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가즈 나이트 – 94화


리오 일행은 선발대보다 훨씬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그들의 임무가 정찰이니 당연했지만…. 가이라스 수도로 가는 길은 소수의 기마대가 전속력으로 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이었다. 게다가 높다란 절벽으로 양쪽이 막혀 있어 대군이 가기란 정말 힘든 길이었다. 반나절이 지날 동안 그리 수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던 리오 일행은 넓적한 바위가 보이자 잠시 그곳에서 쉬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세 명의 남자로만 구성되었다면 쉬지 않고 계속 갔을 것이지만 바이나까지 끼어 있어서 쉴 수밖에 없었다. 쉬지 않고 계속 간다면 수도의 문앞에서 쓰러질 것이 뻔했다.

“귀찮군… 확실히 싸움에 여자란 필요 없어.”

바이칼은 망토로 몸을 둘러싼 채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바이나는 성질대로 바이칼에 덤벼들려고 했지만 지크가 극구 만류한 덕분에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리오는 그런 바이나를 보며 위험하다는 생각을 안 가질 수 없었다. 바이칼의 성격대로면 분명히 바이나 같은 여자는 조각내고도 남을 것이 확실해서였다. 게다가 감정 있는 직업끼리 붙어있으니….

‘위험해… 둘 다.’

리오는 적들보다 이 둘에게 더 신경이 갈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이봐! 여기서 계속 꾸물댈 거야? 빨리 가자구.”

바이나가 다 쉬었다는 듯 얘기하자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리오, 밤이 되어도 계속 걸어갈 거야?”

심심함을 느끼던 지크는 입이라도 달래려는 듯 질문을 했다.

“본대도 수도 전의 어느 곳까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한다고 했어. 우리는 어차피 수도에서나 그들과 합류할 테니까 밤에도 걸어야 할 거야.”

지크는 자신의 앞 머리카락을 감싸 쥐며 투덜댔다.

“젠장, 이 일이 끝나고 이런 데 다시 오나 봐라…. 으, 속 터져.”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서 일행은 아무 장애물을 거치지 않고 수도의 성문이 보이는 계곡의 끝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정찰병 한두 명이 눈에 띄긴 했지만 일행의 손에선 벗어날 수가 없었다. 평지를 사이에 두고서 보이는 거대한 가이라스의 수도를 쳐다보며 리오는 생각했다.

‘수도 외곽에 대한 방어에 자신 있다는 생각인가…. 이전까지 선두 방어 부대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어. 성문 앞까지 정찰해보는 게 좋을 것 같군.’

리오는 바위 돌에 기댄 채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있는 지크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이, 가보자 지크.”

지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으로 돌아 누웠다. 리오는 피식 웃으며 지크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악, 아파 임마! 갈 테니까 놔!!”

지크는 귀를 매만지며 터벅터벅 리오를 따라갔다.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 저항군 군대를 기다리는 장소엔 바이칼과 바이나만이 남게 되었다. 바이칼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등을 기대고 서있을 뿐이었다.

조용한 분위기를 원래 싫어하는 바이나는 바이칼의 등에 장비된 드래곤 슬레이어가 눈에 들어오자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바이칼을 불렀다.

“헤이, 당신! 지크와 리오란 남자에게 들었는데 검술에 능하다면서? 나에게 좀 가르쳐주지 않겠어?”

바이칼은 힐끔 바이나를 보았다. 붉은색의 얼굴은 거칠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목숨은 책임지지 않아.”

바이나는 움찔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살의가 담긴 말투였다.

“서, 설마!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가르쳐줘. 심심해서 그런다구.”

바이칼은 코웃음을 치면서 등을 바위에서 떼었다.

“심심해서라…. 좋아, 심심하지 않게 해주지. 검을 뽑아라.”

바이나는 약간 불길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망설임 없이 드래곤 킬러를 뽑았다.

“잘 가르침 받겠어.”

검을 들고 그냥 서 있기만 한 바이나와는 달리 바이칼은 자세를 취하고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따라하지는 말아, 경험에서 나오는 자세니까.”

바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가 조용해질 무렵, 바이칼의 오른손이 꿈틀 움직였다. 바이나는 사력을 다해서 몸을 옆으로 젖혔다.

팡!

바이나의 목에는 벌써 드래곤 슬레이어가 들어와 있었다. 바이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이봐! 진짜로 하는 거야!”

바이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내가 지금 검을 몇 번이나 휘둘렀나.”

바이나는 정확히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지금의 일격도 눈에 띄지가 않아서였다.

“하, 한 번? 아니 세 번?”

바이칼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바위에 몸을 기대었다.

“넌 역시 나에게 검을 배우는 건 무리야. 하긴, 볼 수 있는 사람도 몇 안 되지만.”

짜작―!

뒤에서 들려온 소음에 바이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뒤에 있던 바위들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지며 땅바닥에 흩어지는 것이었다.

“난 스물여덟 번 휘둘렀다. 첫 번째 일격을 피했기에 목숨은 살려준 거야.”

바이나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앞에서 칼을 휘둘러 보인 사람이 인간 같지가 않아 보였다. 뾰족한 귀도 그렇고….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리오들이 돌아올 때까지 검을 집어넣고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유가 있었군… 젠장.”

리오는 성문 앞을 지키고 있는 거대한 두 개의 물체를 바라보며 거칠게 말했다. 분명 가이라스의 과학력이 만들 수 있는 물체는 아니었다. 지크도 그 물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 저 고릴라들은 뭐지? 6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데… 이 시대에도 저런 인간형 기계 병기들이 있었나?”

지크가 말한 것처럼, 성문을 지키고 있는 황색의 거대한 기계 덩어리들은 고릴라와 같이 다리가 짧고 팔이 긴 형태의 이동식 병기였다. 가슴 부분이 열리며 검은색 코트 차림의 낯선 군인이 나와 입에 담배를 물었다. 따분한 표정들이 섞여있었다. 그들이 쓰고 있는 베레모의 마크를 보고 리오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일이 틀어지게 생겼군… 저 녀석들은 제국군이야.”

“로하가스인가 뭔가 하는 제국 말이야?”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수가 아무리 많아도 저항군에겐 무리겠군… 아마 접근도 못하고 격파될 거야.”

지크는 리오의 말을 들은 후 머리를 몇 번 긁었다.

“그럼 어떻게 해. 총이라도 만들어서 저항군에게 지급하자구?”

리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 우리 손에서 적당히 쓸어버리자구. 열 대면 한 아홉 대쯤….”

지크는 잘됐다는 표정으로 말하며 손을 꺾었다. 관절에서 나는 우두둑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리오는 기겁을 하며 지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 멍청이! 저 녀석들이 음파 탐지 장치를 가졌으면 어떡하려고!”

지크는 피식 웃으며 리오의 뒤를 바라보았다. 리오도 낌새를 채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뒤에서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꼼짝 마라, 저항군 첩자들!!」

리오는 몸을 세우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검은색을 한 기계병의 가슴에서 얼굴을 철가면으로 가린 긴 금발의 사나이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리오와 지크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열 대가 넘는 기계병들이 성문을 통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제길… 일이 커졌는데.”

“재미있게 됐지 뭘.”

둘은 정반대의 얘기를 하면서 각자의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기계병들은 곧바로 둘을 포위했고 둘을 향해 손을 쳐들었다. 검고 긴 막대기가 그곳에서 튀어나왔다. 화약 냄새가 풍겨왔다.

「이곳에 배치된 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이런 성과를 올렸군. 역시 직접 오기를 잘했어. 후후후….」

철가면은 웃으며 자기 기계병의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말소리는 들려왔다.

「무기에 손을 가져가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로하가스 제국 특전대 메탈자켓츠를 그런 구식 무기로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설령 너희들이 마법사라고 해도 말이야….」

그러나 리오는 그 말을 무시하고 디바이너를 천천히 뽑아들었다. 지크는 맨손으로 충분하다는 듯 자신의 가죽 장갑을 더더욱 죄었다.

“시끄럽다. 어차피 우리들에게도 잘된 일이야. 너희들을 찾아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말이야.”

디바이너로 검은색 메탈 자켓을 지적하며 리오가 소리치자, 그곳의 탑승자인 철가면은 화가 난 듯 마이크에 대고 같이 소리쳤다.

「저 녀석들을 넝마로 만들어버려라!! 사격 개시!!!」

메탈 자켓의 손에서 튀어나온 검은색 막대는 그의 명령에 따라 불꽃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얼마쯤 쏘아댔을까… 자신의 메탈 자켓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철가면은 눈을 감으며 허공에 십자를 그었다.

“후훗… 시체를 처리하려면 고생하겠군….”

똑똑.

“음?”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유리 전망창에서 들려오자 철가면은 놀란 표정으로 눈을 떴다. 붉은 재킷을 입고 있는 저항군의 첩자가 빙긋 웃으며 전망창에 노크를 하고 있었다.

“아, 아니?!”

콰아앙―!!

검은색의 메탈 자켓 사령기는 지크의 일격에 성문까지 파편을 날리며 나가떨어졌다. 주먹으로 가격된 부분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장갑이 떨어져 나간 부분에선 스파크가 간간이 일어나고 있었다.

“뭐야∼ 고철 덩이일 뿐이잖아? 사령기라고 해서 강할 줄 알았는데 별것 아니군!”

리오는 이번 싸움은 오랜만에 구경하기로 하고 멀리 떨어졌다.

“잘해봐라, 난 기계하고는 영 취미가 안 맞아서….”

지크는 고맙다는 표정이었다. 양손에 힘을 불끈 쥐자 기전력이 팔을 타고 강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뇌신도 한 수 접어둔다는 지크의 생체 기전력이었다.

“좋아! 하나만 남겨두고 모조리 박살 내주마!!!”

기합성과 함께 지크는 앞에 보이는 메탈 자켓에게 기전력이 담긴 일격을 선사했다. 펀치가 꽂힌 메탈 자켓은 몸 전체가 번개를 맞은 듯 강한 스파크를 뿜어내었다. 외부는 지크가 가격한 곳 한 군데 외엔 외상은 없었지만 내부의 전기적 기관은 모조리 엉망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 안의 탑승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격에 튕기듯이 뒤로 날아간 메탈 자켓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다른 메탈 자켓의 탑승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체의 머리 부분에 장비된 엘리마이트 캐논을 꺼내었다. 형형색색의 엘리마이트 빔이 굉음을 내며 지크에게 쏘아지자 지크는 그 광선을 향해 왼손바닥을 펼쳤다.

“이까짓 음속에 겨우 미치는 광선쯤이야 손으로도 잡을 수 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