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7장 – 독수(毒水) (7)
갈로텍은 그다지 많은 니름을 소비하지 않고서도 의도했던 바 를 성취할 수 있었다. 보라크 군단장과 대나무 군단의 수호 장군 들은 대수호자의 체면을 생각하여 하텐그라쥬 해방 전투를 대수 호자 키베인에게 바치자는 갈로텍의 제안에 쉽게 찬성했다. 그들 은 오히려 갈로텍이 대수호자에게 좋은 예의를 보여준다고 찬사 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갈로텍은 군 단 전체를 서서히 움직이도록 명령했다. 뇌룡공의 경이적인 감각 때문에 병력을 분산시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갈로 텍의 판단이었고, 그래서 대나무 군단은 지금까지 이동해 왔던 것처럼 한데 뭉쳐 하텐그라쥬로 향했다. 급격하게 전투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소드락 복용 시간만 있으면 수호 장군들은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갈로텍은 대충 그 정도로 생각한 다음 자신의 고민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주퀘도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갈로텍.”
”주퀘도. 대금을 듣고 싶은 겁니까?”
”그렇게 해주면 좋겠지. 하지만 용건은 그게 아니야. 네 속에 있는 것의 문제를 좀 이야기하고 싶은데.”
갈로텍은 비늘을 부딪쳤다. 주퀘도는 갈로텍의 입을 이용해 한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표현해도 좀 웃기는 일이 되겠지만 적당한 단어가 없 으니 그냥 되는 대로 말하겠어. 난 지금 강변에 서서 홍수에 떠 내려온 오래된 익사체들을 보는 기분을 느끼고 있어. 난생 처음 보는 것 같은 친구들이 카린돌이라는 홍수 때문에 꾸역꾸역 몰려 나오고 있군. 보통의 경우 스스로도 자신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잠만 자고 있던 친구들이야. 지금 그런 해묵은 군령들이 위로 올라오고 있어. 네가 조금만 아래로 내려온다면 그 자들을 볼 수 있을 거야.”
갈로텍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밀려나온다고요?”
”그래. 밀려나와. 그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표현하기가 어렵 군. 내려와서 카린돌과 이야기 좀 나눠보지 않겠나?”
”저를 죽일 겁니다. 지금 그 여자에게 신경쓸 여유가 없습니 다.”
<도대체 화리트는 뭘 하고 있는 거지.>
”음. 너는 그렇게 쉽게 말하지만, 이 아래의 북새통을 보고나 서도 그렇게 말하긴 어려울걸.”
”이 위까지 올라올 것 같습니까?”
”이 기세가 꺾이지 않는다면, 조만간 그렇게 될 거야.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이 있긴 하지만.”
”그게 뭐죠?”
주퀘도는 손을 움직여 턱을 긁었다. 하지만 비늘의 감촉은 주 퀘도를 별로 만족시키지 못했고 그래서 주퀘도는 손을 도로 내려 놓았다.
”이미 말했지? 해묵은 군령들이 위로 올라오고 있다고. 그런 영들조차도 별 어려움없이 위로 올라오고 있어. 그런데 카린돌은 올라오는 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어. 네 말대로 화리트가 그녀 를 억제하고 있나봐.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말했듯이 고무적인 사실이지. 하지만 바꿔말한다면 화리트의 억제조차도 이제 거의 효력이 다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해.”
”언제쯤이면 앞으로 나올 수 있겠습니까?”
”몇 달 뒤? 며칠 뒤? 그렇지 않으면 몇 분 후? 이봐. 나는 이 런 것 들어본 적도 없어.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군.”
”혹 화리트는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아, 그래. 화리트는 올라오지 않았어. 카린돌을 억제하려면 저 아래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군. 쳇. 끼워맞추는 식의 가설들뿐이로군.”
갈로텍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이 분노인지 우울인지 공포인 지조차 알 수 없었다. 카린돌은 그를 죽이겠다고 선언했고 갈로 텍은 그 선언의 진실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화리트의 표 현처럼 거대한 증오나 거대한 분노처럼 결국 카린돌이 겉으로 드 러나게 된다면 그녀는 기필코 갈로텍을 죽일 것이다.
문득 갈로텍은 피로감을 느꼈다. 전쟁은 분명히 그 끝을 보이고 있었고 그를 대신하여 전후의 나가들을 이끌 사람 또한 정해 둔 상태에서, 이제야말로 완전히 병탄된 북부에서 세페린의 살해자를 찾아나설 수 있게 된 상황에 서 갈로텍은 내면의 문제에 시름하고 있는 자신을 용납하기 어려 웠다.
‘내 속에 너를 담고 싶었다. 그래서 그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 였다.’
오래 전, 샤나가가 달 뒤로 숨는 날, 적출식을 끝내고 허탈감 에 괴로워하다가 다른 대부분의 청년들이 취하는 행동을 그대로 모방했던 한 수련자가 있었다. 고향을 떠나 방랑을 시작하는 것 은 적출식을 끝낸 나가 청년들의 의식 같은 것이다. 비록 그 방 랑이 그대로 인생이 되어버리는 다른 청년들과 달리 고향으로 돌 아와 수호자의 길을 걷게 된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수련자 들 또한 그 의식에 동참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저 화 리트 마케로우 또한 그런 방랑을 떠나는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 갈로텍은 그렇게 다른 청년들과 함께 하텐그라쥬를 떠났다. 하지 만 그의 상실감은 단순히 자신의 몸 속에 있다가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된 어떤 장기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누이와의 연결 을 완전히 잃었음을 알게 되었다. 지나치게 오랜 방랑 끝에 마침 내 한계선 근처까지 도달하게 된 갈로텍은 그곳에서 얼어죽어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무계획하게 방랑했다. 하지만 동사의 운명 대신 그는 한 늙은 군령자를 만났다. 그 군령자는 한계선 지대를 이용하는 무뢰배의 일원이었고, 어떻게 보더라도 변변 찮은 인물이었다. 그를 뒤쫓는 자를 피하기 위해 남쪽으로 지나 치게 많이 내려올 만큼. 하지만 추적자들을 완전히 따돌리는 것 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 늙은 군령자가 내놓은 제안은 갈로텍에게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그래. 나는 나 자신을 너의 신전으로 꾸미고 너를 모시고 싶 었다. 그러나 지금 그 신전은 어중이떠중이들의 굴혈이 되었고,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무서운 괴물이 몸부림치고 있구나. 그 것이 나 갈로텍이다. 이보다 근사한 희극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갈로텍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갈로텍은 나가 살육자를 떠올렸다. 그것은 언제나 그의 가슴 속에서 분노 의 불길을 지필 수 있는 마법의 이름이었다. 갈로텍은 이를 악물 며 말했다.
”일단은 화리트를 믿고 내버려둡시다. 적당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그러면 너는 뜻밖의 순간에 죽을지도 몰라.”
갈로텍은 난폭하게 말했다.
”그러면 당신들에게는 곤란하겠군요.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전령 도 못할 테니.”
”전령하지 마.”
”예?”
”이 짓은 이제 그만둬야 해. 다른 녀석들이 들을지도 모르겠지 만, 상관없어. 나는 더 이상의 전령에 찬성하지 않아. 만일 네가 위험에 처하면, 너를 도우려고 애쓰겠지만 전령하려고 애쓰지는 않을 거야.”
”유료 도로당에게 복수했기 때문입니까?”
”천만에! 네녀석은 나를 다시 유료 도로당에게 데려다줘야 해. 나는 그들에게 사과해야 하니까. 이미 말했지 않나? 그것은 잘못 된 일이었어. 그리고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지금 사과하고 싶다. 다시 그들에게 사과하기 위해 이 몸에서 저 몸으 로 떠돌며 수백 년을 보내지는 않겠어. 그건 이중의 기만이야.”
”주퀘도.”
”함께 북부로 가자.”
”예?”
주퀘도는 활기차게 말했다.
”카린돌이 너를 장악하려 한다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어. 우 리 둘이서 그 여자를 눌러버리자고! 그리고 함께 북부로 돌아가 자. 전쟁도 곧 끝날 것 같으니 이제 우리 일이나 하자. 너는 네 목적을 위해, 그리고 나는 유료 도로당에게 사과하기 위해서 북 부로 가자. 두 사람이 있어도 식사는 한끼만 해도 되니 우린 싸 울 일이 없는 길동무가 될 거야.”
”길동무요?”
”많이 격상시켜준 거다. 원래는 그냥 전속 악사라고 말하려고 했다. 대금은 꼭 챙겨라!”
갈로텍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신의 웃음에 놀라 더 크 게 웃었다. 주위의 병사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갈로 텍은 신경쓰지 않은 채 말했다.
”예. 주퀘도. 북부로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