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4장 – 혈루(血淚)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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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14장 – 혈루(血淚) (7)


대수호자 키베인이 자기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들 중에는 호의적인 것이 별로 없다. 멍청하기 때문에 대수호자가 되었다고 간단히 인정해 버리는 키베인의 성격은, 그러나 자기 혐오나 패배주의 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다. 자칫 그런 경향으로 넘어가버릴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것은 그가 재미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재미를 아는 자는 패배주의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키베인은 갈로텍으로부터 그가 위대하고 현명하고 어쨌든 가로 세로 재어보기도 힘들 만큼 잘났다는 평가를 받게 되자 그런 평가에 도취되는 대신 흥미를 느꼈다. 키베인은 왜 갈로텍이 형용사를 낭비해 가며 스스로도 믿지 않는 사실을 날조해 내려 애쓰는 것인지 정말 궁금했다. 그리고 마침내 갈로텍이 그에게 모든 나가들의 생사여탈권을 주겠다고 닐렀을 때조차 키베인은 그것을 어떻게 쓰겠다는 생각이 아닌, 그것을 왜 주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했다.

대답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갈로텍에게는 대수호자라는 지위에 나가들의 생사여탈권이라는 막강한 권능까지 가진 초월적인 지도자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초월적인 지도자는 막강한 적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 막강한 적은, 초월적인 지도자가 하텐그라쥬 출신이 아니라 지도그라쥬 출신이라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위험한 적이다. 키베인은 거기까지 추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키베인은 갈로텍에게 도대체 어떤 적이 생긴 거냐고 묻는 대신 생각 좀 해보겠다고 닐렀다. 그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갈로텍은 집요하게 달려들었고 그래서 키베인은 신명을 잃은 수호자의 슬픔을 연기해 보여야 했다. 갈로텍은 대수호자가 상실감 때문에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무엇 하나도 제대로 결정하기 힘든 상태라고 판단하고는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갈로텍이 떠나고 나서 키베인은 제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키베인은 심장병의 통제권이라는 것에는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재미를 아는 자는 힘의 노예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베인이 주로 생각한 것은 갈로텍에게 어떤 적이 생긴 것인지, 그리고 왜 갈로텍이 전대 대수호자의 장례식을 주관하고 차기 대수호자의 자리에 오르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둘 다 쉽게 해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었다. 주의력을 잃은 키베인은 멍한 기분 속에서 갈로텍에게 모든 심장병의 통제권을 넘기는 일이 재미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시야 한구석에서 뜨거운 것이 움직였다.

키베인은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 뜨거운 것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키베인은 별 생각 없이 말해 보았다.

“달비 부위?”

뜨거운 것이 방향을 바꿨다. 키베인은 자신의 추측이 맞은 것에 즐거워 했다. 잠시 후 그의 눈앞에 데오늬 달비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대수호자님?”

“예. 왜 그렇게 뛰어다니고 있는 거죠?”

“삭정이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대수호자님. 저희들은 요리를 해야만 먹을 수 있습니다. 대수호자님.”

“아아, 그렇지요. 그런데 삭정이를 모으기 위해 그렇게 뛰어다녀야 합니까?”

“태풍 때문에 나무들이 젖어 있습니다. 대수호자님.”

데오늬는 그 정도면 훌륭한 설명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키베인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생각한 후에야 키베인은 ‘나무들이 젖어 있다. 젖어 있지 않은 나무를 찾으려면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 많이 돌아다니면서도 식사 준비가 늦지 않으려면 달려야 한다.’ 라는 일련의 논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저는 당신이 병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뛰어 다니는 줄 알았습니다.”

“눈을 피한다고 하셨습니까, 대수호자님?”

“어, 당신들이 나무를 태우는 것에 대해 병사들이 싫은 눈치를 주지 않던가요?”

“눈치를 준다고요. 대수호자님?”

키베인은 슬슬 그만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뛰어다니느라 눈치 볼 새도 없나 보다고 생각한 키베인은 손을 내저었다.

“아뇨, 됐습니다. 가보십시오. 방해가 되었군요. 아, 참. 그런데 말입니다.”

“예. 대수호자님.”

키베인은 싱긋 웃었다.

“데오늬 달비. 만약 당신에게 모든 인간들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든 인간의 목숨을 좌우할 능력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대수호자님?”

“그런 능력이 있다고 치고 그게 손에 들어온다면 어쩌시겠냐는 질문입니다.”

데오늬는 고개를 왼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잠시 후 데오늬는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대답을 기다리던 키보렌의 대수호자는, 데오늬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기우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데오늬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어 말했다.

“그건 죽은 자를 살아나게도 할 수 있는 능력입니까, 대수호자님?”

“아니요. 제가 말을 잘못했군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자를 간단히 죽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해야겠군요.”

“그렇다면 아무 쓸모가 없는 능력이군요, 대수호자님?”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만, 음. 달비 부위. 그런 능력이 있다면 당신을 해치려는 자를 먼저 제거할 수도 있잖습니까?”

데오늬는 자신없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키베인은 약간의 조바심을 느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달비 부위?”

“모르겠습니다. 대수호자님. 누가 저를 해친다면, 제가 죽습니다. 그래서 그를 먼저 해친다면, 그가 죽습니다. 어느 경우에도 한 사람은 죽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고 설득하면, 그러면 아무도 죽지 않습니다.”

데오늬는 자신이 말한 내용에 감동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키베인은 어떻게 병사가 설득이라는 미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글쎄요. 달비 부위. 그러면 좋겠지만, 지금 저와 당신이 참가하고 있는 이 전쟁처럼 사람들의 대립에는 화해나 양보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소망을 품는 거야 얼마든지 가능합니다만 그 소망은 이루어지는 경우 만큼이나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데오늬는 또다시 자신없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키베인은 자신이 무의미한 짓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고민을 같은 나가도 아닌 인간과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키베인은 물러가 보라고 말했다. 데오늬는 인사하고 달려갔다.

홀로 남은 키베인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이 있기는 했다. 키베인은 이제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사모를 깨운 것은 니름이었다. 그랬기에 사모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쉬크톨을 움켜쥐었다. 그녀에게 또다시 니름이 들려왔다.

<대호왕 사모 페이.>

사모는 긴장했다. 대호왕이 곧 사모 페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은 북부군의 수뇌들 뿐이었고 그중에서 니를 줄 아는 자는 륜 페이뿐이다. 하지만 그 니름은 륜의 것이 아니었다. 쉬크톨을 든 채 일어났을 때 사모는 가까스로 그 조건에 해당되는 자를 하나 더 떠올렸다.

<유해의 폭포?>

사모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억시니들의 회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모는 그들에게서 전해져 오는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옛날에는 그런 존재였지.>

<그렇다면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지금은 아니야. 자신을 죽이는 신의 화신께서 나를 바꿔놓았지.>

사모는 뜨거운 피라미드를 바라보았다.

<시우쇠 님이……… 너를 불태운 건가?>

<그래.>

돌아오는 대답에는 슬픔이나 분노 같은 것이 섞여 있지 않았다. 사모는 쉬크톨을 다시 꽂아넣으며 질문했다.

<그런데, 그 사실에 대해 화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군. 괜찮은 거야?>

<나는 괜찮아. 시우쇠 님은 내게 대답해 주셨어.>

<대답? 두억시니가 왜 신을 잃었는지 설명해 주셨다는 건가?>

<응. 하지만 그걸 네게 닐러줄 수는 없어. 시우쇠 님이 그걸 원하지 않으니까. 수수깨비도 그것을 무척 말하고 싶었을 거야. 그러니 그런 괴팍한 장난을 친 것이겠지. 결국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께서 그 어르신을 닥치게 해야 했지.>

사모는 유해의 폭포가 니르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네 니름 중에 내가 모르는 단어들이 섞여 있는데. 수수깨비가 뭐지?>

<수수깨비는 옛날 북부에 살았던 어르신이야. 미안하군. 이제 다시는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아무 이야기나 하게 되었어.>

<다시는 대화할 수 없다고?>

<그래. 시우쇠님이 내게 남겨준 것은 단 한 번의 대화야. 그래서 나는 너를 기다렸어. 그 분이 내가 훔쳐쓰고 있던 것을 모두 가져가셨기 때문에 네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무척 빨리 왔군. 너는 북부군과 시우쇠 님을 뒤쫓아온 건가?>

유해의 폭포가 보내어오는 니름은 여전히 알아듣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중 일부분은 사모를 놀라게 했다. 그래서 사모는 유해의 폭포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질문했다.

<단 한 번의 대화라니, 그게 무슨 니름이지?>

<니름 그대로야. 이 대화가 끝나면 나는 사라질 거야.>

<사라진다고?>

<정확하게 니르면 사라지는 것은 없어.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두억시니는 여전히 남아 있을 거야. 하지만 이 어두운 암흑 속에서 흘러내리며 너와 대화를 나누던 나는 사라질 거야.>

사모는 놀랐다.

<그렇다면 죽는 거잖아?>

〈하긴 그렇군. 사람이 죽어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시체가 남으니까.〉

유해의 폭포는 그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사모는 그렇게 즐거워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군.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면서 죽는 거라면 그 죽음에 대해 슬퍼할 필요는 없겠지. 너는 만족하는 거야?>

되돌아온 대답은 사모를 놀라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오오, 사모 페이. 나는 만족해.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을 만큼 만족해!>

그리고 유해의 폭포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불쌍한 너희들에 대해 미칠 것 같은 동정심을 느껴.>

사모는 잠시 아무 니름도 할 수 없었다.

사모 페이는 불쌍하다는 니름을 다른 자들도 아닌 두억시니에게서 듣는다는 사실에 놀라움밖에 느낄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두억시니는 삶의 모든 기쁨을 박탈당한 자, 생을 아름답게 하는 어떤 규칙조차 구성할 수 없는 자, 신을 잃은 자들이다. 그런 자에게 동정을 받는다는 것은 사모에겐 불쾌함보다 더 큰 놀라움을 선사했다.

꽤 긴 시간의 침묵 다음에 사모는 간신히 닐렀다.

<내 처지를 니르는 거야? 동생과 나를 얽어매고 있는 이 끔찍한 운명? 하지만, 네가 니르는 너희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우리 남매를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물론 너와 네 동생에 대해서도 나는 동정심을 느껴. 네 동생과 네가 제발 행복해지기를 바라. 그리고 너희 남매를 동정하는 것은 세상에 오직 나뿐이지. 아니, 그 대호와 용도 있군. 하지만 그들은 너희들을 동정하지 않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원망해서는 안 돼. 사모 페이. 아, 나는 더 이상 니를 수가 없어. 하지만 모든 사실이 사실로 존재할 수 있게 될 때, 오랫동안 무시되었던 권리가 자신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셋이 하나를 상대하게 될 때, 사모. 너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야. 내가 니른 너희가 누구인지도.>

갑자기 유해의 폭포가 보내오는 니름에 묘한 느낌이 덧붙여졌다. 육성을 사용하는 자들의 표현을 따른다면 숨죽여 속삭이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유해의 폭포는 닐렀다.

<그리고 사모 페이. 그들이 미처 예견하지 못했지만, 그때 너에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할 수 있는 일?>

〈그래. 나는 그것을 닐러주기 위해 기다렸어. 내가 감히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동정심 때문이야. 사모 페이. 언젠가 때가 올 거야. 그때가 오면 너는 알 수 있을 테니 그때가 언제인지는 니르지 않겠어. 다만 그때가 오면 너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해.〉

사모는 그 니름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고?>〉

〈그래. 그걸 알아야 해. 그들은 나를 징벌할까? 그렇지 않을 거야. 나는 사라질 테니. 하지만 이 이상 그들의 일에 참견하는 것도 부당한 일이겠지. 사모 페이. 그 두억시니들은 끝까지 너를 따를 거야. 그리고 너를 보호할 거야. 그 두억시니들은 너희 가엾은 남매에게 주는 내 유산이 될 거야.〉

사모는 유해의 폭포가 ‘그 두억시니들’ 이라고 니른 것에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유해의 폭포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다. ‘나들’이라는 괴상하면서도 묘하게 사실을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제 유해의 폭포는 스물두 명의 두억시니들과 관련이 없어진, 객관적 거리감을 두는 표현을 사용했다. 유해의 폭포는 다시 닐렀다.

<이제 사라져야겠어.>

<사라진다고? 잠깐. 나는 네 니름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이해할 필요는 없어. 나는 오히려 네가 이해할까봐, 멍청한 이성으로 이해할까봐 무서워.>

사모는 더 이상 니를 수 없었다. 참으로 거대한 니름이 그녀를 향해 노도처럼 쏟아져왔다.

<살아가, 제발 살아가!>

거기에 애정이 있었다. 사모는 받아본 적 없는 거대한 애정에 놀랐다. 니름이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애정과 관심이, 그리고 수단이 아닌 목적인 호의가 있었다. 웃음, 즐거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완전한 기쁨. 사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멍청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온통 적셔버리는 환희는 사모마저도 즐거움에 넘치게끔 만들었다. 유해의 폭포는 영원히 사라지지만 그것은 절대로 슬픈 일이 아니었다. 정신적 홍소, 폭소라도 터뜨리고 싶은 기분 좋은 소멸. 유해의 폭포는 마지막으로 농담처럼 닐렀다.

<제발,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는 자를 조심해…………… 하하하!>

사모는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지복에 찬 소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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