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3장 – 파국으로의 수령 (3)
까마득한 바위 표면에서 석양이 미끄러졌다.
바위는 거대했다. 억겁의 세월 동안 바람과 비는 바위를 침식했다. 물론 바위의 자존심을 완전히 무너뜨리려면 바람과 비는 지금껏 투자한 시간의 몇 배에 해당하는 시간을 소모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비바람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억겁의 시간 동안 바위를 긁고 쪼고 깨트릴 것이다. 최후의 승자가 자신일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 승자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패배가 그 숙명임에도 불구하고 바위의 자존심은 드높아 보였다. 하늘을 떠받치는 그 오만한 이마는, 언제까지라도 비바람에 맞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선언하는 듯하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위는 그 순간 고고했다.
바위 앞쪽에는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세 그림자가 있었다. 그중 한 그림자의 주인이었던 케이건은 고개를 돌려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었던 티나한은 질문했다.
“왜?”
“당신이 아니라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보고 있었소.”
“이봐, 케, 케이건, 너, 너, 그러니까 말이야! 내 말은!”
“보모와 관련된 농담을 할 생각은 없었소. 티나한.”
케이건이 비형의 악습을 답습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우려했던 티나한은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비형은 왜 갑자기 여신을 쳐다보는 거냐고 질문했다. 케이건은 다시 바위를 돌아보았다.
“저 바위가 보이오?”
티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바위 중간쯤에 음각으로 된 글자들이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억겁의 시간을 존재 포기의 조건으로 삼는 바위와 달리, 바위보다 훨씬 젊은 나이일 것이 분명한 사람의 창조물은 바위보다 훨씬 비참한 모습으로 풍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고인들이 바위에 새겨서라도 전하고 싶었던 뜻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려웠다. 비형이 그 글자들을 읽어 보려 애쓰는 동안 티나한이 말했다.
“그래. 카시다에도 저런 것이 있다고 하던데.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케이건은 약간 짓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봤소.”
“뭐?”
“당신은 카시다를 봤소. 여기가 카시다니까. 그리고 저건 카시다 암각문이고.”
“그럴 리가 있나?”
“동감이오.”
“진짜야?”
“저것이 카시다 암각문이라는 것도, 그리고 동감이라는 것도.”
티나한과 비형은 놀란 표정으로 바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들 또한 도착하려면 몇 달은 걸어 와야 할 곳에 자신들이 서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케이건이 다시 말했다.
“혹 내가 언제부터 걷고 있었는지 기억하시오?”
“예? 무슨 말씀입니까?”
케이건은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최후의 대장간을 출발했을 때 나는 개썰매에 타고 있었소. 그런데 나는 지금 걷고 있소. 개썰매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도대체 내가 언제부터 걷고 있었던 거요? 어처구니없게 들리겠지만, 나는 기억나지 않소.”
비형과 티나한은 질겁했다. 그들은 케이건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들은 황급히 서로의 기억을 대조해 보았다. 그런 대조의 결론은 그들을 경악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이 최후의 대장간을 떠난 것이 얼마 전인지 알 수 없었다. 비형은 황급히 나늬를 찾았고 그의 다리 옆에 앉아 있는 나늬의 모습에 안도했다. 하지만 비형은 언제부터 자신이 나늬에서 내려 걸어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비형은 수화로 나늬에게 질문했지만 나늬의 대답 또한 신통치 않았다. 그들이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최후의 대장간을 떠난 것이 최근의 일이라는 모호한 인상뿐이었다. 그들은 당황했다. 그래서 비형이 내놓은 질문은 다른 두 사람에게 꽤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기가 카시다라면, 우리는 즈믄누리로 가는 길에서 한참 멀어진 거잖아요? 즈믄누리로 가야만 북부군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죠?”
케이건과 티나한은 비형의 미래 지향적인 질문에 잠시 혼란스러워하다가 겨우 그런 질문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케이건은 티나한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현재의 이 기막힌 상황은 여신께서 일으킨 일이라고 믿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여신께서 기침하시면 그때 여쭈어보도록 합시다. 혹 일출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지만, 아무래도 저건 황혼인 것 같으니, 걸음을 멈추고 여기서 잠자리를 폅시다.”
더 나은 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기에 수탐자들은 벼랑 앞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잠자리라고 해봐야 그다지 대단한 것은 없었다. 비형이 도깨비불을 피워놓고 케이건은 방풍복을 꺼내어 몸에 감았다. 그것으로써 하늘을 천장 삼은 훌륭한 침실이 만들어졌다. 그들이 유일하게 신경을 쓴 부분은 강보를 내려놓을 자리였다. 케이건은 나뭇가지를 쌓아놓고 그 위에 풀잎과 이끼를 깔았다. 그리고 티나한은 조심스럽게 강보를 그 위에 내려놓았다. 이로써 사원 또한 완성되었다.
뭔가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티나한은 배낭을 열어 보았고 그 안에 식량이 가득 들어 있음을 발견했다. 티나한은 별로 소비되지 않은 식량을 놓고 볼 때 최후의 대장간을 떠난 것이 그리 오래전이 아님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케이건과 비형은 그 의견에 동의하며 또다시 강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신은 깨어나지 않았다. 그때 케이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기가 먹을 것을 구해 와야겠소.”
“응? 무슨 말이야?”
“시우쇠 님의 경우엔 불덩이로 바뀌었기에 음식이 필요치 않았지만,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 깃든 저 이름 없는 아기는 보통의 레콘 아기잖소. 저 아기가 우리 식량을 먹기는 힘들 것 같소.”
다른 수탐자들은 케이건의 말을 이해했다.
“그럼 어디서 구해 올 거야?”
“예전에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소. 카시다 암각문이 여기 있다면 카시다가 어디쯤 있을지 짐작이 가오. 그곳에 가면 뭔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그러면 모두 함께 가지. 가까운 곳에 도시가 있다면 밖에서 잘 필요는 없잖아.”
케이건은 반대했다.
“아니오. 이곳에 있으시오. 카시다가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소. 기온이 그다지 높지 않은 걸로 보아 이 근처에 나가들이 있을 것 같지는 않소만, 만약 그곳이 전쟁을 경험했다면 당신들에게 위험한 곳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오. 그러니 혼자 다녀오겠소.”
물바다, 혹은 피바다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에 두 사람은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은 그대로 야영지를 떠났다. 그의 확고한 발걸음을 본 수탐자들은 케이건이 근방의 지리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 믿으며, 두 사람은 케이건의 암시를 뇌리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애썼다.
카시다 암각문이 있는 바위에서 2킬로미터쯤 걸어 온 케이건은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케이건은 어렵지 않게 옛 기억 속의 길을 찾아내었다. 케이건은 길을 따라 카시다로 향했다.
얼마 후 카시다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불빛이 없었기에 그것은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다. 케이건은 도시의 불빛이 없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마음속에 새겨 두었다. 그랬기에 케이건은 길 한가운데 쓰러진 인간을 보았을 때 그를 고주망태가 되어 쓰러진 신세 좋은 술꾼이라고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별 감흥 없이 드러난 갈비뼈 위로 넘어갔다.
달이 떠올랐다. 핏내음과 암흑으로 그 불운한 종말을 증거하던 카시다가 오래간만에 나타난 비(非)나가 방문자에게 그 참상을 드러내어 보였다.
염세주의자의 낙원이었다.
부패한 시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가 폐허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케이건은 말뚝에 매달린 시체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 나가들은 약간의 오락을 즐겼던 듯하다. 골목 안쪽에서는 상반신만 남은 시체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죽은 후에도 주장하는 그 숭고한 선언의 정체는 시체의 입 안에서 꿈틀거리는 구더기들이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구더기들의 모습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치아처럼 보였다. 케이건은 가죽이 벗겨진 젊은 처녀의 곁을 지나쳤다. 어쩌면 그녀의 자랑거리였을지도 모르는 그 피부는 지금쯤 사이커 칼집 정도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 재활용 정신이 풍부한 나가는 허물 벗기와 인간의 피부를 벗기는 일의 차이를 고찰하며 지적 흥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케이건은 한 소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소년은, 보통은 장점으로 분류되지 않지만 그 시점의 카시다에서는 장점이라 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케이건은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살아 있는 건 너뿐이냐?”
열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머리는 굳은 피 때문에 기이한 모습으로 뻗쳐 있었고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아직껏 몸에 걸쳐져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드러난 팔다리는 뼈마디가 툭툭 불거져 있었고 살갗에는 피딱지가 잔뜩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케이건은 파헤쳐진 돌무더기를 발견하고는 소년의 상처가 왜 생겼는지 알게 되었다.
아마도 소년의 부모는 땅 속의 은신처에 소년을 숨겼을 것이다. 그 직후 건물이 무너져 은신처의 입구를 뒤덮었다. 나가들이 그런 사실을 알았다 해도 돌무더기를 치우는 수고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긴 시간 동안 은신처에 숨어 있던 소년은 마침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자 돌무더기를 헤치고 나왔다. 나가들은 들어갈 수 없었지만, 굶주림 때문에 깡마른 소년은 돌무더기의 틈을 헤치고 나올 수 있었다.
케이건은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졌다. 하지만 소년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담벼락에 기대어 앉은 자세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 또한 꼼짝도 하지 않았기에 그 눈은 케이건의 무릎을 향해 있었다. 케이건의 말을 들은 기색이 없었다. 케이건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구부렸다.
케이건은 소년의 발 앞에 단검을 내려놓았다.
“사냥을 하겠다는 황당한 생각은 소용없다. 사냥감이 너를 죽일 거다. 자고 있는 난민의 음식을 노려라. 물론 레콘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혼자 있는 자도 안 된다. 그쪽이 쉬울 것 같지만, 별로 그렇지 않다. 도와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필사적으로 덤빈다. 그보다는 가족을 데리고 있는 남자가 좋다. 그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너를 쫓아오지 않을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 있는 자를 노려야 할 때도 있을 거다.”
케이건은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목에 닿았지만 소년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를 찔러라. 깊이 찔러야 된다. 그리고 도망쳐라. 칼을 도로 뽑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깊이 찌른 칼은 뽑기 어려우니 그냥 놓고 도망쳐도 된다. 혹 쫓아온다 해도 얼마 못 가 죽을 거다. 여자들은 죽이지 마라.”
케이건은 신사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와 만날 때까지 살아 있는 여자들이라면 틀림없이 먹을 것을 가지고 있을 거다. 여자들은 항상 그렇지. 가지고 있는 것을 계산하는 좋은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도와주겠다는 식으로 잘 말하면 가진 것 내놓을 거다. 그것들을 챙긴 다음 밤에 도망치면 된다. 간단한 방법이 있으니 굳이 힘들게 죽일 필요는 없다.”
소년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무릎을 펴 일어났다.
“그리고, 명심해라. 세상에 완전히 믿어도 되는 사람은 죽은 사람뿐이다.”
케이건은 몸을 돌렸다. 그때 등 뒤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도 살아 있는데?”
케이건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나?”
대답은 없었다. 케이건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집 두어 채를 지날 때쯤 케이건은 더 이상 소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잠시 후 케이건은 적당한 곳간을 가진 집을 발견했다. 물론 곳간은 비어 있었다. 곡물에 별 관심이 없는 나가들이지만 식용으로 데리고 다니는 동물들을 먹이기 위해 가져간 것이다. 하지만 케이건은 빗자루를 찾아내어 곳간 바닥을 쓸었고 얼마 후 몇 됫박은 되는 낱알을 모을 수 있었다. 케이건은 그것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쥐똥과 썩은 것들을 골라낸 케이건은 그것을 깨끗이 씻은 다음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죽 비슷한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불을 살피던 케이건은 달빛 가득한 마당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발견했다.
“저리 가라.”
케이건의 말을 따르는 대신 소년은 부엌 입구에 섰다. 소년이 쥔 단검이 달빛에 기묘하게 반짝였다. 소년이 말했다.
“저를 데려가 주세요.”
“실습으로는 좋지 않은 시작이다. 우선, 나는 여자가 아니다. 그리고 접근해서 목을 딸 생각이라면 단검은 숨기는 편이 좋다. 무엇보다도, 혼자 있는 상대는 노리지 말라고 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데려가 주세요.”
“싫어.”
“데려가 주지 않으면 여기서 죽어버릴 거예요.”
케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부젓가락으로 아궁이를 헤집었다. 소년이 앙칼지게 외쳤다.
“죽어버릴 거라고요!”
“들었다.”
소년은 침묵했다. 케이건은 일어나 솥 안에 숟가락을 담아 저었다. 한 동안 숟가락이 솥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렸다. 소년이 힘겹게 말했다.
“당신은 평생 죄책감을 느낄 거예요.”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아.”
“그럴 거예요.”
“그렇지 않아. 네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전혀 그렇지 않아. 넌 살아서도 별 볼 일 없는 보통 꼬마야. 그리고 죽은 다음에도 특별한 시체 같은 건 될 수 없어. 별 볼 일 없는 보통 시체가 될 뿐이다.”
“제가, 제가 조금도 특별하지 않다면 단검은 왜 준 거예요!”
“나가의 작품을 망치기 위해서다. 네가 굶어 죽게 되면 그것은 이 도시를 파괴한 나가의 의도를 만족시키는 것이 되겠지. 나는 그런 나가들의 의도에 작은 파괴를 일으킨 것이다.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유다.”
만약 그 자리에 다른 수탐자들이 있었다면 케이건이 언제나처럼 ‘친절하게’ 대답하고 있다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 내용엔 경악했겠지만,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죽이 끓고 있는 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케이건은 소년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당한 그릇을 찾아 죽을 옮겨 담은 케이건은 새끼줄로 그릇 뚜껑을 잘 묶은 다음 허리춤에 매달았다. 마당으로 나왔을 때 케이건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실망하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빈 공간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래. 두 손으로 솥을 쥐면 손이 자유롭지 않게 되지. 좋은 발상이었다.”
대답은 없었다. 케이건은 달빛을 밟으며 그 집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