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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82화


“사부님! 저게 뭐예요? 예?”

제자가 당황해서 물어오자 역천은 킥킥거렸다. 그러나 제자가 너무도 강력한 눈빛을 보내오기에 할 수 없이 말해주었다.

“뭐긴 뭐냐? 물통이지.”

마침내 동천의 얼굴은 새빨개져 버렸다.

“으으.. 그러니까, 그 물통을 저 녀석이 힘들게 들고 오는 이유가 뭐냐구요!”

역천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으응.. 그거? 한 개당 50근(30kg)이기 때문이다.”

사부의 말에 질린 표정으로 서있던 동천은 곧이어 이상함을 발견하고는 설마 하면서 물어보았다.

“한 개당이라면… 더 있다는 말이예요?”

역천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다. 그럼, 너는 물을 떠올 때 한 개만 가지고 왔다 갔다 하려고 했느냐? 그렇게 하면 비능률적(非能率的)이지 않으냐. 왜 두 손을 내버려 두고 한 손만 쓰려 하느냐. 이 사부는 오로지 능률을 생각해서 두 개를 준비한 거란다.”

“꿀꺽…!”

동천은 할 말이 없어서 말없이 마른침만 삼켰다. 도연이 들고 오는데 표정을 보니 굉장히 무거워하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무거워했다. 도연은 어깨가 빠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겨우 동천의 앞에까지 들고올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쇠에 약간의 녹이 슬어있는 게 좀 을씨년스럽게까지 보였다. 그 물통을 보고 있자니 어떤 이의 한(恨)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하였다. 역천은 그 물통을 보자 웃음을 멈추었다. 감상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간 역천은 시커먼 물통을 주름진 손으로 쓸어내렸다. 역천의 목소리는 나직이 떨려 나왔다.

“종식아….”

동천은 갸웃! 거렸다.

‘종식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서 들었더라? 자… 머리를 굴려보자. 머리를 굴려보자… 길가다가 나한테 맞았던 녀석인가? 아니면, 나한테 맞고 길 가던 녀석인가.. 아니지. 내가 아는 게 아니고 사부가 아는 사람이니까.. 오! 이제야 생각났다. 종식이라면… 죽었다던?’

이름만 알고 얼굴은 당연히 몰랐던 자신의 첫째 사형.. 문제는 그 사형이 죽었다는 데에 있었다. 놀란 눈으로 물통을 바라보았는데 왠 인간이 음침하게 웃으면서 자신에게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순간 온몸이 찌릿! 거렸다.

“으-흑!”

동천이 기겁해서 물러날 때쯤에는 어느새 그 인간은 사라져 버린 후였다. 그런 동천의 목소리 때문에 옛 생각에서 깨어난 역천은 갑작스러운 제자의 반응에 의아해했다.

“제자야.. 왜 그러느냐?”

동천은 두려워하는 얼굴로 물통을 가리켰다.

“저.. 저 물통에서 갑자기 왠 인간이 나타났다 사라졌어요…”

그 말을 듣자 역천은 깜짝 놀라 동천에게 물었다.

“호.. 혹시, 그 인간의 오른쪽 볼에 커다란 사마귀가 나있지 않았더냐?”

동천은 사부의 물음에 그 인간의 생김새를 천재적인 머리로 떠올려 보았다. 다시 그 음침한 얼굴이 생각나서 몸이 떨렸지만 계속 떠올려보니 확실히 오른쪽 볼에 사마귀가 나있었던 것 같았다. 동천은 생각할수록 확실해지는 것 같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확실히 있었어요.”

역천은 동천이 확실하다고 하자 물통을 부여잡고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했다.

“아이고~오! 종식아.. 종식아… 네가, 아직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남아있었구나! 아이고! 아이고!”

동천은 멍하니 서있고 역천은 대성통곡을 하고 있을 때 도연이 나머지 다른 하나의 물통을 들고 왔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가지고 온 도연은 지금 상황을 몰랐기에 물통을 내려놓고 조용히 뒤로 빠졌다. 동천이 찜찜한 마음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는데 도연이 뒤늦게 가져온 물통은 반짝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 사부님. 어째서 하나는 칙칙하고, 다른 하나는 윤기가 나는 거죠? 같은 짝이 아니었어요?”

한참을 울던 역천은 제자의 물음에 그제서야 울음을 멈추었다. 오랜만에 울어서 그런지 눈이 씨뻘겋게 충혈돼 있었다.

“같은 짝이다.”

“예? 그런데 왜 하나만 이래요? 혹시, 장마 때 관리를 잘못해서 녹이 슬었나요?”

역천은 고개를 저었다. 역천은 감싸 안고 있는 칙칙한 물통을 바라보았다.

“그것에 관해서는 이 사부도 신기해하고 있던 현상이었다. 이 사부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이 한쪽 물통에 종식이의 영혼(靈魂)이 깃들어있지 않나.. 본다.”

역천의 말은 이랬다. 예전에 종식이가 두 개의 물통을 들고 우물가에서 물을 떠오다가 어느 날 한쪽 팔을 다쳤단다. 그런데 어찌나 무공 수련에 집착(執着)을 가졌던지 비가 오는 날 한쪽 팔만으로 문제의 그 칙칙하게 된 물통을 들고 물을 뜨러 우물가로 갔다고 한다. 비가 와서 기초 체력장에 물을 채울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여러 번 왕복하던 도중 재수가 없었던지 미끄러져 넘어졌단다. 그런데 한쪽 팔이 성하지 못한 게 주효가 됐는지 바닥을 짚지 못하고 엎어졌는데 하필이면 종식이의 머리가 쇠 물통의 모서리에 부딪혀 그대로 즉사(卽死)했다고 한다. 그 후로 신기하게도 종식이를 죽게 했던 물통은 조금씩 칙칙해지더니 지금처럼 변했다고 한다.

이 말을 끝으로 역천은 조금 활달하게 말했다.

“먼저 간 네 사형이 언제나 너를 지켜줄 것이라 이 사부는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사부의 말을 동천은 달리 해석했다.

‘그게 아니라 얼른 뒈져서 자길 따라오라고 할 거라는 게 맞겠죠…’

아까의 그 사형이라는 인간이 음침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손짓을 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동천이었다. 동천이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다시 역천이 말을 했다.

“자.. 이제 그런 말은 그만두고, 너는 이 두 물통을 들고 나를 따라오너라.”

사부의 말에 찜찜함을 감추지 못하며 물통을 집어 올린 동천은 상체는 올라가는데 자신의 두 팔은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윽! 에이 씨발.. 끄-응차!”

똥 빠지게 힘을 써봤지만 역시, 두 팔은 꿈쩍도 안 했다. 그런 제자의 모습을 멀거니 쳐다본 역천은 고개를 절레 젓더니 다가왔다.

“제자야. 내공을 활용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 말에 동천은 무안한 듯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예? 아하! 히히.. 또 까먹었네요. 야, 도연아. 이리 와서 이것 좀 들어라.”

허리띠를 풀른 동천은 도연을 불러 건네주었다. 도연은 내공이 없어서인지 돌이 들어있는 부분을 만졌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것 같았다. 도연에게 허리띠를 준 동천은 숨을 들이키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온몸에 힘이 가득 차는 게 상쾌함이 느껴졌다. 씨익 웃은 동천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두 물통을 들어 올렸다. 이를 본 역천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리고 도연의 눈은 희미하게 번뜩였다.

“이야.. 역시, 내공이란 좋구나.”

내공의 없음과 있음의 차이를 깨달은 동천은 내공 수련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조금 걸어가자 우물가가 나왔다. 거기에는 몇몇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역천을 보자 얼른 일어나 인사를 했다. 고개를 끄덕여준 역천은 그 우물가를 그냥 지나쳤다.

“어? 사부님! 여기 우물가가 있는데 왜 그냥 지나쳐요?”

여기인 줄 알고 신나서 물통을 내려놓으려던 동천은 자신의 사부가 말없이 지나쳐가자 자연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역천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 우물가는 종식이가 물을 푸던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종식이를 생각하는 마음에 수련의 용도로는 쓰지 않기로 했다. 조금만 더 가면 다른 우물이 나올 테니 거기서 수련을 하자꾸나.”

말이 조금이지 걸어가보니 족히 반각은 되는 것 같았다. 그때쯤에서 동천은 자신의 두 팔이 조금씩 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그 잘난 사형 때문에 동천은 좀 더 먼 곳으로 물을 떠다녀야 할 운명에 처해지게 되었다.

‘으으.. 씨발놈의 인간이 죽어서도 도움이 안 되는구나..’

동천은 속으로 이를 바득! 갈았다. 마침내 또 다른 우물가에 도착한 역천은 동천에게 말했다.

“자.. 여기가 앞으로 네가 물을 떠다녀야 할 곳이니 잘 외워두기 바란다. 아니, 잘 외우지 않아도 무방하다. 네가 다 외울 때까지 도연이가 안내해 줄 것이니까. 어서 물을 퍼올려라.”

동천은 도연도 같이 다닌다는 말에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부 앞이기에 내색 않고 우물로 다가갔다. 꼴에 물이라고 햇살이 비추자 찰랑거리며 반짝였다. 물에 비친 자신을 보고 혀를 내밀어 메롱. 메롱.. 하던 동천은 사부가 뒤에서 왜 그러냐는 말에 얼른 입을 다물고 물을 퍼올렸다.

촤-악! 쿵…!

하나를 퍼올린 동천은 다시 한번 두 번째 물통을 퍼올렸다. 두 번째 것도 퍼올리고 난 동천은 “어떡할까요?”라는 얼굴로 자신의 사부를 보았다. 이에 역천은 “당연히 들고 가야지!”라는 몸짓을 한 뒤 다시 되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으..음! 이거, 생각보다 힘든데?’

수련장으로 거의 다가갔을 때 동천의 생각이었다. 특히, 자신의 왼팔이 더욱 저렸다. 왼팔에 들고 있던 물통은 사형이 머리를 쳐박고 뒈졌다던 그 물통이었다. 그러나 동천은 왼손잡이였기에 어느 정도 참을만했다. 이때, 역천이 말을 꺼냈다.

“자, 어서 물을 뿌려보거라.”

첫 번째 떠온 물이라 동천은 조심스레 물통을 들어 바닥에 부었다.

촤아아아-악—!

물을 붓고 두 번째 물통을 집어 올린 동천은 물을 바닥에 부으려고 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엥?”

없었다. 물이 어느 정도 차있어야 하는데 그 물이 허망하게 땅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었다. 동천은 불안한 마음에 같은 자리에다 다시 물을 부어 제꼈다.

촤아아악–!

“으-윽?”

다시 놀란 동천의 목소리가 들리고… 동천은 황당해하며 옆에 서있는 사부를 바라보았다.

“사부님! 물이 스며들어요.”

이에 관해 역천은 간단히 대답해주었다.

“계속 채우면 안 스며든다.”

아주아주.. 무책임한 말이었다. 즉, 네가 죽어라고 채우면 언젠가는 물이 찰 테니 열심히 해보라는 말이었다. 동천은 절망적인 얼굴로 울상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사부님…!”

“왜!!”

동천이 애원조로 사부를 불렀지만 역천은 의외로 얼굴을 굳히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이에 쫄아버린 동천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말을 꺼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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