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21화
도연은 주군(이제는 주인님이 아니다)의 명에 따라 요양소로 돌아왔지만 가만히 침대에 앉아 있는 게 좀이 쑤셨다. 그는 별 의미 없이 단도를 꺼내들었다. 도집 끝 부분을 누르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단도가 약간 위로 튀어 올랐다. 도연은 단도를 꺼내들었다.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며칠 전에 자신이 직접 갈았으므로 날카로운 게 당연했다. 단도가 뿌리는 빛 무리에 심취해 있던 도연은 칼날이 박혀 있는 손잡이의 이음새 부위에 검은 물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응? 뭐지?”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이 검은 물질의 정체를 생각해보던 도연은 곧이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쳇!”
쥐의 피가 아직도 이 단도에 묻어 있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 도연은 침대의 이불에 단도를 닦았다. 그러나 굴곡진 구석에 묻어 있는 굳은 피는 한 손으로 닦아내기가 힘들었다. 잠시 고심을 하던 도연은 칼을 도집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연의 행동을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감의원은 도연이 단도를 품안으로 갈무리하자 그제서야 나섰다.
“험! 이보게. 자네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나? 그러지 말고 다시 누워 있게나.”
정파는 지위가 자주 변동하지 않는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강등이나 승진이 어려웠다. 그러나 마도는 달랐다. 자신이 아끼는 수하라고 하더라도 한번 밉보이면 지위를 현격히 낮추거나 멀리하는 현상이 자주 일어났다. 반대로 아부를 잘하고 잘 보이면 무공에 상관없이 옆에 끼고 도는 게 비일비재(非一非再) 했다. 한마디로 지 맴이었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마도는 특성상 무식한 인간들이 많아서 그런지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래서 정파인들이 툭하면 내던지는 소리가 ‘무식한 것들이…’였다.
아무튼 그런 현상은 이곳 암흑마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감찰소(監察所)였다. 관부의 냄새가 풍겼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어서 그런지 이 이름은 수 백 년 동안 계속 이어져왔다. 감찰소는 팔당과 사전.. 그리고 이궁, 이각에 각각 하나씩 존재했다. 자리가 변동되면 그 즉시, 보고를 올려야 하는 것이다. 이는 필수였기 때문에, 교내의 인물이라면 누구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는 도연도 마찬가지였다. 도연은 감찰소에 보고를 올린 뒤 이곳에서 눈에 띄게 다른 대접을 받았다.
어떻게 그렇게 금방 알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자신을 돌봐주는 의원들이 좀 더 부드럽고 세심히 대해주는 것이었다. 소전주의 직속 수하는 엄청난 고속 승진이었다. 이를 뜻하는 말을 찾자면 ‘개천에서 용났다..’ 정도일 것이다. 그러니 눈앞에 서 있는 감의원이란 자의 행동이 예전과는 현격히 달라지는 게 당연했다. 도연은 감의원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한편으론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도연은 이곳의 생리(生利)가 그런지라 차분히 대했다.
“요 앞에 우물가로 가서 곧 돌아올 겁니다.”
감의원은 묵뚝뚝한 도연의 대답에 멋쩍게 웃었다.
“하하..그런가? 다녀오게나.”
도연은 그에게 약간 고개를 숙여준 뒤 목발을 집고 밖으로 나섰다. 이곳에는 수시로 환자들이 들어왔다 나가곤 했다. 도연은 그들을 피해 뒤로 돌아 나갔다. 작은 월동문이 보이자 그곳을 향해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도연이 월동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 두 인영이 두런대며 나타났다.
“여기는 또 어디냐?”
“글쎄요..허허!”
얘기를 들어보니 길을 헤매고 있는 노인들로 보였다. 남 얘기 같지 않은 그들의 모습에 도연은 서둘러 다가갔다.
“어디를 찾으시는지요.”
서로 대화를 나누던 두 노인들은 동시에 도연을 바라봤다. 그들 중 평범하게 생긴 노인이 도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넌, 뭐하는 아이냐?”
목소리가 꽤나 날카로웠다. 아마도 오랫동안 헤매인 듯싶었다. 도연은 노인의 마음을 이해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소전주님의 밑에 있는 도연이라 합니다.”
육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내 얘기는 들었다. 이번에 약전주께서 새로 제자를 들였다지? 그럼, 네가 소전주의 하인이냐?”
도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분의 수하입니다.”
육장로의 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응? 너 같이 어린애를 벌써, 수하에? 허허! 이거 애들 병정놀이도 아니고..쯧..!”
이번에는 도연의 검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을 삼가해주시지요. 그분은 저의 주군이십니다!”
어린애의 매서운 반격에 육장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꼬맹이의 말이라고 해도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자체는 불변이었기 때문이었다. 육장로는 새로운 시선으로 도연을 바라봤다. 그는 말없이 도연을 주시하면서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팔장로는 가만히 대형의 행동을 지켜봤다. 대형이 턱수염을 만질 때는 무언가 중대한 결론을 내릴 때 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인 육장로는 마침내 눈을 떴다.
스으으으…..파-팟!
도연은 번갯불이 자신을 덮쳤다고 느꼈다.
“큭! 커-억!”
엄청난 압력이 도연의 두 어깨를 내리눌렀다. 한쪽 목발이 땅속에 박혀 들어갈 정도였다.
-우두-둑!
“으읍! 크으윽…!”
한쪽 어깨뼈가 탈골되었다. 다쳤던 팔이었다. 도연은 영문도 모른 채 고통을 받는다는 것에 화가 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그의 머리를 짓눌렀지만 자신이 내뱉었던 말에 후회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치밀었다. 도연은 이를 바득! 갈며 온 힘을 목소리에 집중시켰다. 쥐어짜는 듯한 음성이 도연의 입안에서 흘러나왔다.
“어째서…윽! 난…나-안! 잘못한 게…없..!! 울컥! 으으으…”
육장로는 도연을 조롱하듯 희미한 미소를 보내줬다. 급격히 사그라들던 도연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파직..! 소리와 함께 목발이 부서지자 도연은 허무하게 쓰러지고야 말았다.
“끄으으으…난…승복할 수……으음….”
결국은 기절해버렸다. 쓰러진 도연의 위로 두 개의 그림자가 비추었다. 육장로가 말했다.
“놀랍군. 상상 외야…더군다나 내공도 없는 상태에서….”
팔장로는 대형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조심스레 물었다.
“대형, 무슨 말씀이십니까?”
육장로는 도연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곧이어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렸다.
“흥. 근골은 별로군…”
도연을 살펴보던 그는 자신의 사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는 무공에 적합한 인재의 첫 번째 조건이 뭐라 생각하느냐.”
난데없는 질문에 의아해하던 팔장로는 갑자기 깜짝 놀라며 다급히 물었다.
“서..설마, 대형…이 아이를…..!”
육장로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내 질문에 먼저 답해라!”
대형은 자신의 질문에 딴소리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이를 상기시킨 팔장로는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의문을 접어두어야만 했다.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바로 근골이 아닌지요.”
“틀렸다!”
팔장로는 엥? 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아니란 말씀입니까?”
육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몰골이 말이 아닌 도연을 안아 들었다. 그는 월동문 안으로 들어가 처음 보이는 방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안에는 약초방인 듯 여러 명의 의생들이 약초를 나르고 있었다. 육장로는 위엄 서린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암흑마교 십이장로 중 육장로이다. 지금부터 이곳을 출입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죽일 것이다. 알았으면 모두 나가라.”
의생들은 벌벌 떨면서 밖으로 기어나갔다. 육장로는 열려진 문을 허공을 격하고 닫아 버렸다. 아직도 뭐가 뭔지 헷갈리는 팔장로는 답답한 듯 약간 소리를 높였다.
“대형! 이유가 뭡니까?”
육장로는 사제의 물음을 무시하고 도연을 앉혀 세웠다. 기절한 인간이 절로 꼬꾸라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신기하게도 도연의 몸은 굳어버린 듯 정좌로 앉아 있었다. 육장로는 도연의 뒤에서 자리를 잡고 명문혈에 두 손을 붙였다.
“사제, 이 녀석의 중부혈에 손을 붙이게.”
그제서야 팔장로는 대형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펄쩍! 뛰며 다가갔다.
“대형! 이건 미친 짓이오! 사혼대는 각기 일인전승으로서 이미 모두 제자들을 배출했소! 또 다른 제자를 두는 것은 금기(禁忌)라는 것을 잊어버렸소? 이를 어기는 것은 바로 죽음이외다!”
“닥쳐라!”
두 눈에 살기를 머금은 대형의 호통에 팔장로는 그만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육장로는 자신의 추태를 의식했는지 이내 살기를 거두었다.
“누가 또 다른 제자를 둔다고 했느냐?”
“그럼…”
“잔말 말고 중부혈에 손을 얹어라. 설명은 그 다음에 해주겠다.”
그러나 팔장로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자신의 대형을 빤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이유 없이 제 내공을 소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확실하고 타당한 근거가 있겠지요?”
육장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이다.”
망설이는 눈으로 도연과 대형을 지그시 바라보던 팔장로는 못내 말했다.
“끄응…좋습니다. 하지만 벌모세수를 한다면 근 십여 년 동안 내공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는 것도 아시고 하는 말씀이겠지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