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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 78화


리오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야룬다 요새에 가깝게 위치한 보르브 마을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들이 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느낌은 `참혹함’이었다. 여기저기에 가축들의 시체가 있었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일행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리오는 자신의 눈을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고 키세레는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서 기도를 올렸다. 여관의 문도 단단히 잠겨있어 일행은 쉴 곳조차 없었다. 일행은 여관 앞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제길, 수도에 가까이 갈수록 이 모양이라니. 진짜 가이라스 왕이 미쳤나?”

리오는 거칠게 내뱉으며 인상을 썼다.

“…물이 없어요.”

“뭐?”

머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마을엔 물이 없어요. 물의 정령이 얘기하는 소리가 저의 귀에는 들리지가 않아요.”

리오는 머셀의 말을 듣고서 손가락으로 땅을 훑어보았다. 흙에 물기가 전혀 없었다. 마치 사막을 연상시켰다.

“진짜군. 물이 하나도 없어. 머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물도 깨끗이 말라버렸을 거야. 이보다 더한 악조건은 없겠지….”

리오는 벌떡 일어나 일행을 뒤로하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요?”

“사람들을 찾아볼게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리오는 마을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가면서 그가 본 것은 굉장히 많은 페가였다. 저절로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조금 더 걸어가니 사람들이 약간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리오는 주저하지 않고 그곳을 향해 뛰어갔다.

“이제… 이 마을도 끝장인가?”

보르브 마을의 촌장인 시완타는 자신의 허연 수염을 쓸어내리며 아직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을 향해 중얼거렸다.

“다 그 빌어먹을 가즈 나이트 때문이에요! 저항군이 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마을의 수맥을 파괴시키다니, 몹쓸 녀석!!”

달려오면서 그 말을 들은 리오는 발을 멈추었다. 무슨 소리인가…?!

“아, 손님이 오셨었군. 어서 오시오 젊은이.”

리오는 얼굴 표정을 펴면서 시완타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이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다고요?”

시완타는 한숨을 쉬며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입술도 말라 있었다.

“한 달 전쯤인가…? 회색의 얼굴을 한 사나이가 이 마을을 찾아왔었소. 그 청년은 마을의 수맥이 어디 있냐고 물은 후 수맥이 있는 장소로 가서 그곳을 마법으로 무참히 파괴해버렸다오. 그 후로 물이 없어진 이 마을은 가축들이 죽어가고 사람들이 몽땅 떠나가 이렇게 폐허가 되어버렸지요. 우물도 거의 말라가는데…. 아무래도 이 마을은 끝장인 것 같소…. 후우….”

“그 녀석은 어디로 갔습니까!”

리오는 촌장에게 소리쳤다. 옆에 서있던 청년이 리오를 막아서려 했지만 촌장은 그 청년을 손으로 제지했다.

“그 가즈 나이트를 아시오…?”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색빛의 얼굴이고 가즈 나이트라고 자신을 밝히는 그 가증스러운 녀석을 결코 잊을 수가 없지요! 아마 제가 예상하고 있는 그 녀석이 확실할 겁니다!”

촌장은 리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살아온 경험에서 오는 건지 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듣기론 야룬다 요새를 입에 올린 것 같구려. 아마 그곳으로 향했을 거요.”

리오는 촌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일행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청년이 촌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니, 선뜻 가르쳐 주실 줄은…?”

촌장은 웃으면서 땅에 내려놓았던 이삿짐을 들었다.

“그 사나이보다 강한 남자일 것 같아서. 후후후….”


물질계의 가즈 나이트는 5인이 존재한다. 지, 수, 화, 풍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네 명 외에 특이하게 무속성을 가지고 있는 리오, 이렇게 구성되어 있지만 서로 알고 지내는 가즈 나이트는 3인뿐, 나머지 둘은 독립적인 행동을 한다.

리오가 말하고 있는 가즈 나이트, 바이론·필브라이트는 제 6의 가즈 나이트로서 인간 중에 뽑힌 인물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가 가즈 나이트로부터 낙오되고 이러한 행동만을 저지르는지는 뒤에 가서 밝혀질 이야기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도 가즈 나이트로서의 힘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리오는 일행을 데리고 급히 마을을 빠져나갔다. 일행은 갑자기 급해진 리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리오, 왜 이러는지 얘기 좀 해 줘요!”

리오는 굳은 표정으로 길을 재촉했다. 클루토의 물음도 듣지 못했을 정도로 리오의 머릿속은 바이론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리오가 정신 차렸을 때는 키세레가 그를 막아섰을 때였다.

“리오!”

리오는 갑자기 자신의 앞을 키세레가 막아서자 움찔하며 멈추어 섰다. 키세레는 화가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얘기 좀 해 줘요. 다짜고짜 우리들을 마을에서 끌어내더니 혼자 씩씩대며 걸어가는 게 어디 있어요!”

리오는 잠시간 멈춰 서서 키세레를 바라보았다. 언젠가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리오는 팔짱을 끼면서 천천히 사정을 설명했다.

“태라트님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어요…. 굶주린 히드라 두 마리를 앞에 풀어놓은 것과 다름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분이 이끄는 군대의 수는 상관이 없어요, 그 녀석이 마음만 내키면 한꺼번에 쓸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좀 흥분했었어요.”

일행은 리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르만이 말했다.

“그럼, 리오 혼자 가세요.”

리오는 놀란 눈으로 아르만을 바라보았다.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아르만은 웃으며 자신의 뜻을 밝혔다.

“제가 알기엔 리오는 우리보다 빨리 갈 수 있잖아요. 오히려 우리는 리오가 가는 것에 방해가 될 뿐이겠지요. 걱정 말아요, 우리는 리오를 항상 믿고 있으니까요. 야룬다 요새 도시에서 리오를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얘기를 들은 머셀, 클루토, 리카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는 약간 주저하다가 결심을 굳힌 듯 그들에게서 돌아섰다.

“…야룬다에서 만나자.”

“잠깐만요.”

키세레는 낮은 음성으로 리오를 불렀다. 그리고 목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리오에게 건네주었다. 언제나 그녀가 만지작거리는 은제 십자가였다.

“…?”

키세레는 다시 돌아섰다.

“설마 그것을 받고도 죽지는 않겠죠….”

얘기를 들은 리오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죽으면 묘지에 걸어 놓아달라고 부탁해 놓을게요. 후후….”

리오는 말을 마친 뒤 곧바로 야룬다 요새 쪽으로 뛰어갔다. 점점 멀어지는 리오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행의 눈은 한결같이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 우리도 야룬다로 떠나자고요.”

아르만은 키세레를 올려보며 빙긋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담긴 미소였다. 키세레도 아르만을 향해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우울함이 섞여 있었다.


기마대가 떠난 다음 날, 지크는 그날 아침도 운동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운동을 할 때만큼은 무명도를 몸에서 떼어 놓는다. 한결 홀가분하다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슈에게 가끔 말한다. 슈는 그 말뜻을 잘 몰랐으나 무명도를 만져보고 난 후에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웬만한 남자는 힘으로도 이길 수 있는 슈였지만 그 무명도만큼은 들지 못했던 것이다. 들지 못하면 뽑을 수도 없는 것, 그래서 누가 훔쳐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 얘기를 얼핏 들은 란지크가 무명도에 도전을 했었다. 그의 힘으로 무명도를 들기란 어렵지 않았으나 지크처럼 한 손으로 자유롭게 휘두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무 위에 올려놓아도 아무 이상이 없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거요? 헤헷, 이 칼의 특성이죠.”

“칼의 특성이요?”

슈는 궁금하다는 듯 물구나무를 서서 운동을 하고 있는 지크에게 물었다.

“그 칼에 담겨있는 장인의 혼 때문이에요. 그 무게는 무생물에겐 영향을 주지 않지만 생물에게는 엄청난 무게로 느껴지지요.”

슈는 알듯 하면서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크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후 호흡을 조절하며 슈를 보았다.

“리오가 이런 말 한 적 없어요?”

“무슨 말이요?”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요.”

슈는 알겠다는 듯 칼에 관해선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조금 후 출발의 호른 소리가 앞열에서 들려왔다. 지크는 재킷을 다시 입으며 앞열로 뛰어갈 채비를 하였다.

“자, 도착해서 만나요. 전 먼저 앞열에 가 있을게요.”

슈는 달려가는 지크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녀도 떠날 준비를 하며 기대에 부풀었다. 태라트를 몇 개월 만에 다시 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왕국도 다시 살아날 거야…. 반드시.”

지금도 영주들의 손에 짓눌리고 있는 말스 왕국의 국민들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혼자 떠나고 싶은 것이 슈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혼자서 태라트를 다시 말스 왕국까지 데리고 간다는 건 가이라스 왕국의 사정상 무리였다.

서서히 출발하고 있는 독립 부대를 따라 슈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이! 소머리 아저씨!”

란지크는 인상을 찌푸린 채 뒤를 돌아다보았다. 지크가 반가운 표정으로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도착 예정 시간이 언제예요?”

란지크는 손으로 눈 위를 가리고 태양의 방향을 보았다.

“음…. 아마도 한 시간 후면 요새가 보일 거야. 병사들의 사기도 그런대로 올려놓았으니 상황이 나쁘진 않겠지. 물론 전투는 예상을 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지크는 뒤를 돌아서 병사들의 모습을 보았다. 다른 때보다 활기 있는 모습이었다. 사기가 매우 올라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손을 턱에 대고서 중얼거렸다.

“흠… 바이나가 앞에서 `재미있는’ 쇼라도 하면 사기가 더 오를 것 같은데….”

“시끄러워 마른 남자.”

바이나가 어느새 마차에서 나와 지크를 보고 있었다. 지크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오, 웬일이지? 오늘은 소리를 안 지르고 말이야.”

“전투를 앞에 두고 미리 흥분해버리면 좋을 게 없잖아. 아, 정찰병으로부터 소식은 왔나요 란지크?”

“아뇨, 아직…. 아, 저기 오는군요.”

정찰 임무를 맡은 병사가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언가에 질겁한 표정 그 자체였다.

“부, 부대장님, 큰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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