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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7화


동천은 순간적으로 눈앞의 녀석이 독종이라는 것을 알았다. 옛날에 이런류의 독종과 한바탕 치고받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상대에게 뒷다리를 물렸던 동천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에 몸서리를 쳤다.

‘저 새끼를 보니까, 그 개새끼가 떠오른다… 그 새끼는 개새끼도 아닌데 나의 다리를 깨물고 안 놓아줬다. 그래서 나도 그 새끼를 깨물었지만 결국에 항복한 것은 나였다… 그러나 나는 웃으며 걸어가는 그 새끼의 뒤통수를 짱돌로 후려갈겼다. 결국, 최후의 웃는 자는 나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뭣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아하? 도연이 저 자식 때문이구나? 응? 으으으… 이 새끼 눈깔을 치켜뜬 게 드럽게 무섭네? 저 자식. 돌아버리면 신분을 안 가리고 덤빌지 모르니까…’

생각을 마친 동천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래, 다 때렸다. 거기서 잠시 쉬어라.”

그 말을 끝으로 동천은 아까 판 곳까지 가서 곡괭이를 들고 돌아서서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도연은 입을 악다물고 힘이 빠져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다잡았다. 이 정도로 얻어맞고 쓰러진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동천의 판단은 주효했다고 볼 수가 있었다. 자존심이 유난히도 강했던 도연은 이런 일을 예상하고 언제나 가슴속에 작은 단도를 넣고 다녔기 때문에 동천이 더 때렸다면 어떻게 됐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이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동천은 땅을 파면서 투덜대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길… 무슨 놈의 무공 수련이 이따위야? 아직, 기초 체력 훈련이라고 했으니까 내가 참는다… 만약에 나중에도 이따위기만 해봐라.. 사부고 뭐고 다 엎은 다음에 도망쳐 버릴 테다…’

궁시렁대며 땅을 파던 동천은 몇 번 쉬어가며 겨우 왕복 일 회를 마쳤다. 처음의 중노동이라 팔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아주 죽을 맛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동천은 이젠 도연이 뭐라 하던 꼼짝달싹 못 할 것 같았다.

“헉.. 헉… 나아.. 나 더 이상은 못하겠어에… 헥헥…”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동천은 자신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생기자 의아해하며 눈을 떴다.

“뭐야? 헉헉…”

“물입니다. 드십시오.”

그 말에 동천은 입맛을 다시며 얼른 일어났다. 도연이 들고 있던 사발을 뺏어든 동천은 허겁지겁 물을 들이켰다.

“꿀꺽.. 꿀꺽.. 크-어… 후우.. 이제야 살 것 같네..”

“다 드셨습니까?”

동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 때문이었다.

“다 드셨다. 어쩔래?”

동천이 먹고 바닥에 던져버린 사발을 주워든 도연은 허리를 필 때 잠깐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을 고쳤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동천.) 벌써 뻗어버렸겠지만 그걸 인내심으로 참아내는 도연의 의지력은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조금 더 쉬시다가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 물수건을 가져올 때까지 쉬어 계십시오.”

도연이 다리를 약간씩 절뚝거리며 뒷마당을 꺾어 나가자 동천은 투덜거리며 다시 자빠졌다.

“에이.. 지가 내 사부야.. 뭐야? 이래라저래라하게..”


한 아이가 뜰에 쪼그리고 앉아서 눈앞의 아름다운 꽃들을 천천히 감상하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눈빛이었다. 그때, 뒤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떨어지더니 서서히 일어났다. 아름다운 중년 초입의 여인… 그녀는 아이의 뒤에서 그 아이가 하는 짓을 잠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주 차가운 음성이었다.

“소량.. 또 여기에 있구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란 소량은 얼른 일어서서 멋쩍은 듯이 웃었다.

“헤헤.. 그렇게 됐어요. 마유(麻誘).”

소량의 환한 웃음에도 불구하고 마유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웃었던 소량은 무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마유의 이런 모습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지만 아직 익숙해지지 못해서인지 마유의 앞에서는 언제나 수줍어했다.

“그런 꽃들을 봐서 어쩌자는 거지?”

소량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꽃들이라뇨? 얼마나 아름다워요. 전 이 꽃들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는걸요. 마치..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아 보인다는 말을 하려던 소량은 어두운 안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소량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지만 마유는 굳이 위로해주려 하지 않았다. 마도의 법칙은 비정(非情).. 오히려 방금 전보다 더욱더 싸늘하게 말했다.

“넌, 그렇게 감상적이어서는 안된다. 네가 아무리 자미성(紫微星)의 아이라고 할지라도 혈사교는 마음이 나약한 존재는 용납해주지 않아. 그건.. 내가 너를 처음 데려올 때 얘기해준 말이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겠지?”

장소량(張少亮)은 아직도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어요….”

그제서야 처음으로 마유의 눈가에 작은 눈웃음이 퍼져 나갔다.

“가자. 다른 아이들이 너를 기다린다.”

소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운 듯이 꽃밭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마유를 따라갔다.


“랄라랄라~! 기분 좋다.. 그 새끼는 잠깐 갖다 온다고 가더니 오지도 않고.. 히히! 이렇게 놀다가 사부님이 물으시면 그 자식 기다리다가 안 와서 다 못했다고 해야지… 우헤헤! 늦게 와라.. 늦게 와라….”

반각이 지나도 물수건 가지러 간다던 도연이 안 오자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처마 끝에서 햇살을 피하며 누워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잠시 동천이 그러고 있을 때, 소연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걸 볼 수가 있었다.

“어? 쟤는 또 여길 왜 와?”

동천이 벌떡! 일어서자 소연은 다급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주인님.. 큰일 났어요.”

소연이 큰일이라고 해봤자 별거 아닌 게 분명했기에 동천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뭐가.. 뭐가 큰일인데?”

“그게요. 두 가지인데.. 첫 번째 걸 들으실래요.. 아니면, 두 번째 걸로 들으실래요?”

“야! 헛소리하지 말고, 첫 번째부터 말해봐.”

이에 소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첫 번째는요. 도… 도.. 도연? 맞나? 하여튼 걔가요. 쓰러져서 지금 누워있다는 거예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좋아서 입을 헤벌쭉.. 벌렸던 동천은 소연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급히 안색을 침울하게 바꾼 후 말했다.

“뭐라고? 이런… 어떻게 그런 일이… 왜 쓰러졌대냐?”

소연은 동천의 갑작스러운 표정의 변화에 의아해했지만 얼른 대답해주었다.

“저는 듣기만 한 건데요. 우물가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끌어 올리다가 갑자기 쓰러졌대요. 그래서 지금 요양실(療養室)에서 누워있다고 들었어요. 가보실래요?”

“히히! 당연하지!”

지금 가면, 곡괭이질을 안 해도 되는데 그걸 마다할 동천이 아니었다. 신이 나서 소연을 끌고 가려던 동천은 아직 한가지 큰일을 못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서있던 동천은 얼른 고개를 돌려 물었다.

“소연아. 근데, 또 다른 큰일이 뭐냐?”

“아..? 그거요? 그건.. 큰일이라는 말보다는요.. 좀 신기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일이거든요?”

신기한 일이라는 말에 동천은 눈을 가늘게 만들면서 물어보았다.

“신기(神奇)한 일? 그게 뭔데?”

소연은 말하기에 앞서 동천의 반응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말을 꺼냈다. 이 얘기는 동천과 깊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인님께서도 아시고.. 또, 저도 알기로는 강시는 주인 말만 듣는다고 했는데.. 맞나요?”

“응? 그.. 그래. 왜?”

“거기에는 주인님의 강시도 포함되는 거죠?”

도연이에 관해 얘기할 때는 아주 빨리 말해주더니, 이번 얘기는 좀 뜸 들이며 말하는 듯한 인상이 주어지자 성질이 급한 동천은 화를 내며 다음 말을 독촉(督促)했다.

“그래! 맞으니까, 뜸 들이지 말고 후딱 얘기해봐!”

동천의 성냄에 소연은 두려워서 다급하게 말했다.

“예예. 근데, 그 강시가 제 말도 듣는 거 있죠? 신기하죠?”

말도 안 되는 소연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동천은 소연의 손이 자신의 눈앞에서 흔들리게 보이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뭐.. 뭐야? 화정이가 네 말을 듣는다고?”

“예? 화정이가 누구예요?”

“에이씨.. 그 강시 이름이야! 잔말 말고 대답이나 해! 걔가 진짜로 네 말을 들었어?”

소연은 진실 어린 눈빛으로 대답했다.

“예. 맞아요. 무섭기는 하지만 주인님의 방에 청소하러 갔을 때, 침대에 앉아서 나를 쳐다보는 게 무서워서 저리 가라고 했더니 그 강시가 진짜로 가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여러 가지 일을 시키니까, 그 강시가 다 따라하지 뭐겠어요? 그런… 앗? 어디 가세요?”

자신의 말을 다 듣다 말고 뛰어가는 동천의 모습에 소연이 놀라 말했지만 당사자인 동천은 그런 말이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에 대하여 머리를 굴리며 뛰어가던 동천은 마침내 자신의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정아! 야! 어디 있어?”

문을 열고 들이닥친 동천은 침대 위에서 누워있는 화정이를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소연이 나오면서 누워있으라고 명령을 했던 것 같았다. 확실히 자신이 아까 나갈 때, 사부님이 왔다고 해서 화정이를 침대에 앉힌 상태에서 나갔었는데 지금 침대에 누워있는 화정이의 모습에 다급함을 느꼈다. 얼른, 화정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 동천은 앞에 멈춰서서 명령했다.

“화정아! 일어나봐!”

그러자 화정이는 침대에 누워서 동천을 바라보다가 침대 위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본 동천은 몸에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에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휴우… 야, 이리 와서 앉아봐.”

화정이가 침대에서 내려와 동천의 앞에 앉자, 화정이를 빤히 쳐다보던 동천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했다. 자신의 말도 듣고… 소연이의 말도 듣는다?

‘그래.. 삼자대면(三者對面)이야.. 그것 밖에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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