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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131화


육문(六文).

내가 지니고 있던 기억들이,

서서히 풍화되어갈 때 그날의

아름다운 수채화는 지금쯤 무

엇이 되어 있을 텐가.

돌아보면 보이는 건 모조품이

되어버린 나의 낡은 풍경화..

다시 기억을 되돌리면 유년기

에 누렸던 그 기쁨인 것을…

『변치 않는 기억 中에서…』


육장(六章).

두 번째 공명(共鳴)..

여자(女子)…여자였다.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허탈감이 밀려들어왔다. 더군다나 무공도 몰랐다.. 최악의 상황…..

그녀와 완전하게 공명하게 된 시간은…

사십삼년(四十三年)….

그의 분신(分身)을 찾아 이십여 년을 돌아다닌 끝에… 결국에는 다시 안식의 틀을 고정해야만 했다.

초조하다.

시간이 훨씬 줄어들었음을 느낀다…

그것으로 나의 두 번째, 공명은 끝이 났다. 만약, 세 번째 공명 시… 그때도 그의 분신을 찾지 못한다면….


“들어오너라.”

이 음성이 근 두 시진째 걸어가면서 육장로가 처음 터뜨린 말이었다. 팔장로는 웃는 낯이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형을 따라 입을 다물고 있었으므로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도연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도연은 그저 말없이 그들을 따라만 가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육장로가 멈춰서며 말을 꺼낸 곳은 제법 넓기는 하지만 오랜 세월의 풍화(風化)에 견디다 못해 삭아버린 곳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그런 곳이었다. 도연은 묵묵히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몇 개의 통로를 지나 한쪽 벽이 심하게 허물어진 문 같지도 않은 문으로 들어가던 도연은 마당 한가운데에서 상체를 벗고 정좌해 있는 늙은 노인을 보았다. 명상을 하고 있었는지 노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노인의 얼굴은 한쪽 안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마도 예전에 심한 화상을 입은 듯했다. 노인은 외부인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는지 조용히 물었다.

“누굽니까…”

육장로는 그를 지나쳐가며 대답해 주었다.

“우리의 숙원을 풀어줄 아이다.”

순간, 눈을 감고 있던 노인의 눈에서 하얀 섬광이 일어났다. 도연은 자신도 모르게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멈춘 것은 노인의 기세가 아니라 뜨여진 노인의 눈알이 모두 하얀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잠시 놀랬던 도연은 이내 마음을 안정시키고 노인을 향해 인사를 했다.

“도연이라 합니다.”

하얀 눈알의 노인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아까는 앉아 있어서 몰랐는데 막상 일어난 노인을 대하니 어린 도연으로 서는 고개를 올려서 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도연과 눈을 마주치던 노인은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별것 아닌 놈이로군…”

도연은 자신도 모르게 한쪽 손을 말아 쥐었다. 그러나 곧이어 힘을 풀었다. 노인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먼저 간 육장로와 팔장로를 따라갔다. 도연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노인이 도착한 곳은 허름한 방이었다. 그 방은 이미 열려 있었다. 거기에서 도연은 또 다른 노인을 볼 수 있었다. 그 노인의 얼굴은 마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기가 흐르는 청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도연의 시선은 얼마 안 가 노인의 다리로 향해야만 했다. 청수한 노인이 도연의 시선을 느꼈는지 얕게 웃으며 말했다.

“왜..너도 관심이 있느냐?”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도연은 얼른 노인의 다리에서 시선을 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노인은 상관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됐다. 두 다리가 없는 노인을 봤으니, 한순간이라도 절로 시선이 안 간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됐으니 들어오너라.”

양쪽 다리가 없는 노인이 그렇게까지 말해주자 도연은 더욱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이제 이 일과 관련된 모든 이가 모이자 그들의 대형인 육장로가 입을 열었다.

“모든 상황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대형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팔장로도 아울러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머리를 번쩍 들며 다른 사형, 사제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다소 황당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럼, 이 사형과 막내는 모두 알고 있었단 말이요? 나만 여태까지 몰랐고?”

팔장로가 다소 흥분하며 고함을 지르자 두 다리가 없는 이 사형인 칠장로가 그를 제지했다.

“진정해라. 우리도 어저께 알았을 뿐이다.”

그러나 팔장로의 흥분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 듯했다. 그는 대형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하루 차이라도 어떻게 나만 쏙 빼놓고 말을 해줄 수가 있는 겁니까!”

육장로는 표정의 변화 없이 팔장로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간다고 옷을 구하러 사라졌던 것이 누구였더냐…?”

찔리는 게 있는지 팔장로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래도 이렇게 끝을 맺는 게 싫었는지 약간 누그러진 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제가 갖다 와서라도 이야기를 해주셨어야…..”

이번 대답은 육장로가 아닌 칠장로가 해주었다.

“그렇게 나가서 오늘 새벽에야 들어온 것은 또 누구였더냐?”

팔장로는 그제서야 자신의 표정을 완전히 풀었다. 듣고 보니까 자신이 잘한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말을 끌었다가는 자신이 건질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팔장로는 알아챘다. 그는 어색한 너털웃음을 흘려보냈다.

“허허허…대형. 아까 하시던 말씀을 마저 하시지요. 허허..”

“좋다. 원래는 오늘 약왕전주께 근골이 뛰어나고 심지가 굳은 아이를 부탁하려고 찾아간 거였지만 뜻하지 않게 도연이라는 저 아이를 만나게 되어서 내가 직접 저 아이를 고르게 되었다. 다른 사항은 나중에 말하기로 하겠다. 너희들이 맘에 들건 안 들 건 그건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내가 골랐으니 이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저 아이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면 물어보아라.”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구장로였다.

“나이가 몇이더냐?”

도연은 구장로를 직시하며 말했다.

“올해로 10살입니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구장로의 얼굴이 약간 더 일그러졌다. 그러나 별 차이는 못 느낄 정도였다. 이는 곰보 사내의 얼굴에 곰보 몇 개가 더 늘어났다고 해서 알 수 없는 이치와 똑같은 것이었다.

“좀 늦군.”

처음 대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구장로가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칠장로는 곧이어 물어보았다.

“네가 이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무(武)이다. 그렇다면 무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냐.”

도연의 양쪽 눈썹이 한 곳으로 가지런히 모이기 시작했다. 뜻밖의 것을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대개 무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은 들어봤어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물어보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답하기가 좀 애매한 성질의 것이었다.

“흥! 꼬마에게 너무 어려운 것을 질문했소이다.”

비꼬는 듯한 이 말투는 구장로의 것이었다. 그러자 묘한 반발심이 일어났다. 대답을 포기할까 생각했던 도연은 문득 어렸을 적에 누군가가 이것과 유사한 이야기를 해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누구지? 분명 누군가가….’

-아이야. 너는 왜 저 아이를 때렸느냐?

-씩씩…저 녀석이 제가 아버지 없는 호로 자식이라고 놀려서 그랬습니다.

-허허…아이야. 보아라. 네가 아무리 힘에 세더라도 그것은 정저지와(井底之蛙)니라. 언젠가는 너보다 더 센 아이가 나타날 것은 뻔한 이치. 그때가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야..나중에 제가 그 녀석보다 더욱 힘을 키워야겠죠.

-흐음…아이야.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물론 정진(精進)하는 마음가짐은 좋은 것이란다. 허나, 힘을 다른 목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 단련함은 잘못된 생각이니라.

-그럼, 어찌하란 말이죠?

-내 그 방법을 일러줄 테니, 항상 머릿속에 간직하거라. 무릇 힘이란…..

도연의 의식이 과거 속에서 현재로 천천히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생각났다…’

해답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도연의 목소리에는 한 점의 주저함도 없이 튀어나왔다.

“무(武)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동등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도연의 말이 끝나자 모두들 깜짝 놀란 표정들을 하였다. 그들의 표정은 도연이 정확한 이치를 집어내서가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 방안 공기가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칠장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려 퍼졌다.

“신기(神奇) 여휘량(呂揮兩)….”

“음…”

“역시….”

여기저기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도연은 이들이 왜 이러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질문을 해와서 어렵사리 대답을 해주었더니, 난데없이 여휘량이라는 사람 이름을 이야기하고 모두들 심각한 얼굴을 해대니 도연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역시 육장로였다.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네가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넌, 그 말을 누구에게 들었느냐?”

어떤 연유가 있다는 것을 직감한 도연은 모두의 싸늘한 시선을 받아내며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육장로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도연의 말이 끝나자 물었다.

“어디서 그를 보았느냐.”

“운남성 곤명에서입니다. 제가 그 부분에서 살았었습니다.”

팔장로는 다소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는 이 사형을 돌아보며 작은 웃음을 보였다.

“허허. 뜻밖의 곳에서 실마리를 찾아냈군요.”

칠장로는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정말 뜻밖이군. 이십 년 전에 사라졌던 그가 그곳을 지나갔다니…”

“흥! 이제 그놈을 잡아서 찢어 죽일 수 있겠군요! 흐흐흐…. 이 사형. 조금만 기다리면 사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겠소이다.”

구장로는 이를 바득 갈면서 한 맺힌 음성을 흘렸다. 도연은 그제서야 이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아마도 그 여휘량이란 사람이 칠 장로의 다리를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구장로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어서 갑시다! 내 이놈을 당장 잡아서 족치겠소!”

정작 당사자인 칠장로가 가만히 있는데 구장로는 마치 자신의 원수를 갚으러 가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그만큼 그들의 우애가 강하다는 간접적인 증거였다. 그러나 칠장로는 행동하기에 먼저 자신의 사형에게 의견을 물었다.

“어찌해야겠는지요.”

잠시 눈을 감고 이 사태를 관망(觀望)하고 있던 육장로는 모두가 흥분을 가라앉힐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됐다 싶을 때까지 눈을 감고 있던 육장로는 눈을 뜨며 근엄하게 말했다.

“모든 일에는 선(先)과 후(後)가 있는 법! 그중 이 여휘량의 일은 후다!”

나머지 사제들의 신형이 약간씩 움찔거렸지만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대형의 말씀은 곧 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조용히 칠장로를 바라보았다. 육장로는 칠장로와 눈이 마주치자 안색을 약간 풀었다.

“몇 년만 기다려라. 어차피 여휘량은 꼬리가 잡히는 게 시간문제일 것이다. 우선 저 아이에게 우리들의 심득을 옮겨놓는 일이 먼저다. 사제. 이해하겠지?”

칠장로는 십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해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냉정하게 하는 법이죠. 후후… 이제 또 하나의 낙이 생기게 되겠군요. 그날이 은근히 기다려집니다. 그려…”

모두들 침묵하는 가운데 칠장로의 여운이 담긴 듯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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