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8장 – 천지척사(天地擲柶)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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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18장 – 천지척사(天地擲柶) (3)


대호의 발이 힘차게 바위를 박찼다. 무너진 계곡의 틈을 이리 저리 달리던 대호는 다시 힘껏 발을 굴러 낭떠러지 위로 뛰어올 랐다. 계곡과 숲은 대호의 배 아래로 쑥 내려갔고 잠깐 동안 대 호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굉장한 소리와 함께 땅에 발을 디딘 대호는 다시 숲을 가로질러 달렸다.

시모그라쥬를 떠난 지 다섯 시간, 대호는 날짐승들이나 어림할 수 있는 거리를 맹렬하게 주파하고 있었다. 마루나래라는 이름의 대호는 지난 1년 가까이 땅을 제대로 밟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마루나래의 질주는 마치 분풀이처럼 보였다. 키보렌의 짐승들은 이 경이적인 광경에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마루나래가 달리는 방향을 따라 온갖 새들이 날아오르고 원숭이들이 끔찍한 불협화 음을 내질렀다. 제각기 가진 재주에 따라 나무 위로, 굴 속으로, 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으니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다.

거대한 나비 무리를 만난 마루나래는 주저없이 그 속으로 뛰어 들었다. 수십만 마리의 나비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광경 은 눈(雪)을 모르는 이 땅이 상상만으로 만들어낸 폭설 같다. 거꾸로 내리는 휘황한 빛깔의 눈 속을 헤치며, 마루나래는 비 행이라 표현하는 것이 어울리는 속도로 질주했다.

마루나래의 등 위에는 두 명의 나가가 앉아 있다. 한 명은 매 우 어린 나가였고 마루나래의 털을 꼭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어 린 나가가 나가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더 큰 나가가 등 뒤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큰 쪽은 한 손만으로 대호의 털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어린 나가를 감싸안고 있었다. 그 동작은 매우 능숙해 보였다.

나가답게 그들은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 구애되지 않은 채 대화 를 나눌 수 있었다. 더 큰 쪽이 닐렀다.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괜찮니?>

<괜찮아>

<그렇게 보이지 않아. 그리미. 며칠만 기다렸으면 편안히 올 수 있었을 텐데.〉

<며칠 후에 내가 뭘 원할지는 몰라. 하지만 오늘 나는 거기에 가길 원해. 사모.〉

사모 페이는 아이답지 않은 그리미 마케로우의 대답에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 다른 니름을 떠올리기도 전 에 목적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앞쪽으로 경이적인 장관이 떠올랐다.

그것은 일견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처럼 보였다.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고 가공할 위력으로 꿈틀대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든든한 기둥 같은 안정감이 있었다. 200미터를 훌쩍 넘는 거대한 회오리 바람. 5년 전에 발생한 이후로 그 바람은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도 않았다. 눈에 익은 모습이었 지만 사모는 다시 가슴 한 구석에 밀어닥치는 청량함을 느꼈다. 사모는 그리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미는 아무런 니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생 처음 보는 그 모습에 그리미가 놀란 것은 분명했다. 그것은 그리미가 가진 것 같은 지성에게도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장관이었다. 그리미 가 한참 후에야 관심 없다는 투로 니른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저게 그건가 보군. 못 알아볼 리는 없겠는데.>

사모는 속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다른 것과 착각할 일은 없지.〉

그리미는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어쨌든 그녀는 다섯 살 이다.

<저기부터 가봐.〉

<그럴까.〉

사모는 마루나래에게 개념을 전달했다. 마루나래는 탐탁치 않 다는 반응을 보내어왔지만 그녀의 의도를 따라 움직였다. 회오리 를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던 그리미는 서서히 느려진 마루나래 의 속도를 느끼지 못했다. 회오리의 모습이 거대해질수록 그리미 의 작은 몸에서 비늘이 일어났다. 마침내 마루나래가 걸음을 멈 추었다. 사모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미가 마루나래의 정지를 깨달은 것은 그 일이 일어나고도 한참 후였다. 그리미는 고개를 돌려 사모를 바라보았다.

<더 가까이 안 가?>

<더 가면 위험해.>

그리미는 바닥의 풀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좀더 가까이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저길 봐. 거의 몇 백미 터 앞까지 풀들이 조금도 흔들리지……………. >

<아니. 여기서는 마루나래의 판단을 따라야 해. 그리미.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몇 걸음 더 걸어가면 갑자기 몸이 휙 끌려갈 수도 있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바람의 미세한 흐름에 영 향을 주기 때문이야. 저 풀들은 오래 전부터 균형을 이루었기에 저렇게 평온하게 있을 수 있는 거야. >

<내려줘.>

마루나래는 바닥에 엎드렸다. 먼저 내려선 사모는 그리미가 땅 을 디딜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미는 니름 없이 회오리를 바 라보았다.

사모는 어쩔 수 없이 스며드는 애수를 피하기 위해 주위로 시 선을 돌렸다. 5년이 지난 지금 하텐그라쥬를 이루고 있던 대부분 의 물체들은 기묘한 모양으로 변해 있었고 번식력 강한 식물들이 그 위를 그물처럼 뒤덮어 하텐그라쥬의 모습은 초록의 구릉지대 처럼 보였다. 부러진 채 땅에 거꾸로 꽂혀 있는 조각품, 죽은 야 수의 치열 같은 열주들, 넝쿨을 휘감은 채 고고하게 서 있는 기 념탑. 하텐그라쥬의 마지막 모습은 묘하게 두억시니를 닮아 있었 다. 그것은, 바꿔 니르면 아무것도 닮지 않았다는 말과 마찬가지 다. 두억시니에게는 규칙이 없으므로. 하텐그라쥬는 그저 단순한 폐허가 아니었다. 그리미가 닐렀다.

<소리 들어?>

<말했니?>

<아니. 소리 들어봐.>

사모는 그렇게 했다. 끊이지 않는 웅웅거림이 들려왔다. 대폭포의 굉음이나 우레의 포효조차 비교되기 어려울 강력한 소리가 들려왔다. 회오리에서 흘러나오는 그 엄청난 소리는 내재 된 파괴적인 힘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시모그라쥬에 주재 하고 있는 데오늬 달비 대사의 중요 임무 중 하나는 그 회오리의 동향을 보고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모는 그 회오리가 조금도 약화 되지 않은 채 다가오는 정신나간 동물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있다는 보고를 줄기차게 받을 수 있었다. 그리미가 닐렀다.

<저 안에 부서진 심장탑이 있다고?>

<그래. 아마 지금도 남아 있을 거야.>

<사모가 살아 있으니까?>

사모는 어쩔 수 없이 회오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살아있으니까.〉

<아무도 저긴 들어갈 수 없겠군.〉

<티나한이 몸에 쇠사슬을 스무 개 연결하고 도전했지만 거의 죽을 뻔한 다음 가까스로 빠져나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 그 엄청난 무게에도 불구하고 티나한은 위로 떠올랐고 스무 가닥의 쇠사슬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불꽃을 튀기며 팽팽하게 잡 아당겨졌지. 티나한이 쇠사슬을 팔뚝과 발목에 감으며 땅으로 도 로 내려온 직후 쇠사슬들은 박살나며 부서졌어. 그래. 아무도 저 기에 다가갈 수 없어.>

<그렇다면, 그 누구도 심장 파괴를 사용해서 사모를 죽일 수는 없는 것이군.〉

사모는 누가 그리미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준 것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미는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케이건 드라카는 언제나 아라짓 전사였지.〉

회오리가 삼 개월 동안이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보고를 들 은 직후, 그 보고를 들은 라수 규리하는 자신의 환상벽과 대화를 나눈 다음 결론을 내렸다. 최후의 아라짓 전사 케이건 드라카는 그의 왕이 가진 유일한 약점을 봉인해 버린 것이다.

<그 케이건 드라카라는 아저씨, 한번 만나보고 싶어. 모든 사람 들이 그 아저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언제나 그 사람들이 평소 에 보여주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야기한단 니름이야.>

<다른 모습?>

<그 점잖은 괄하이드는 케이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젊은 망나 니가 된 것처럼 기운차게 이야기하지.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르는 라수는 케이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잘 모르겠다는 투로 이야기하 고. 그 정도만 해도 놀랍지만, 우수에 젖은 눈으로 이야기하던 티나한의 모습은 비늘이 빠질 정도로 충격적이었어.〉

사모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감상적이라는 평가에 격분해 버릴 티나한이지만 케이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그는 그런 혐의 를 벗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리미가 닐렀다.

<이제, 거기로 가봐.>

<가까우니 걸어가도록 하지.>

그리미는 동의했다. 사모는 마루나래에게 뒤를 따라오도록 한 다음 그리미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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