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74화
“이 새끼야! 더, 빨리 달리란 말이야!”
맞은 게 기분이 상했는지 도연은 동천을 힐끗! 돌아보았다. 도연은 다시 앞을 쳐다보고는 다리에 힘을 가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뒤에서 다시 동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알겠습니다.”
더 이상 잔소리가 듣기 싫었던 도연은 동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하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 속력으로 달려갔다. 체력이 동천 같지 않아서 얼마 안 가 숨이 가빠왔지만 도연은 알 수 없는 오기(傲氣)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다물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도연의 몸에서는 더 이상의 뜀박질은 위험하다고 계속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헉.. 헉…. 더… 이상은..’
도연이 헐떡이며 걸음을 멈추려고 할 때, 바로 뒤까지 따라온 동천은 인상을 팍팍! 쓰며 소리쳤다.
“그게 아니고.. 이 자식아! 너무, 빠르다고!!!”
도연은 가쁜 숨결을 토해내며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여전히 숨이 가빠왔지만 아까와는 달리 어느 정도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옆구리에서 통증을 호소했지만 도연은 이를 무시했다. 결국, 먼저 포기한 것은 동천이었다.
“야! 헉헉.. 그만 달리자.. 후우.. 이만큼 달렸으면 많이 달린 거니까, 이제 천천히 걸어가도 될 거야…”
도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니 주인이란 인간은 혓바닥을 있는 대로 내밀고는 대자로 뻗어있는 것이 보였다. 도연도 저렇게 눕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신의 몸은 자신의 생각을 따라주지 않았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하늘도 어지러웠다.
‘갑자기.. 왜 이러지…?’
도연은 결국, 자신의 생각대로 동천과 같이 바닥에 누울 수 있었다.
쿵-!
도연이 쓰러지자 헥헥.. 거리던 동천은 놀라서 얼른 도연에게 다가갔다. 도연의 풀어진 눈동자를 바라보던 동천은 따귀를 후려갈기며 소리쳤다.
“어? 야, 임마! 너 왜 이래? 이 자식아! 쓰러지더라도 길은 다 안내해주고 기절해야 하는 거 아냐! 너, 이 자식! 그렇게 책임감이 없으면서 어떻게 이 사회를 살아가려고 그래!”
안 그래도 농땡이를 부려서 늦었는데 안내해줄 도연이 기절해 버리자 다급해진 동천이 계속, 따귀를 때렸지만 의식을 잃어버린 도연이 그렇게 간단하게 깨어날 리가 없었다.
“아휴.. 미친 새끼처럼 달려갈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하도 열받아서 도연에게 주먹질까지 해버린 동천은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도연을 때리다 말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결국에는 문틈 사이에서 조심스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눈동자를 포착할 수 있었다. 그 눈동자는 동천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놀라하는 것 같았다. 연회에서 얼굴을 들이댔으니, 아마 자신을 모르는 인간은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한 동천은 도연의 멱살을 쥔 손에 힘을 풀고는 일어나서 그 의문의 눈동자에게로 걸어갔다.
물론,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기 누구지? 나와 봐..”
동천에게 걸렸다고 생각한 눈동자의 주인공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문을 열고 얍삽하게 웃으면서 걸어 나왔다.
“헤헤.. 제가 소전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방해 됐다고 인상을 쓸까.. 아니면, 괜찮다고 할까.. 고민을 하던 동천은 우선, 상대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고 나서 대처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웃음기 가 감도는 표정을 계속 유지시켰다.
“아니야. 방해가 되기는.. 그럴 리가 있나. 그런데… 어디에 속해 있는 누구지?”
동천이 밝은 얼굴로 말을 걸어오자 사내는 저으기 안심했다. 그는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저는 잠마대(潛魔隊) 외이단(外二團)에 소속된 장평(張坪)이라 합니다. 지금은 간단한 임무를 마치고 쉬고 있는 중입니다.”
한마디로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는 소리에 여태까지 웃고 있던 동천의 얼굴은 험악하게 바뀌었다.
“이 새끼.. 그런 자식이 감히 바쁘신 어른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져? 너, 간덩이가 부었냐? 겨우 외이단의 단원인 주제에 나한테 말을 걸어서 어쩌자는 거야! 죽고 싶어? 안 그래도 열받아 죽겠는데 여기서 칼부림 한번 해봐?”
동천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듣던 장평은 갑자기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죽음(死)…. 안색이 창백해져서 사시나무 떨 듯 심하게 몸을 떨던 장평은 어떻게든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넙죽! 엎드렸다.
“살려주십시오! 제가 미천한 놈이라 감히 바쁘신 소전주님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어떻게든 만회할 기회를 주신다면, 이 몸 분골쇄신(粉骨碎身)하여 불길이라도 뛰어들겠습니다.”
장평이 떨고 있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자신이 넓은 마음으로 봐주기로 했다.
“좋아. 네가 부교주님의 따님이신 사정화 아가씨의 거처를 알고 있다면, 내가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해줄게. 알고 있어?”
모를 리가 없었다. 비록,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미천한 것들이 함부로 돌아다니다가는 황당하게 죽을 수도 있는 일이라 다 알아서 어디로 가면 어디가 나오고, 거기가면 잘못해서 칼침 맞아 죽고, 또, 가서는 안 되는 그 옆길로 가다 보면 똥침 맞아 죽고… 등등. 귀로 듣고 자신이 아는 것을 다른 친구에게 말해주면서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가서는 안 되는 길을 숙지해야 목숨을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살았다는 표정으로 얼른 대답했다.
“예.. 예! 제가 그걸 모를 리가 있나요. 바쁘신 것 같으니 제가 냉큼,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좋아. 앞장서.”
소전주의 명령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안내하려던 장평은 옆에서 쓰러져있는 도연을 쳐다봤다. 그의 눈길에 자연히 동천도 도연을 쳐다보게 되었다. 동천은 냉정했다.
“놔두면 알아서 일어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장평은 미련 없이 시선을 거두고는 굽실거리며 얼른 앞서 나갔다.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어린아이에게 더 이상의 관심은 화를 불러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동천의 재촉으로 걸음을 빨리하며 앞장서 갔던 장평은 사정화의 거처로 가는 길을 애써 떠올렸다.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장평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걸어갔다. 그러나 그의 등줄기에서는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휴.. 이제 이 길만 꺾어가면 사정화 아가씨의 거처가 나올 겁니다. 더 안내해 드릴까요..?”
조심스레 물어보는 장평의 물음에 동천은 그만 가보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여기서부터는 자신도 찾아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평은 고개를 90도 이상으로 숙이고 재빨리 사라졌다.
“으음..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그래.. 나는 최선을 다했어. 내가 늦게 왔다고 뭐라고만 해봐라. 그냥….!”
콧김을 거세게 내뿜으며, 동천은 당당하게 걸어갔다.
딸랑.. 딸랑….
안절부절 동천을 기다리던 수련은 방울 소리가 들려오자 재빠르게 수련동으로 달려갔다. 수련이 들어가보니 사정화는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굳어있는 그녀의 얼굴은 평상시와 그리 다르지 않았으므로 도대체 그녀가 화나있는 건지 아닌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 동천이 좀 늦죠?”
사정화는 고개를 약간, 돌리며 말했다.
“아니…”
아니라는 말에 수련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헤헤.. 기다리시면 곧, 올 거예요.”
“많이 늦어….”
“예?”
수련이 놀라서 되묻자 사정화는 조금 여운을 남기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오면 패줄 거야..”
‘아이고.. 동천은 이제 죽었다. 멍청한 자식.. 내가 그렇게 빨리 오라고 그랬건만… 큰일.. 가만?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호호호! 오히려 잘된 건데? 그래.. 동천아. 조금만 더 늦게 와라. 오호호호!!’
겉으로는 동천을 걱정하는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좋아서 웃고 있는 수련…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천은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어? 아무도 없네? 흠.. 그냥, 갈까?”
안으로 들어온 동천은 아무도 보이질 않자 꿀리는 게 있어서 얼른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인가? 열쇠는 사정화가 쥐고 있었으므로 동천은 입으로만 나불대고 있을 뿐이었다.
“에이.. 씨…..? 누구 있어요?”
‘씨발년들’이라고 나불대려던 동천은 뒤통수가 당기는 느낌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동천의 예상대로 이층에서 컬컬한 목소리와 함께 늙은 노파가 내려왔다. 정원이었다.
“켈켈켈.. 이거, 약왕전의 소전주 아닌가? 켈켈.. 오랜만이군.”
동천은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사정화 다음으로 무서워했던 노파를 까먹고 있었을까…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동천은 자신이 예전의 동천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 후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아.. 그렇네요. 아직도 정정하시네요?”
이 말의 숨은 뜻은 ‘아직도 안 죽었냐?’라는 깊은 뜻이 있었다. 정원은 예의 그 누런 이를 드러내며, 가래 끓는 소리로 웃기만 했다.
“켈켈켈…”
생각 같아서는 쭈그러진 얼굴을 조져 버리고 싶었지만 생각 외로 신분이 높은 정원이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요림(妖林)의 림주(林主)인 요화(妖花) 금요랑(金妖郞)의 사부가 바로 정원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동천은 그때부터 여자에 관한 호기심을 버렸다. 요림주는 대대로 뛰어난 미모와 무공을 바탕으로 림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정원의 얼굴도 예전에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늙어버리자 얼굴이 흉물스럽게 변해서 여자에 대한 환상은 깨진 지 오래였다.
“헤헤.. 아가씨를 뵈러 왔는데 어디 계신 줄 아시나요?”
동천의 물음에 정원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동천이 보기에는 징그러운 미소로 보였다.
“크크.. 가르쳐 주지.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나가서 세 번째 집 끝 쪽으로 돌아서면 작은 꽃밭이 나올 거네. 그 길을 따라서 걸어가다 보면, 작은 소로길이 나오네. 그곳으로 들어가다 보면 다시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가시면 안 돼. 켈켈.. 왼쪽으로 가야 하지. 그렇게 쭉 가다 보면 동굴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는 야채나 과일, 또는 육류를 저장하는 곳이니까 그냥, 지나가고 그 동굴을 바라본 상태에서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정면에 수련동이라는 곳이 나오게 된다네. 거기에 들어가면 여러 길이 나오는데 모두 세 갈래…”
어쩌고 저쩌고, 모두 얘기를 해준 정원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이층으로 올라갔다. 황당한 표정으로 말을 듣던 동천은 정원이 사라지자 밖으로 나와서 중얼거렸다.
“저, 늙은년이 찾아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정원이 해준 말은 찾아가지 말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러나 수련동이라는 곳에 있다는 것은 알았기에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행히도 처음 와서 돌아다닐 때, 안쪽에서 동굴을 본 것 같기에 그쪽으로 걸어갔다.
“거기, 누구 있어요?”
걸어가다가 동굴이 보이길래 목청을 높여본 동천은 곧이어 눈에 들어오는 야채 종류에 여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동천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여기가 아닌가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