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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89화


촤아악–

“아아.. 좋다.”

두 개의 욕통을 준비해서 왼쪽 통에 먼저 들어간 수련은 시원하고 짜릿한 느낌에 절로 입을 벌렸다. 잠시 고개를 뒤로 젖히며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본 수련은 숨을 한껏 들이켜고는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 물속에서 고개를 마구 흔들던 수련은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촤악! 튀어 올랐다.

“푸-하..! 허억. 허억… 호호호!”

수련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연신 웃어댔다. 대충 몸을 손으로 닦고 밖으로 나온 수련은 두 번째 욕통으로 들어갔다. 그 욕통에는 향료를 뿌려서인지 향긋한 난초(蘭草) 냄새가 물에서 풍겨져 나왔다. 수련은 거기에서 본격적으로 목욕을 했다. 목욕을 다 마치고 밖으로 나온 수련은 몸이 가벼워지자 마음까지도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랄랄라… 아이, 시원해.”

기분이 좋아서 수건으로 몸을 닦던 수련은 얼굴을 닦다가 턱 부근을 건드렸는지 살풋이 인상을 찡그렸다. 턱은 많이 까져 있었지만 출혈이 없어서 그런지 아프다는 것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마 알았다면 상처가 남을까 봐 안절부절 못했을 것이 뻔했다. 수련은 서둘러 새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는 복수에 불타는 눈으로 자신의 방을 찾았다. 맨손으로 쥐를 때려잡을 수 없었기에 목검을 가지러 가는 것이다.

“흥, 너 어디 두고 봐라.”

침대 옆에서 목검을 집어 든 수련은 몇 번 휘둘러본 뒤 한껏 냉소를 지었다. 그녀는 방을 빠져나와 다시 이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키익-! 끼이익….

평소에는 들리지도 않았던 계단 어긋나는 소리가 오늘따라 천둥 치듯 들려왔다. 겉으로는 당당한 척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 듯 목검을 쥔 손에는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까 자신의 목이 끼었던 방으로 들어간 수련은 요리조리 고개를 돌리며 목검을 양손에 다잡았다.

“나와라 쥐야.. 나와라 쥐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해서인지 찌린내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 손으로 코를 잡은 수련은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푸드드-득-!

재수 없게 까마귀 한 마리가 창가에 앉아 있다가 놀라 달아났다. 그러나 수련은 그게 무슨 새인지 분간할 여지가 없었다.

“엄마야-!”

갑작스레 날아간 새 때문에 엉덩방아를 찧은 수련은 곧이어 새라는 것을 알자 쪽팔렸는지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투덜거림으로 자신의 쪽팔림을 무마시켰다.

“쳇! 하필이면 거기에 새가 있을게 뭐람…”

뛰는 가슴을 어느 정도 진정시킨 그녀는 옆에 떨어져 있는 목검을 집어서 몸을 일으켰다. 방 한복판에 선 수련은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너무 민감한 자신이 우스웠는지 피식! 웃었다.

“나도 참.. 호호. 쥐가 박쥐도 아닌데…”

수련은 목검으로 자신의 머리를 살짝 내리쳤다. 수련은 바닥에 넙죽 엎드려 가구 밑부분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쥐의 쥐꼬리도 보이질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수련은 자신의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에 경각심을 가졌다.

‘쥐가 없어서 안도하다니… 수련아! 정신 차려! 너는 쥐를 꼭! 잡아야 해!’

수련은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련은 혹시나 해서 다시 둘러본 후 쥐가 없다는 것이 재차 확인되자 처음에 구멍을 보았던 손님용 방으로 갔다. 역시 조심하느라 문을 신중하게 열어젖힌 수련은 끼이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주위를 살폈다. 얼떨결에 생긴 반사행동이었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곧바로 방 중앙에서 멈추었다. 수련은 먼저 주위를 둘러본 후 그다음에 바닥에 엎드렸다. 한 바퀴 둘러본 수련은 또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천정에서 무언가가 수련의 등 뒤로 떨어졌다.

터-엉!

다다다다닥….

“히-익?”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공포를 느낀 수련의 몸은 굳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딱딱딱딱….”

이와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해진 방안을 울려 퍼졌다. 벌어진 입에서는 가느다란 침이 흘러나왔지만 수련은 모르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된 수련은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눈에는 눈물이 넘쳐흘렀다. 거의 문 앞에 도달했을 때 뒤에서 무언가가 다시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다다다다닥….

“꺄-악!”

그 소리에 정신이 든 수련은 나 살려라 하고 방을 뛰쳐나왔다. 뒤에서 찍찍.. 하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도 같았다. 쥐가 맞는 모양이었다. 너무나 무서워서 집 밖까지 뛰쳐나온 수련은 생사(生死)의 와중에서 쥐도 천정을 기어 다닐 수 있다는 한 가지 귀중한 산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쥐 잡아줄 사람을 찾다가 여기로 온 거예요.”

수련이 진지하게 말하고, 소연이 진지하게 들었건만 동천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킬킬거렸다.

“이히히히! 그래.. 고작, 고작 쥐새끼 한 마리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 도망쳐 나왔다고? 히히! 너, 되게 겁쟁이구나?”

수련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이이…!”

동천은 수련의 얼굴이 빨개지자 더욱 놀려댔다.

“메롱! 메롱! 이 겁쟁아! 히히! 자, 화정아. 같이 웃자. 그래.. 옳지! 낄낄낄!”

어지간히 통쾌했던 모양이었다. 수련은 안 그래도 동천이 자기를 놀려서 화가 나는데 옆에 있는 강시까지 웃어대자 더욱더 화가 났다.

“흥! 됐어! 나 갈 테니까 뒷일은 네가 책임져!”

수련은 그 말을 끝으로 휑하니 나가버렸다. 소연은 그런 동생의 행동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동천의 눈치만 보았다. 동천은 수련이 가는 모습을 보고는 코웃음 쳤다.

“치… 흥!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리고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뒷일을 책임지냐? 별 거지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라고 말하려던 동천은 수련이 “뒷일”이라는 말을 던지고 간 부분에 대해서 머리를 굴려 보았다.

‘뒷일? 똥싸는 거? 그게 아닌데.. 뭐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동천은 소연을 불렀다.

“야! 가서 수련 데리고 와. 못 데리고 오면 알아서 하고..”

“예.”

소연은 주인의 명령에 얼른 나갔다. 잠시 후 소연이 혼나긴 싫었는지 투덜대는 수련을 데리고 들어왔다. 수련은 집에 가는 게 무서워서 뭉그적거리다가 언니가 돌아가자고 설득하자, 거부하는 척하다가 마지못해 따라간다는 티를 역력히 내며 들어왔다. 동천은 그 모습에 뭐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수련이 말했다.

“왜 다시 불러? 흥! 뒷일이 걱정돼서 불렀냐?”

수련의 정확한 지적에 뜨끔! 했지만 동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네가 가고 소연이가 하도 쥐를 잡아주자고 쫑알거리길래 그것에 대해 의논해 보려고 너를 데려온 거야.”

수련은 그 말이 정말이냐는 눈빛으로 소연을 바라보았다. 소연은 억지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마.. 맞아! 내가 쥐를 워낙에 잘 잡잖아.. 호호! 그래서 내가 주인님께 쥐를 잡아주자고 말했어.”

언니가 쥐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수련은 미심쩍어하면서도 긍정의 표시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수련은 언니의 말을 믿는다 치고 동천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떤 의논을 하려고 하는데?”

의논(議論)을 한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쥐 잡는 일에 의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에 동천은 이제와서 뻥이었다고 말하기도 뭐해서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다. 생각하는 척하며 손에 턱을 괴고 고개를 숙이던 동천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읽었던 복수혈전이란 책을 보았다. 그 순간 번뜩이는 게 있었다.

“좋았어!”

수련은 동천이 갑자기 소리치자 놀랐지만 하는 짓을 보니 뭔가 좋은 대처 방안을 생각해낸 것 같기에 얼른 물어보았다.

“뭐, 좋은 일을 생각해냈어?”

동천은 씩 웃었다.

“그래.”

“뭔데?”

“후후, 잘 들어. 넌 쥐에게 당했어. 맞지?”

당했다는 말이 어째 이상한 말로 들렸지만 수련은 그 말에 수긍해주었다.

“응.. 맞아.”

“당했으니 당연히 복수를 해야겠고?”

“응.. 그래.”

“복수를 해야겠는데 힘이 모자라지?”

“응.. 맞아.”

“힘이 모자라니 나한테 온 거겠지?”

“응.. 그래.”

“넌 내가 쥐를 잡아주길 바라지?”

“응.. 맞아.”

“난 네 바람에 부응을 해줘야 하고?”

“응.. 그래.”

둘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소연은 더 이상 못 참겠는지 동천이 다시 말하려는 순간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본론으로…”

“야! 이제 다 왔어! 말 끊지 마!”

소연은 찔끔! 해서 얼른 조아렸다.

“예.. 예.”

이를 본 수련이 소리쳤다.

“너 왜 언니한테 소리쳐!”

일을 잘 풀어나가려고 다시 불러줬건만 수련이 자신에게 소리쳐오자 동천은 화가 나서 받아쳤다.

“내 맘이다! 네가 보태준 거 있냐? 응?”

“네가 뭐 잘한 게 있다고 보태주냐? 차라리 지나가는 거지한테 보태줄망정 너한테는 내가 먹던 과자 부스러기도 안 주겠다!”

“뭐라고? 이게..!”

잘 나간다 싶었는데 일이 다시 틀어지는 것 같은 분위기로 흐르자 소연은 울상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말이 점점 거칠어지며 상황이 나쁜 쪽으로만 흐르자 도연이 나서서 수련을 막아섰다.

“그만두시지요. 주인님의 말씀을 마저 들으신 다음에 화를 내셔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수련은 무표정한 도연이 자신을 막아서자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동천에게 꿀리는 인상을 주기 싫어서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동천은 도연이 나서서 자신을 옹호하자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야, 너 왜 그래. 평소에 하던 대로 해 임마.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면 뒈질 때가 가까워진 거라고 강 아저씨가 그랬단 말야.”

동천의 말에 도연은 별말 없이 고개를 까딱! 하고는 자기 자리로 물러났다. 그걸 보고 난 동천은 수련에게 말했다.

“좋아. 결론부터 말할게. 쥐 하나 잡는 것 가지고 굳이 이 몸이 나서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똘마니 하나와 둘을 추천해줄 테니까 그 둘 중에 하나를 데리고 가.”

수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똘마니?”

“그래, 똘마니.”

“그게 누군데?”

동천은 수련의 물음에 손을 들어 검지로 도연을 가리켰다.

“하나..”

그다음 손을 그 옆으로 옮겼다.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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