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92화
수련이 멍청한 표정으로 실없이 웃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소연은 깜짝 놀랐다.
“앗? 수련아!”
그게 고양이가 아닌 줄 뒤늦게 알았던 소연은 수련의 뒤에서 목검을 잡고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동생이 멍청한 건지 아닌지 몰라도 자신이 눈치를 주었건만 비대해서 괴물 같아 보이는 쥐를 신기한 듯이 쳐다봤다. 소연이 말로써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쥐가 갑자기 고개를 드는 바람에 얼어붙어서 말을 건네줄 수 없었다.
아무리 소연이 쥐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해도 이렇게 큰 쥐한테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목검을 쥐어들고 경계 태세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경계를 하는데 갑자기 동생이 헤헤.. 거리기에 놀라서 동생에게 다가갔다. 초점이 풀어진 게 약간 맛이 간 것 같았다. 소연이 소리를 지르자 큰 쥐가 몸을 돌려 그녀들을 바라봤다.
“착한 쥐야.. 그대로 있어. 착하지…”
소연은 한 손으로 동생의 허리를 잡고 천천히 뒤로 끌었다. 그 순간에 맞춰 쥐도 바닥에 내려섰다.
타-닥…!
소연이 그대로 있으라고 했지만 쥐는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머지 한 손으론 목검을 잡고 있던 소연은 목검을 내밀어 쥐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거리를 벌렸다. 소연이 한 걸음 물러서면 쥐가 입을 실룩! 거리며 다가왔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이가 벌어질 리가 없었다. 매 걸음마다 긴장이 아니 될 수 없었다. 뒤로 물러서던 소연은 등에 무엇이 닿기에 살짝 고개를 돌렸다. 벽이었다. 그 순간 쥐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앗?”
놀란 소연은 황급히 목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수련이 거의 안기다시피 하고 있는데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 버티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검은 쥐는 여유롭게 피하고는 문쪽으로 다가가 소연을 노려봤다. 꽤 영악한 놈인 것 같았다. 일이 어려워질 것을 예상한 소연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동생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짜짜짜-짝!
“아윽!”
효과가 있는지 뺨을 감싸 쥐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난 수련은 자신의 볼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련은 눈앞에 언니가 보이자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언니, 여기서 뭐해요? 나 보러 왔어요?”
여태까지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소연은 동생의 행동에 한순간 당황했지만 어디서 부분 기억 상실증이란 얘길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차라리 지금 상황에서는 모르는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행이 수련이 문쪽에 버티고 있는 쥐를 못 본 것 같자 소연은 일이 또 터지기 전에 얼른 사태를 수습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동생에게 다가가 손으로 다짜고짜 동생의 눈을 가렸다.
“아앗! 뭐 하는 거예요?”
수련이 손을 들어 자신의 손을 잡고 내리려고 했다. 다급해진 소연은 아직까지 문 앞에서 버티고 있는 쥐를 눈여겨보면서 소리쳤다.
“가만히 있어! 이게 다 너를 위해서라고!”
자기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느닷없이 자신의 눈을 가리는 언니의 행동을 수련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워낙 언니의 목소리가 다급했기에 올렸던 손을 내리며 투덜거렸다.
“아이~ 참! 뭐 때문에 그래요…”
소연의 목소리는 경직되서 나왔다.
“그대로 가만히 있어.”
언니의 긴장된 목소리에 수련은 영문도 모른 채 같이 긴장하며 눈을 꼭! 감았다. 동생이 생각 외로 말을 잘 듣자 소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러면서도 쥐의 동태를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그 쥐는 상대가 덤빌 생각을 않는다는 걸 느꼈는지 바닥에 엎드려 한가로이 뒷다리로 목 언저리를 긁어댔다. 저런 괴물 같은 쥐새끼를 생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소연은 쥐의 행동 하나하나가 엄청난 압박감으로 느껴졌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눈을 감고 있는 수련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수련은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난 분명히 아침에 청소하고 있었는데…? 거참, 이상하네. 그리고 언니는 어떻게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거지?’
박박.. 박박….!
한참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데 무언가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리자 눈을 감고 있던 수련이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앗? 이게 무슨 소리예요?”
동생이 눈을 뜨자 다급해진 소연은 문가 쪽으로 몸을 움직여 동생의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소리쳤다.
“눈 감어!”
“또? 아휴…”
눈을 떴을 때 언니의 굳은 얼굴을 바라본 수련은 찜찜함을 감추지 못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위험천만했던 순간이 지나가자 소연은 진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재빠르게 문가로 고개를 돌리자 다행히 그 쥐는 소연의 고함에 몸을 일으켰을 뿐 그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소연은 생각했다.
‘아아.. 이래서는 도저히 안되겠어. 뭔가 타개책이 필요한데.. 어쩐다지?’
쥐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으며 머리를 굴리던 소연은 자신이 동생을 업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제일 낫겠다고 결론 지었다. 소연은 동생이 눈을 뜨는 사태를 대비해 자신의 허리천을 풀어 동생의 눈을 싸맸다. 수련은 낯선 감각에 고개를 뒤로 젖혔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언니의 말을 듣고 입을 삐쭉! 거리며 가만히 있었다. 소연은 쥐가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도록 동생의 뒤로 가서 허리천을 묶었다.
다 묶고 난 소연은 앞으로 나서서 등을 보였다.
“자, 업혀!”
“언니. 도대체 왜 그래요. 이유 좀 알자고요.”
“수련아.. 모든 건 잠시 후에 가르쳐 줄 테니까 우선 업히기나 해.”
자신이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던 수련은 언니가 다시 재촉하자 못 이기는 척.. 하고 손을 더듬거리며 언니의 등을 찾아 업혔다.
“꽉 잡아.”
수련은 언니의 말에 안 그래도 세게 감싸고 있던 두 팔을 더욱 세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소연은 조여오는 힘을 느꼈다. 그녀는 동생이 자신의 몸에서 떨어질 염려가 줄어들자 내심 안도했다. 나름대로 쥐 잡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소연은 아무리 커도 쥐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두 손으로 목검을 잡았다. 오른발을 바닥에서 조심스레 떼자 수련의 몸무게 때문에 기우뚱! 했다. 업혀있던 수련도 그것을 느꼈는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그래.. 걱정 마.”
시간을 끌수록 자신만 불리하다고 생각한 소연은 상대에게 겁을 주기 위해 가능한 한 몸짓을 크게 하며 문가로 달려갔다. 아울러 소리도 크게 지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야아-아-아–!”
붕붕! 부-웅!
소연의 야무진 고함 소리와 휘둘러지는 목검이 효력(效力)을 발휘했는지 몰라도 문 앞에 버티고 있던 쥐는 툭! 튀어서 오른쪽으로 피했다. 기회라고 생각한 소연은 밖으로 나가자마자 문짝이 떨어져 나가도록 닫았다.
콰-아앙!
그 소리에 언니의 목을 죽어라고 잡고 있던 수련이 놀랐다.
“앗? 깜짝이야! 언니, 지금 문 닫은 거 맞죠? 그리고 왜 소리는 질렀어요? 예?”
위기가 다 지나갔지만 소연은 방심(放心)하지 않고 동생의 말을 무시한 채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집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 사이에 몇 번 굴러떨어질뻔했지만 행운이 따라서인지 간신히 버티며 내려올 수 있었다. 집 밖으로 나오자 소연은 그제서야 긴장이 풀리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수련은 뭔지 몰라도 다 해결된 것 같자 물어보았다.
“언니.. 이제 눈가리개 풀어도 돼요?”
소연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그래…. 다 끝났어.”
그동안 어지간히도 답답했는지 수련은 언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풀 것도 없이 눈가리개를 잡고 그대로 내렸다.
“푸-하! 살 것 같다.”
눈가리개는 수련의 턱에 잠깐 걸렸다가 사르르 미끄러져 목 언저리로 떨어졌다. 언니에게서 떨어진 수련은 두 팔을 들어 기지개를 한껏 켠 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언니, 그런데 왜 제 눈을 가리고 도망치듯 나왔어요? 그것도 우리 집에서?”
소연은 설명해줄 여력이 없었다. 팔다리는 저절로 후들거렸다. 모든 게 귀찮았다. 그녀는 겨우겨우 일어서서 숨을 조절했다.
“따라와. 내가 가면서 얘기해줄게.”
“어딜 가는데요?”
“주인님께..”
“에… 그러니까, 대가리에 이상이 있다고?”
동천의 무식한 말에 수련이 대들었다.
“야! 그게 아니라 부분 기억 상실증. 이라니까!”
동천은 모르는 척했다. 수련을 보다가 소연에게 눈을 돌렸다.
“에… 그러니까, 그 쥐새끼가 생각 외로 컸다고?”
소연이 대답하려 하자 수련이 먼저 말했다.
“큰 정도가 아니라 살쾡이만 하더래!”
동천은 다시 수련을 무시하고 소연에게 말을 하였다.
“에… 그러니까, 네 힘으로는 부족하다고?”
“너, 죽을래?”
드디어 무시당한 수련의 분노가 극에 달았는지 그녀는 콧김을 씩씩! 거리며 대들 듯이 다가왔다. 동천은 역시, 이를 또 무시하고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옆에서 소연은 무안해했고 수련은 열받아서 계속 조잘댔지만 동천은 고개를 숙이고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오늘 저녁에는 뭘 먹을까…?’
생각을 마친 동천은 수련이 뭐라고 지껄이건 흘러나오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도연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예상대로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이 명령을 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에는 자신이 나가야 한다는 걸 감지한 듯했다.
“아무래도 네가 가야 할 것 같다.”
도연은 군말 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