 그 방어에 끌려나가게 될 테니까. 하지만 쥬어가 우리를 떠나게 해 줄까? 그 악독한 녀석은 오랫동안 함께 했던 동료들의 요청도 거절한 것 같은데.”
“몰래 떠나는, 그러니까 도망치는 것은 어떨까? 밀림에 숨어 있다면…….”
“그러면 전투가 벌어졌을 때 잠입하기 쉽지 않을 거야. 그 시점에 우리는 심장탑 가까이에 있어야 해.”
“그렇다면 도시 쪽으로 도망쳐서 아무 가문이나 방문한다면? 여기는 하텐그라쥬야. 이렇게 큰 도시에서 우리가 어느 집을 방문 중인지 어떻게 찾아내겠어?”
카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쉽지 않아. 하텐그라쥬가 지나치게 소란스러워졌어. 사람들은 집 밖으로 너무 자주 나오더군. 우리는 여자들을 호위하기 위해 계속 밖으로 나와야 할걸. 그러면 발각될 가능성이 높지. 출입을 별로 하지 않는 가문을 알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어. 자네 혹시 그런 가문 아나?”
스바치는 특별히 떠오르는 가문이 없다고 대답했다. 카루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그들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잠시 후 카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쥬어에게 비밀을 알려주면 어떨까?”
“비아스가 화리트를 죽였다는 것? 물론 쥬어가 그 비밀을 알면 비아스를 조종하는 데 쓸 수 있으니 좋아하겠지. 하지만 증거가 없어.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이고.”
“아니, 내가 말한 것은 그것이 아냐. 수호자들이 여신을 구속하고 있다는 비밀 말이야.”
“음? 그걸?”
“그래. 우리가 나서서 니르는 것은 소용이 없겠지. 수호자들은 당장 우리를 눌러 죽일 테니까. 하지만 쥬어는 대가문들에게 호의를 얻으려 애쓰고 있어.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기도 하고. 잠깐. 생각 좀 해 보자. 뭔가 계획이 될 것도 같아.”
카루와 스바치는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차츰, 그들의 머릿속에 모호하나마 어떤 계획이 떠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