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충돌
태풍의 눈처럼 거대한 기파의 폭풍우를 몰고 오던 사내가 곡 입구에서 멈춰 섰다. 이쪽을 눈치 챘음인가? 이윽고 그 사내, 대공자 비의 시선이 비류연을 향했다. 십장을 격한 거리였지만 비류연은 충분 히 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호오, 눈치 챘다 이건가?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비류연의 눈에 더욱 강렬한 기광이 어렸다. 역시 상대는 자신의 시선을 의식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고수였다. 게다가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피어오르는 저 농후한 살기.
‘누군가에게 파악되고 싶지 않다는 건가?”
범상치 않은 자임에 분명했다. 게다가 즉각적으로 피어오르는 저 농밀한 살기로 미루어보아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우리라.
“뭐, 좋아! 그 정도는 돼야 재미있지!”
상대편의 위압적인 기파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상당히 오만한 기. 남들 위에 군림하는 자의 기였다. 기파의 역량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그에 걸맞는 실력 또한 겸비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영역이 타인에게 침범당하는 것을 결코 반기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런 건방진 존재를 반드시 말살하려고 든다.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사내처럼.
‘해보겠다는 건가?”
비류연의 입가에 그림 같은 미소가 맺혔다.
대공자는 기분이 무척 나빠졌다.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을 침범한 탓이다. 그는 먹이를 노리는 사냥꾼의 시선을 가졌으면 가졌지 그 반대의 경우를 당한 적은 없었 다. 그것은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누구냐??
기분 나쁜 시선의 출처는 금세 밝혀졌다. 그곳에는 긴 앞머리로 눈을 가린 채 손목과 팔목에 기이한 장신구를 찬 청년이 서 있었다. 비류연을 바라본 대공자는 세 가지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첫 번째는 상대의 기운이 낯설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
저런 볼품없는 자를 예전에 만났을 리가 없었다. 어두운 밤 비류연이 그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도 비류연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터라 정체를 한눈 에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다.
두 번째는 상대의 품 안에 깊숙이 갈무리되어 있는 알 수 없는 존재감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위력적인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좀더 시야를 확장시키지 않았다면 그 자신도 모르고 지나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 의 신경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정말 용한 재주 없이는 그걸 말로 꺼내 설명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그가 자신의 길을 보란 듯이 가로막았다는 사실에서였다.
그는 놀람과 분노를 뛰어넘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앞에서 이런 무례하고 오만불손하며 막돼먹기까지 한 짓거리를 한 자는 이제껏 아무도 없었 던 것이다. 물론 그 자신 또한 그런 행위를 용납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자에게는 죽음조차도 너무나 은혜로운 선물인 것이다.
그런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징계는 하나뿐이었다.
이 세계로부터의 소거(消).
그들에게 선택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죽음만은 면하게 해주기로 했다. 그래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찍어 자신의 우행 을 반성하는 교훈 정도는 남겨둬야 할 것 같았다.
“어리석은 자여, 낙인을 지고 살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영원히 속죄하라!’
순간 그의 몸에서 대기를 진동시킬 정도로 엄청난 살기의 파도가 뿜어져나왔다. 이제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그 살기는 유형의 기운이 되어 상대를 유린하기 위해 돌진할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평범한 한 발자국이겠지만 상대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크나큰 한 걸음이 될 터였다. 확실히 그럴 예정이 었는데…….
그러나 대공자는 그 한 발자국을 내딛지 않았다. 아니, 내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는 것은 스스로 상대의 간격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행동이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왜소해 보였던 간격이라 깔보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는데, 그 간격이 순식간에 확장되면서 그의 면전을 압박해 들어왔던 것이다.
상대의 간격 안에 자신을 둔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목을 상대에게 내준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물론 비 정도의 실력자라면 그 간격을 무시하고 들어가서 상대의
생명을 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두 번째 이유가 그의 발걸음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한 발자국을 내딛지 않으면 그도 상대를 자신 의 간격 안에 넣을 수 없다.
“간합(間合)은 정확하게 읽었다 이건가?”
과연 어디까지 제대로 읽었을까? 비류연은 한번 시험해보기로 했다.
대공자 비는 분노를 넘어 황당해졌다.
상대의 도발이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던 것이다. 상대에게서 뿜어져나오는 기세는 너무도 명확하게 자신의 간격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마치 용기가 있으면 들어 와 보라고 시위라도 하는 것 같았다.
도발은 단순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이었다. 그것은 상대에게 두 가지 선택권밖에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걸어가든가, 뒤로 물러나든가!
물론 뒤로 물러나거나 이리저리 망설이다 엉거주춤 멈춰 서 있게 되면 그의 패배였다. 실질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심리적인 패배감을 안겨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비류연으로서는 이득이었지만 비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대공자 비에게 패배란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겨진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승리를 증명하는 것 이었다. 그것이 그의 의무였다.
“이 도전! 받아주마!”
비가 거침없이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곳은 정확하게 상대가 펼쳐 보인 간격의 경계가 되는 부분이었다.
“뭐, 뭐야!”
주변 시찰이라는 명목 하에 아침부터 비류연에 의해 끌려나온 남궁상은 순간 대경실색하며 몸 안의 호신지기(護之氣)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미증유의 압력이 폭풍우처럼 그의 몸을 휩쓸었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압력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며 그의 심장과 폐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숨막히는 살기……. 조 금이라도 방심하면 이 살기의 회오리바람 속에 갈가리 찢겨나갈 듯한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도대체 누가?”
어느 무식한 인간들이 이런 장소에서 이렇게 흉험한 기운을 내뿜는단 말인가? 생사를 가르는 사생결단의 순간에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흉맹한 기운들의 격돌이 었다.
“여, 역시!”
원인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 축의 한 편에는 자신의 대사형이, 그리고 다른 한 축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저 남자는 누구지?”
비류연은 그렇다 치고(이미 그러려니, 혹은 그러면 그렇지 하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자포자기하고 있는 심정이었다), 저 눈앞에 나타난 낯선 사내는 달랐다. 저 무식과 흉폭의 대명사인 대사형과 저토록 미련하게 정면으로 맞서다니……. 범상한 사내가 아니었다.
얼음조각 같은 수려한 용모, 무심히 빛나는 암울한 두 눈동자. 게다가 무정한 두 눈동자는 빛을 삼키며 어둠을 내뿜고 있는 것 같았다. 전신에 넘치는 비범한 기개, 위엄 넘치는 왕후(王侯)의 풍모. 남궁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성취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나이는 자신과 그다지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은 데 일신에서 일파의 장문인도 능가하는 기파가 뿜어져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자신은 어떤가?
‘겨우 이 정도 실력밖에 안 되면서 천무구룡의 일인이라고 우쭐대고 있었으니……. 궁상아! 궁상아!’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럽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보는 자아성찰의 계기를 얻게 된 남궁상이었다.
사르르륵!
공기가 대지를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궤적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가볍게 먼지가 일었다. 대지를 쓸 듯 미끄러지는 공기는 두 접점을 향해 거대한 나 선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점점 더 많은 먼지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척 천천히 미끄러지듯 움직이 던 공기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더니 마침내 바람이 되어 대지를 질주했다. 무수한 나선의 궤적이 춤을 추는 것처럼 켜켜이 얽히기 시작했다.
“바, 바람이 요동치고 있어!”
두 사람에게 인력이라도 발생한 것처럼 공기가 나선의 궤적을 그리며 빨려들어갔다가 다시 나선을 그리며 돌아나왔다. 돌아나온 나선의 바람은 날카롭기 그지없 었다.
팟!
남궁상은 깜짝 놀라 자신의 앞섶을 내려다보았다. 질주하는 바람에 스친 옷의 가슴 앞섶 부위가 칼날에라도 베인 것처럼 예리하게 잘려나갔던 것이다.
‘말도 안 돼! 바람에 검기를 실어서 날려 보낸다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팟!!! 팟! 팟!
마치 현란한 검투라도 벌이는 듯 바람과 바람의 나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것은 곧 치열한 접전으로 변했다.
“공기가…….”
놀란 것은 비단 남궁상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따라 나왔던 진령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어찌 된 조화일까?
“공기가 칼날 같아!”
그녀의 말은 짧지만 정확한 표현이었다.
나선을 그리며 질주하는 바람이 마치 칼날처럼 주변을 베어가고 있었다. 강력한 두 힘이 한 접점에서 부딪치면서 발생한 거대한 압력이 공기를 압축, 왜곡시키며 주위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남궁상은 얼른 호신지기를 끌어올리며 자신과 진령의 앞을 보호했다. 공기 중에 얇은 막 하나가 생겨나며 풍인으로부터 그 둘을 보호했다. 진령 역시 호신지기를 끌어올려 남궁상의 방어를 돕자 막이 더욱 단단해졌다.
비류연과 대공자, 두 사람은 서로를 지켜본 채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제자리에 붙박여 선 채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지금 남궁 상이 느끼고 있는 이 전율스럽고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압력은 딱 그 중간 지점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었다.
“괴물이 두 마리인가?”
한 마리만으로도 벅찬데 두 마리라니……. 하늘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피부를 에는 듯한 무시무시한 살기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인간이 내뿜을 만한 살기가 아니었다. 남궁상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대치를 바라보았다.
그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공방이 지금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꿈에도 몰랐다. 만일 알았다면 그는 더욱더 절망하고 말았으리라. 쾅!
번천지복할 충돌음이 곡내를 진동시켰다.
자갈과 먼지들이 무수히 주변을 때린다. 돌의 우박이나 다름없다. 저기에 얻어맞았다가는 온몸이 걸레짝 되기 십상이다. 휘말리면 자신만 손해인 것이다. 난폭하 게 요동치는 바람이 주변을 마구잡이로 휩쓸고 들어갔다.
돌풍이 휘몰아쳤다.
“크윽!”
남궁상과 진령은 호신지기를 유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후두둑 공중으로 밀려올라갔던 작은 돌멩이들이 비가 되어 떨어졌다. 화려하게 피어오른 황토빛 먼지구름이 잠잠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먼지구름이 살포시 내려앉자 남궁상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두 사람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것을.
그들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이 거센 돌풍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그들은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여전히 두 사람의 머리와 옷 은 처음 상태 그대로의 단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처음부터 목격하지 않았다면 그런 격돌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믿지 못했을 것이다.