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96화
란지크의 외침과 함께 저항군은 함성을 지르며 수도의 외곽으로 돌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항군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가이라스 궁병 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화살은 저항군이 더 빨랐다. 성벽 아래에서 날아오는 화살 때문에 방위군은 제대로 화살을 쏘지 못하였고 성문 아래까지 간단히 돌파당하고 말았다. 힘 좋은 성문 충돌 부대가 가장 단단하다는 가이라스 수도 외곽의 성문에 도전하는 순간이었다. 궁병대는 적들이 돌을 떨어뜨리지 못하도록 화살을 바쁘게 쏘아댔다. 보병 부대는 방위군 화살에 대비해 방패를 우산처럼 사용하였다. 보병대는 함성을 지르며 성문을 뚫고 있는 부대를 응원했고 궁병대는 거의 완벽할 정도로 엄호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 상황이 약간 틀어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성의 또 다른 문에서 출동한 방위군의 기병대가 나타난 것이었다. 상처가 치유된 샤먼이 오랜만에 돌격 기병대를 이끌고 방위군의 기병대와 맞서 싸우기 위해 달려 나갔다. 곧 두 기병대는 충돌하였고 피 튀기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수는 저항군 쪽이 확실히 적었으나 조직력만은 확실해 어렵지 않게 싸울 수 있었다. 샤먼의 애마 스루프도 주인의 기분을 아는 듯, 적군 사이를 가볍게 날아다녔다. 샤먼은 자신의 곡도를 휘두르며 방위군 기마대 대장을 향해 뛰어들었다. 말과 말이 충돌하자 스루프의 힘에 밀린 적 대장의 말이 비틀거렸고 적 대장도 휘청거렸다. 샤먼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곧 비명 소리와 함께 그 대장의 목은 하늘로 날았고 저항군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대장을 잃은 방위군 기마대는 약간의 병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샤먼은 돌격 기마대에게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의 대열로 돌아갔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그의 성격이었다.
기마대의 승리 소식을 들은 보병대는 팔에 힘을 더더욱 가했다. 나중엔 란지크까지 가세해 성문을 두드렸고 성문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반시간이 지나자, 무적을 자랑하던 성문은 결국 부서지고 말았다. 란지크와 중보병 부대는 함성과 함께 성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위군의 궁병 부대가 맨 앞에 뛰어오는 란지크를 향해 활을 날렸지만 란지크의 해머 프레일에 튕겨나가고 말았다. 곧 궁병 부대의 대다수는 해머 프레일에 머리를 내 맡겨야만 했고 그 모습을 본 방위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 기병대 출격! 적군을 섬멸할 기회는 이때다!!!”
로먼은 거대한 깃발을 휘두르며 전 기마대에 명령을 하달했다. 돌격 기병대와 창기병대, 그리고 템플 나이트까지 가세한 이 물결을 막을 만한 방위군은 없었다. 방위군들은 하루아침에 적으로 변한 템플 나이트를 바라보며 머리를 감싸 쥐고 도망쳤다. 역시 템플 나이트란 이름은 거저가 아니었다. 한창 전투가 열기를 더해갈 때 태라트가 말을 몰고 전장 중앙으로 나섰다.
“보아라, 가이라스의 병사들이여! 지금의 가이라스 왕은 진짜가 아니다, 왕비가 조종하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것인가, 아니면 가이라스 왕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인가!!!”
마법에 의해 확성된 태라트의 목소리였다. 전장은 잠시 조용해졌다. 확실히 그 외침은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라칸도 앞으로 나섰다.
“난 템플 마스터 라칸이다! 여기서 제군들을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어떻게 될 것인지는 너희들에게 맡기겠다! 끝까지 왕비에게 충성을 다한다면 템플 나이트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처단할 것이다! 그러나 마마에게 충성을 다한다면 너희들을 받아줄 용의가 있다! 왕비인가, 아니면 돌아가신 마마인가!!!”
방위군은 전투를 멈췄다. 왕비에 의해 고용된 대장들만이 공격을 외치고 있을 뿐이었다. 라칸은 안장 옆에 끼워두었던 자신의 창을 꺼내고 거기에 감겨있는 헝겊을 풀고 그것을 휘둘렀다. 100년 전부터 사용되었던 가이라스의 깃발이었다.
“왕께서 나에게 마지막으로 하사하신 물건이다!”
라칸은 여러 번 그 거대한 깃발을 휘둘렀다. 가이라스의 문장인 피닉스가 붉은 바탕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방위군 사이에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가이라스 만세! 우리는 왕을 따를 것이다!!”
만세의 소리가 성문 앞에서 거세게 일었다. 태라트는 주먹을 불끈 쥐고서 하늘에 다시 한번 외쳤다.
“모두 일어서라! 자신들의 동포와 가족을 위해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방위군 병사들은 결국 자신들의 무기를 공중에 쳐들면서 태라트를 따라 외쳤다. 그 외침을 들은 왕비의 대장들은 무기를 버리고 본성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두 시간 만에 끝난 외곽의 전투는 방위군의 떨어질 대로 떨어진 사기와 태라트, 라칸의 설득이 한데 어울려져 이루어낸 걸작이었다. 저항군은 이 전투로 본성 직전까지의 수도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시민들의 반응도 의외로 좋아 저항군은 안심하고 본성 작전을 위한 상황을 만드는 데 전념할 수 있었다. 본성 공격 작전은 3일 후. 그동안 외부에 대기하고 있던 부대와 야룬다에 있던 후속 부대는 수도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하달받게 된다.
하루가 지나고, 리오는 모든 사람들이 성의 외곽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지켜보며 거리를 걸었다. 순찰 비슷한 일이었지만 별로 상관할만한 심각한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리오는 피신하는 사람들의 행렬 건너편에서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볼 수가 있었다. 티퍼와 키세레, 아니. 세레나들이었다. 지크는 반가운 표정으로 둘에게 향했고 둘 역시 잘되었다는 듯 리오와 함께 자신들의 목적지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리오의 물음에 세레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집이요. 티퍼가 그러는데 집사 할아버지께서 아직도 집을 지키고 계시다고 하시더군요….”
티퍼도 끼어 말했다. 다른 때보다 더욱 신이 나있는 표정이었다.
“할아버지는 꼭 계실 거예요, 아버지와 저, 그리고 누나가 돌아올 때까지 반드시 집을 지키신다고 하셨어요.”
리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성이 맨눈으로 보일 정도까지 걸어간 그들은 곧 거대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그 저택의 앞에선 몇 명의 사람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한 명의 노인과 그의 자식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저항군 병사 몇 명이었다.
“안돼 이 사람들아! 아무리 대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난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게야! 주인님과 도련님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구!”
저항군 병사는 한심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그 노인을 설득했다.
“나 참, 할아버지! 이곳이 불바다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잠시 피해 계시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안 피하시면 저희들이 상관에게 큰일 난다고요!”
난처한 입장에 처한 저항군 병사의 어깨를 누군가가 건드렸다. 병사는 자신의 어깨를 두드린 사람을 보고선 급히 경례를 올렸다.
“아, 리오님이시군요!”
리오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는 그 병사들에게 가보라는 말을 했다. 태라트의 공문으로 리오의 지위는 각 대장급들과 비슷했다. 그리고 예전의 활약 덕분에 인기도 있는 상태였다. 병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경례를 올리고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노인은 리오를 보고서 그의 앞으로 다가와 말부터 먼저 꺼내었다.
“아, 당신이 상관인 모양이구먼. 병사들을 그냥 가게 해줘서 고맙소.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와 가족들은 절대로 이 저택을 떠날 수가…!”
리오는 노인의 말을 들으며 옆으로 살짝 비켜 섰다. 그의 등 뒤에 가려져 있던 세레나와 티퍼의 모습이 노인의 주름투성이 눈에 들어왔고 노인은 그 자리에서 굳어진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 아아…!! 도련님, 아가씨!!!”
노인의 부인과 아들, 그리고 딸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이게 꿈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싶은 듯 소리치자 세레나와 티퍼는 그들의 품에 안기며 기뻐했다. 리오는 조용히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재회가 낯선 사람에게 방해되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다시 성 외곽 쪽에 도착한 리오는 누군가가 말을 타고 자신이 걸어왔던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슬쩍 볼 수가 있었다. 리오는 놓고 온 물건이 있는 사람이겠거니 하고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의 대피가 끝난 후, 본성 진군에 필요한 병력은 가이라스 왕성 앞에 차례로 집결했다. 진형은 템플 나이트를 선두로 하는 화살표형 진형이었다. 적군의 불사병이나 정예 기사단이 선두로 나온다면 저항군의 병력으로 막기는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병력과 물자가 완전히 갖추어지기까지는 하루가 더 걸렸다.
운명의 날….
태라트는 잠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천계에 있는 신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올리는 기도였다.
“제발… 이 전투가 이 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나는 전투가 될 수 있도록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리오와 지크, 바이칼 등은 성안에 먼저 잠입해 들어가 적군의 주요 인물들을 없애는 것이 이번 작전에서의 임무였다.
“층마다 지키고 있겠지?”
리오의 말에 지크가 대답했다.
“흐음… 그렇겠지. 그 얼간이들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고 싶은 걸? 헤헷….”
바이칼은 팔짱을 낀 채 묵묵부답이었다. 아마 자신과 거의 비슷한 힘을 가진 루브레시아 공작과의 대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저 애는 왜 데려가는 거지?”
리오는 엄지손가락으로 뒤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있는 바이나를 가리키며 지크에게 말했다. 바이나는 리오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 지크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쟤가 가이라스 왕국의 공주래잖아. 어쩔 수 없이 데리고 가야지 뭐.”
바이나는 흠칫 놀라며 지크의 멱살을 잡고 그 일을 알게 된 배경을 물었다. 지크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해주었다.
“음? 그거 저항군들은 다 알고 있던데? 모르고 있었어?”
바이나는 순간적으로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조금 후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에게 부담감을 가지지 않도록 한 그들의 배려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자, 지크는 바이나와 함께 중앙계단으로 가고 나와 바이칼은 양쪽의 계단으로 올라간다. 아무 일이 없다면 최상층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우리들이 행동을 빨리 취하면 취할수록 일은 빨리 끝난다는 것을 알아둬. 최상층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 아마 부딪혀봐야 알 거야. 자, 그럼 행동 개시!”
리오 일행은 걸음을 성의 뒤쪽으로 옮겼다. 태라트와 리오의 양동 작전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태라트는 진형의 중앙에서 전군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자신들의 힘을, 자신들의 모든 것을 이 전장에서 발휘하는 것이다! 역사는 제군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신이 우리에게 미소를 주느냐 안 주느냐는 제군들에게 달렸다! 자! 전군 진격―!!!”
태라트의 검, 하이바렌이 아침의 태양빛을 받아 찬란한 반사광을 뿜어내자 전군은 우렁찬 함성을 질렀다. 하이바렌이란 뜻에 걸맞는 장면이었다. 그 말스왕국 고대어의 뜻은… ‘희망’….
라칸은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을 굳게 가졌다. 진격 명령에 따라 말을 움직이며 라칸은 중얼거렸다.
“반드시 오셔야만 합니다… 블레이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