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안
“대붕의 눈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아느냐?”
소년은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높이 날아야만 멀리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붕의 날개가 필요하다!”
기억이 쉬지 않고 떠오른다. 다시 사부가 말한다.
“내가 너에게 그 날개를 주겠다. 날아올라라! 가로막힌 산을 넘지 못하면 그 다음 세상을 볼 수 없고, 구름 위를 뚫고 날아오를 굳센 날개가 없으면 그 위의 세상을 볼 수 없다. 대붕의 날개로 날갯짓해 세상 만물을 꿰뚫어보고 포용하는 눈을 가져라. 그것이 홀황경憁侊境)으로 가는 길목이자 지름길이다!”
그 뒤에 또 다음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살의를 느꼈지만 능력이 미치지 않으므로 포기하기로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기란 무척 힘든 일이 다. 하지만 남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바라보고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살펴보는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자신은 처음부터 잘 배워나가고 있었다. 시작부터 나쁘지 않은, 뛰어난 학생이었다. 아마도.
“자냐?”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스읍! 소년이 소매로 입가를 훔치며 대답했다. 아주 자연스런 동작이었다.
“흐음…, 류연아!”
“네?”
“존말할 때 귓구멍 후비고 똑바로 들어라!”
사부가 살기 품은 눈웃음을 지으며 자상하게 말했다.
“보는 것에도 단계가 있다.”
절대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일단계 정안(眼).
바르게 본다.
세속의 때에 찌들어 장님이나 다름없던 눈이 비로소 뜨이는 첫 단계다. 잘못 조성된 여론에 휘둘림 없이 사물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자신의 가치판단을 남에게 위탁하지 않게 되고 자기 자신만의 선입견 없는 잣대를 지니는 단계. 상대와 자신을 바르게 평가하는 공정한 시선을 지니게 된다.
이 단계 광안廣眼).
넓게 본다.
잘못 고정된 상식이나 관념에 흔들리지 않는 넓은 시야를 지니게 된다. 또한 넓어진 시야를 통해 한꺼번에 많은 정보들을 수용, 정리할 수 있다. 자신의 시야 안에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고 세상이 넓은 것을 잘 알기에 성급하게 단정하거나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삼단계 심안(深眼).
깊게 본다.
사물의 본질을 그 정점 깊숙이까지 살펴보는 단계. 미세한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또한 의식하지 않는데도 상대방이 무의식적으로 내보이는 세밀한 움직임까 지도 그 뜻하는 바를 놓치지 않고 알아챌 수 있게 된다. 생각보다 느낌이 더 중요한 정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통찰력이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것이 다.
이 삼 단계까지는 거쳐야 비로소 심안(心眼)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할 만한 자격이 생긴다.
사단계 투안(透眼).
꿰뚫어본다.
사물의 본질을 순식간에 꿰뚫어보는 단계. 통찰안(通察眼)이라고도 부른다. 많은 정보를 한순간에 정리, 해결한다. 보석결정(寶石結晶) 같은 핵심정보를 순식간에 손에 넣는다.
생각보다 느낌이 더 중요한 정보라는 것을 확신한다. 정확하게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언제나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어려운 과정은 순 수한 느낌과 모조(模造)의 느낌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다.
범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삼과 사 단계 사이에 이르면 기(氣)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리고 사 단계 투안의 단계에 완전히 진입하면 우주를 감싸고 있는 세상 만물에 내재된 기의 흐름마저 읽을 수 있게 된다. 이 엄청난 비전(秘傳)을 접하게 되면 이를 응용하여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그릇이 작으면 이 정보들을 조금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인간은 폭발해버린다. 이렇게 그릇이 깨진 상태를 보통 ‘미쳤다’고 칭한다. 세상의 기운과 동화돼 자신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그릇을 먼저 대기(大器)로 키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오 단계 월공안(越空眼).
공간을 뛰어넘는다.
자신의 시선이 미치는 범위 내의 모든 것을 완전히 파악하게 된다. 이것은 곧 공간을 지배하는 첫 단계이기도 하다.
육단계 시월안(時越眼).
시간을 뛰어넘는다.
말 그대로 시간을 뛰어넘는 단계. 예지안(豫知眼)을 얻을 수 있는 단계라고 한다. 비의(秘意)상으로만 전해지는 단계다.
오륙 단계를 합쳐 시공안(時空眼)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시공안이 아닌 사물의 속도를 늦추는 경지는 삼 단계와 사 단계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보통 무인 들이 궁극의 단계로 여기는 것은 이 사 단계까지다. 그러나 소수지만 이 시공안의 경지까지 접근한 이들이 있다고도 한다.
육 단계와 칠 단계 사이에 이른 이는 생사를 초월하게 되고, 우주의 섭리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
칠 단계 궁극(窮極)의 단계 신안(神眼).
신을 본다.
자신 안에 내재된 신을 만나는 단계. 내우주(內宇宙)와 외우주(外宇宙)가 합일되고, 기(己 : 부분)가 전(全 : 전체)이 되고 전이 기가 되는 단계. 만물일체(萬物 體)의 비의를 통해 세상 모든 것에 분리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으며,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진리안(眞理眼)이라고 부 르기도 한다.
궁극의 깨달음을 얻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단계. 자신이 곧 신이 되는 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신화경(神化境)의 단계다. 도(道)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하나가 되는 경지기도 하다. 이 눈을 얻으면 곧 세상 만물의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 들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궁극에 이르러 신(神)이 된다.
“…이것이 바로 네가 단순히 ‘본다’고 지칭한 행위 뒤에 도사리고 있는 무한히 심오한 세계이다.”
제자의 이해 정도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간단해 보이지만 일 단계가 사실 무척이나 어렵다. 바르게 보는 것은 주위의 상식이나 여론, 의견, 의식, 관념에 좌우되지 않고 그냥 그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심정안(正心正眼)이라 하여 바른 마음을 지니지 못하면 바르게 볼 수도 없다고 했다.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이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 야 하는 인간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경지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맞다고 우르르 외치면 자신의 마음이 뭐라고 생각하든 말든 상관치 않고 덩달아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아직 기본이 안 돼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사고판단 잣대를 남의 기준에서 찾는다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냐? 그런다고 남들이 너 밥 먹여주냐? 하긴 가끔 남들이 주는 거라면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안 하고 넙죽넙죽 받아먹는 족속들이 있지. 그런 놈들은 인생을 자면서 걸어가듯 사는 족속들이다. 너도 그 런 족속이 되고 싶냐?”
“아뇨! 미쳤어요?”
비류연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런 진부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소름끼치도록 끔찍한 일이었다.
사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운 사실은 속세에 나가보면 의외로 그런 족속들이 천지사방에 널려 있다는 점이지. 자신의 판단이 우연히 남들과 같을 수는 있다. 이건 상관없다. 하지만 남 의 판단을 아무런 사고의 여과과정 없이 자기 판단으로 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가끔 뒤의 것을 해놓고 앞의 것을 했다고 주장하는 인간들도 있긴 있지. 이
런 인간들의 특징이 뭔 줄 아느냐?”
비류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권위에 아주 약해.”
“권위요?”
“그래, 권위! 그런 족속들은 권위 앞에서 설설 기지. 좀 정도가 심해지면 권위가 있다는 사람의 뒷구녕이라도 기쁘게 핥아줄 기세로 갖은 아양을 떠는 인간들도 있 어. 이 족속들은 권위를 가진 인간이 맞다고 하면 무조건 다 맞는 줄 알아! 그리고 그 권위에 반항하는 자가 있으면 화형시키려 들지! 왜냐하면 그들은 그 권위 있는 자들이 자신들 대신 생각해주길 바라거든. 자신들 대신 생각해주고 판단해주는 편한 존재를 남들이 모욕했으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 우국충정에 불타오른 그들은 자신의 권위ᅳ이런 착각까지 종종하지ᅳ에 도전한 악적들을 처단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날뛰지.”
“그거 바보놀음 아닌가요?”
비류연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그렇지. 바보놀음이지!”
사부가 동의했다.
“그런 꼭두각시놀음에 동참할 바에야 차라리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바른 기준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겠다. 그편이 훨씬 이익이지.”
사부의 말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이 세상에 정말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널려 있을까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잖아요?”
그의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쯧쯧쯧, 아까 내가 하던 얘기는 뒷동산에 암매장했냐? 그런 족속들은 조금의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대신 생각해주는 이들이 있어서!”
“아참, 그랬었죠.”
이제야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기억났냐?”
“네, 기억났어요!”
“오냐,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자!”
일 단계가 어렵기 때문에 심안을 얻기가 힘든 것이라고 사부가 부연 설명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동안 지니고 있던 선입관을 깨뜨릴 용기와 진실로써 보고자 하는 자세란다. 하지만 우리 비뢰문에서 인간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삼 단계까지는 이루어놓고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잡현묘한 비뢰도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무리한 것만 잘도 요구하는 사부였다. 사부가 귀신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읽는 데는 다 저런 곡절이 있었던 탓인 모양이었다.
사부가 비류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치 사부의 시선이 빛의 창이 되어 그의 정신을 꿰뚫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과연 어느 단계까지 다다를 수 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