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동천(冬天) – 125화


순간 싸늘한 기운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 기운은 팔장로에서 특히 강했다. 그는 말을 씹어뱉듯 흘렸다.

“당. 연. 히!….”

그러나 그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대형이 손을 들어 제지한 것이었다. 육장로의 얼굴 또한 굳어져 있었지만 그에게서 퍼져 나오는 목소리는 의외로 온화한 것이었다.

“상관없다. 너 같은 어린애는 쌔고 쌨으니까.. 본 장로가 너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너를 택했다고 보느냐.. 근골(筋骨)? 아니면 지식(知識)? 너의 지식 수준은 모르겠으나 근골은 형편없었다. 내가 그런 너의 무엇을 보고 너를 택했다고 보느냐.”

엄청난 신분의 사람이 자신을 택했다는 데에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도연은 나직한 충격을 받았다. 무인의 최고 조건은 근골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육장로는 기다렸다는 듯, 도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입을 열었다.

“눈이다.”

“눈?”

“눈이오?”

도연과 팔장로가 동시에 의문을 토하자 육장로는 그 둘을 말없이 둘러보았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입을 다물고 있던 육장로는 잠시 동안 그 여운을 즐기다가 도연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너는 무공에 적합한 인재의 첫 번째 조건이 뭐라 생각하느냐.”

이는, 아까 육장로가 자신의 사제인 팔 장로에게도 물어보았던 질문이었다. 도연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저 육장로는 분명히 자신의 근골은 형편없었다고 말을 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택했다. 그리고 자신을 택한 이유가 눈 때문이라고 말했다.

‘눈(目)? 눈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내 눈은….’

그때 갑자기 주군인 동천이 생각났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예전에 주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이 새꺄! 어딜 노려봐? 눈 안 깔어?

도연은 그제서야 한 가닥의 실마리를 풀었다.

“내면(內面)이 강한 자. 입니다.”

육장로는 호오? 하는 눈치 더니, 좀 더 도연을 재촉했다.

“부연 설명을 해 보거라.”

말은 했지만 설명하기에는 좀 골치 아픈 속성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을 정리한 도연은 틀리면 그만이라는 심정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자. 한번 정해놓은 목표가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끝까지 해내는 자. 주위의 현혹(眩惑)에 쉽게 물들지 않는 자.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의지(意志)가 강한 자.입니다.”

육장로는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사제를 힐끗!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어린놈이 누구하고는 생각하는 게 다르구나.”

팔장로는 대형이 자신을 빗대어 얘기했다는 것을 알고, 무안한 마음에 낮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도연의 시선도 따라 팔장로에게 가 있었지만, 곧이어 다시 육장로를 돌아봐야만 했다.

“맞다. 근골은 바꾸면 된다. 그래서 우리가 너에게 환골탈태를 시켜준 것이다. 우리가 너에게 강요하는 것이 너무 일방적이라 생각 마라. 너는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다. 절세의 무공을 얻게 되고, 누구나 꿈꾸는 임독이맥도 뚫리고, 거기다가 부수적으로 네가 상상도 못할 정도의 무신(武神)이 될 수도 있다. 네가 나중에 그 무공을 돌려주는 문제에 대해서는 염려를 안 해도 된다. 네 대에서 우리의 주군과 손속을 겨루는 일은 없을 것이고, 또 나중에 몇 대 뒤에 그 일을 해내고 무공을 돌려줄 때 네 자손은 사혼대 중 일혼으로 역임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냐. 이만하면 누가 손해를 보는지 알겠느냐?”

육장로의 말을 듣는 내내 도연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만큼은 그와 정 반대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원인 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환골탈태란 말에서였다. 그러고 보니 몸이 날아갈 것 같이 힘이 넘쳤다. 단전 부근이 알 수 없는 힘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도연은 그 힘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 운용법을 몰랐다. 문득 강한 본능이 도연을 자극했다. 그 본능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힘(力)! 힘이 필요하다고….

도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 본능에 따랐다. 그의 입술은 사술이라도 걸린 듯 서서히 열렸다.

“예…”

육장로는 다시 물었다.

“허냐? 불이냐?”

“허(許)입니다..”

육장로는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이는 뒤에 서 있던 팔장로도 마찬가지였다.


동천은 소연에게 업혀 오면서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 멋들어졌던 동천의 옷은 어느새 이리저리 찢겨 있었고, 그의 얼굴은 본판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큰 상처들과 피멍들로 일그러져 있었다. 의식이 가물가물…정신이 오락가락…지금 동천의 상태가 바로 그러했다. 그러다가 얼마 안 가 기절해 버렸다. 소연은 암한문에 와서 마부가 동천을 업고 가는 것을 졸졸 뒤따라갔다. 마부가 동천을 침대 위에 눕히자, 소연은 그제서야 한시름을 놓았다.

“으으으….”

얼굴이 퉁퉁 부어서 벌게진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대던 소연은 동천이 나직한 신음을 하자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아아..이를 어째! 많이 아프시겠다…”

얼굴을 닦아내자 물에 번들거려 동천의 피멍들이 더욱 빛(?)을 발했다. 동천은 괴로운지 연신 ‘으으..’ 거리면서 고개를 좌우로 비틀었다. 소연은 더욱 애처로운 눈으로 눈물까지 글썽이며 아까보다 더 세심히 동천을 보살펴 주었다. 동천의 목 언저리를 닦아내던 소연은 아까, 주인님이 몸도 집중적으로 많이 얻어터졌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어떻게 해야 하지?”

소연은 망설였다. 지금 소연이 닦아주고 있는 물은 그냥 평범한 물이 아니라 수십 종의 약재가 섞여 들어간 일종의 약수(藥水)였다. 상처가 난 곳은 이 약수로 씻어 줘야만 효과가 있는데 소연이 망설이는 이유는 그러자면, 동천의 옷을 벗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옷은 놔두고 그냥, 물수건만 집어넣어서 닦을까?”

소연은 한번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얼른 물수건을 빼내야만 했다. 수건에 닿았던 옷자락 부분이 녹색으로 물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크..큰일났다! 이건, 주인님께서 제일 아끼시는 옷인데…”

동천이 아꼈던 옷이더라도 어차피 걸레 비스름하게 변해버려서 그 가치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소연은 당황해서 거기까지 생각을 못해 울상을 지었다. 곧이어, 마음을 다잡은 소연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깊은 심호흡을 했다.

“후우..후우….”

마음을 진정시킨 소연은 결국, 동천의 옷을 벗기기로 했다. 우선 허리띠를 풀른 다음 겉옷을 조심스레 벗기었다. 동천이 대자로 뻗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벗겨졌다. 그다음은 속옷이었는데 그 속옷을 벗기려고 다가가는 소연의 손은 다 죽어 가는 할머니가 죽기 싫어서 허우적대는 손의 떨림과 거의 흡사했다. 한참 동안의 시간을 소비한 소연은 마침내, 동천의 상의 속옷도 벗길 수 있었다.

“아아..이, 상처들 좀 봐…”

소연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려는 눈물 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낸 다음 물수건으로 동천의 망가진 몸을 꼼꼼히 닦았다. 이 상처들을 보고 그 당시. 사정화가 동천을 얼마나 두들겨 패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가 있었다. 몸이 쓰라린지 동천은 낮은 신음을 토해내며 조금씩 몸을 비틀었다. 그때마다 소연이 화들짝 놀라서 손을 멈추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멈춤 없이 계속 닦았다. 약수가 동천의 몸으로 스며들자, 동천은 그 쓰라림에 약간 의식을 되찾았다. 그리고 희미한 의식 속에서 기절하기 전 계속 생각했던 것들을 이어나갔다.

‘나는 왜 맞아야 했는가? 내가 잘나서? 그래..그런 거라면 이해가 간다. 정화 년은 미미처럼 시기심이 많은 년이니까 그럴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잘난 아이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못나서? 그래..그런 거라면 이해가 간다. 변변찮은 아이가 자신의 하인이라면 나라도 그럴 테니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변변찮은 아이가 아니다…

가, 가만? 그렇다면 내가 왜 맞은 거지?’

이런 생각들을 늘어놓는 것을 보니,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동천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자꾸, 자신의 몸이 쓰라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쓰라렸던 부분이 조금 후에는 곧 시원해졌기 때문에 그저 그 느낌을 차분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동천은 곤혹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하의를 끌러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소연의 손은 동천의 바지끈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 나는 남자가 아닌 한 사람의 병자를 치료하고 있는 거야..”

소연은 동천의 상체를 닦아주면서 어느 정도 대담해져 있었다. 의외로 단단히 묶여있는 끈의 매듭을 풀면서도 소연은 자신이 하는 짓(?)을 정당화하려고 엄청 노력하고 있었다. 마침내 매듭이 풀리자 소연은 소리 죽여 침을 삼켰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진동시켰다.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지 소연은 눈을 찔끔! 감은 채 주인의 바지를 밑으로 까발려 내렸다. 바지가 동천의 무릎까지 벗겨진 것을 감각으로 알아챈 소연은 바르르. 눈을 떨면서 조심스레 실눈을 떴다.

그녀는 낮은 소성을 터뜨렸다.

“……어..엄마….야.”

짧게 소리쳐야 할 단어들이 낮은 목소리로 길게 늘어져서 이상한 어감으로 들렸으나 정작 소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실눈을 떴던 소연의 눈은 어느새 왕방울 만해졌다. 그녀의 왕방울 만한 눈은 동천의 중심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동천이 바지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입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귀…귀여워..”

이게 과연 소연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동천의 거기를 보고 소연이 귀엽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평소에 남정네의 상징은 말(馬)처럼 징그럽게 생겼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내를 그렇게 무서워했던 소연은 오늘 엄청난 진실을 알게 되어 그저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예전에 호기심에 발정 난 숫말의 거시기를 직접 목격한 전적(?)을 가지고 있는 소연이었기에 남자 거부증은 남달랐었다. 그런 그녀가 조그마하고 앙증맞은…까지는 아니고, 어쨌든 작은 고추 하나를 매달고 있는 동천의 그 부분을 보았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말의 그것과는 천양지차였기 때문에 징그럽기는커녕 오히려 장난감을 보는 듯했다.

갑자기 소연의 간이 배 밖으로까지 튀어나왔는지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마..만져볼까?”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